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7월호

경의선 제7호 특급열차 뭉칫돈 도난사건

달리는 열차, 철통 보안 뚫고 벌어진 희대의 ‘완전범죄’

  •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입력2007-07-05 17: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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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식산은행 경성 본점에서 평북 선천지점으로 보내는 거금 2만원이 달리는 열차 위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두 명의 경비원이 화물차에 동승했지만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금고 안의 많은 소하물 가운데 표시도 없는 현금주머니 하나만을 콕 집어 꺼내간 범인의 완벽한 솜씨는 식민지 조선의 경찰력을 철저하게 농락했다. 그리고 7년 뒤, 세월의 흐름에 묻혔던 비밀이 하나씩 드러나지만 그 결과는 뜻하지 않은 곳을 향해 치닫는데….
    경의선 제7호 특급열차 뭉칫돈 도난사건

    ‘신여성’ 1934년 4월호에 실린 ‘미궁의 열차도난 2만원 사건’ 기사와 당시의 경성역 전경.

    1930년 10월7일, 추석 이튿날의 경성역은 온종일 북적거렸다. 일본의 추석에 해당하는 오봉(お盆)은 양력 8월15일 전후여서, 조선의 추석은 공식적으로 명절도 휴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강제합방 20년이 지났어도 조선인에게 추석은 설날과 함께 여전히 최대의 명절이었다. 경성역은 명절을 쇠고 돌아온 귀경객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업무차 경성역에 나온 식산은행 본점 직원 정창섭은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귀경객들과 마주하자 자신의 처지가 더 초라하게 느껴졌다. 관청에서 설날과 추석을 쇠지 말라고 아무리 강요해도 시골에서 농사를 짓거나 도시에서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은 하루 이틀 쉬면서 명절을 쇠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직장인들은 조선의 세시풍속을 억제하는 총독부 정책 탓에 명절날만큼은 월차조차 낼 수 없었다. 은행원으로 일한 10년 동안 온전히 명절을 쇤 적은 일요일이던 1929년 설날 단 한 차례뿐이었다. 명절이 반공일(半空日, 토요일)이던 다섯 차례를 제외하면, 명절날 새벽 부랴부랴 차례를 지낸 후 서둘러 출근해 평소와 다름없이 업무를 봐야 했다.

    명절 기분에 젖을 겨를도 없이, 정창섭은 주위를 경계하며 서둘러 소하물계로 들어갔다. 역이 붐빌수록 사고가 발생할 위험이 컸다. 정창섭은 경성역 소하물 담당 역무원 마쓰시타에게 다가가 지니고 온 가방을 풀었다. 가방 속에는 식산은행 본점에서 평안북도 선천지점으로 보내는 빳빳한 10원짜리 지폐 2000매가 들어 있었다. 당시 돈 2만원은 경성시내 고급주택 두 채를 살 수 있는 거금이었다.

    마쓰시타가 현금 확인을 끝내자 정창섭은 돈다발을 창호지로 한 겹 싸고 두꺼운 장지(壯紙)로 또 한 겹 싸고 기름종이로 감싼 후 헝겊주머니에 넣어 단단히 동여맸다. 겉면에는 수취인 주소와 중량만 표시된 ‘귀중품’ 딱지를 붙였다. 귀중품 딱지에 내용물이 무엇인지 표기하지 않았으므로 정창섭과 마쓰시타 외에는 헝겊주머니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마쓰시타는 정창섭에게 영수증을 끊어준 후 돈주머니를 들고 사무실을 나왔다. 이런 부담스러운 소하물은 접수하는 즉시 처리해야지, 꾸물거리다가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괜한 일로 신세를 망치는 수가 있었다. 지난해에도 원산에서 함흥으로 보내는 현금 3만5000원을 도난당해 관계자 전원이 해고되는 일이 있었다.



    10원짜리 지폐 2000매는 의외로 가벼웠다. 보통 크기의 책 서너 권 무게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내 월급이 50원이니, 30년 넘게 안 쓰고 모아야 이만한 돈이 생기는군.”

    2만원이 든 돈주머니가 그처럼 가벼운 것을 알고 보니 박봉의 월급쟁이 생활이 새삼 허망해졌다. 마쓰시타는 플랫폼에 정차 중인 ‘부산발 펑톈(奉千)행 제7호 특급열차’의 귀중품 화차(貨車)로 발걸음을 옮겼다. 열차 화물책임자 오키모토 전무차장에게 돈주머니를 맡기고 확인증을 받아 사무실로 돌아갔다.

    오키모토는 마쓰시타가 건네준 헝겊주머니를 귀중품 금고에 넣고 열쇠로 단단히 걸어 잠갔다. 귀중품 금고에는 방금 넣은 헝겊주머니 외에도 박스나 헝겊주머니로 포장된 귀금속, 유가증권, 현금 등 값비싼 소하물 수십 건이 들어 있었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귀중품 화차에는 전담 승무원 홍인상이 항상 대기했다.

    승객 탑승과 화물 적재가 모두 끝난 오후 7시20분, 제7호 특급열차는 요란한 기적을 울리며 경성역을 출발해 석양을 가르며 탁 트인 경의선 철로를 힘차게 내달렸다.

    감쪽같이 사라지다

    열차가 신촌, 수색, 능곡을 거쳐 일산을 지났을 때, 차창 밖은 벌써 어두워졌다. 열차는 철로의 이음새를 넘을 때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덜컹거렸다. 특급열차는 경성역에서 개성역까지 무정차로 운행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이번 운행에서는 화물 하역을 위해 금촌역에 잠깐 정차할 예정이었다.

    “이봐 홍군, 일반 화물칸에 잠깐 다녀올 테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잘 지켜야 해.”

    경의선 제7호 특급열차 뭉칫돈 도난사건

    베개 파는 소년이 차장 복장의 남자를 보았다고 증언한 당시의 삼등실 객차 내부.

