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7월호

‘전두환 안기부’, 박근혜 약혼설과 재산 의혹 수사했다

박근혜 성북동 자택·영남대 병원 건축 미스터리

  • 허만섭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shue@donga.com / 최호열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honeypapa@donga.com

    입력2007-07-09 15:35: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여당 인사 “박근혜 관련 1984년 안기부 수사 보고서 확보”
    • 안기부 보고서 “신기수가 박근혜 재산 의혹 자백”
    • 보고서 “신기수는 박근혜 성북동 자택 건축해줬고, 영남대는 박근혜 이사 재임 때 병원 공사 신기수에 맡겨”
    • 신기수, 구국봉사단·영남대·육영재단·정수장학회 참여
    • 안기부 조사 직후 경남기업 넘어가고 성북동 집 매각
    • 신기수 “안기부 조사받았으나 자백한 적 없다”
    • 안기부, ‘박근혜-신기수 약혼설’ 관련 신기수 진술받아
    • 박근혜 측 “특별히 할 얘기 없다”
    ‘전두환 안기부’, 박근혜 약혼설과 재산 의혹 수사했다
    장영달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는 6월14일 당 연석회의에서 “홍준표, 원희룡, 고진화라면 몰라도 박근혜 전 대표나 이명박 전 시장이 대선후보가 된다면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 그런 중요한 자료들을 우리가 갖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두 후보는 음침한 지난날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최태민 수사기록, 전두환의 도움, 재산변동 등 ‘박근혜 X-파일’ 기사가 ‘신동아’ 2007년 6월호에 보도된 뒤 여당 내 한 인사는 전두환 정권 시절 박근혜 의혹을 조사한 것이라는 국가안전기획부 보고서를 ‘신동아’에 전했다. 장 대표의 발언과 연관지어 생각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신동아’ 6월호 기사에는 박근혜 전 대표의 측근이던 고(故) 최태민 구국봉사단 총재의 부정행위 의혹 44건을 담은 박정희 정권 시절 중앙정보부 수사기록, 신기수 전 경남기업 회장이 1979년 10·26 이후 전두환 사령관의 지시를 받고 박 전 대표에게 서울 성북구 성북동 330-416번지 자택을 지어줬다는 내용 등이 담겨 있었다. 여당 인사는 이 중 성북동 자택 부분에 대해 “보도된 내용보다 훨씬 더 깊은 내막이 있다”면서 후속보도를 주문했다.

    여당 측이 이미 확보해두고 있는 자료라면 대선 과정에서 언젠가는 공개될 개연성이 높다. 여당 측이 6월 중순 시점에서 언론에 ‘박근혜 공격 자료’를 제공한 배경은 알 길이 없지만, 일단 내용에 대한 사실 확인은 해보기로 했다. 안기부 보고서의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84년 안기부는 신기수 당시 경남기업 회장을 소환조사했다. 조사가 전방위적으로 진행되면서 박근혜 관련 문제도 나왔다. 신기수는 1979년 박근혜 측근 최태민이 운영하던 구국봉사단의 운영위원이 되어 거액의 운영비를 냈고 10·26 이후엔 박근혜에게 성북동 자택을 지어줬다. 박근혜는 1980년 영남대 재단이사장이 된 뒤 신기수를 영남대 이사로 임명하는 한편 경남기업이 영남대 발주 공사를 맡도록 했다. 신기수는 공사 수주는 성북동 집을 지어준 것과 연관이 있다고 자백했다. 신기수는 인기 여배우 A양과의 관계, 박근혜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조사를 받았다.”



    안기부 조사가 끝난 직후(1984년 상반기) 신기수는 경남기업 경영권을 포기했고(84년 6월), 박근혜는 성북동 집을 매각(84년 5월30일)했다. 안기부 기록은 어디까지가 확인 가능한 진실일까. 안기부 조사와 박근혜 집 매각은 연관성이 있을까. 또한 보다 근본적인 물음도 제기된다. 여권이 갖고 있는 이런 유형의 과거 자료가 장영달 대표의 호언처럼 야당 후보를 날려 보낼 폭발력을 지니고 있을까.

