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6월호

꽁트로 엿본 한국 대기업 ‘대리學’

경제전쟁 첨병, 대표이사급 대리들의 군주적 본능을 깨워라!

  • 박성원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parker49@donga.com / 일러스트·박진영

    입력2007-06-07 17: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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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동아’ 4월호에 ‘꽁트로 엿본 한국 대기업 부장學’이 실리자 그 기사에 나온 이들 중 누가 임원이 됐는지 알려달라는 독자의 요청이 쇄도했다. 편집장이 이번엔 ‘대리學’을 취재해서 독자의 궁금증을 덜어주라고 했다. 그리하여 경제전쟁의 첨병, 대리들의 세계를 취재하면서 기자는 아직 수면으로 떠오르지 않은 한국 기업의 문제점을 발견했다. 신대륙을 발견한 듯한 기쁨이 일었다.
    #Scene 1

    꽁트로 엿본 한국 대기업 ‘대리學’
    한국물산 홍보팀에서 한국전자 홍보팀으로 옮긴 윤병구(33) 대리. 자리는 옮겼지만 윤 대리는 여전히 사보(社報) 담당이다. 한국물산을 떠나기 전날, 사무실에서 짐을 싸고 있을 때 홍보팀 나영만 부장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윤 대리, 섭섭해.”

    “부장님 덕분에 많이 배우고 갑니다. 멀리 가는 것도 아닌데요, 뭐.”

    “한국전자는 우리 그룹 최고의 계열사잖아, 좋겠어.”



    “다, 괴력의 소유자 부장님 덕입니다.”

    “어, 윤 대리 아네! 내가 힘 좀 썼지.”

    크, 허세는…. 그래도 섭섭하다. 나 부장은 형님 같은 분이었다.

    “참, 김정도 상무 비서실에서 연락이 왔던데. 한번 가봐. 그리고 오늘 저녁 홍보팀 회식 있으니까 도망가지 말고. 노래방 가서 재미있게 놀자, 응?”

    이거 뭐, 어린이도 아니고, 보채긴. 알았다고요. 도망 안 간다고요.

    ‘모든 걸 다 걸어서…’

    김정도 상무. 사장 비서실 부장 출신인데, 얼마 전 한국전자 인사팀 상무로 승진했다. 박명진 부사장이 민 것 같다. 지난번에 윤 대리에게 부장들 만나서 ‘성향 보고서’를 올리라고 했는데, 결과는 김 부장과 신수미 부장의 임원 승진. 공연기획팀 한공연 부장은 퇴사했다. 잘렸다기보다는 그가 먼저 사표를 냈다. 사표 내던 날, 한 부장은 윤 대리에게 이별주를 샀다.

    “야, 윤 대리. 나 이제 로또복권 안 사기로 했다.”

    “이제부터 사야 하는 거 아니에요?”

    “천만에. 오늘부터 안 살 거야. 이젠 푼돈에 목숨 걸지 않기로 했어. 푼돈 아무리 써봐야 말짱 꽝이란 거, 어제 깨달았어.”

    “….”

    “어제 사무실 정리하다가 예전에 읽은 책을 찾았지. 변화경영 전문가를 자처하는 구본형씨 책인데, 주르륵 훑어보다가 밑줄 친 부분이 눈에 들어오더라고. ‘마흔 살은 가진 것을 다 걸어서 전환에 성공해야 한다. 나의 모든 것을 걸어 내 안에 있는 군주적 본능을 깨워야 한다.’ 캬, 얼마나 멋진 말이야. 나도 내 안에 있는 군주적 본능을 깨울 거야. 자, 건배.”

    한 부장의 말은 성경에 나온 갈렙 선지자의 외침 같았다. 모세가 아꼈던 두 명의 후계자 중 하나였고, 이스라엘 민족의 가장 용맹한 영웅이었던 갈렙은 85세에 이런 기도를 했다고 한다.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山地)를 내게 주소서. 그 성읍들이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한 부장은 자신의 ‘산지’를 찾아 지방으로 내려갔다. 모 지자체 산하의 예술문화회관 팀장으로 가는 그의 얼굴은 한층 밝아 보였다. 꼭 꿈을 이루시길….

    #Scene 2

    똑똑. “홍보실 윤병굽니다.” “들어오세요.”

    김정도 상무. 임원이 됐지만 표정은 근엄하지 않다. 어깨에 힘도 들어간 것 같지 않다. 오히려 좀더 부드러워졌다고 할까. 근데, 이 심상치 않은 기운은 뭐지?

    “혹시 저 때문에 윤 대리님도 한국전자로 발령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죠?”

    “어르신들의 생각을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축하드립니다. 상무님.”

    “근데 맞아요. 아니 반쯤은 내가 원했어요. 아무래도 제 생각을 이해해 줄 수 있는 분이 필요해서요.”