    오키모토 전무차장은 금촌역에 부릴 화물을 점검하기 위해 귀중품 화차를 나섰다. 금고 열쇠는 늘 허리춤에 차고 다녔다. 부산역을 출발한 이후 12시간째, 홍인상은 귀중품 화차에서 한 발짝도 떠나지 않았다. 쳐다보는 것만으로는 안심이 안 됐던지 금고를 의자 삼아 걸터앉아 있었다. 차창 밖 스산한 가을풍경이 어둠에 묻혀 사라지고 지루한 여행길 말동무가 돼준 오키모토마저 곁을 떠나자 갑자기 피로가 엄습했다. 기관차 쪽에서 날아오는 석탄 타는 냄새가 오늘따라 유난히 역하게 느껴졌다. 눈꺼풀이 스르르 감기다가 놀라서 눈을 뜨고, 졸음을 쫓으려 얼굴을 도리질 치기를 몇 번. 홍인상은 깜박 잠이 들었다.

    제7호 특급열차는 일산역을 통과한 지 13분, 경성역을 출발한 지 56분 만에 금촌역에 정차했다. 오키모토 전무차장은 일반 화물칸 소하물 점검을 끝내고 귀중품 화차로 돌아왔다.

    “아니 이 친구, 그 사이 졸고 있어?”

    부산에서 펑톈까지 여정은 24시간이 넘었다. 한가할 때 조는 것은 눈감아줄 만한 일이었다. 상관에게 핀잔을 들은 홍인상은 졸음을 쫓기 위해 길게 기지개를 켰다. 기지개 한번 켜고 나면 웬만한 졸음은 달아나는데, 그날만큼은 머리가 어지러운 게 좀처럼 졸음이 가시지 않았다. 홍인상이 담배를 피우며 졸음을 쫓고 있을 때 금촌역 소하물 담당 직원 이태운이 귀중품 인출을 위해 서류를 들고 화차 안으로 들어왔다.

    “아니, 왜 열쇠를 금고 위에 올려두셨어요?”

    이태운의 한 마디에 얼음물을 끼얹은 듯 졸음이 순식간에 달아났다. 아닌게아니라 귀중품 금고 위에는 정체불명의 열쇠가 놓여 있었다. 오키모토 전무차장은 본능적으로 허리춤에 손이 갔다. 다행히 금고 열쇠는 허리춤에 그대로 걸려 있었다. 그러나 정체불명의 열쇠로 귀중품 금고를 열어보았더니 금고문은 거짓말처럼 열렸다. 눈대중으로 보기에 금고 안에 든 내용물이 없어진 것 같지는 않았다.

    금촌역은 정차 시간이 짧아서 금고 내용물을 장부와 대조해가며 일일이 점검하기 어려웠다. 오키모토 전무차장은 일단 이태운에게 금촌역에 내릴 귀중품을 찾아주고는, 열차가 출발한 이후 전담 승무원 홍인상과 함께 내용물을 하나씩 점검했다. 수십 건의 귀중품 중 딱 하나가 비었다. 식산은행 본점에서 선천지점으로 보내는 귀중품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오키모토는 낙담해 주저앉았다. 겉면에 내용물이 표시되지 않아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은행에서 보내는 귀중품 소하물 중 열에 아홉은 현금이었다. 그것도 몇만원, 몇십만원대의 뭉칫돈이었다.

    오키모토 전무차장은 도난사고 발생을 하루타 열차구장(총책임자)에게 보고하고, 다음 정차역인 개성역에 전보를 쳐 지원을 요청했다. 제7호 특급열차는 금촌역을 떠난 지 37분 만에 수십 명의 경관이 대기하고 있는 개성역에 정차했다.

    현금 2만원이 잠깐 동안 정차한 금촌역에서는 없어질 겨를이 없었다. 처음 적재한 경성역에서도 역시 도난을 당할 겨를이 없었다. 홍인상이 잠깐 졸았던 일산과 금촌 사이 13분 동안 도난당한 것이라고밖에는 달리 추측할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홍인상은 조는 동안에도 금고를 깔고 앉아 있었다. (‘미궁의 열차 도난 2만원 사건’, ‘신여성’ 1934년 4월호)


    사건은 의문투성이였다. 우선 홍인상이 조는 동안 누군가 침입해 금고문을 열고 현금을 꺼내갔다면 어떻게 금고 위에 걸터앉아 있던 홍인상에게 들키지 않았는지 의문이었다. 홍인상이 등받이도 없는 금고 위에 걸터앉아 졸면서 그처럼 깊은 잠에 빠졌을 리 없었다. 더욱이 금고에 보관 중이던 귀중품에는 내용물이 표기돼 있지 않았고, 범인이 금고를 뒤지거나 포장을 뜯은 흔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범인이 금고에서 알짜만 콕 집어 빼내간 것은 내용물이 무엇인지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음을 의미했다. 범인이 만능열쇠가 아니라 사전에 준비해간 복제열쇠로 금고문을 연 것도 의문이었다. 오키모토 전무차장이 늘 차고 다니던 열쇠를 어떻게 빼돌려 복사할 수 있었는지, 그처럼 용의주도한 범인이 범행 현장에 복제열쇠는 왜 남겨두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단서를 종합해보면, 범인은 내부자거나 최소한 철도업무에 정통한 사람임에 분명했다.

    꼬리를 무는 도난사고

    사건이 접수되자 경의선의 모든 역에는 비상이 걸렸다. 개성경찰서에 수사본부가 설치됐고 경기도 경찰부에서 지원대가 파견됐다. 피해액이 큰 사건인 만큼 수사지휘는 경기도 경찰부 노무라(野村) 형사과장이 직접 맡았다. 오키모토와 홍인상, 이태운 등 사건에 직접 관련된 인물은 물론 제7호 특급열차 승무원 전원이 개성경찰서에 연행돼 조사를 받았다. 승무원 조사에서 결정적인 단서가 드러났다.

