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7월호

자칭 ‘비주류 의리파’ 홍준표

이명박 배신감에 며칠간 통음… ‘운하 무너뜨리기’ 선봉으로

  • 이동훈 한국일보 정치부 기자 dhl3457@naver.com

    입력2007-07-10 12: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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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준표의 ‘이명박 공격’이 매섭다. 홍준표가 한나라당 경선에 뛰어든 것 자체가 ‘이명박 수도권 표’를 잠식하는 것이다. 한때 ‘호형호제’하던 두 사람의 관계가 왜 이렇게 됐을까.
    자칭 ‘비주류 의리파’ 홍준표
    5월27일 서울 강서구 염창동 한나라당 당사를 찾은 홍준표(洪準杓·53) 의원의 얼굴은 꽤나 상기돼 있었다. 대통령후보 경선전 출마를 선언하기 위해 그는 오랜만에 당사를 찾은 참이었다.

    그의 출마선언문은 “오랜 번민과 고뇌의 시간을 거쳐 마침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지난 몇 달간은 제 삶에 있어 가장 힘든 기간이었습니다. 수많은 밤을 불면으로 지새웠고, 참으로 많은 지인과 국민들을 만났습니다”라고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지난 삶을 이렇게 요약했다.

    “정치에 몸담은 지 10여 년. 어느덧 3선의 중진이 되었습니다. 1972년 2월24일 새벽, 단돈 1만4000원 달랑 들고 서울역에 내린 산골 소년이 이제 이 땅의 책임 있는 정치인이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룰 만큼 이루었습니다. 검사 시절에는 사법정의 실현을 위해 거악(巨惡) 척결에 앞장섰고, 15대 16대 국회의원 시절에는 권력형 비리를 색출하기 위해 ‘저격수’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도 감수했습니다. 2004년 4월, ‘탄핵 광풍’을 뚫고 서울 동북부 17개 선거구 중에서 한나라당 후보로는 유일하게 당선되고 나서부터 한나라당의 울타리를 넘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제 할 일이 무엇인지 깊은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이 시점, 국민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읽고자 노력했습니다.”

    이명박의 ‘원조 측근’

    홍준표의 출마를 보는 당 안팎 시각은 크게 두 가지로 갈렸다. “당내 경선에 활력소가 될 것”이란 긍정론이 있고, “돈키호테는 어쩔 수 없다”는 부정적 시각도 있다. 팽팽히 맞선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박근혜 전 대표측의 반응도 달랐다. 전자는 불쾌해했고 후자는 그의 출마를 내심 반겼다.



    그의 최근 정치적 궤적을 되짚어보자. 2006년 초까지만 해도 그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측근 중의 측근이었다. 한나라당 의원 가운데 홍준표만큼 이명박과 인간적 유대를 맺고 있던 이도 없었다. 이명박에 대한 충성도 대단했다고 한다. 그는 ‘원조(元祖)’ 측근이었다.

    그러던 그는 2006년 서울시장 경선을 거치면서 이명박과 결별했다. 올해 초엔 박근혜 전 대표로부터 경선 캠프 본부장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박근혜 캠프의 상당수 인사는 그를 영입하기 위해 발 벗고 뛰었다. 박근혜 캠프에서 홍준표를 영입한다는 것은 단순히 의원 한 명을 영입하는 의미 이상이었다.

    그 역시 그 제의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했다. 물론 이 전 시장측은 홍준표가 끝내는 자기들에게 돌아올 것으로 믿었다. 홍준표의 선택은 한동안 언론의 관심사였다.

    하지만 홍준표는 어느 쪽으로도 가지 않았다. 자신이 직접 출마하는, 다소 의외의 결론을 내린다. 그는 왜 스스로의 표현대로 번민과 고뇌 끝에 출마를 결심한 걸까.