    엥? 그럼 이제부터 나는 김 상무 라인? 이거, 기회야, 위기야?

    “우선 한 가지 물어봅시다. 소문 들었겠지만 한국전자 대리들의 퇴사율이 그룹 계열사 중 최고예요. 이유가 뭘까요?”

    “그거야….”

    “그리고 회사에 흘러다니는 이 문건 본 적 있어요?”

    하얀 A4용지 석 장에 글이 빽빽하다. 이게 뭐지? 어디 보자. ‘H전자에서 얻은 상식’ ‘심심할 때 읽어보세요’ ‘단 과장님은 읽지 않는 게 정신건강에 좋을 듯’.

    “누군가 이런 내용을 작성해 사적인 e메일로 전파하는 것 같아요. 인사팀은 이 문건이 퍼지면서 대리들의 퇴사율이 높아졌다고 보고 있어요.”

    “읽어보겠습니다.”

    “읽어보시고, 누가 이 문건을 작성했는지 알려줘요.”

    “아직 온 지도 얼마 안 됐고, 또 아는 사람도 많지 않고….”

    “오자마자 스파이 노릇하는 게 꺼림칙하다는 거죠? 내가 진심으로 알고 싶은 것은 요즘 대리들의 머릿속입니다. 그 머리로 뭘 생각하면서 회사에 다니는지 궁금해요. 사보 담당이니까, 특집기사 쓴다는 명분으로 우리 회사 대리들 좀 만나보세요. 그리고 결과는 알려주시고. 이건 윤 대리와 나 사이의 비밀이요.”

    김 상무 라인에 선다는 것, 위험할 것 같다.

    #Scene 3

    도대체 뭔 내용이기에 호들갑이야. 한번 볼까.

    제목: H전자에서 얻은 20가지 상식

    1. MIT, 스탠퍼드, 칼텍 등 세계 주요 대학 출신들 다 소용없다. 결국 S대가 평정했다. SSAT, 식스시그마 시험을 비롯한 모든 사내 시험의 1등은 S대였다.

    2. 연수원 동기 150명 중 40명은 입사 5년 뒤 퇴사한다. 110명이 경쟁하지만 15년 뒤 부장은 딱 한 명만 된다.

    3. 1년에 50명 중 4명이 퇴사한다.

    4. 과장 퇴직자는 집에서 논다. 부장 퇴직자는 하청업체에서 논다. 상무 퇴직자는 꽤 괜찮은 회사의 고문실에서 논다.

    5. 인사 실수로 한 부서에 한 명은 일 없이 1년 내내 논다.

    6. 대부분의 과장급은 일하지 않고 지시만 한다.

    7. 대리 승진에서 한 번 탈락하면 임원의 꿈은 접어라.

    8. 임원에게 인정받는 상사를 모시는 사원 나부랭이는 가정을 포기해야 한다.

    9. 임원들의 주요 경영 전략은 ‘노동력 착취의 극대화’다.

    10. 임원들의 두 번째 ‘필살기’ 전략은 ‘재료비 단가 인하’다.

    꽁트로 엿본 한국 대기업 ‘대리學’

    대리가 대리운전의 준 말이냐구요? 천만에 대표이사의 준말이라고요!

    11. 부서 분위기 좋은 데치고 성과 좋은 데 없다.

    12. 성격 좋은 상사치고 인정받는 상사 못 봤다.

    13. 그러나 마음씨 좋은 상사를 만날 확률은 5%다.

    14. 일이 빡세다고 회사 옮긴 사람들, 옮겨도 빡센 데서 일한다. 이유는 모른다.

    15. 해외유학파 여사원이 3년 안에 퇴사할 확률은 95%다.

    16. 공무원, 의사, 수능시험을 위해 퇴사한 사람 중 80%는 성공했다.

    17. 엔지니어 생활 5년이 넘으면 정치·경제·문화 면에서 바보가 된다.

    18. 나이 40에 자기 집이 없는 사람은 20%다.

    19. 3년 동안 평균 퇴사 시간은 저녁 9시였다.

    20. 추석과 설 전날이 유일하게 눈치 안 보고 5시에 퇴근하는 날이다.

    잘 썼네, 잘 썼어! 어쩜, 회사 돌아가는 원리를 이렇게 잘 표현할 줄이야. 대단해, 대단해. 근데, 난 지금부터 뭘 해야 하지? 지하저항군의 본거지를 알아내려는 외계인 프락치, 윤병구…. 오 노!

    #Scene 4

    우선 이구식 대리를 만나야 한다. 고등학교 동창이자 입사 동기인 이 대리. 한때는 새벽까지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우리의 미래를 이야기했다. 지방대학 전자공학과를 나왔지만 그의 대학입학 시험성적은 서울 명문대에 입학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원래는 의대를 가려고 했다가 집안 사정이 여의치 않자 장학금을 받고 지방대로 갔다. 그가 한국전자에 입사할 때, 우리 동기들은 그가 고등학교 성적으로 회사에 들어왔다고 놀리곤 했다.