    객차에서 베개 파는 소년은 경성역 출발 직후 삼등실 객차에서 철도원 제복을 입고 차장 완장을 찬 낯선 사람을 보았는데, 귀중품 화차를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열차가 금촌역에 정차하자 바람결같이 사라져 버렸다고 증언했다. 수사본부인 개성경찰서는 돌연 활기를 띠고 그 차장 복장을 한 인물의 거취에 대해 엄밀한 수사를 개시했다는데 그 자가 혹은 범인이 아닌가 하여 추측이 구구하다 한다. (‘의문의 2만원 거처’, ‘동아일보’ 1930년 10월10일자)


    경의선 제7호 특급열차 뭉칫돈 도난사건

    고가 사치품을 사들이다 2만원 도난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받아 곤욕을 치른 오산역 역무원 김영환의 사연을 실은 ‘동아일보’ 1931년 9월1일자.

    베개 파는 소년이 보았다는 차장 복장의 인물이 진짜 차장이었는지 가짜 차장이었는지 확실하지 않았다. 제7호 특급열차 승무원들끼리도 ‘차장 복장을 한 낯선 사내를 보았다’ ‘보지 못했다’ 증언이 엇갈렸다. 보았다는 승무원들도 증언하는 인상착의가 제각각이어서 몽타주조차 만들 수 없었다. 내부자의 범행이 아니라면, 2만원을 훔쳐간 범인은 베개 파는 소년이 보았다는 차장 복장을 한 인물일 것임에 분명했다. 하지만 오키모토가 너무 늦게 신고하는 바람에 경찰은 결정적인 단서를 확보하고도 문제의 인물을 찾을 길이 막막했다.

    수사가 제자리걸음을 치자, 오키모토와 홍인상을 향한 의혹의 눈초리는 더욱 따가워졌다. 다른 승무원들은 사건 발생 이튿날 모두 풀려났지만 오키모토와 홍인상, 금촌역에서 복제열쇠를 처음 발견한 이태운 등 세 사람은 개성경찰서에 계속 유치돼 강도 높은 신문을 받았다.

    개성경찰서는 오키모토 전무차장과 홍인상 귀중품 화차 전담승무원을 유력한 혐의자로 인치하고 엄밀한 조사를 진행 중이다. 개성경찰서 오키타 형사와 이 형사는 어떠한 단서를 잡았는지 지난 8일 오후 4시 상경하여 경성역에 머물고 있는 하루타 열차구장을 비밀리에 조사하고 오키모토와 홍인상의 가택을 수색한 후 경기도 형사과를 방문해 노무라 형사과장과 오랫동안 협의한 후 9일 새벽 돌아갔다. 아직까지 사라진 2만원의 행방에 대해서는 분실인지 도난인지조차 명백하지 못하고 혐의자도 개성경찰서에서 조사 중인 오키모토와 홍인상 이외에는 없다고 한다. (‘의문의 2만원 거처’, ‘동아일보’ 1930년 10월10일자)


    사라진 2만원의 소유주인 식산은행은 조선화재회사에 보험을 들어두었기 때문에 현금을 찾건 못 찾건 손해 볼 것이 없었다. 범행의 직접적인 피해자는 이번 사건으로 신용을 잃은 조선철도주식회사와 수사에 진전을 보지 못해 무능함을 드러낸 경찰이었다. 2만원이면 한평생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 큰돈이었다. 범죄자가 절도한 돈으로 부귀영화를 누린다면 법질서가 문란해지고 모방범죄가 기승을 부릴 게 불을 보듯 뻔했다.

    10월11일 밤, 나흘 전 2만원 도난사건이 일어난 바로 그 제7호 특급열차에서 우려했던 모방범죄가 발생했다.

    지난 11일 밤, 현금 6880원(100원권 68매, 10원권 8매)을 휴대하고 제7호 특급열차편으로 신의주로 돌아가던 청부업자 후쿠자와가 삼등침대차에서 자고 있다가 식당차에 잠깐 다녀와서돈을 넣어두었던 주머니를 만져보니 사라지고 없었다. 후쿠자와가 전무차장에게 분실 사실을 알리자 전무차장은 즉시 신막경찰서에 신고했다.

    열차가 2만원 도난 사건이 발생한 제7호 특급열차요, 지역이 역시 개성 부근이어서 혹시 동일 계통의 범행이 아닌가 하여 경기도 경찰부 형사과는 철로 주변과 각지의 역을 엄밀히 경계하도록 지시하는 한편, 이번에는 기어이 범인을 체포하고자 예하 각 경찰서에 수사를 독려했다.

    신의주경찰서는 피해자 후쿠자와를 추가로 조사하고 용의자로 서너 명을 인치하고 문초 중이다. 후쿠자와의 직업과 평상시 품행으로 미루어보아 허위고발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없지 않다. (‘제7열차에서 6000원 또 분실’, ‘동아일보’ 1930년 10월15일자)


    사건의 실마리가 잡히지 않고 모방범죄까지 발생하자 경찰은 더욱 초조해졌다. 존재 자체가 불분명하고 몽타주조차 만들지 못한, 차장 복장을 한 인물을 추적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경기도 경찰부는 사건이 발생한 이후 매일같이 8~9명의 전·현직 승무원을 소환해 사건 당일 행적을 조사했지만 아무런 혐의점도 발견하지 못했다. 마지막 기대를 걸 곳은 사건 발생 이후 줄곧 개성경찰서에 유치 중인 오키모토, 홍인상, 이태운 세 사람뿐이었다.

