2007년 6월호

‘미녀들의 수다’ 맏언니 레즐리의 12년 한국견문록

“한국의 ‘유리천장’에 지쳤어요, 이제 나그네는 떠납니다”

  • 박성원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parker49@donga.com

    입력2007-06-07 16: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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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녀는 예뻤다. 그리고 그와 나눈 대화는 따뜻했다. 숨기는 것도 없고, 재는 것도 없었다.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해도 또박또박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기자도 배운 바가 많았고, 그도 이 대화를 통해 한국 생활 12년을 정리하는 듯했다. 서로 유쾌했고, 유익했다. 다만 한국에서 그를 더 볼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은, 좀 슬펐다. 우리 사회를 빛낼 ‘보석’일 수 있었는데.
    ‘미녀들의 수다’ 맏언니 레즐리의 12년 한국견문록
    요즘 한창 시청자의 인기를 모으고 있는 KBS 2TV의 이색적인 토크쇼 ‘미녀들의 수다’는 우리에게 묘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숨기고 싶은 우리의 진면목을 거울처럼 여과 없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토크쇼에 나오는 미녀들은 모두 재색(才色)을 겸비한 외국인. 그중에서도 단연 두각을 나타내는 미녀는 미녀들의 ‘맏언니’ 레즐리 밴필드씨다.

    “O형이에요, 소심한 O형”

    올해로 한국 생활 12년째.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쳤고, 서울시청에선 최초의 외국인 공무원으로 발탁돼 서울의 국제화에 기여했다.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기획단을 거쳐 지금은 KOTRA(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에서 영문 에디터로 활약 중이다. 화려한 경력, 빼어난 한국어 실력 덕분에 그는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잘 아는 ‘흑진주’로 인기를 얻고 있다.

    한국에서 거침없이 승승장구하는 줄 알았던 그가 최근 갑자기 한국을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소문은 많은데 정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오랜 타향살이에 지친 것일까. 그가 지금까지 체험한 한국의 이면, 그리고 떠나는 이유가 몹시 궁금했다. 무척 바쁠 그에게 ‘근사한 저녁’을 대접하겠다고 했더니 “그러자”는 시원한 대답이 돌아왔다.

    서울 강남의 한 음식점에서 한정식을 주문했다. 그는 육회, 삼겹살 보쌈, 갈비, 갖은 나물, 된장찌개 등이 놓인 상을 휙 둘러보더니 보쌈 하나를 먼저 집어 입에 넣었다.



    ▼ 보쌈을 좋아하나보죠.

    “한국 음식 다 좋아해요.”

    ▼ 나이가 저랑 엇비슷할 것 같네요. 저는 71년 돼지띠.

    “그럼 제가 두 살 더 많네요. 저는 69년 닭띠.”

    ▼ ‘레즐리 누님’이네요! 그나저나 한국에 온 지 10년이 넘었으니 남자친구 하나쯤은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미인인데 누군가 ‘보쌈’ 해간다는 말도 했을 법한데요.

    “몇 명 사귀었죠. 사귀다 헤어지고 사귀다 헤어지고. 제가 좀 짧게 사귀는 편이에요(웃음).”

    ▼ 어떤 분들일지 궁금하네요.

    “날라리 같은 남자는 싫어요. 결혼 생각 없이 그냥 놀자고 하면 거절했죠. 그런데 사귄 사람들이 다 날라리야(웃음). 여자친구들이 저더러 ‘그놈은 아니야’ 하는데, 저는 잘 모르겠더라고요.”

    ▼ A형이에요?

    “O형이에요. 소심한 O형.”

    ▼ 자기가 소심하다고 말하는 사람치고 소심한 사람 못 봤어요.

    “잘 아는 사람에겐 소심하지 않은데.”

    ▼ 그럼 남자에게 먼저 다가서는 편은 아니군요.

    “한참 지켜보고 난 뒤 사귀죠.”

    ▼ 그렇게 지켜보면 날라리인지 아닌지 구분이 될 텐데, 어째 매번 당한 겁니까.

    “한국 남자들 잘 모르겠어요.”

    ▼ 사귈 만하기는 하고요?

    “재미있어요. 생각하는 게 다르니까.”

    ▼ 어떻게 달라요?