    회사에 입사한 뒤 나는 한국물산으로, 그는 한국전자로 가는 바람에 1년에 한 번 정도 보는 사이가 됐고, 그나마 최근 2년 동안은 본 적이 없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다고 하는데 아직 나는 안부조차 물어본 적이 없다. 이런 나를 그는 어떻게 생각할까.

    “구식아, 병구다. 잘 있었냐?”

    “어이, 윤 대리님. 안녕하셨어요? 우리 회사의 실세, 김 상무님 라인 아니십니까?”

    이런. 소문이 벌써 났나보다. 대리들의 특징 하나. 어느 라인이 주류이고, 비주류인지 귀신 같이 안다. 인맥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집착한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실세라고 알려진 사람들의 신상을 조사하고 숙지한다. 초장부터 이 대리에게 한 방 먹었다.

    “라인은 무슨 라인. 야, 오늘 퇴근하고 소주나 한잔하자. 니 아들 옷 사놨어. 내 마누라가 챙겨주더라. 바쁘신 얼굴 한번 보자고.”

    “거 좋지. 삼겹살 어때?”

    순순히 만나자고 한다. ‘아들 옷’이란 낚싯밥에 척 걸리는 걸 보니, ‘단순 무식’ 옛날 이구식이 맞다.

    한국전자 사옥 로비. 저쪽에서 이구식 비슷한 친구가 걸어오는데, 잘 모르겠다. 벌써 노안(老眼)인가. 뒤뚱뒤뚱 걸어오는 게 동물원 코끼리 같다. 설마, 구식이가?

    “윤병구! 나 안 반가워? 뭐냐, 그 표정은?”

    “혹시 이구식 대리…님?”

    “왜? 내가 살 좀 쪘지.”

    “아니 어떻게 된 거야?”

    “105kg.”

    “이런, 이런! 이 몸으로 어딜 가시려고? 어디서 야채비빔밥이나 먹자. 무슨 삼겹살이야.”

    “무슨 소리. 오랜만인데 소주는 한잔해야지.”

    거짓말 조금 보태면 30kg은 찐 것 같다. 결혼 때문인가. 일 때문인가.

    “스트레스지, 뭐. 너도 소문 들어서 알겠지만 한국전자 부회장, 집으로 갔잖아(퇴출됐다는 뜻). 그 밑의 전무도 나갔고. 총괄하는 임원이 새로 오니 우리 팀 방향이 완전히 바뀌었어. 적응하느라 뭘 좀 먹었더니, 살이 붙어.”

    “한두 달에 붙은 살이 아니야. 어휴, 이 뱃살 좀 봐. 눈은 볼살에 눌려서 보이지도 않아.”

    “윗선이 자꾸 흔들리니 밑에선 죽을 맛이야. 기술 위주로 팀을 운영하다가, 마케팅 위주로 또 바꾸고.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모르겠어. 요즘 대리가 예전 대리냐? 예전엔 대리운전의 대리였지. 요즘은 대표이사의 대리야. 맡고 있는 프로젝트가 있고, 책임도 져야 돼. 그러니 윗선이 흔들리면 우리까지 흔들린다고.”

    “구식이 많이 컸다. 제법 임원처럼 말하네.”

    “내가 하는 일이 뭐냐, 신제품 기획이야. 고객 가장 많이 만나는 게 우리, 대리들이야. 거기서 아이디어가 나오고 신제품이 나오는 거지. 근데 과장이나 차장급은 이런 현실을 몰라. 현장에 있지 않으니까. 그리니 대리가 임원하고 바짝 붙어서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밖에 없어. 그런데도 중간 간부들은 ‘어이, 이구식, 요즘 상무님하고 자주 만나데. 잘나가나봐’ 이러면서 빈정대니. 일할 맛이 안 나. 책임은 주면서, 권한을 인정을 하지 않으면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야.”

    어이쿠, 이 녀석. 마음고생이 심했군. 겉은 털털하게 생겨도 속은 여려서 자신의 불만을 밖으로 표출하지 않는다. 선배들에게 대들지도 못한다. 오히려 그들을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면, 스트레스는 어디로 가나? 자신을 괴롭히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먹고, 또 먹었던 것이고.

    “중간 간부들 이해해. 먹고살기도 바쁘고, 일하는 것도 힘들 텐데.”

    대리들의 특징 두 번째. 상사와 몇 마디 하다가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으면 아예 입을 닫는다. 대화 단절이다. 예전 대리들은 어떻게 해서든 대화하려고 했다는데. 우리 대리들은 그렇지 않다. 상사를 무시해서 말을 안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니까 대화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대화를 단절하면서, 이런 의미를 무언으로 전달하고 있는 셈이다. ‘당신 처지를 인정하니, 내 처지도 이해하기 바라오. 그냥 나를 내버려두시오.’