    사실 확인을 위해 6월6일 서울 이태원 자택에서 당사자인 신기수 전 경남기업 회장을 만났다. 신씨는 1984년 박근혜 성북동 자택과 영남대 문제, 여배우 A양과의 관계에 대해 안기부에서 조사받은 사실을 인정했다. 또 구국봉사단 위원으로 활동한 것, 박근혜 이사장 시절 영남대 이사가 된 것, 경남기업이 1980년대 초반 영남대 발주 공사를 맡은 것도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성북동 집과 관련해선 “전두환의 지시로 지어줬다”는 ‘신동아’ 6월호 인터뷰 당시의 주장을 거듭 밝혔다. 성북동 집을 지어준 것과 영남대 공사를 수주한 것은 전혀 관련이 없다고 했다. 안기부에서 자백한 일도 없다고 했다.

    “안기부 직원들 새벽에 들이닥쳐”

    여당 측 주장을 전해들은 신기수의 첫 반응은 “터무니없는 거짓말”이었다. 지난번엔 어렵사리 말문을 연 그였지만 이번에는 인터뷰 요청에 기꺼이 응했다. 그는 지난번보다 건강이 나아 보였다. 하지만 턱 부위의 구강암 수술자국은 여전히 선명했고, 수술로 들어낸 왼쪽 얼굴은 많이 부어 있었다. 발음은 전보다 나았지만 여전히 제대로 알아듣기 힘들었다.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더 필요해 보였다. 현재 독신인 그는 음식물을 씹을 수 없어 죽만 먹고 있으며 오후엔 남산으로 산책을 하고 일주일에 한 번 병원을 찾는다고 했다.

    ‘전두환 안기부’, 박근혜 약혼설과 재산 의혹 수사했다

    신기수 전 경남기업 회장.

    ▼ 기사가 나온 후 여당 관계자는 신 회장을 조사한 안기부 보고서를 제시했다. 거기에는 지난번 신 회장의 증언과는 다른 내용이 들어 있었다(문건 내용을 설명해줌).

    “안기부 보고서라고 하는 것을 믿을 수 없다. 내가 안기부에서 조사를 받은 기간은 3일인가 그랬다. 아니, 그것도 안 되는 짧은 기간이었다. 내 자필 사인이 없는 기록은 인정할 수 없다.”

    ▼ 안기부에서 조사를 받긴 받은 듯한데 언제 조사를 받았나.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기자가 ‘공식적으로 1984년 6월에 경남기업 대표에서 물러난 것으로 되어 있다’고 하자) 그 직전이었다. 어느 날 새벽 4시쯤 안기부 직원들이 집으로 들이닥치더니 나를 남산으로 끌고 갔다. 그들은 방안에 있던 서류들도 다 가지고 갔다. 조사실에 하루 종일 혼자 있게 해 진을 빼놓고는 백지를 주며 진술서를 쓰게 했다. 당시 안기부장은 노신영씨였고, 감찰실장은 최모라는 사람이었다. 나는 이때말고는 안기부는커녕 경찰서에도 한 번 간 일이 없다.”

    ▼ 어떤 내용을 조사받았나.

    “안기부 측은 내가 정치권에 정치자금을 줬는지를 물었다. 그리고 여자관계에 대해 물었다. 당시 근무했던 안기부 직원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 누구에게 정치자금을 줬다는 것인가. 여당인가, 야당인가.

    “나는 정치권에 돈을 준 적이 없다. 그래서 그렇게 진술했다.”

    ▼ 안기부에서 신 회장이 불법 정치자금을 건네줬다는 진술을 확보하고 싶어한 정치인이 누구였나. 당시 여권 실력자 중 한 명이었나.

    “모르겠다. 23년이나 지난 지금 이야기해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당시 정치부 기자를 했던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그 시기 전두환 대통령 주변의 젊은 실력자들 사이에 알력이 많았다. 물론 그것 때문에 내가 당했다는 건 아니다. 솔직히 나는 지금도 그들이 나를 조사한 이유를 모른다.”