    홍준표의 삶을 관통하는 큰 명제가 하나 있다. 그가 입버릇처럼 얘기하는 “나는 잃을 것이 없다”다. 이 말은 그의 뱃심과 근성을 상징한다. 배수진이자 자신감이기도 하다.

    그는 경남 창녕의 가난한 집 막내아들이었다. 그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평생을 한량으로 보낸 무능력한 가장이었다. 홍준표는 국민학교만 5군데를 옮겨 다녔다. 막노동으로 먹고살기 위해 창녕, 울산, 합천, 대구를 유랑하는 아버지를 따라다니다 보니 그랬다.

    장학금 준다는 곳이면 ‘똥통학교’도 마다하지 않았다. 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돈이 많이 든다”는 아버지의 반대로 육군사관학교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도난 비료를 배급받았다가 경찰에 잡혀가 곤욕을 치르는 사건을 겪으면서 사법고시로 방향을 전환했다. 이어 홍준표는 ‘1만4000원’을 들고 상경한다. 그는 가난했고, 왜소했고, 볼품없었다.

    “영남고 나왔습니다”

    자칭 ‘비주류 의리파’ 홍준표

    2006년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 나선 오세훈, 맹형규, 홍준표 후보.

    가진 것 없던 고대 법대생 홍준표를 상징하는 사건이 있었다. 첫 미팅을 하게 됐다. 파트너는 대구 출신이었다. 경북여고를 나온 학생이었다. 그녀는 대구 출신이라는 홍준표에게 자연스럽게 “경고(경북고) 몇 회세요?”라고 물었다. “영남고를 나왔다”는 말에 그 여학생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고 돌아오지 않았다.

    잃어봐야 본전이라는 생각은 그를 늘 비주류로 만들었다. 검사와 국회의원 등 주류가 됐지만 그는 자신을 비주류로 생각한다. 홍준표는 검사 시절을 곧잘 회고한다. 정덕진 박철언을 잡고, 이건개를 치던 무용담 늘어놓기를 좋아한다. 술을 잘 못하는 그는 술 한잔만 들어가면 늘 그 이야기를 반복한다.

    “박철언 전 장관이 잘나가던 시절에 언젠가 우연히 만나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박 전 장관이 나더러 ‘홍 검사 어느 고교 출신이요’라고 묻더라. 내가 ‘영남고 나왔다’고 했더니 박 전 장관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거기 나와도 사시가 되냐’고 하더라. 속으로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너 이놈 한번 두고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검사 시절 엘리트 코스를 밟지 못했다. 대신 그는 검찰 주류의 심장부를 향해 거침없이 칼을 휘둘렀다. 그것이 ‘모래시계 검사’ 홍준표를 만들었다. 그의 수사는 조직과의 투쟁 과정이었다. 그는 그 투쟁을 위해 언론을 이용할 줄 알았다. 조직이 반대하는 수사는 언론에 먼저 흘렸다. 그래서 수사를 기정사실화했고, 윗선은 그에게 수사 중단 압박을 가하지 못했다. 그는 당시 인연을 맺은 기자들과 지금도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홍준표는 골프를 좋아하는데 자세가 독특하다. 스윙을 할 때 폴짝 뛴다. 그래서 ‘개구리 폼’이라고 불린다. 그런 자세로 과연 공이 맞을까 싶다. 그가 티샷을 하면 그런 스윙을 처음 본 동반자들이 키득거릴 때가 많다. 그러나 의외로 공은 잘 날아간다. 더욱이 그는 쇼트게임만큼은 프로 골퍼 못지않은 수준이다.