    사건 발생 아흐레째 되던 10월15일, 수사책임자 노무라 형사과장은 개성경찰서에서 경기도 경찰부로 수사본부를 옮기고, 오키모토, 홍인상, 이태운 세 사람을 경성으로 호송해 직접 신문했다. 세 사람이 새로운 내용을 진술하면 고등과 미와 경부가 경성역으로 달려가 승무원을 상대로 일일이 확인했다. 한동안 승무원들은 고된 일과에다 경찰 조사까지 이중고에 시달렸다. 조그마한 꼬투리라도 잡기 위해 사력을 다해 수사했지만, 세 사람의 혐의점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이태운과 오키모토는 사건 발생 열흘 후인 10월16일 석방됐고 홍인상은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10월19일 풀려났다.

    경찰은 오키모토가 자리를 비운 13분간 홍인상이 잠든 것이 아니라 범인이 뿌린 마취약 냄새를 맡고 일시적으로 정신을 잃은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단순히 잠든 것이라면 범인이 금고문을 열고 2만원을 꺼내갈 동안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오키모토와 홍인상은 형사처분은 면했지만, 직무 태만을 사유로 나란히 해고됐다.

    제7호 특급열차 삼등침대차에서 6880원을 잃어버렸다고 신고한 후쿠자와는 10월17일 허위신고 혐의로 신의주경찰서에 체포됐다. 경찰은 후쿠자와를 유치장에 가두고 허위신고한 이유를 문초했다. 후쿠자와는 ‘돈을 잃어버린 것도 억울한데 감옥살이가 웬 말이냐’고 피눈물을 흘리며 부인했다. 일주일 동안의 수사에도 혐의를 입증하지 못한 경찰은 후쿠자와를 은근슬쩍 석방했다. 이로써 2만원 도난 사건도, 6880원 도난 사건도 미궁에 빠졌다.

    1930년이 저물도록 경찰은 사라진 2만원과 6880원의 행방은커녕 조그마한 실마리조차 찾지 못했다. 하지만 가시적인 성과를 얻지 못했다고 수사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1931년 새해 벽두, 6880원의 행방이 드러났다. 후쿠자와가 돈을 분실한 것은 경찰의 주장처럼 허위신고가 아니라 사실이었다.

    경의선 열차에서 신의주에 사는 청부업자 후쿠자와가 6880원을 잃어버린 지 3개월 만에 돈의 행방이 밝혀졌다. 작년 10월12일 경의선 물개역과 신막역 사이 ‘자근다리’라는 지점에서 그 동리 고의순의 어린 아들이 놀다가 100원짜리 68매와 10원짜리 8매, 즉 6880원이 들어 있는 신문지 뭉치를 얻어 가지고 자기 부친에게 주었다. 고의순은 조카 고간국과 의논하여 고간국은 3000원 고의순은 나머지 3800원을 나눠 가졌다. 고간국은 금교역 앞에서 장사를 시작하고, 고의순은 그 돈 중에서 1100원어치 토지를 사고 처남에게 1000원을 주어 그 돈을 함부로 쓰다가 지난 12일에 소관 물개주재소에 발각되었다. 고간국과 고의순, 그리고 고의순의 처남 등 3명은 물개주재소에 인치 중이다. (‘동아일보’ 1931년 1월15일자)


    경기도 경찰부는 후타미 경부보를 황해도 남천으로 파견해 6880원 습득현장을 조사하고 고간국과 고의순을 문초했다. 그러나 2만원 도난 사건은 물론 6880원 도난사건에 대한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다. 고간국과 고의순은 습득물 횡령범일 뿐 후쿠자와의 돈을 훔친 절도범은 아니었다. 범인은 훔친 돈을 차창 밖으로 내던진 후 나중에 찾아가려 했지만, 돈이 떨어진 장소를 찾지 못해 엉뚱한 사람이 횡재한 것으로 추측됐다. 6880원 사건은 끝내 범인을 찾지 못한 채 후쿠자와에게 돈을 돌려주는 것으로 종결됐다.

    철도원 수난시대

    2만원 도난사건 수사도 조금씩 성과가 나타났다. 사건이 발생한 지 100일이 지나면서 전·현직 철도원을 상대로 사건 당일 행적을 캐묻는 수사는 한계에 다다랐다. 경찰은 사건 발생 이후 재산이 갑자기 불어나거나 씀씀이가 커진 철도원을 찾는 쪽으로 수사방향을 틀었다. 1931년 3월30일 함흥경찰서는 대구에 형사를 파견해 2만원 도난사건 용의자를 검거하는 개가를 올렸다.

    곽경삼(39세)은 재작년까지 조선철도주식회사 신흥역 역무원으로 근무하다가 사직하고 인천을 거쳐 대구에 거주하면서 대규모로 미두 투기를 했다. 신흥역에 재직하던 중 수천원의 공금 횡령 사실이 최근에 발각되어 수사에 착수했는데, 피의자 신문 과정에서 뜻밖에 2만원 도난 사건의 혐의가 드러났다. 함흥경찰서에서는 수사 초점을 돌려 비상한 활기를 띠고 가일층 엄중한 문초를 진행 중이다. (‘경의선 2만원 사건 혐의자 우연 발각’, ‘동아일보’ 1931년 4월4일자)


    곽경삼은 함경남도 신흥역에서 역무원으로 일하면서 월급 30원을 받으며 어렵게 살았다. 그런 그가 아무런 연고도 없는 대구에 내려가 수만원의 재산을 굴리며 떵떵거리며 살았으니 의심을 살 만도 했다. 그러나 곽경삼이 갑자기 부자가 된 것은 2만원 도난사건이 발생하기 1년 전 일이었다. 조사 결과 곽경삼은 공명심에 사로잡힌 경찰의 강요로 2만원을 훔쳤다고 거짓 자백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수만원에 달하는 곽경삼의 재산은 횡령한 공금을 밑천으로 미두 투기를 해서 불린 것이었다.