    ▼ 신 회장이 안기부 조사를 받은 직후 경남기업은 대우로 넘어갔다. 이에 대해 당시 경제관료였던 인사는 경남기업의 부실이 너무 컸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그건 말이 안 된다. 당시 건설회사치고 경남기업 정도의 부채가 없는 회사는 거의 없었다. 내가 망한 이유를 모르겠다. 정치적 이유가 있었을 거란 추측밖에는.”

    박근혜와의 4가지 접점

    최근 한나라당 경선후보 검증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표에 대해 ‘최태민 목사’ 관련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구국봉사단 회장이던 최태민 목사는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건의로 1978년 박정희 대통령이 친국(親鞫)을 한 후에 명예총재로 물러나 앉았고, 박근혜 대표가 총재에 취임했다.

    최태민 목사가 구국봉사단을 활용해 기업 등을 상대로 여러 부정행위를 했다는 의혹에 대해 박 전 대표는 최 목사를 적극 두둔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박 전 대표는 6월14일자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천벌을 받으려면 무슨 짓을 못 하겠나”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분은 저에게는 고마운 분이다. 그분이 횡령을 했느니 사기를 했느니 하는 얘기가 있는데 실체가 없는 얘기다. 횡령을 당했다는 사람도 없고 사기당한 사람도 없어 법원에서도 문제가 없는데 그런 소리 나오는 게 네거티브다. 천벌을 받으려면 무슨 짓을 못 하느냐는 말도 있는데… 중요한 것은 실체다.”

    그런데 신기수씨는 1970년대 말 구국봉사단 운영위원이었다. 또한 박근혜 대표가 영남대학교 재단인 ‘영남학원’ 이사장에 취임할 때 그도 영남학원 이사가 됐다. 백원우 열린우리당 의원에 따르면 신씨는 박근혜가 이사장으로 있던 육영재단과 정수장학회의 이사도 역임한 것으로 돼 있다. 백 의원의 비서관은 “관련 재단의 자료들을 일일이 확인한 것”이라고 했다.

    이에 따르면 신기수씨는 전두환의 지시로 박근혜 전 대표의 성북동 집을 지어주기 이전부터 박 전 대표와 인연(구국봉사단 운영위원)이 있었던 것이다. 또한 두 사람은 오랜 기간 인연을 이어온 관계였다. ‘박근혜가 있던 곳엔 신기수도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구국봉사단-영남대-육영재단-정수장학회).

    이에 대해 신씨는 “이상하게 볼 일이 아니다. 박근혜 전 대표는 신의를 중시한다. 그래서 한번 믿은 사람을 잘 내치지 않는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일 뿐”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같은 설명에도 단순히 신의만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측면이 적지 않다.

    ‘전두환 안기부’, 박근혜 약혼설과 재산 의혹 수사했다

    한국건업주식회사에서 공사를 하다 경남기업으로 넘어가 논란을 빚고있는 영남대학병원 본과(뒷건물).

    ▼ 신 회장이 1979년에 구국봉사단 운영위원이었다고 하는데.

    “운영위원 명단을 구해서 보면 알 것이다. 김우중 당시 대우 회장, 이명박 당시 현대건설 사장 등 전경련 이사들은 대부분 구국봉사단 운영위원으로 위촉됐다. 나도 당시 전경련 이사였다.”

    ▼ 최태민 목사를 만난 적이 있나?

    “한 번도 없다.”

    “김재규가 훨씬 무서웠다”

    ▼ 최태민 목사가 구국봉사단을 주도했으니 어떤 식으로든 만날 일이 있었을 것 같은데.