    “처음 남자친구는 기독교인이었어요. 내가 다니던 교회의 교인이었는데, 룸메이트이던 여자친구하고 셋이서 주로 만났죠. 그런데 어느 날 룸메이트가 ‘레즐리, 그 남자가 널 좋아하는 것 같더라’ 하는 거예요. ‘에이, 설마’ 했어요. 왜냐하면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 한 번도 한 적이 없거든요.

    “사랑한다, 예수님 안에서”

    근데 룸메이트는 남자가 나에게 그런 힌트를 많이 줬다고 해요. 예전에 그 남자가 밥 먹을 때 ‘나랑 결혼하는 여자는 좋겠다’고 한 적이 있거든요. 그게 그 뜻이래요. 나는 속으로 ‘어, 이상하다, 나에게 한 얘기도 아닌데’ 했죠. 또 이런 적도 있어요. 제가 사는 집에 남자친구가 놀러왔는데, 저에게 ‘집이 좋다’며 ‘부모님 모셔와 살아도 되겠다’고 했어요. 왜 내 집에 남의 부모님을 모셔와 살아야 하지? 이상하게 생각했거든요. 근데 친구는 그게 그 뜻이래요. 이해가 안 됐죠.”

    ▼ 그 친구 좀 비겁한 거 아니에요?

    “한국 남자들은 말을 돌려서 하는 버릇이 있나봐요. 솔직하게 ‘너 좋아한다’ 하면 될 텐데. 한 번은 전화로 저에게 ‘사랑한다, 예수님 안에서’라고 하는 거예요(웃음). 이게 한국 남자들이 프러포즈하는 방식인가요? 하여튼 힌트를 많이 줬다는데 해석이 안 돼서 좋은 사람 다 놓쳤어요.”

    ▼ 결혼할 뻔한 경우는 없었나요?

    “한국 사회에선 안 되잖아요.”

    ▼ 아니 왜요? 국제결혼 얼마나 많이 하는데.

    “아는데, 흑인 여자와 한국 남자가 결혼하는 건 못 봤어요.”

    ▼ 그런가? 흠….

    “정식으로 사귀자며 결혼할 것처럼 보였던 남자친구가 저를 부모님 앞에서 ‘그냥 친구’라고 소개하는 거예요. 그랬더니 그 어머님이 저에게 ‘영어 좀 잘 가르쳐줘요’ 하시더라고요. 살짝 기분이 나빴어요. 섭섭했고. 그 친구가 용기가 없었던 것 같아요. 용기 없는 사람과 결혼하면 불행하지 않겠어요?”

    ▼ 용기 있는 한국 남자가 있다면?

    “제 기준에 맞으면 결혼할 수 있어요. 저는 준비 다 돼 있다니까요(웃음).”

    “그게 엄마 소원이었는데…”

    ▼ 많은 나라 중에 어떻게 한국에 오게 됐어요?

    “대학에선 국제정치학을 전공했는데, 꿈은 선교사였어요. 미국에서 제가 다니던 교회 목사님이 선교사로서 비전을 찾으려면 낯선 곳에서 선교활동을 해보라고 하셨죠. 불어를 공부했기 때문에 프랑스로 가려고 했는데 못 갔어요. 1990년대 중반의 유럽은 유럽인이 아니면 취업비자를 내주지 않았거든요.

    나에게 가장 낯선 곳이 어딘가 찾아봤더니 동양이었어요. 중국 일본 한국 중 택해서 가려는데, 마침 한국에서 영어선생을 찾는다는 광고를 보게 됐고요. 목사님이 한국은 놀라울 정도로 교회가 성장한 곳이어서 그 성공 노하우를 알아보는 것도 나중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셨어요. 그게 벌써 12년 전 일이에요.”

    ▼ 한국 교회 성장의 비밀을 찾았습니까.

    “교회의 성장이 경제 성장과 맞물렸던 것 같아요. 사회는 급하게 성장하는데, 여기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사람들이 교회를 찾았다고 할까요. 한국 기독교에는 기복신앙이 있어요. 물론 그 바탕에는 ‘하늘님’을 섬겼던 문화적 토양이 있고요.”

    ▼ 한국의 종교적 토양이 다층적이죠. 지하층엔 미륵신앙이 있고, 1층엔 불교, 2층엔 유교, 3층엔 기독교가 있습니다. 외국인이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죠.