    그는 골프를 순전히 독학으로 배웠다. 광주지검에 있을 때 골프 연습장을 찾은 홍준표에게 레슨 프로가 ‘똑딱이’를 시켰다. 공을 톡톡 맞히는 연습만 시킨 것이다. 홍준표는 짜증이 났다. 옆 좌석에선 몇몇이 공을 시원하게 치고 있었다. 자존심도 상했다. 몇 분간 똑딱이를 하던 그도 덩달아 후려대기 시작했다. 레슨 프로가 황급히 뛰어와 “뭐하는 거냐, 왜 시킨 대로 안 하냐”고 고함을 질렀다. 홍준표는 “어디서 큰소리냐, 오늘 연습한 비용 빼고 내가 낸 돈 돌려달라. 나 안 다닌다”고 했다. 홍준표의 골프 레슨은 그렇게 끝났다. 홍준표는 귀가 길에 골프 레슨 비디오테이프를 샀다. 그의 스윙 자세는 혼자 비디오를 보면서 연구를 거듭한 결과물이다.

    1999년 5월. 정권이 넘어간 뒤였다. 정치 입문 이래 ‘DJ 저격수’를 자처했던 그를 DJ 정권은 선거법 위반 혐의를 걸어 ‘저격’했다. 의원직을 스스로 그만둔 그는 무작정 방미 길에 오른다. 처음 가는 미국이었다. 더욱이 더 이상 의원도 아닌 백수 신분이었다. 그는 영어회화에 자신이 없었다. 당장 미국에 도착해 세관을 통과할 일도 막막했다. 그는 ‘민병철 생활영어’의 ‘세관’ 파트를 열심히 외며 미국에 도착했다.

    두려움과 긴장 속에 워싱턴 덜레스 공항에 내렸을 때 그의 눈에 낯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이명박이었다. 연락도 하지 않았는데 마중 나온 것이다.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고 한다. 이명박도 선거법 위반 혐의로 의원직을 사퇴하고 미국에 체류하고 있었다.

    워싱턴 공항의 반가운 얼굴

    홍준표는 국회에 입문한 이래 대학 선배인 이명박과 곧잘 어울렸다. 자신과 비슷한 ‘개천’출신이란 점이 끌렸다고 했다. 그는 그때부터 이명박을 ‘형님’이라 불렀다. 1996년 가을 선거법 위반으로 이명박이 위기에 몰렸다. 그가 구속될 것이란 설도 파다했다. 이때 앞장서 이 전 시장을 변호하고 나선 것이 홍준표였다. 국정감사가 한창이던 과천 정부종합청사의 잔디광장으로 홍준표는 신한국당 사무총장 강삼재 의원을 불러냈다.

    “이명박 의원을 건드리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제가 검사 시절에 YS 대선 자금을 들여다본 적이 있습니다. 이걸 터뜨릴 수 있습니다.”

    이런 인간적 인연으로 따지면 지금의 그 누구보다 홍준표는 이명박의 측근이었다. 그런데 왜 홍준표와 이명박은 멀어졌을까. 홍준표는 이를 ‘이명박의 배신 때문’이라고 말한다.

    홍준표는 자칭 ‘의리파’다. 배신을 죽기보다 싫어한다. 좌충우돌형이지만 한번 인연 맺은 사람은 철저히 챙긴다. 2004년 초 최병렬 대표체제가 무너질 때 몇 안 되는 최 대표 사수파 중 한 명이 홍준표였다.