    “내가 운영위원이 된 게 1978년 말인가, 1979년인가였다. 그때 최태민 목사는 구국봉사단에서 공식 직함이 없었다.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한창 그를 조사할 무렵이었다. 그런데 누가 감히 김재규의 뜻을 거스르면서 최태민을 만날 수 있었겠나. 생각해보라. 그 당시 김재규가 더 무서웠겠는지 박근혜가 더 무서웠겠는지…. 그런 상황에서 최태민을 만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 구국봉사단에 기부금을 얼마나 냈나.

    “많이 내지는 않았다. 운영위원들이 일괄적으로 얼마씩 내는 정도였다. 일년에 몇백만원에서 많아야 1000만, 2000만원 정도였다. 그나마 1980년대 초 보안사에서 구국봉사단을 해체시켜 더 이상 돈을 낼 일이 없게 됐다.”

    ▼ 박근혜 전 대표와는 언제부터 알고 있었나.

    “구국봉사단 운영위원들이 다 함께 청와대에서 갔을 때 만나서 악수나 하는 정도였다. 개인적으로 만난 적은 없다.”

    ▼ 영남대학교 재단인 ‘영남학원’에 확인한 결과 박근혜 대표가 1980년 5월에 정식으로 재단 이사장에 취임했다. 그 직후인 같은 해 6월에 신 회장도 재단 이사가 됐는데.

    “나 혼자만 이사가 된 게 아니다. 당시 이사진 명단을 확인해보라. 다른 젊은 기업인도 있었다.”

    영남대 재단 역대 이사 명단을 확인한 결과 박근혜 전 대표가 정식으로 이사장으로 취임한 직후 선임된 이사는 7명이었다. 그러나 신씨의 말과는 달리 신씨 외에 다른 기업인은 포함돼 있지 않았다.

    영남대는 1967년 청구대학과 대구대학이 통합해 만들어진 학교로 박정희 전 대통령과 깊은 연관이 있었다. 당시 청구대학 재단은 재단비리, 신축교사 붕괴 등으로 재단이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에 처하자 학교를 박정희 정권에 헌납한 것으로 알려져왔다. 대구대학을 운영하던 이병철 당시 삼성 회장 역시 사카린 밀수 파동이 일어난 후 조건 없이 대학을 헌납했다고 한다.

    이런 사정 때문에 영남대의 이사장과 이사는 박 정권의 실세들로 채워졌다. 1979년 10·26 시점의 이사회 구성을 보면 이효상 전 국회의장이 이사장이고,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 백남억 전 공화당 의장이 이사였다. 다른 이사로는 이인기 영남대 총장, 오일룡, 김준성, 오동수, 이희건 등이었다.

    10·26 이후 영남학원은 몇 차례 이사회가 열린 뒤 1980년 5월 박근혜 대표가 이사장에 취임했다. 같은 해 6월 새로운 이사진이 꾸려졌는데, 이인기 총장을 제외하고는 전부 새로운 인물로 교체됐다.

    청구대학 이사장이던 전기수씨의 4남 재용(성형외과 의사)씨는 지난 6월14일 기자회견에서 “박근혜 전 대표는 1980년 29세의 나이에 오로지 대통령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영남대 이사장에 취임해 온갖 비리를 자행했다”고 주장했다. 전재용씨는 청구대와 대구대의 통합에 대해서도 “강제통합이었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전씨가 주장한 불법자금 편취, 공금횡령, 부정입학, 공사대금 유용, 회계장부 조작 등의 비리의혹 내용은 대부분 1988년 영남대 국정감사에서 제기된 것이다. 박근혜 전 대표의 이사장 재임기간은 6개월 정도로 짧았으며(1980년 5월~11월. 이사 재임 기간은 1980년 3월~1989년 2월), 국감 당시 박 전 대표가 영남대 불법비리 의혹에 관여됐다는 직접적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 신 회장에게 누가 영남대 이사직을 제의했나.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나 다른 권력층의 지시가 있었나.

    “내 기억으로는 박근혜 전 대표가 영남학원 이사장이 된 뒤 영남학원 사무총장에게서 ‘학교를 도와달라’는 전화가 왔다. 사무총장은 여성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는 나뿐 아니라 여러 젊은 기업인들에게 이사가 돼달라고 부탁했다.”