    “한 가지만 물어보자. 한국전자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그런데, 여기 대리들은 왜 퇴사율이 높은 거야?”

    “나도 어제 헤드헌터에게 전화 받았어. 회사 옮길 생각 없냐고. 연봉은 여기 1.5배, 과장으로 승진. 외국계 회사인데 곧 한국에서 상장할 계획. 상장하기 전 주식을 좀 주는 조건. 집 사려고 하면 저리로 융자도 해준대.”

    “와! 거기 어디냐. 나 좀 데려가주라.”

    “근데, 안 간다고 했어. 생각 같아서는 가고 싶은데. 요즘 회사 나간 대리들 사는 것 보면 겁나. 얼마 전에 퇴사한 대리가 우리 회사에 놀러왔는데, 그래도 우리 회사가 최고라고 하더라. 그쪽 회사는 학벌 따지는 게 장난이 아니래. 사조직도 많고. 그 친구, 명문대 출신 아니거든. 벌써부터 숨이 막힌다고 울상이야. 우리 회사가 일은 많이 시켜도 그런 건 안 따지잖아.”

    그의 말처럼 한국전자는 학벌을 따지지 않는다. 임원들의 출신 대학만 봐도 다양하게 섞여 있다. 누군가는 이게 한국전자의 경쟁력이라고 했다.

    “그래서 여기서 버티시겠다?”

    “아니. 기회가 좋으면 옮기지. 제일 불만은 비전이 없다는 거야. 기획팀이면 기획을 얼마나 잘했는지 그걸 평가해주고 보상해줘야지. 제품 몇 대 팔렸냐로 우리 실력을 평가하면 어떻게 하냐고. 제품 팔리는 건, 운도 작용해. 우리가 잘해서 그런 게 아닐 수도 있다는 얘기야.

    내가 중간 간부라면 이렇게는 안 해. 진짜 선배라면 일이 되게 하는 경험도 있고, 신기술을 파악하는 센스도 있고, 후배가 뭔 얘기하면 들어주기도 하고 그래야지. 더 불안한 건, 이런 선배들은 회사에서 인정받지 못한다는 거야. 닮고 싶은 선배는 물 먹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선배는 승진하고. 이러니 헷갈리는 거지. ”

    “어느 회사라고 그런 사람 없겠냐? 그래도 열심히 하면 다 인정받겠지.”

    꽁트로 엿본 한국 대기업 ‘대리學’

    한국의 모든 대리님들 힘내세요, 파이팅!

    “천만에. 우리 회사 평가 시스템 알지? 한 팀에 A급, B급, C급 정해져 있어. 인사 적체로 승진 못하는 과장, 차장들 먼저 A급, B급으로 돌리고, 그 다음 대리들에겐 C 줘. 말로는 ‘니들도 과장 되면 A급 준다’고 하지만, 그게 합리적이냐? 팀장 처지에서야 부하들 다독이려면 그렇게 해야 하겠지만. 우리 대리들은 열심히 일해도 이미 평가등급이 정해져 있어. 대들면 이기적이라고 혼나고.”

    “구식아, 그만 마시자. 너무 많이 마셨어, 우리.”

    “윤병구! 니 마누라가 사준 우리 아들 옷 고맙다고 전해라. 그리고 넌, 좀 반성해. 연락도 안 하고, 짜식. 김 상무 라인이면 다냐?”

    아니라니까, 김 상무 라인!

    #Scene 5

    따르릉.

    “예, 홍보실 윤병굽니다.”

    “형, 저 모르시겠어요? 장학수예요.”

    “학수? 그 꼬맹이?”

    “예, 그 꼬맹이. 저, 마케팅 부서에서 일해요.”

    “가만있어봐. 니가 몇 살이지? 나한테 과외 받을 때 고등학생이었잖아.”

    “스물아홉이요. 회사 들어온 지 2년 넘었고요.”

    “공부 잘하더니 결국 우리 회사 들어왔구나. 점심이나 같이 먹을까?”

    “예, 형님.”

    학수. 고등학교 다닐 때 내가 영어 수학 좀 봐준 녀석. 사실 워낙 공부를 잘해서 나는 그냥 공짜로 과외비 받은 거나 다름없었다. 얼굴도 잘생겨서 여자깨나 울렸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벌써 결혼했단다. 나 같으면 좀 더 놀다가 이 ‘진흙탕 세계’로 들어왔을 텐데. 역시 모범생들은 인생의 맛을 모른다. 짜식.

    “지금 대리들은 꼈어, 꼈어”

    “입사 3년차면 한참 놀 때구나.”

    “웬걸요. 제가 우리 부서에서 일 다 해요.”

    “어허, 사원 나부랭이가 뭔 일을 한다고 그래?”

    “천만에요, 형님. 제가 우리 부서 대리급 사원이에요.”