    “그 때문에 한국이 기독교적 하나님을 잘 받아들인 것 같아요. 제가 놀란 건, 교회 다니는 분들이 불교, 유교 심지어 미신도 믿는 거예요. 여러 한국 교회를 찾아다녔는데, 기독교인이라면서도 성경 공부는 안 해요. 모여서 어제 꿈자리가 어땠는지, 요즘 사회생활이 어떤지 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신비주의 쪽으로 빠져 있다고 할까, 그런 느낌을 받았죠.”

    ‘미녀들의 수다’ 맏언니 레즐리의 12년 한국견문록

    한국의 전통 민속춤을 구경하고 있는 레즐리씨. 그는 곧 한국을 떠날 예정이다.

    ▼ 한국으로 떠날 때 부모님이 말리지 않으셨나요.

    “엄마가 많이 반대했어요. 결혼도 안 하고 어딜 가냐고.”

    ▼ 어머니가 찍어놓은 사윗감이 있었나 봅니다.

    “제가 2남4녀 중 막내예요. 막내라서 더 애틋하셨나봐요.”

    ▼ 나중에 한국남자 데리고 가면 되죠, 뭐.

    “2000년에 돌아가셨어요. 이제껏 살면서 후회한 적이 없는데. 그때는 무지 후회했어요. 펑펑 울었죠. 결혼해서 잘사는 모습을 보여드렸어야 했는데, 그게 엄마 소원이었는데…. 한국에 있느라 임종도 못했어요.”

    “언니, 내가 시청에 놀러왔어?”

    ▼ 이런, 죄송합니다…. 그나저나 한국은 좋으세요?

    “한 나라의 문화를 두고 좋다, 싫다 평가하는 건 무리고요. 싫었으면 지금까지 살았겠어요?”

    ▼ 한국 기업은 어떻습니까. 적응할 만해요?

    “외국 사람이니까 잘 봐줘요.”

    ▼ 상사에게 혼난 적도 있을 것 같은데.

    “있죠. 중소기업청 산하 APEC 기획단에서 일할 때, 영어 문서를 번역하고 있었어요. 어느 분이 제게 오시더니 ‘왜 이렇게 번역했냐’고 화를 벌컥 내요. ‘어디가 틀렸냐’고 물었더니, 틀린 것은 아닌데 자기 방식대로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한국에서 한영(韓英) 번역 대학원도 나왔고, 영어 번역만큼은 내가 전문가인데. 좀 너무하다 싶었어요.

    게다가 많은 사람 앞에서 창피를 줬어요. 기분이 안 좋을 수밖에요. 혼내는 방식도 문제지만, 전문가를 대우해주지 않는 게 더 못 참겠더라고요. 그분의 얘기대로라면 그 사람의 머릿속을 내가 훤히 들여다봐야 하는데, 그게 가능하냐고요.”

    ▼ 아까 남자친구가 여러 힌트를 줬는데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했죠? 한국엔 말을 안 해도 눈치껏 알아서 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이런 데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을 거예요.

    “뭐, 이해할 수 있어요. 그래도 여러 사람 앞에서 창피 주는 건 이해 못해요.”

    ▼ 여자 상사에게 혼난 적은 없어요?

    “없어요. 서울시청에서 일할 때는 ‘여인천하’였어요. 너무 좋았죠.”

    ▼ 외국인이어서 당하는 불이익은 없었어요? 가령 무리에 끼지 못해 왕따가 됐다든지.

    “그게 불만이었어요. 서울시청에 들어갔는데 일을 주지 않아요. 마치 곧 떠날 사람처럼 대하는 게 느껴졌죠. 함께 일하는 언니에게 ‘내가 시청에 놀러왔냐’고 불만을 털어놓았더니 그제서야 일을 마구 주더라고요(웃음). 그때 중요한 일도 많이 했고, 책임도 많았어요. 행복했어요.”

    ▼ 여러 직장 중에서 시청 일이 적성에 딱 맞았군요.

    “전공도 살리고, 한국에 대한 경험도 깊이 있게 해보고 좋았죠. 서울을 해외에 알리기 위해 CNN 등 외국 방송사에 편지를 보내 서울의 달라진 모습을 취재하라고 했어요. 제가 했던 일, 아무도 모르겠지만 제 나름대로 보람을 느끼면서 했어요.”

    ▼ 그럼 왜 APEC기획단으로 옮기셨습니까.