    1931년 8월30일, 제7호 특급열차에서 2만원이 분실된 지 어느덧 11개월이 지났다. 일요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원경찰서에는 다나카 서장 이하 전 대원이 모두 출근해 지난 밤 오산주재소에서 압송된 오산역 역무원 김영환의 신문 결과를 초조히 기다렸다. 스물세 살 혈기왕성한 청년 김영환은 하루 전 오산주재소에서 자신이 지난해 10월 경의선 열차에서 금고에 든 2만원을 훔친 범인이라고 자백했다.

    오산주재소가 김영환에게 들었다는 내용을 탐문한 바는 다음과 같다. 1930년 10월7일, 김영환은 비번이어서 경성에 올라갔다. 식산은행이 열차로 2만원을 탁송하는 것을 탐지하고 경성농업학교와 경성상업학교 학생 두 명을 꾀어 그날 오후 7시20분 경성역을 출발하는 제7호 특급열차에 탑승했다. 열차 승무원이 2만원을 인계받고 잠깐 쉬려고 한눈을 파는 1분30초 동안에 거금을 감쪽같이 절취해 금촌역에서 하차했다. 그 후 김영환은 오산역으로 돌아와 오늘에 이르도록 태연히 근무해왔다. 일설에는 배후에 모종 사상계통의 관계자가 있어 안젠(安全)은행을 폭파할 계획까지 세워 음모를 착착 진행 중에 있었다고 한다. (‘2만원 분실 괴사건’, ‘동아일보’ 1931년 8월31일자)


    불과 1분30초 만에 쥐도 새도 모르게 금고문을 열고 현금 2만원이 든 헝겊주머니를 쏙 빼내 달아난 대담무쌍한 절도범 김영환이 꼬리를 잡힌 것은 오산역에서 발생한 작은 분실사고 때문이었다.

    경의선 제7호 특급열차 뭉칫돈 도난사건

    조선상업은행 은행원 최공부는 대낮에 경성역에서 4만4900원을 사기횡령하고 2만원 도난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받았다. 1935년 2월26일 최공부의 체포는 ‘동아일보’가 이튿난 호외(사진)를 발행할 만큼 큰 뉴스였다.

    1931년 8월22일 밤, 오산역 오카야마 역장은 김영환과 함께 숙직했다. 이튿날 아침 일어나 보니 현금 14원이 든 지갑과 시계가 사라졌다. 관할 오산주재소는 김영환을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해 문초했다. 증거확보를 위해 김영환의 집을 수색하니 축음기, 양복, 금시계 등 온갖 사치품들이 쏟아졌다. 토지를 매입한 정황까지 드러났다. 오산주재소는 돈의 출처를 강도 높게 추궁했고, 결국 범행 일체를 자백받아 수원경찰서로 압송했다.

    김영환이 열차 2만원 도난 사건의 진범이 맞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지자 다나카 서장은 즉답을 피했다.

    “글쎄요. 아직 문초 중이니까 진범인지 아닌지는 나조차 모르겠소. 금명간 진위가 드러날 것입니다. 조금만 더 참아주시오.”

    사건 발생 직후부터 줄곧 수사를 지휘한 경기도 경찰부 노무라 형사과장 역시 말을 아꼈다.

    “김영환은 오산주재소에서 시계 절도범으로 문초를 받다가 혹시 2만원 사건의 범인이 아닌가 하고 신문했더니 그렇다고 자백했소. 하여 수원경찰서로 압송 문초 중이나 전후의 사실을 따져보면 범인이 아닌 듯한 점도 없지 않소. 좌우간 문초 중이니 진범인지 아닌지는 지금으로선 알 수 없소.”

    서둘러 범인 체포사실을 발표한 오산주재소와는 달리 수사 책임자들이 이처럼 신중을 기한 것은 김영환을 2만원 도난사건의 범인으로 보기에 미심쩍은 구석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1. 김영환은 역무원 생활 2년 동안 줄곧 오산역에서만 근무했다. 오산역은 조그마한 역이어서 특급열차는 정차하지 않는다. 특급열차를 가까이서 살펴본 경험이 없는 김영환이 특급열차의 구조며 현금의 탁송 절차를 알 리가 없다.

    2. 2만원이라는 거금을 절취했다면 아무리 손버릇이 나쁘기로 역장과 단 둘이 숙직하면서 단돈 14원이 든 지갑을 훔치리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3. 오산주재소에서 범행을 자백했다면서 수원경찰서에서는 범행 일체를 부인했다.

    4. 오산주재소에서 학생 두 명과 공모했다고 자백했으나, 학생이 다닌 학교 이름은 알지만 정작 학생의 주소와 성명은 모른다고 말했다.

    5. 공범 두 명은 중간에 내리게 하고 자기는 금촌역에서 내려 되돌아왔다고 하나 제7호 특급열차는 경성역에서 금촌역 사이에 정차한 역이 없었다.

    (‘2만원 분실 괴사건’, ‘동아일보’ 1931년 8월31일자)


    아니나다를까 김영환은 수원경찰서로 압송된 지 단 하루 만에 2만원 도난사건과 무관한 것으로 밝혀졌다. 월수입이 27원밖에 되지 않았던 그가 고가의 유성기도 사고 양복도 맞춰 입을 수 있었던 비밀도 밝혀졌다. 수원경찰서의 조사 결과 김영환이 소유한 유성기와 양복은 월부로 구입한 것으로 드러났고, 공범으로 간주돼 경성에서 붙잡혀왔던 경성상업학교 학생은 그냥 친구에 불과한 것으로 판명됐다. 그의 통장엔 2만원은커녕 2원도 들어 있지 않았다. 숨겨둔 땅은 물론 자기 집도 없었다.