    “오, 그러셔요? 뭔 일을 그렇게 세게 하셔요?”

    “제 나와바리(영역)를 갖고 싶은데, 조직이 허용해주질 않아서….”

    어쭈, 이 녀석 목소리도 제법 굵어졌네.

    “형님, 입사 초기엔 정신없이 일했는데요. 3년차가 되니까 좀 보여요.”

    “뭐가 보이세요, 학수 형님?”

    “참, 형님도. 자, 우리 회사에 임원 빼고 45세 이상 직원이 있습니까. 과장 진급률은 60%고요. 대리 10명 중에 4명은 집에 가야 하는 거죠. 저보다 불과 10년 선배들이 집에 가고 있는데 제가 지금 가만히 있게 생겼냐고요.”

    망둥어가 뛰니 꼴뚜기도 뛴다고, 왜 이 아이까지 뛰는 거야? 한국전자, 문제 많구먼.

    “그것뿐입니까요, 형님. S급 인재들 물밀듯이 들어오죠. 이들은 30대 초반에 팀장 달아요. 저도 곧 30대에 접어드는데, 한 일은 없고. 지금 대리들은 꼈어, 꼈어. 혀 꼬부라진 S급 인재에 끼고, 근엄하신 중간관리급에 끼고.”

    “일이나 열심히 해라. 그런 분석이나 하면서 세월 보내지 말고.”

    “선배들과 술 마시느라 제 관리도 못 해요. 근데 여직원들은 달라요. 걔네들, 회식 때도 1차만 하고, 영화 보러 가고, 연극 보러 가고, 차 마시면서 생존전략 짜고. 그래서 그런가. 회의할 때 보면 여자들 아이디어가 훨씬 좋아요. 위기감이 느껴진다니까요.”

    학수야, 이젠 네가 나를 가르치는구나. 맞다. 자기관리 해야 한다. 나처럼 술 먹고 프락치 짓이나 하지 말고.

    “야, 근데 요즘 ‘H전자에서 얻은 20가지 상식’이란 글 본 적 있니?”

    “아, 그거요. 다 봤죠. 별거 아니에요.”

    “누가 작성했는지 아냐?”

    “그건 모르죠. 제가 보기엔 그 글 써놓고 퇴사한 것 같은데요.”

    “아니야. 내가 보기엔 아주 지능적인 놈 같아. 회사가 흔들리는 꼴을 보고 희열을 느끼는 자의 소행 같아.”

    “요즘 탐정놀이 하세요, 형님?”

    “어? 아니야. 야, 일할 시간이다. 학수 형, 또 보자. 너 많이 멋있어진 거 아니?”

    “흐흐흐.”

    #Scene 6

    오늘은 참 이상한 날이다. 과외 해줬던 동생이 전화하질 않나, 중학교 때 미국으로 이민 간 강혜진을 만나지 않나. 가전사업부 강혜진 대리. 회사 로비에서 우연히 만났다. 여드름 많던 혜진이가 근사한 여성이 돼서 나타났다. 오 마이 갓.

    “이게 누구야? 강혜진?”

    “병팔이?”

    “크, 그래 윤병구. 근데 여기서 뭐해? 여기는 외부인이 함부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외부인이라니? 나 여기서 일해. 너야말로 우리 회사에서 뭐 하니?”

    “오, 그렇게 됐구나. 나도 홍보실에서 일해. 이러지 말고, 2층에서 차나 한잔하자.”

    아직 싱글이라는데, 남자친구는 있단다. 외국지사에서 근무하는 아버지를 따라 일찌감치 외국에 나가더니 국제경영학을 전공, 외국회사에서 근무하다가 스카우트됐다. 중학교 때 친구인데, 아버지 눈매를 닮아 강렬한 인상이 남아 있다.

    ‘홍성흔과 마르티네스’

    “국적은 미국이야. 그래도 나는 한국 사람이잖니. 그런데 한국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는 거야. 남동생은 미국에 남고 나만 한국으로 들어왔어. 한국 기업의 조직을 경험해보고 싶어서.”

    “그랬구나. 언제 입사한 거야?”

    “4년 됐어. 그때 경력직으로 140명이 들어왔는데, 지금 딱 반이 남았지. 나처럼 외국에서 근무하다가 온 사람이 80명이었는데 반이 퇴사했어. 회사는 S급 인재라며 치켜세우는데, 권한은 주지 않아. 그러니 무슨 일을 하겠어. 도로 나가지.”

    “너는 어때?”

    “나도 마찬가지야. 임원급이 변화를 시도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안타까워. 부장이 실무책임자지만 임원 딸랑이나 마찬가지야. 결국 임원이 변해야 해. 아이디어를 내도 반응이 없어. 이러니 내가 승부를 걸어보고 싶겠니?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도 그냥 마음속으로 숨겨둬. 혹시 누가 물어보면 쬐끔 말해줄까, 말까 하지. 하여튼 좋은 사람 많이 나갔어.”

