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후 미국으로 망명 아닌 망명길에 오른 그는 남캘리포니아대에서 정치학 석·박사학위를 받고 1977년 귀국했다. 전두환 정부 들어서 영국 및 로마교황청 대사를 지낸 그는 노태우 정부 시절 국무총리(1988~90)를 지냈다. 1990년 9월4일, 분단 45년 만에 최초로 남북 총리회담을 성사시켜 남북 화해의 새 장을 연 그는 7년간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맡아 민간의 대북 지원 사업을 주도하기도 했다. 청렴하고 강직한 이미지로 각인돼 있는 그는 지금도 유엔 환경계획 한국위원회 총재와 각종 사회단체 고문 등을 맡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또한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반대운동에 적극 나서는 등 국가 원로로서 목소리를 아끼지 않는다.
5월3일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자택에서 만난 강 전 총리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국가 원로로서 목소리를 내는 게 보기 좋다”고 인사를 건네자 “그렇지 않다”며 손을 내저었다.
“갈수록 건강이 신통치 않아요. 여든이 넘으니까 몸이 확실히 달라지는 게 느껴져요. 건강도 건강이지만 정부가 ‘나라 망친 사람들은 집에 가만히 있으라’고 하잖아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나라를 망친 것 같지는 않은데, 어쨌든 가만히 있으라고 하니까 집에 가만히 있습니다(웃음).”
그는 시간이 나는 대로 회고록을 정리하고 있다고 했다. 한 번 탈고한 원고를 다시 읽으며 수정하는 중이다. 거기엔 그의 파란만장한 개인사뿐 아니라 격동기 한국 근현대사의 이면이 오롯이 녹아 있을 것이다.
“후손에게 할아버지가 무슨 일을 했나 알려주고 싶어요. 지금 정부가 할아버지 같은 사람들을 욕하는데, 정말 욕 먹을 일을 한 것인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요.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쓰다보니까 분량이 꽤 되더라고요.”
느닷없이 펼쳐든 포퓰리즘 깃발
올해는 대선이 있는 해다. 대통령선거는 미스코리아 뽑듯 하거나 누가 몇 %를 차지했냐는 식의 인기투표가 아니다. 그래서 정치권 안팎에선 ‘대통령 자질론’ ‘대통령 덕목론’이 나돈다. 기독교계 지도자 60여 명이 ‘차기 대통령이 갖춰야 할 10대 덕목’을 발표하는가 하면 강 전 총리를 비롯한 원로 26명도 지난 3월 ‘대한민국 대통령 10대 덕목’을 내놓았다.
“나오라고 해서 발표 당일에 나갔는데, 내용을 보니까 맘에 안 드는 게 있더군요. 우선 국제외교 실무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말이 안 되죠. 그 얘긴 외교관 출신만 대통령 하라는 거잖아요. 외교정책에 대한 자기 철학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 꼭 실무경험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죠. 다른 덕목들도 부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의도는 알겠는데, 지나치게 세세하게 규정한 것 같아요.”
▼ 그렇다면 차기 대통령은 어떤 덕목을 가져야 한다고 봅니까.
“인격이 가장 중요합니다. 우선 고상한 인격이 있어야 하고, 둘째는 외교와 내치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에 대한 식견이 있어야 합니다. 강대국은 내치가 우선이고, 내치를 발전시키기 위해 외교를 합니다. 반면 약소국은 외교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내치 역시 국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외교관계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강대국들 틈바구니에 끼어 있습니다. 따라서 강대국들의 갈등 속에서 외교적으로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그럴 수 있도록 어떻게 내치를 해서 나라의 힘을 키울지를 잘 아는 대통령이 나와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6·25전쟁 때 이승만 대통령이 한미방위협정을 맺은 것은 외교와 내치를 조화시킨 예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