    이 난센스 사건에 대하여 경기도 노무라 형사과장은 파안일소한 후

    “여보 신문기자 양반. 내 안색을 살펴보고 그렇게 짐작이 안 된단 말이요? 이번 사건도 요컨대 몇몇 신문이 만든 것이지요. 하 하…

    범인이란 거짓말을 잘 하는 법인데 그래 2만원을 절취한 용감한 범인이면 그리 쉽게 자백했을 리가 있겠소. 가만있소. 내일쯤 김영환을 범인인 듯이 만들어 놓은 경과를 이야기해 드리지요. 좌우간 헛물켠 사람이 많은 것이 미안하오.”

    (‘2만원 사건의 난센스’, ‘동아일보’ 1931년 9월1일자)


    김영환은 2만원 절도 혐의를 벗은 후에도 오카야마 역장의 지갑과 금시계를 훔친 혐의로 열흘 동안 더 문초를 받다가 9월9일 사법주임의 엄중한 훈계를 듣고 체포된 지 18일 만에 풀려나 집으로 돌아갔다.

    미궁의 7년 세월

    김영환의 거짓 자백이 밝혀진 이후 2만원 도난사건은 영구미제로 남는 듯했다. ‘이수탁 살부(殺父) 사건’ ‘가와카미 순사 살해사건’ ‘마리아 참살 사건’과 함께 1930년대 4대 미궁 사건에 꼽히기도 했다. 사건이 해결될 것으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열차 도난사건이 발생하거나 대규모 절도사건이 발생하면 어김없이 2만원 도난사건과 관련성을 의심받았다.

    사건이 발생한 지 3년이 지난 1933년 8월14일 밤, 안주를 지나던 경의선 제5호 특급열차에서 차표와 돈이 든 승객의 지갑이 사라지고 침대차에 누워 있던 승객이 호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만년필을 소매치기당하는 사고가 연이어 발생했다. 이튿날 새벽 2시, 같은 열차에서 청소부 김복남이 청천교 부근에서 떨어져 죽었다.

    동료 승무원이 김복남(28세)이 사라진 것을 뒤늦게 발견하고 곧 각 역에 조사해 볼 것을 요청했다. 김복남의 사체는 안주역 북쪽 청천교 부근에서 모자에 선혈이 낭자하고, 뒤통수가 깨지고, 왼팔이 떨어진 채 발견되었다.

    그의 죽음에는 여러 가지 의심나는 점이 있다. 가정에 우환이 있어 염세자살한 것이라는 설도 있고, 실수로 인한 추락사라는 설도 있다. 철도 관계자는 ‘그가 청소를 하다가 발을 잘못 디뎌 열차에서 떨어져 뒤통수가 깨지고 정신이 몽롱해졌는데 더듬어서 기어간 곳이 하필이면 철로였다. 때마침 펑톈행 열차가 지나가는 바람에 팔이 끊어지고 출혈 과다로 사망했을 것’으로 추측했다. (‘승무원 의문의 추락사’, ‘동아일보’ 1933년 8월17일자)


    추락사하기 전 김복남은 몇 시간 전 발생한 연쇄 도난사건, 더 나아가 3년 전 발생한 2만원 도난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됐다. 미묘한 시기에 추락사한 관계로 김복남의 죽음은 구구한 억측을 불러일으켰다. 김복남이 추락사한 것이 단순한 사고였는지, 누명을 쓴 것이 억울해서 자살한 것인지, 3년 동안 간직한 비밀이 발각되는 것이 두려워 자살한 것인지 확실치 않았다. 김복남의 품행과 성품을 아는 사람은 그가 도난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됐다는 사실 자체를 납득하지 못했다.

    김복남은 50원의 월급을 받고 있어 생활의 곤란을 받은 일이 없다. 술도 먹지 않는 얌전한 사람이어서 역 당국에서도 신용했다. 1000원 이상의 저축이 있었고, 외가 장씨 집안이 유족하여 가끔 보조도 받았다.

    모친 장씨와 아내 길금순 세 식구가 단출하게 살았다. 큰아우 김유남은 분가해 서빙고역에 근무 중이고, 막내아우 김성남은 선린상업학교를 마치고 금년에 교원으로 부임했다가 사고로 죽었다. 주워다 키운 아이가 역시 불에 타 죽었다. 그의 품행에 대해서 서빙고주재소 순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김복남은 18세 때부터 역에 출근했습니다. 4년 전에 ‘홍제소년군’을 창설하고, 물질적 정신적으로 도와주는 일이 적지 않았습니다. 평소에 얌전해서 조금도 의심받을 점이 없습니다.”

    (‘열차도난 관련 풍설’, ‘동아일보’ 1933년 8월17일자)


    주위 사람들의 강력한 항변 덕분에 죽은 김복남은 도난사건 관련 혐의를 벗었다. 그럼에도 하필이면 왜 미묘한 시기에 사고를 당했는지에 관한 의문은 그 후로도 풀리지 않았다.

    1934년 2월, 공덕리 쓰레기 매립지에서 1000원가량으로 추측되는 썩어 문드러진 지폐 한 다발이 발견됐다. 출처가 석연치 않은 그 돈이 2만원 도난 사건과 관련이 있지나 않을까 하여 수사를 벌였지만, 직접적인 관련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1935년 2월26일, 조선상업은행 평택, 재령, 단천 등 각 지점에서 본점으로 보내는 현금 4만4900원이 경성역에 도착했다. 결산이 끝난 시간이어서 조선상업은행은 그 돈을 즉시 인출하지 않고 경성역 금고에다 하룻밤 보관했다. 이튿날 오전, 조선상업은행 본점 직원이 경성역 소하물계에 전화를 걸어 곧 돈을 찾으러 가겠다고 통보했다. 오전 10시, 전화를 걸었던 20대 중반의 은행 직원이 경성역 소하물계에 나타나 영수증을 내밀면서 현금의 인출을 요구했다. 소하물계 직원 기무라는 아무런 의심 없이 4만4900원을 내주었다. 은행 직원은 돈 가방을 들고 역 앞에 나가 택시를 타고 사라졌다.