    “반면 마음에 드는 선배들도 있겠지?”

    “그럼. 우선 오픈 마인드! 이런 분들이 좋아. 내 얘기 들어주고, 또 뭐하는지 물어봐주고. 혼낼 때는 진을 쏙 빼놓을 정도로 혹독하게 하시는 분이 있는데, 뒤끝이 없어. 그런 분, 너무 마음에 들어. 혼내더라도 다시 기회를 주는 상사는 사랑할 수밖에 없잖니.”

    어라, 사랑? 이거 좀 위험한데.

    “회사 욕만 했는데, 좋은 점도 많아. 가족 같은 분위기는 너무 좋아. 엊그제 회사 동료의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문병을 갔다왔거든. 버스를 한 대 빌려서, 전체 팀원들이 가서 가족처럼 위로해주고 일해주고 왔어. 미국 회사에선 상상도 못할 일이지.”

    강 대리의 이야기를 듣자니 갑자기 장학수가 투덜거린 말이 생각났다.

    “여자들은 좋겠어. 회식 때도 끝까지 남지 않아도 되지. 남자들보다 자기 개발할 시간을 확보할 수 있어서 좋지.”

    1만대 1의 경쟁을 뚫어?

    “그렇게들 쑥덕거리는구나. 여자들 처지에선 안 그래요. 실수를 해도 선배들이 그냥 넘어가. 나, 차별대우 받는 거 싫어해. 혼내려면 똑같이 혼내고, 기회를 주려면 똑같이 주고.”

    이크, 괜히 한마디 걸쳤다가 본전도 못 뽑을 것 같았다. 이럴 땐 살짝 다른 질문.

    “남자친구는 뭐 해?”

    “한국서 만났는데, 나처럼 어릴 때 미국에서 살았어. 말해보니 공통점이 많더라고. 뉴욕 양키스 팬이고, ‘섹스 인더 시티’(미국 TV 드라마)를 즐겨 보고.”

    잘났다, 강혜진. 나는 두산팬이다, 이쒸!

    “두산도 좋아해. 홍성흔 포수 너무 좋더라. 뉴욕 양키스 선수였던 티노 마르티네스 같아.”

    잘났어, 정말!

    #Scene 7

    ‘윤병구 대리, 너무 열심히 일한다. 그러다 병날라….’

    어디서 환청이 들리는 줄 알았더니 꿈이다. 나 부장 목소리 같았다. 떠날 때는 시원하더니 막상 떠나오니 옛사람이 그리운 이유. 누구 아세요?

    오늘은 사원협의회 일을 보고 있는 혁신팀 노혁진 대리를 만나는 날이다. 사원협의회에선 ‘X파일’의 진상을 좀 알지 모른다. 누가 어떤 목적으로 그 보고서를 쓰고 유포했는지. 오늘은 그걸 추적해야 한다. 노 대리 프로필을 보니 나보다 한 살 어리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입사한 이후 매번 A등급을 받은 인재라고 한다. 만만한 친구가 아닌 것 같다. 너무 부담이 된 탓인지 새벽에 나 부장 목소리를 들은 것 같다.

    ‘외계인 프락치, 윤병구. 힘내라, 오버.’

    어? 또 나 부장? 아니면 김 상무? 귀가 간지럽다.

    “홍보실 윤병굽니다.”

    “아, 네. 노혁진입니다. 반갑습니다. 대리들의 세계를 취재하신다죠? 드릴 말씀이 없을 것 같은데요. 뭐든 물어보세요. 성의껏 말씀드리죠.”

    역시 만만치 않다. 당당하다. 나에겐 없는 태도다. 그러니 해외 MBA를 나와도 들어가기 힘들다는 혁신팀에 들어갔지. 그는 서울 중위권 대학 출신이다. 너무 단단한 태도가 슬쩍 거슬린 때문인지, 나는 송곳 같은 질문부터 했다.

    “요즘 해외파 아니면 승진하기도 힘들다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한국전자에 들어온 지 3년째 되던 해, 내가 여기서 뭘 배울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정년까지 근무하기는 힘들 것 같고. 사장 하려면 1만 대 1의 경쟁을 뚫어야 하는데, 불가능할 것 같고. 그런데 나는 거대한 피라미드의 바닥에서 놀고 있고.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했죠.”

    위험회피적인 부류들

    어라, 의외로 솔직담백하다.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좀 없긴 해…. 인정, 인정.

    “그러다 전사 공모제를 보게 됐어요. 혁신팀 사원을 뽑는다기에 도전했죠. 물론 해외파들이 득실거린다는 얘기를 들어서 약간 겁을 먹기는 했는데. 일단 들어가면 당분간 승진이 보장될 것 같았어요. 인터뷰 하면서 제가 겪은 3년의 경험을 털어놓았고, 제 나름대로 어떻게 하면 혁신할 수 있는지 말했죠. 그게 주효했나봐요.”