    “물론 시청에서 계속 일하고 싶었어요. 1년 계약 끝나면 정규직 공무원으로 전환해준다는 약속도 받아냈고요. 그런데 계약 기간이 만료될 즈음 일이 복잡하게 꼬였죠. 우선 제가 정규직 공무원이 되면 시청 공무원 중 누군가 한 사람은 나가야 한대요. 그래서 선뜻 나서기가 쉽지 않았어요. 그래도 남기로 했는데, 누군가 저를 APEC기획단에 추천한 겁니다. 사실 그분은 내게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아서 그냥 알아봐준다고 한 건데, 기획단에선 제가 오는 것으로 알아들었나봐요. 처음엔 싫다고 했는데, 아예 대전에서 저를 데리러 한 분이 올라오셨어요. ‘안 간다고 했는데 찾아오면 어떻게 하냐’고 화를 내기도 했죠.”

    지레짐작하는 한국인

    ▼ 뭔가 커뮤니케이션을 잘못 하신 것 같은데요.

    “한국인끼리 잘못 커뮤니케이션 한 거죠. 서로 다른 말을 하고도 서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알아들은 겁니다. 듣고 싶은 말만 듣는다고 할까요. 저는 오해가 없었거든요. 안 간다고 했고, 시청의 직속상관도 그렇게 알아들었고요. 대전에서 올라온 분이 ‘이건 일생에 한 번 올까 말까한 기회’라며 함께 일하자고 했어요. 복잡하게 일이 꼬이니까 그냥, 운명인가 하면서 받아들였죠.”

    ▼ 지레짐작하는 한국인이라….

    “한번은 제가 춘천에 닭갈비집을 내고 싶어 한다는 소문이 퍼진 적이 있어요. 사실은 방송에서 누군가 제게 ‘미국에 가면 어떤 사업을 하고 싶으냐’고 묻길래 ‘닭갈비집 하면 잘될 것 같다’고 말한 것뿐인데. 방송 작가들도 제각각 해석하고, 시청자도 제각각 해석하고. 제가 한국말이 짧아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나그네… 이방인…

    ▼ 한국인과 일하면서 힘들었던 적이 또 있습니까.

    “대학 사회는 적응하기 쉬운데, 공무원 사회는 좀 힘들어요. 외국인과 어떻게 대화해야 하는지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시청에 있을 때 일입니다. 어느 과장님하고 제가 등을 마주대고 앉아야 하는 사무실에서 근무했는데. 그냥 등만 돌리면 저에게 얘기할 수 있는 구조였죠. 그런데 아침에 그분에게 인사하면 저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바닥만 내려다보는 거예요.

    살짝 기분이 나빠졌는데, 지시할 때도 다른 사람들 시켜서 하거나 전화를 거는 겁니다. 그냥 일어나서 말씀하셔도 되는데, 왜 그러는지 궁금했어요. 나중에 같은 과의 친구에게 물었더니, 그 과장님이 외국인과 한국말로 대화하는 게 어색하고, 여성과 얘기하는 것도 쑥스러워서 그런다고 해요.”

    ▼ 지금 근무하는 KOTRA는 다르죠? 거긴 외국인들과 일을 많이 하니까.

    “그래도 분위기가 서먹서먹해요.”

    ▼ 왜 그럴까요?

    “우리 층에 계약직이 많아서 그런 것 같아요. 다른 계약직 직원에게 물어보니 저랑 비슷한 걸 느꼈대요. 우리가 곧 떠날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마음을 열고 다가오는 사람이 없어요. 미국에선 누가 계약직인지, 정규직인지 몰라요. 누가 비주류인지, 주류인지 하는 구분도 없고요. 한국엔 이런 구분이 있어요. 사내에 비밀도 없어요. 누가 월급을 얼마나 받는지도 아는 것 같아요. 좀 힘들죠.”

    ▼ ‘미녀들의 수다’는 주말에 촬영한다고 들었는데, 쉬지도 못하고 힘들지 않아요?

    “재미있어요. 여러 국가에서 온 미녀들에게서 다양한 문화를 배우는 게 좋아요. 또 한국말 연습하는 시간도 되고요. 아참, 방송국에서 출연료로 준 상품권 바꾸러 가야 하는데….”

    ▼ 한국말을 이렇게 잘하는데 뭘 또 연습까지 하려고 합니까.