    ‘전두환 안기부’, 박근혜 약혼설과 재산 의혹 수사했다

    박근혜 전 대표가 살았던 성북동 집.

    ▼ 신군부의 지시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박근혜 전 대표와 각별한 인연도 없었다면서 단지 영남대와 박근혜 전 대표를 돕기 위해 이사가 됐다는 것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건 나를 몰라서 하는 말이다. 나는 의협심이 강한 사람이다. 그때 나는 젊었다. 어려움에 처한 박근혜 전 대표를 도와주는 게 인간적인 도리라고 생각했다. 인정머리 없이 거절하는 건 사람의 도리가 아니지 않은가.”

    병원 시공, 경남기업으로 변경

    ▼ 신 회장의 영남대 재단이사 재임(1980년 6월~1983년 8월) 무렵 영남대에서는 학교 건물을 많이 지었다. 안기부 보고서에 따르면 경남기업에서 이때 큰 공사를 여러 건 수주한 것으로 돼 있다.

    “1980년 초에 남자기숙사 한 동 지어준 것이 전부다. 그것도 공사비를 5년 후에 받는 조건이었다. 학교에서 기록을 찾아보면 알 것이다. 그리고 영남대학 부속병원 본관을 지었는데, 내가 이사가 되기 전에 공개입찰을 통해 수주한 것이다. 경남기업은 당시 대구에 아파트를 가장 많이 지었다.”

    영남대 측에 1980년대 초 학교건물 건축현황을 문의했다. 1980년부터 84년 말까지 이 대학에선 남자기숙사(현재 생활관 A동)와 병원 외에 상경관, 제2과학관, 자원대 제2실험동 등 10여 개의 크고 작은 대학건물이 들어섰다. 그러나 어느 건설업체가 이 건물들의 공사를 맡았는지에 대해선 문서보존기한이 지나 확인이 불가능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경남기업이 맡았다는 남자기숙사 건물은 지상 3층, 연면적 800여 평으로, 대형 공사는 아니었다. 그러나 현재 대구시 남구 대명동에 위치한 영남대 병원의 신축은 당시로서는 상당한 규모의 사업이었다.

    1997년 발간된 ‘영남대학교 50년사’에 따르면 1978년 10월 정부로부터 의과대학과 병원설립 허가를 받은 영남대학교는 60억원의 예산을 들여 1979년 8월 대구 대명동에 지하 3층, 지상 13층, 연건평 1만2793평 규모의 병원을 짓기 시작했다. 이때 시공업체는 ‘한국건업주식회사’였다.

    순조롭게 진행되던 공사는 한국건업이 골조공사를 마쳤을 무렵인 1980년 11월말 영남대 재단 이사진 개편, 총장 경질 등을 이유로 중단됐다. 공사는 1년여 후인 1981년 10월 재개됐는데, 이때 시공업체가 경남기업으로 변경됐다. 이 공사를 영남학원 이사가 되기 전에 공개입찰로 수주했다는 신씨의 해명과는 다른 내용이다. 1981년 10월 당시 박근혜 전 대표와 신기수씨는 영남대 재단 이사였다.

    대형 건축물 공사에서의 시공업체 변경은 빈번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이례적으로 볼 일도 아니라고 한다. 영남대 측에 따르면 최초의 병원 시공업체가 교체된 이유, 경남기업이 공사를 이어받게 된 이유는 현재로선 입증하기 어렵다고 한다. 병원은 1983년 2월 준공됐다.

    1980년대 초 영남대 보직교수이던 L교수는 “당시 대학 측이 사회관을 짓기 위해 공개입찰을 하겠다고 하자 대구 지역 건설업체들이 ‘어차피 경남기업이 될 것 아니냐’고 해 ‘절대 그렇지 않으니까 참여하라’고 설득했는데도 결국 응찰에 참여하지 않은 일이 있다. 경남기업이 80년대 초 영남대 공사를 많이 수주했다. 당시 지어진 큰 건물의 절반 이상은 경남기업이 지은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영남대의 다른 관계자는 “1980년대 초 재단 이사가 시공사 변경에 실질적 권한을 행사했는지 여부는 현재로선 알 길이 없다. 공사 수주와 관련된 비리 의혹은 없었던 것으로 안다”고 했다.