    “혁심팀은 회사 전체를 보는 눈을 가지도록 훈련하는 부서 아닙니까. 요즘 우리 회사 직원들, 특히 대리들의 문제는 뭐라고 생각하세요?”

    “전반적으로 일의 만족도가 낮아요. 자기가 하는 일이 가장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다 힘든데 말이죠. 엔지니어 관련 부서는 괜찮은데, 금융팀 같은 지원부서는 만족도가 더 낮아요. 요즘 대리들 이직하는 쪽 중 상당수가 지원부서에서 일하죠. 좀더 들어가보면 이 중에서도 학사 출신 대리들의 이직이 많아요. 어떻게든 단기간에 승부를 보려고 하니까, 직급을 높여서 외국계 회사로 떠나는 겁니다.”

    “노 대리님은 남기로 하신 겁니까?”

    “어이쿠, 질문이 너무 공격적이신데요. 근데 직설적이어서 좋습니다. 저는 뒤에 뭘 숨겨놓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얼씨구, 당신이 사장하쇼. 그래도…, 젠틀한 맛이 나쁘지는 않다.

    “전 한국전자가 좋습니다. 중위권 대학 출신이 출세할 수 있는 곳으로 여기만큼 좋은 곳은 없다고 봅니다. 사실 회사 안에 특별한 사람은 없는 것 같아요. 이렇듯 평범한 사람들이 최고의 실적을 올립니다. 제가 생각하기엔 시스템이 우리 회사만큼 좋은 곳이 없는 것 같아요.

    각종 교육 프로그램으로 사원들이 실력을 닦으면서 탄탄한 기반이 마련됩니다. 회장님이 천재를 영입하자는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이런 기반이 있기 때문이죠. 아무리 천재급 인재가 와도 그걸 실무적으로 풀어낼 기반이 없다면 무용지물이잖아요. 저는 이런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어떻게 개선해야 하는지 알고 싶어요.”

    역시 혁신팀 대리답다. 나에겐 부족한 시각이 느껴진다. 오, 밀리면 안 된다, 윤병구. 분위기를 역전시키려면 좀더 까칠한 질문을 해야겠다.

    “사실 오늘 노 대리님을 만나려고 한 이유는 대리들의 집단 퇴사 때문입니다. 경영진 처지에선 걱정이 많습니다.”

    “한국전자가 드디어 변혁기에 들어섰다고 봐요. 윗사람이 아랫사람의 일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시기가 온 거죠. 기술 분야 부장이 엔지니어를 컨트롤 할 수 없어요. 워낙 기술이 빨리 변하니까, 또 경험한 바 없으니까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을 몰라요. 그럼, 이런 현상이 최근에 생긴 걸까요? 예전엔 경기가 좋아서 감춰졌을 뿐이에요. 매출이 올라가니까 그냥 냅둔 겁니다. 경기가 좋지 않고 매출이 떨어지니까, 윗선에서 진상을 파악하기 시작했다고 봐요. 윤 대리님이 취재하시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 나온 거 아닙니까.”

    난 몰라. 위에서 시키니까 하는 거야. 근데 그게 그런 뜻이었니?

    “한국전자의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는 쪽은 임원급과 대리급이라고 봅니다. 둘 다 전선(戰線)에 서 있으니까요. 그래서 둘은 통합니다. 근데 문제는 중간관리자들이에요. 옛날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이쪽이 사람들은 많아서 경쟁은 치열하죠. 조그마한 실수만 해도 집에 가야 하죠. 위태위태한 겁니다. 그러니까 움직이질 않아요. 잘나가는 대리나 누르면서 생명을 연장하고 있는 수준이에요.”

    너무 세게 나가는데. 당신의 말, 나 지금 다 적고 있어.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릴게요. 요즘 현장에서 일하는 엔지니어들, 특히 젊은 층은 퇴사율이 심각합니다. 엔지니어로 살면 시야가 좁아지고, 정치·경제·문화 면에서 바보가 된다고 하잖아요?”

    어, 이 말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어디지?

    “그러니 이들은 남들로부터 떨어져 고립된다고 생각해요. 뒤처진다고 보는 거죠. 남들과 다르게 사는 것을 견디지 못해요.”

    아! 생각났다. 그럼 이 친구가?

    “전 오늘의 상황이 심각하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누군가는 질문을 해야 합니다. 어떤 형태로든 조직 개편이 필요해요. 지금 생각 같아서는 대리들에게 팀장을 주고, 중간간부들은 지원을 맡았으면 좋겠는데. 콘텐츠 생산은 대리에게 맡기고, 콘텐츠를 담는 그릇은 중간간부들에게 맡기고요.”

    “노 대리님 오늘 솔직하게 말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왜 대리님을 두고 인재라고 하는지 이해가 됩니다.”