    “아니에요. 오히려 한국말 까먹을 정도로 안 써요. 우선 하는 일이 영어번역이잖아요. 또 친구들에게 한국말 하면 싫어해요. 억울하대요. 영어 연습할 기회를 놓치니까(웃음). 외국인하고 한국말 하면 어색하다고 하고. 이래저래 한국말 하기가 어려워요.”

    ▼ 어이쿠, 그런 어려움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늘 나그네일 수밖에 없나봐요. 이방인이랄까. 아무리 오래 살아도, 한국말을 완벽하게 해도 이방인으로 살아야 할 걸요.”

    ▼ 여기서 사는 게 쉽지 않았군요.

    “쉽지 않아요.”

    ▼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한 겁니까.

    “외국 생활도 힘들고, 언니들도 보고 싶고.”

    ‘미녀들의 수다’ 맏언니 레즐리의 12년 한국견문록
    ▼ 힘들다는 건, 외롭다는 뜻?

    “그런 것도 있고. 한국은 ‘유리천장’ 같다고 할까. 제가 올라갈 수 있는 한계가 명확하게 있는 곳이죠. 뭔가 도전하고 싶은데, 허용하질 않아요. 몇 년을 해도 저에게 맡기는 일이 뻔해요. 예를 들면 미국 대학에서 5년을 일했으면 승진도 하고, 더 많은 책임을 맡았을 거예요. 그런데 한국의 대학은 나를 떠날 사람으로 생각하는지 책임 있는 자리를 주지 않아요.

    제 동료 중에 한국 여성과 결혼한 외국인이 있어요. 모 대학의 국제교육원에서 강사로 일하는데, 실력도 좋고 거기서 일한 경력도 많아 원장 자리에 가고 싶어했죠. 그런데 그 대학에선 외국인이라 안 된대요. 한국 여자와 결혼해서 한국 아이들도 낳고, 한국을 떠날 계획도 없는 사람인데 왜 자리를 주지 않는 거죠? 다들 그 사람이 적임자라고 했어요. 결국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되는 한국인에게 원장을 맡겼어요. 제가 보기엔 오히려 그 사람이 부적합한데도. 이런 일 겪으면서 힘들었던 것 같아요.”

    ▼ 레즐리 누님은 진짜 하고 싶은 일이 뭡니까. 그게 없으니까 자꾸 직장을 옮기는 거 아닐까요. 그렇게 되면 동료들 처지에선 ‘저 외국인은 곧 떠날 사람’이라 생각하게 되고, 그래서 일을 주지 않게 되고….

    “하고 싶은 것은 있는데, 누군가 부탁하면 거절하질 못해요. 좀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시청에서 계속 일하고 싶었는데, APEC기획단에서 일하게 됐고요. 고향에 가서 새로운 공부를 시작해야 하는데, KBS에서 프로그램 개편하면 몇 회분은 더 촬영하고 그만둬야 한다고 해서 또 이렇게 남아 있죠.”

    ▼ 주위에서 간섭 아닌 간섭을 많이 하는군요.

    “직장을 옮길 때마다 주위에선 모두 ‘좋은 기회’라면서 추천해요. 그런데 들어가보면 계약직이고, 한시직이에요. APEC기획단에서 일할 때도, 이걸 경험 삼아 세계기구 같은 곳에서 일하게 될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냥 한국에서 할 일밖에 없었어요. KOTRA에 입사할 때도 면접관에게 ‘나중에 다른 나라의 무역관에서 일할 기회가 있냐’고 물었더니 ‘그건 하기 나름’이라고 해요. 그런데 들어와보니 그냥 계약직이더라고요.”

    ▼ 다시 물어볼게요. 진짜 하고 싶은 일이 뭐죠?

    “음…. 얼마 전 해외에 선교사로 다녀온 사람을 만난 적이 있어요. 기대를 품고 갔는데, 고생만 하고 왔다고 하더군요. 얘기를 들어보니, 현지 주민에게 제대로 성경을 가르치지도 못했고, 실제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지도 못했더라고요. 괜히 풍토병에만 걸려 고생만 했던 거죠. 이를 통해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됐어요. 나는 한국에서 뭘 했나 하고.

    저는 선교사가 성경 말씀뿐 아니라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채워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수님도 그렇게 사셨잖아요. 나름대로 저도 그렇게 하려고 애는 썼죠. 대학에 간 것도, 시청에 들어간 것도, KOTRA에 들어간 것도,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말씀을 전도하기 위해서였어요. 근데 모두 실패한 것 같아요. 이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이런 방법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충분히 배웠으니까.”

