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7월호

구약 속 탕녀는 진정한 여권운동가?

  • 정정만 M&L 세우미(世優美) 클리닉 원장 / 일러스트·김영민

    입력2007-07-04 16: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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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약 속 탕녀는 진정한 여권운동가?
    ‘너사람아, 예전에 두 여인이 있었다. 그들은 한 어미의 딸이었다. 그들은 에집트에 있을 적에 놀아났었다. 거기에서 사내들에게 으스러지게 껴안겨 남자를 모르던 그 젖가슴이 짓눌렸었다…언니의 이름은 오흘라요 아우의 이름은 오흘리바였다. 그들은 내 사람이 되어 아들, 딸들을 낳았다.’(에제키엘, 23:1-4)

    ‘오흘라는 내 그늘에서 살면서도 외간남자들과 놀아났다. 아시리아인들과 사랑에 빠져 몸이 달아올랐다. 자줏빛 옷을 입은 장성들, 총독들, 지방영주들, 모두 말 잘 타는 멋진 젊은이들이었다. 오흘라는 아시리아인들 가운데서도 뛰어난 그들과 놀아났다.’(에제키엘, 23:4-7)

    구약의 이 대목은 주변 강대국과 결탁해 그들의 우상을 숭배하는 사마리아인들의 신앙적 타락을 간부의 음분(淫奔)에 비유한 대목. 하지만 이는 당시에도 권력, 금력 친화적인 여인들이 남자들 틈새에 흔히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우상숭배는 곧 파멸일 만큼 하느님의 분노를 자아내는 대역죄였으며 그 대죄를 굳이 여인의 음행에 견주어 묘사한 것은 여인의 황음(荒淫)을 바라보는 하느님의 타이트한 시각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런데 아우 오흘리바는 이 모든 것을 보고서도 언니보다 더 몸이 달아 다른 남자들과 놀아났다. 내 눈에 그는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져서 그 언니에 그 동생이었다. 오흘리바는 점점 더 심하게 놀아났다. 심지어 벽에다 바빌론 사내의 모양을 새기고 붉은 물감으로 칠해놓고 쳐다보았다. 그 모습을 보기만 하고도 몸이 달아올라 바빌론으로 사자들을 보내어 사내들을 불러다 한자리에 들었다. 그 사내들의 애무를 받으며 그는 자기의 몸을 더럽혔다.’(에제키엘, 23:11-17)

    오흘라가 감히 야훼(여호와)를 거역하고 에집트와 아시리아인들과 더불어 놀아나다가 마침내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왕에게 멸망한 꼴을 보고서도 오흘리바는 정신을 차리기는커녕 언니보다 더욱 시먹은 창부 근성을 발휘해 하느님을 격노케 한 것.



    ‘오흘리바는 이렇듯 놀아나면 놀아날수록 에집트에서 소녀의 몸으로 놀아나던 그 시절이 그리워졌다. 나귀의 그것만큼 정액을 말처럼 쏟는 에집트의 정부들과 열을 올리던 일을 잊지 못하였다. 에집트에서 소녀의 몸으로 젖가슴을 짓눌리고 가슴이 으스러지게 안기던 그 젊은 시절을 못 잊어 애태웠다.’ (에제키엘, 23:19-21)

    하느님은 수차례에 걸쳐 이사야나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들을 통해 이방인과의 동맹을 엄금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의 훈계를 무시하고 강력한 이방인들에게 정치적, 경제적으로 의존했고 심지어는 신앙적으로도 종속돼 우왕좌왕하다 유다의 백성조차 바빌론 군대에 살육당하고 말았다.

    자신이 선택한 백성, 이스라엘과 유대인에게 일편단심을 기대했던 하느님은 정작 그들이 자신에게 등을 돌리자 끓어오르는 분노로 가증할 죄목을 일일이 열거하고 저주의 징벌을 내렸다. 하느님은 이 국면에서 독특한 수사법을 동원하고 있다. 배교(背敎)를 여인의 성적(性的) 방종에 비유한 은유적 설법을 사용한 것이다.

    배교는 곧 파멸이었다. 여인의 음행을 배교에 견준 것은 성적 쾌락을 횡령하는 여인의 죄질과 하느님을 배신하는 대역무도한 행위를 동렬에 두려는 하느님 의지의 강력한 표현방식이다. 하느님은 여자의 ‘끼’를 무엇보다 더 혐오했다. 특히 놀아난 유부녀에겐 더욱 엄격해 거의 예외 없이 중벌로 징계하곤 했다.

    아무에게나 섹스의 터전을 마련해주는 직업 매춘부에겐 꽤나 관대했던 하느님이 유독 유부녀의 성적 비희(秘戱)에는 초강경 조치를 서슴지 않았는데, 이는 하느님 자신의 독특한 성관(性觀)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느님은 여성의 인큐베이터적 역할을 지고한 것으로 설정하고 그것을 여성관의 본령으로 삼았다. 남녀 간의 교환에서 여성의 위상은 남자의 성적 도구 내지는 남성의 다급한 식욕을 채워주는 조력자였다.

    하느님의 이런 사고방식이 여권(女權)을 무시한 옹졸한 편견에서 기인한 것인지, 여체의 순결에 대한 강박관념의 결과인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남녀의 교합에서 여성의 가장 큰 임무는 참여이며, 따라서 교합 중인 여성이 화려한 개인기를 바탕으로 한 출중한 공격술을 구사하거나 응원의 교성(嬌聲)을 지르는 것은 성적 사치이거나 음탕한 허영의 발로라는 것이 하느님의 생각이다.

    이와 같은 하느님의 권위주의적 독선에 반기를 들고 성의 자유를 부르짖은 투사형 여성도 허다했다. 하느님의 눈초리를 의식하면서도 원형의 섹스, 느낀 대로의 인본주의적 섹스를 구가한 역사적 여성들이 줄을 이은 것이다. 러시아 여제 카타리나, 청조 말기의 서태후, 당조의 측천무후, 신라조의 진성여왕과 미실, 조선조의 어우동, 유감동, 장녹수 등에서 최근 미국 조정을 발칵 뒤집어놓은 제시카 커틀러까지 모두 하느님의 눈 밖에 난 ‘놀아난 여자들’의 선두주자다.

    요즘에도 우리는 놀아난 여자의 소문을 끊임없이 듣고 있다. 육신을 구속하고 지배하는 지성과 윤리, 이성의 자장(磁場)을 과감히 이탈해 관능의 뜨거운 외침에 충실한 실천가적 여성들의 이야기 말이다. 에제키엘의 여인, 오흘라와 오흘리바 자매도 창조적 권위를 제거한 본질적 섹스에 몰두한 뜨거운 여성이었다. 공수가 반전돼 갈수록 왜소해진 이 시대의 남자들에겐 묘한 긴장을, 섹스의 다양한 메뉴를 무리 없이 즐기는 식도락가에겐 입맛 다시는 기대감을 가져다주는 슈퍼우먼들, 그들이야말로 명실상부한 여권운동가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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