    이같은 증언에 따르면, 영남대와 경남기업의 관계는 논란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그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영남대 병원 수주 문제와 관련, 신기수씨에게 공세적으로 질문을 던져봤다.

    ▼ 안기부 보고서엔 경남기업이 박근혜 전 대표의 성북동 집을 지어준 것과 경남기업이 영남대 병원 등 학교 건물 공사를 수주한 것 사이에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돼 있다. 신축주택이던 성북동 주택의 소유권 변동(신기수→박근혜) 시점이 1982년 8월25일이다. 성북동 집의 착공-준공은 1980년~82년쯤이 될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성북동 집의 착공-준공-소유권 이전 시점은 신 회장이 박근혜 이사장 재임시절 영남대 이사가 된 시점(80년 6월), 경남기업이 영남대 병원 시공사가 된 시점(81년 10월)과 비슷하다. 이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겠나.

    “박 전 대표의 성북동 집 가격이 얼마나 된다고 내가 영남대 병원 공사를 달라고 요구했겠나. 성북동 집이 있던 일대는 원래 대한교육보험(지금의 교보생명) 소유여서 흔히 ‘대교단지’라고 불렸다. 대한교육보험에서 그 땅을 등기 분할해 팔았는데 분양이 잘 안 됐다. 그래서 경남기업이 일괄적으로 고급주택을 지어 팔았다. 박 전 대표 집도 그중 하나였다.”

    ‘전두환 안기부’, 박근혜 약혼설과 재산 의혹 수사했다

    경남기업이 만든 영남대학교 기숙사 A동.

    ▼ 수사 보고서에는 신 회장이 성북동 집과 영남대 공사의 연관성에 대해 자백을 한 것으로 돼 있는데….

    “말이 안 되는 얘기다. 안기부는 그 문제에 대해선 관심 자체가 없었다. 전두환 정권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자 당시엔 아무런 힘도 없던 박근혜 전 대표의 재산 문제를 낱낱이 뒤진다는 게 말이 되는가. 나는 안기부에서 그런 자백을 한 바 없다. 병원 등 영남대 공사는 합법적으로 수주했고 대학에 봉사한다는 차원에서 최선을 다해 잘 지어줬다. 영남대 측도 이런 점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전혀 문제될 일이 없다. 안기부는 나를 상대로 정치자금 제공 문제, 여자 문제를 주로 수사했다.”

    ▼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은 ‘박근혜가 살 집을 지으라’는 지시를 신 회장에게 직접 한 것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을 통해 전달한 것인가.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잘 안 난다. 그리고 ‘지시’라기보다는 ‘그랬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내게 보내온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집을 짓기 시작했다.”

    “집값 누가 냈는지 모른다”

    ▼ 박근혜 전 대표 측에서는 ‘신동아’ 6월호에 실린 신 회장의 증언(경남기업이 전두환의 지시로 박근혜 집을 지어줬다)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 바 있는데….

    “당시 박 전 대표 쪽으로부터 ‘집을 지어달라’는 이야기를 들은 바 없다. 전두환 사령관 측으로부터 그런 의견을 들은 것이 분명하다.”

    ▼ 전두환 사령관이 여러 건설사 CEO 중 유독 신 회장을 지목해 집을 지으라고 한 것은 그만큼 두 사람이 가까운 사이여서인가.

    “그렇지는 않다. 전두환 사령관과는 사적으로 만난 적이 없다. 그가 1사단장이었을 때 경남기업이 1사단 관할 건축물을 공사한 적이 있어 공식석상에서 한 번 봤을 뿐이다. 하지만 당시 나는 잘 나가는 건설회사 대표였으니까 그가 나를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경남기업은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건설사였다. 한때 6위까지 올랐다. 더욱이 내가 박근혜 전 대표의 구국봉사단 운영위원이었고 하니까 내게 부탁한 것 같다.”