    최병렬 당시 대표는 2003년 대선자금 수사가 본격화하면서 위기에 봉착한다. ‘차떼기 정당’이란 오명이 붙기 시작했다. 최병렬은 난국 타개를 위해 재선 3인방을 전면에 배치한다. 이재오가 사무총장, 홍준표가 전략기획위원장, 김문수가 인재영입위원장을 맡았다. 그때부터 이듬해 최 대표가 물러날 때까지 홍 의원은 최 대표의 최측근이었고, 한나라당의 실세였다. 홍준표는 17대 공천심사위원을 맡으면서 공천도 좌지우지했다. 정치 입문 이래 주류를 경험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전에 그는 변변한 당직을 맡지 못했다. YS 때도 그랬고 이회창 전 총재 때도 그랬다. 누구도 좌충우돌하는 그를 신임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재오는 최 대표와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이후엔 최 대표 체제를 무너뜨리는 데 앞장섰다. 공천심사위원장을 맡았던 김문수도 최 대표 체제 수호에 소극적이었고 이후 최 대표 공천 배제를 공식 선언하면서 그를 무너뜨리는 데 일조한다. 최 대표 체제가 위기에 봉착해 있던 2004년 2월21일, 홍준표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 최병렬 대표 곁에 아무도 없다. 최 대표 체제를 떠받치던 이재오도 최 대표를 쫓아내는 데 앞장섰고, 최 대표가 향후 대통령감이라고 칭찬하면서 아꼈던 남경필, 오세훈, 원희룡도 최 대표의 등에 칼을 꽂았다. 또 최 대표 체제에서 대변인으로 명성을 날리던 박진도 칼을 꽂았고, 최고 참모였던 윤여준도 최 대표 퇴진에 가세했다. 이것이 정치적 대의라면 용납하겠지만 정치적 대의라고 보기는 어려운 구석이 많다.”

    그는 끝까지 최병렬의 곁을 지켰다. 지금도 홍준표는 최병렬과 수시로 연락한다. 자신을 알아준 최병렬에 대한 인간적 의리를 다하려고도 한다.

    그런 그가 인간적 배신으로 치를 떤 게 2006년 서울시장 경선 때였다. 홍준표는 당시 이명박의 지원을 암묵적으로 약속 받고 경선전에 뛰어든다. 박근혜 대표의 지지를 받는 맹형규 의원에 비하면 그는 출발도 늦었고 준비도 부족했다. 그가 믿었던 것은 이명박의 지원이었다.

    “나를 밀 수밖에 없다”

    그 무렵 홍준표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차기 서울시장이 누가 되느냐는 이명박 시장의 대권 행보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여당 후보가 시장이 되는 것은 최악의 상황이다. 한나라당 후보가 되더라도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당선시켜야 한다. 따라서 이 시장은 나를 밀 수밖에 없다.”

    이명박이 자신을 지원할 것이라는 홍준표의 믿음은 굳건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 후보로 강금실 전 장관이 급부상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경쟁을 벌이던 맹형규, 홍준표 후보 모두 강 전 장관보다 지지율이 뒤처졌다. 그때 한나라당에서 오세훈 전 의원이 대안으로 급부상한다. 이명박은 당내 경선을 앞두고 오세훈 전 의원 지지로 돌아선다.

    이런 분위기가 곳곳에서 감지됐지만 홍준표는 당최 믿으려 들지 않았다. ‘이 시장이 오 전 의원 지지로 돌아섰다’는 보고가 올라오면 손사래를 쳤다.“두고 봐라. 결국 이 시장은 나를 지원할 것이다.”

    “닭 쫓던 개 꼴”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이 열린 당일, 체육관은 맹형규와 오세훈 양강전으로 이미 분위기가 잡혀 있었다. 홍준표는 믿었던 이 시장이 오세훈을 후보로 밀고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실감했다.

    “닭 쫓던 개 꼴.” 홍준표는 당시의 참담함을 그렇게 표현했다. 술을 못하는 그는 인간적 배신감 때문에 며칠간 통음(痛飮)했다.

    그는 한동안 이명박을 만나지 않았다. 만나자는 연락이 오면 피했다. 그러던 그는 2006년 말 이명박을 만났다. 그는 이명박에게 “형님의 정치적 선택을 존중한다”고만 했다. 그는 이번 대선출마 선언이 이명박에 대한 섭섭한 감정의 표출이 아니냐는 질문을 받으면 이렇게 답한다.

    “오세훈 시장을 도운 것은 이 전 시장의 정치적 선택이다. 대선으로 가는 길목에서 나를 지지하는 것보다 더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경선 참여는 나의 정치적 선택이다. 한나라당 경선을 더욱 흥미롭고 다이내믹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대선후보 경선 참여는 서울시장 선거와는 무관하다.”