    역 앞까지 배웅 나갔던 기무라는 은행 직원이 관용차도 타지 않고 현금을 인출하러 온 것이 왠지 미심쩍었다. 자리로 돌아간 즉시 영수증을 검토했다.

    면밀히 검토하니 영수증에는 수입인지가 붙어 있지 않았고, 예전 영수증에는 ‘受取人 西鄕幸吉, 保證人 阿都五文’이라고 기입돼 있는데 이번 영수증에는 ‘受取者 安藤平八, 保證人 金乙相’이라고 기입돼 있었다. 기무라는 즉시조선상업은행으로 전화했다. 은행에서는 마침 돈을 찾으러 가려고 준비 중이었다. 사기 당한 것을 깨달은 기무라는 즉시 본정경찰서에 신고했다. (‘백주 경성역에서 4만여원 사기’, ‘동아일보’ 1935년 2월27일자)


    기발한 범행수법과 달리 범인은 불과 몇 시간 만에 검거됐다. 범인은 조선상업은행 직원 최공부였다. 선린상업학교 출신 스물여섯 살 전도유망한 은행원이던 최공부는 범행 즉시 택시를 타고 영등포로 달려가 2만원을 들여 땅을 살 만큼 치밀하게 범행을 준비했다. 최공부가 사기로 취득한 거금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허망하게 체포된 것은 범행 당일 월차를 낸 조선상업은행 본점 직원이 그뿐이었기 때문이다. 범행 수법이 너무나 교묘했기에 최공부는 5년 동안 미궁에 빠진 2만원 도난 사건의 범인이 아닌지 추가로 조사를 받아야 했다. 물론 최공부는 2만원 도난 사건과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홈스와 루팡의 ‘지혜 내기’

    1937년 12월23일, 경기도 경찰부는 함경북도 성진으로 수사대를 급파했다. 수사대는 성진역 승무원 김봉암을 체포해 경성으로 호송했다. 연이틀 혹독히 문초하자 성탄절 아침 김봉암은 굳게 다문 입을 열었다.

    “그래요. 내가 그랬어요. 내가 바로 2만원 도난 사건의 범인이요.”

    사건발생 당시 김봉암은 경성과 토성 간 열차 승무원이었다. 제7호 특급열차에 화물담당 승무원으로 승차할 때도 가끔 있었다. 근 10년 철도원으로 열심히 일했건만, 50원 월급으로는 다섯 식구 먹고 살기도 빠듯해서 좀처럼 돈이 모이지 않았다. 조그마한 집 한 칸이라도 마련하려면 월급 외에 부수입이 필요했다. 귀중품 화물을 운송할 때면 공연히 입맛이 다셔지기도 했다. 김봉암은 제7호 특급열차 화물 담당 승무원으로 탑승할 때 몰래 금고열쇠를 복사해 두고 기회를 노렸다.

    경의선 제7호 특급열차 뭉칫돈 도난사건

    7년2개월 만에 2만원 도난 사건의 진범 체포소식을 전하는 ‘동아일보’ 1937년 12월30일자.

    1930년 추석 이튿날은 마침 비번이었다. 성묘나 갈까 하고 경성역에 나갔는데, 식산은행 관용차가 눈에 들어왔다. 경성역 소하물계에서 몇 번 마주친 일이 있는 식산은행 현금수송 담당 직원 정창섭이 가방을 들고 관용차에서 내렸다. 현금을 인출하러 온 것인지 발송하러 온 것인지 두리번거리는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유난히 주위를 의식하는 것이 현금을 발송하러 온 것이 분명했다.

    ‘옳거니.’

    김봉암은 성묘를 가려던 계획을 수정해 정창섭의 뒤를 따랐다. 소하물계에 들어간 정창섭은 담당 역무원 마쓰시타의 책상 위에 100매씩 묶은 10원짜리 돈다발 스무 개를 올려놓았다. 현금 확인과 포장이 끝나자, 마쓰시타는 돈주머니를 들고 사무실을 나와 플랫폼으로 걸어갔다. 김봉암은 마쓰시타의 뒤를 쫓았다. 철도원 제복을 입고 있어 아무도 의심하거나 제지하지 않았다. 마쓰시타는 제7호 특급열차 귀중품 화차에 올랐다. 김봉암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제7호 특급열차의 귀중품 금고 열쇠는 오래전부터 복사해 들고 다녔다. 모자를 최대한 눌러쓰고 귀중품 화차 다음 칸 삼등실 객차에 올랐다.

    ‘경성에서 펑톈까지 가는 20시간 동안 단 5분만 주어지면 빳빳한 현찰 2만원이 손에 들어온다.’

    열차는 오후 7시20분 경성역을 출발했다. 김봉암은 승객들이 눈치채지 않게 조심해서 귀중품 화차의 동향을 관찰했다. 신촌, 수색, 능곡을 거쳐 일산을 지났을 때, 일본인 전무차장이 귀중품 화차에서 나와 일반 화물칸으로 걸어갔다. 기회는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찾아왔다. 부산에서 경성까지 12시간 동안 귀중품 금고를 지키고 있었을 담당 승무원은 상관이 자리를 뜨면 이내 골아 떨어지게 마련이었다. 귀중품 화차 문을 조심스럽게 열어보니 담당 승무원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일반인은 침대차에서도 쉽게 잠들지 못하지만, 열차여행에 이골이 난 승무원들은 어떤 환경에서도 잠들 수 있다. 금고에 걸터앉아 잠에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담당 승무원을 바라보니 측은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김봉암은 발걸음 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귀중품 화차로 들어갔다. 다음 정차역인 금촌역까지는 이제 10분밖에 남지 않았다. 김봉암은 준비해둔 복제열쇠를 꺼내 조심스럽게 금고문을 열었다. 식산은행 본점에서 보내는 소하물은 다행히 금고문 가까이에 놓여 있었다. 김봉암은 식산은행 소하물을 꺼내고 금고문을 잠갔다. 다급한 마음에 금고 위에 복제열쇠를 두고 오는 실수를 저질렀지만,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돈주머니를 들고 귀중품 화차를 빠져나왔다. 삼등실 객차에 돌아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는데, 베개 파는 소년이 빤히 쳐다보며 지나갔다. 1~2분쯤 지나자 열차는 금촌역에 정차했다. 김봉암은 돈주머니를 들고 잽싸게 열차에서 뛰어내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구 달렸다.