    ▼ 전두환 사령관의 의견을 접한 것은 영남대 이사가 되고 난 이후였나.

    “그 이전으로 추측된다. 이사가 됐을 때 이미 그 집을 짓고 있었다.”

    ▼ 재단 이사가 된 게 1980년 6월이다. 그때 이미 집을 짓고 있었다면 적어도 1981년엔 집이 완공됐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소유권이 박 전 대표에게 넘어온 게 1982년 8월이다. 소유권을 넘기기 전부터 박 전 대표가 그 집에 살았나.

    “모르겠다.”

    ▼ 집이 완공된 게 정확히 언제인가.

    “정확히 언제 완공됐고, 박 전 대표가 언제부터 살았는지 기억에 없다.”

    ▼ 박근혜 전 대표는 성북동 자택 집값을 경남기업 측에 지급했나.

    “집값을 누가 냈는지, 얼마나 냈는지 알지 못한다. 돈을 받고 하는 건 직원들이 할 일이지 내가 기억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 당시 성북동의 그 주택들은 얼마 안 했다. 그 무렵 경남기업이 지은 50평형 아파트가 2500만원인가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 집값을 받은 건 확실한가.

    “기억이 안 난다. 경남기업 창고에 가서 뒤져보면 영수증이 나올 것이다.”

    안기부 보고서에 따르면 신기수씨는 안기부에서 여자 문제로도 조사를 받았다. 당시 신씨는 독신이었다. 안기부가 왜 독신자의 사생활에 불과한 여자 문제를 집중적으로 캤는지는 의문이다. ‘안기부 조사 직후 신기수가 경남기업을 뺏기게 된 것은 여자 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 아닌가’라는 의문도 나올 수 있는 대목이다.

    ▼ 신 회장은 안기부에서 여자관계에 대해서도 조사를 받았는데, 인기 여배우였던 A양과의 소문을 말하는 것인가.

    “A양과는 ‘그냥 사귀는’ 정도였다. 나는 젊은 독신 사업가여서 따르는 인기 여배우가 많았다.”

    ▼ 여배우 A양은 당시 권력자와도 소문이 있었다. A양과 사귀면서 후환이 두렵지 않았나?

    “그땐 젊었으니까(웃음).”

    ▼ 안기부 수사를 받게 된 것이나 경남기업을 빼앗긴 것은 여배우 A양과의 관계가 원인 중 하나였을 것으로 보나.

    “모르겠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

    “약혼설 나온 뒤 박근혜 집에 안 가”

    ▼ 당시 세간엔 신 회장과 박근혜 전 대표와의 약혼설이 떠돌았다. 알고 있었나?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이 아니었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뜬소문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거라 생각했다.”

    박근혜 전 대표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안기부의 조사가 있었는지 여부에 대해 신씨는 기침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내가 좀 피곤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그 부분에 대해서도 안기부 조사를 받은 사실을 인정했다.

    ▼ 박 전 대표 자택에 하자가 발생하면 신 회장이 직접 갔다고 했는데….

    “기술자들과 함께 갔다. 그들에게 지시를 내리거나 차를 마시는 정도였겠지 뭐. 그러다 소문(박 전 대표와의 약혼설)을 접하게 된 뒤로부터는 박 전 대표 자택에 전혀 출입하지 않았다.”

    박 전 대표 자택에 하자가 발생했을 때 기술자만 보낸 게 아니라 건설회사 사장인 신씨가 직접 들락거렸다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 안기부에서 그런 내용도 다 조사했나?

    “안기부에서 A양과는 단순히 교제하는 사이였고, 박근혜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정도의 진술서를 썼다.”