    ‘역시 혼자 사는 게 좋아’

    ▼ 신학을 공부할 생각입니까.

    “국제선교학을 공부할 계획이에요. 한국에서 배운 노하우를 선교와 접목하면 좋을 것 같아요. 사실 한국에서 선교는 실패했다고 자인하지만, 배운 게 많잖아요. 어느 나라를 가든지 사람들은 공무원과 일하는 법, 무역하는 법, 학생들 가르치는 법을 배우려고 할 것이고, 저는 한국에서 이런 것들을 익혔으니까요. 개발도상국으로 가서 좋은 학교를 세우고 일하고 싶은 꿈도 있어요.”

    ▼ 한국에 살면서 미국보다 더 미국 같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습니까.

    “그게 무슨 뜻이에요?”

    ▼ 젊은이들이 상당히 개인주의적 성향을 보인다든지, 미국 영화만 본다든지.

    “글쎄요. 제가 보기엔 다 한국적인 것 같은데…. 누군가 파티 문화를 미국에서 수입했다고 하던데, 한국에도 잔치 문화가 있잖아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 온천이나 찜질방은 안 갑니까.

    “옷 벗는 게 부담돼서요.”

    ▼ 여자끼린데 어때요.

    “뜨거운 데를 좋아하지 않아요.”

    ▼ 자주 보는 TV 프로그램은?

    “사랑과 전쟁.”

    ▼ 그건 부부생활에 관한 드라마 아닙니까.

    “재미있어요.”

    ▼ 대리만족?

    “부부생활에 금이 가는 얘기니까, 혼자 사는 저에겐 위안이 돼요(웃음). 결혼생활의 환상이 깨지니까. 속으로 ‘그래, 역시 혼자 사는 게 좋아’ 하면서 드라마에 빠져들어요. 혼자 사는 행복을 느끼게 해준다고 할까(웃음).

    물론 배우는 것도 많아요. 지난번엔 남편이 바람피우는 이야기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부인의 잘못도 있었어요. 남편에게 허구한 날 ‘능력도 없고, 승진도 못하는 인간아. 결혼하지 말라는 엄마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하고 바가지를 긁은 거예요. 나는 결혼하면 저런 말은 하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해요.”

    ▼ 사실은 남편이 잘못할 때가 더 많죠.

    “남자의 문제가 아니라 남성우월주의가 있다는 게 문제죠. 여자는 아들을 낳아 왕자처럼 키워야 하고, 남편보다 능력 면에서 못하다고 생각하며 눌려 살아야 하는 문화가 있으니까.”

    ▼ 천만에요. 요즘엔 그런 남편 드뭅니다. 저만 해도 얼마나 ‘많이 그리고 자주’ 집안일을 거드는데요.

    “좋으시겠어요.”

    ▼ 그러면서도 오히려 집사람에게 눌려 살고요.

    “오, 부인께서 용기가 있네요.”

    ▼ 처갓집 권력도 세졌고요.

    “얼마 전만 해도 한국 결혼식에 참석하면 폐백 드릴 때 처가댁 어른들은 빼놓고 해서 신부들이 속상해하고 그랬는데.”

    ▼ 요즘엔 안 그래요. 처가댁에 잘하지 않으면 집사람에게 혼나요.

    “와, 하하하.”

    ‘아직도 길을 찾는 사람’

    ▼ 영화 좋아해요? 누구와 보세요?

    “친구랑 보죠. 다들 혼자 살아요. 결혼한 친구들은 연락을 안 하더라고요.”

    ▼ 창세기에 보면 혼자 사는 건 하나님께서도 좋지 않다고 하셨는데.

    “남자들에겐 그렇죠. 아담을 먼저 지으시고 ‘독처(獨處)’하는 게 좋지 않다고 이브를 만드셨잖아요. 신약에선 여자는 결혼하지 말라고, 고생이라고 말려요(웃음). 저, 결혼하기 싫어하는 사람 아니에요. 미련이 남아서 그런가?”

    ▼ 벌써 밤이 깊었습니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 있다면.

    “제가 TV에 나온다고 별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평범한 사람이에요. 아직 길을 찾고 있는 사람이고요. 제 인생에 만족하면서 사는 사람이고요.”

    ▼ 훌륭한 선교사가 되길 빕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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