    제7호 특급열차에서 베개 파는 소년은 범행 직후 경찰에 ‘철도원 제복을 입고 차장의 완장을 팔에 건 괴한이 찻간을 왕래했소’하고 증언했다. 당시부터 경찰은 가짜 차장을 탐사하는 한편 진짜 차장들 뒤도 쫓았다. 김봉암은 자신이 경찰의 감시 대상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또 지폐의 번호가 어쩌면 은행 장부에 올라 있을는지도 몰라 지능범답게 4년 동안을 그 돈을 잊은 듯 손도 대지 않고 참고 참아왔다. 경찰은 경찰대로 끊임없이 그의 씀씀이를 감시했다.

    실로 명탐정 셸록 홈스와 괴도 루팡의 지혜내기와 흡사한 경찰과 김봉암의 두뇌 싸움은 오랜 시간 계속되었다. 그러나 돈을 훔친 사람은 결국 약점을 드러냈다. ‘이제는 아마 잊었겠지’ 하는 작은 방심에서 김봉암은 1934년 1월 전학순에게 1000원을 빌려주었다. 그때도 자기 돈이라는 말은 하지 않고 딴 곳에서 돌려주는 듯 채권자의 명의를 딴 사람으로 했다. 같은 해 5월 전학순의 명의로 김포에다 땅을 4000원어치 샀다가 되팔아 3000원의 이익을 보았다. 그해 말 함경남도 성진으로 전근을 가서 1935년 함경남도 차호에다 역시 전학순 명의로 1만9000원을 들여서 정어리공장을 차렸다. 성진읍 욱정에 130평의 대지를 매수해반양식 가옥을 신축하고, 금과 보석으로 몸치장을 하는 등 박봉의 봉급생활자로서는 너무나 호화로운 생활을 하다가 그만 경찰에 꼬리를 잡혔다. (‘미궁 7년의 2만원’, ‘동아일보’ 1937년 12월28일자)


    겉보기에 김봉암은 박봉의 성진역 승무원으로 근무하면서 2남1녀를 키우는 성실한 가장이었다. 가족들조차 김봉암이 수천원 상당의 토지와 시가 5만원 상당의 정어리공장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뜻하지 않은 ‘해피엔딩’

    김봉암의 범행은 7년2개월 만에 백일하에 드러났다. 그러나 경찰은 김봉암의 범죄사실을 낱낱이 밝혀내고도 체포한 지 한 달 만인 1938년 1월23일 석방했다. 절도죄의 공소시효가 7년이었기 때문이다. 김봉암은 2개월이라는 간발의 차이로 형사처분을 면했다. 사건 발생 직후부터 수사를 지휘한 경기도 경찰부 노무라 형사과장은 그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노무라 형사과장은 7년2개월 만에 범인을 밝혀낸 소회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사건의 해결을 본 것은 무척 기쁩니다. 그간 참으로 고심했소이다. 처음부터 혐의가 농후하다고 본 김봉암을 단념하지 않고 뒤쫓았는데, 공소시효가 지난 것은 실로 유감입니다.”

    공소시효가 지났다고 민사상의 책임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사건은 범인 체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새로운 문제를 낳고 있다. 바로 2만원의 처리 문제다. 식산은행은 조선화재보험회사에 보험을 들어두어서 도난 사건이 일어난 직후 보험회사로부터 2만원의 보험금을 지급받았다. 민사소송을 일으켜 2만원을 찾게 된다면 어느 편에서 이를 먼저 요구하게 될 것인가? 보험회사일 것인가? 식산은행일 것인가?이에 대하여 신빙할 방면의 의견을 종합하면 보험회사는 식산은행에 대해 보험금을 지불하였을 뿐 범인과 직접 관계가 없고, 식산은행은 손해가 없을 뿐만 아니라 분실된 2만원은 철도국에 맡겼던 것이라 또한 직접 관계가 없다. 따라서 직접 피해자는 철도국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 문제는 철도국이 범인에게 반환을 요구할 것이며, 그 돈은 철도국과 직접 관계가 있는 식산은행으로 일차 갔다가 다시 식산은행에서 보험회사로 돌아갈 것이라 한다. (‘미궁 7년의 2만원’, ‘동아일보’ 1937년 12월28일자)


    경의선 제7호 특급열차 뭉칫돈 도난사건
    전봉관

    1971년 부산 출생

    서울대 국문과 졸업, 동 대학 석·박사(국문학)

    서울대, 아주대, 한신대, 한성대, 덕성여대에서 강의

    現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 과학부 교수

    저서 및 논문 : ‘1930년대 한국 도시적 서정시 연구’ ‘황금광시대’ ‘경성기담’ 등


    1938년 1월22일 요시다 철도국장은 경성지방법원 민사부에 원금에 법정이자를 더한 2만7350원의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같은 해 3월3일 법원은 원고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후 김봉암과 철도국은 정어리공장의 소유권을 넘기는 것으로 합의했다. 원금과 이자를 돌려주고도 김봉암에겐 수만원에 달하는 토지와 집이 남았다. 수십 명의 무고한 동료 철도원들을 절도 용의자로 내몬 희대의 절도범으로서는 기가 막힌 ‘해피엔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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