    신씨의 증언과 ‘신동아’의 취재에 따르면 그가 경남기업을 뺏긴 것은 시점상 안기부 수사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안기부 수사 내용 중 어느 요소가 신씨의 경영권 상실에 직접적 영향을 줬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신씨가 정권이 원치 않았던 특정 정치인을 지원한 의혹, 여배우와의 관계에 대한 규명이 수사의 주목적이었을 수 있다. 신씨는 ‘정치적 이유에서 기업을 잃었다’고 믿고 있는데, 이 두 가지 의혹은 당시 정권이 관심을 가질 만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일부에선 미국산 군수용품 수입을 둘러싼 로비에 신씨가 연루됐다는 의혹이 안기부 수사 착수의 배경이었다는 얘기도 있으나 신씨는 이를 강하게 부인했다.

    어느 경우든 이번 대선의 쟁점이 될 수 있는 박근혜 전 대표 재산 의혹은 1984년 안기부 수사에서 일부 다뤄지긴 했는지 모르나, 수사의 포커스는 아니었던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전두환 정권이 아무런 힘도 없는 박근혜의 얼마 되지 않는 재산을 철저하게 뒤져 자백까지 받아낼 이유가 없다”는 신씨의 증언이 논리적으로 합당한 측면도 있다.

    전두환은 박정희 정권 시절 청와대 경호실에 근무하면서 박근혜 전 대표와 친분이 있었고, 박정희 사후 청와대 집무실 금고에 있던 박정희의 통치자금 9억원을 박 전 대표에게 유자녀 생계비로 준 것(이중 3억원은 박근혜가 김재규 수사격려금으로 되돌려줌)으로 알려져 있다(‘박근혜 53년 인생 이야기’ 등 각종 저서 기록).

    ‘과거 자료’의 가치와 한계

    여당 인사가 제시한 안기부 보고서는 신기수씨의 진술서가 아닌, 수사결과를 정리한 형식이다. 이 보고서는 박근혜-신기수를 둘러싼 ‘사실의 편린들’을 처음으로 보여준 가치는 있었다. 흥미를 끌 만한 내용도 있었다. 유력 대선주자의 모든 것이 까발려지는 한국 대선의 속성을 드러낸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본질적 문제인 ‘사실들 간의 관계성(성북동 집 건축과 영남대 공사 수주의 대가관계 등)’은 입증이 어려운 것으로 나타났다. 당사자인 신씨가 대가성을 강하게 부인하는데다 ‘신기수가 자백을 했다’는 부분의 신빙성도 의심되기 때문이다. 신씨의 거듭된 주장대로, 전두환의 의견 제시에 따라 성북동 집을 지어준 것이 사실이라면 성북동 집과 영남대 병원 공사 수주와의 연관성은 더욱 멀어진다.

    대선주자에 대한 ‘과거 자료’는 장영달 대표의 호언과는 달리 판결문, 공소장 등 공식 기록이 아닌 이상 검증 자료로서의 가치는 떨어질 수 있다. 공격하는 측은 자신에게 유리한 일부의 사실만 부각해 상대 후보에게 부정의혹을 뒤집어씌우는 데 ‘과거 자료’를 활용할 여지도 있어 보였다. ‘사후 가공’의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성북동 집과 영남대 병원과의 관계, 전경련 이사들의 구국봉사단 운영위원 참여, 신기수 씨의 영남학원 이사 선임 이유 등에 대해 ‘신동아’는 박근혜 전 대표의 답변을 듣기 위해 서면으로 질의를 보냈다. 이에 대해 박 전 대표 측 최원영 특보는 “성북동 자택 문제, 구국봉사단 문제 등에 대해선 이미 언론에 밝힌 것 외에는 더 이상 박 전 대표가 특별히 할 이야기가 없다”고 공식적으로 알려왔다.

    그러나 여당 측이 성북동 집, 영남대 등에 주목하면서 자료를 축적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난 이상, 대선 국면이 좀더 본격화되면 박근혜 전 대표는 이 논란의 사실관계(성북동 집의 매입경위 등)에 대해 분명하게 밝히고 넘어가라는 요구에 직면할 것으로 보인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