    “천만에요. 아까 말씀드렸듯이 전 평범하고요, 저같이 평범한 사원에게 일을 맡겨주는 회사가 고맙고요.”

    알았다, 알았어. 겸손한 것도 마음에 든다.

    “근데, 제가 드린 말씀, 과장들이 알면 화낼 것 같은데요.”

    어라, 이 말도 그 보고서에 있지 않았던가?

    #Scene 8

    사슴 같은 선한 눈망울. 아담한 키. 제대로 빗진 않았지만 자연스러운 머릿결. 청바지. 제도용 연필 몇 자루가 들어 있을 것 같은 낡고 조그마한 갈색 가방. 운동하고는 전혀 관계없을 것 같은 어깨. 그러나 말에는 단단한 힘이 느껴진다. 디자인팀 고양수 대리.

    “회사 대리들이 과장님들 욕하는데, 그거 잘 모르고 하는 말이에요.”

    “뭘 모른다는 말인지?”

    “그분들 회사 입사할 때가 외환위기 전후일 겁니다. 그때 살아남은 사람들이에요. 실력도 있고, 윗사람에게 잘 보였고. 어느 줄이 생명줄인지도 구분할 줄 알고, 적당하게 위험을 피할 줄도 알죠.”

    뭐야, 결국 과장들 욕하는 거야?

    “그런 환경에서 생존했으니 대리가 보기에 과장들이 답답한 겁니다. 그러나 그땐 상황이 그랬죠.”

    “고 대리님은 입사한 지 5년째죠?”

    “전 대리가 되길 정말로 기다렸어요. 제 생각을 펼쳐볼 수 있는 최초의 직급이 대리라고 생각했어요. 벼룩은 일정한 높이만 뛰죠. 그 위의 세상에 대해서는 모르죠. 저는 대리가 되면서 벼룩의 시각은 뛰어넘었다고 봅니다.”

    좋으시겠어요. 벼룩 다음엔 뭐죠? 메뚜기?

    그게 치유의 시작

    “이 시대의 대리는 욕심이 많아요. 저만 해도 학교 다닐 때 외환위기가 터졌어요. 그때부터 줄곧 우리 사회에 청년실업 문제가 나왔잖아요. 저로선 알에서 나오기도 전에 불안함부터 배웠다고 할까요. 힘들게 공부했고, 힘들게 입사했어요. 다시는 힘든 시기를 겪지 않으려고 자기 개발에 정성을 쏟아요. 그러다보니 결혼이 늦어졌고요.”

    “디자인부서는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많겠습니다. 세계에서 유일한 것을 그려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은 일이죠.”

    “사람들이 제가 디자인하는 제품을 보고, 그들의 정신적인 아픔을 치유했으면 해요. 시각적인 즐거움, 사용의 즐거움을 느끼다보면 현실의 고통을 잠시 잊는 거죠. 잊다보면 여유가 생기고, 그럼 자신의 아픔을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어요. 그게 치유의 시작이죠.”

    오, 그럴듯해.

    “북유럽에선 찻잔을 하나 디자인하는데도 자신의 철학을 담잖아요. 그게 사회의 철학이 되고,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고요. 작은 것이라도 사람과 사람이 통할 수 있는 통로가 되는 것, 그게 디자인이라고 생각해요.”

    “많이 배웠습니다. 종종 놀러와야겠는데요. 제가 좀 많이 아파서요.”

    “좋아요. 다음에 올 때는 색연필 하나 가져오세요. 재미있는 것 가르쳐 드릴 테니.”

    야, 이 친구 말 통하네. 우리 회사 대리들, 괜찮네!

    #Scene 9

    똑똑. “홍보실 윤병굽니다.” “들어오세요.”

    “상무님, 대리 보고서 드리러 왔습니다.”

    “수고했어요. 쉽지 않았을 텐데. 어때요, 우리 대리들. 건강한가요?”

    “다음엔 과장 보고서도 써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요? 뭔가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는 거죠? 윤 대리님, 이젠 알아서 일을 하시는군요. 좋아요.”

    윤병구 대리, 한국그룹 입사 이후 처음으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다.



    #Scene 10 에필로그

    한국 굴지의 전자회사에서 실제 벌어지는 일을 쓴 것이다. 대리들의 위기는 곧 과장, 차장, 부장의 위기다. 이들이 떠나는 회사. 부하 없는 간부가 어디 있는가. 30, 40대 중간 간부들은 경쟁하려 하지 말고, 경쟁을 피해야 한다. 1지망을 고집하지 말고, 2지망을 찾아 거기에서 뿌리를 내리려고 해야 한다.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눈을 돌리다보면 거기에 자신에 맞는 자리가 있을 것이다. 전쟁은 대리들에게 맡기고 과·부장들은 보급부대에서 뛰어라. 그들의 든든한 후원자가 돼줄 때, 대리들은 그대들을 위해 뛰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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