    박근혜 캠프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선 “내가 박 전 대표 캠프로 가면 이 전 시장 공격의 선봉에 서야 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나. 나는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홍준표는 대선후보 경선에서도 단기필마(單騎匹馬)로 나섰다. 그는 경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1993년 슬롯머신 사건을 맡아 단기필마로 싸울 때도 사람들은 나를 돈키호테라고 했지만 결국 이겼다.”

    5월29일 한나라당 경선후보 정책토론회에서 홍준표는 ‘한반도 대운하’ 등 이명박의 공약에 대해 맹공을 퍼부었다.

    “길이 18㎞의 경인운하도 10조8000억원을 들여 15년간 추진하다 환경단체의 반대로 무산됐는데 530㎞가 넘고 14조원이 드는 경부운하가 되겠는가” “청계천은 환경복원이지만 대운하는 환경파괴인데, 시민단체의 반대에도 실현 가능하겠는가” “운하에서 배가 충돌해 취수장 앞에서 침몰하면 부산과 대구 시민은 두 달간 생수만 먹어야 한다”….

    6월28일 정책토론회에서는 “1년에 신혼부부가 25만6000쌍이나 나온다. 이명박 전 시장의 신혼부부 주택공급 공약은 정밀하게 계획된 공약이 아니라 노무현 대통령의 행정수도 이전 공약처럼 무대뽀(막무가내) 공약이다”고 쏘아붙였다.

    홍준표는 5월29일 정책토론회에서 후보간 1대 1 질의응답 방식을 스스로 도입하면서 이명박을 압박했다. 이명박이 “운하는 오히려 근본적 수질대책”이라고 해명하자 홍준표는 곧바로 “내가 (국회) 환경노동위원장으로 수질관리위원장이다. 흐르는 강물도 1급수로 만드는 게 쉽지 않은데, 물을 가둬놓고 1급수로 만들겠다는 발상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몰아붙였다.

    그러나 홍준표는 BBK 의혹에 대해선 “이명박 전 시장은 피해자”일 뿐이라며 이명박을 두둔했다.

    “홍준표 뜨면 이명박 불리”

    홍준표는 이번 경선에서 ‘성공’할 것인가. 한국사회여론연구소 한귀영 연구실장은 이렇게 분석했다.

    “6월 중순에도 홍준표 효과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홍준표 의원이 출마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대선후보 홍준표’는 유권자에게 별로 각인되지 않았다. 홍준표 의원에 대한 관전 포인트는 지지층이 겹치는 이명박 전 시장의 지지층을 얼마나 잠식할지 여부다. 홍 의원은 한나라당 내에 존재하는 중도개혁적 포지션을 가지고 대중의 감성을 파고드는 데 능하다. 경선 막바지엔 이 전 시장의 지지층을 어느 정도 잠식할 가능성이 있다.”

    다음은 정치 컨설턴트 박성민씨의 전망이다.

    “군소 후보들 간의 단일화 여부가 중요하다. 홍 의원으로 단일화된다면 홍 의원이 자연스럽게 중간자 효과를 누릴 수 있다. 이명박 전 시장과 박근혜 전 대표 사이의 중간자로서 개혁과 보수를 넘나들면 수혜를 입을 가능성이 있다.”

    홍준표는 경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지지율 5%가 1차 목표”라고 했다. “종국에는 10%에 도전하겠다”고 했다. 현실성이 있는 이야기일까. 그를 대선 주자에 포함시킨 여론조사는 그가 아직 멀었다는 결과를 보여준다.

    어차피 그의 목표는 2007년이 아닌 2012년이다. 이번 출마의 목표는 당내에서 힘과 지분을 충분히 확보하는 것이다. 이번 경선전에서 지더라도 선전할 경우 그는 차세대 리더 경쟁에서도 한걸음 앞서게 된다. 대신 박근혜와 박빙의 승부를 벌여야 하는 이명박에겐 홍준표의 부상이 부담스러운 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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