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조건 누르기만 하는 정부, 시세차익 실현에만 골몰하는 투기세력, 투자와 주거 사이에서 방황하는 실거주자들, 그리고 흐르는 세월…. 개포 대치 삼성 청담동의 알짜 재건축 대상 아파트들은 그야말로 개점휴업 상태다. 뜬금없는 동탄 2지구 신도시 발표로 ‘강남 수요’는 더 늘어난 상황. 강남 재건축의 내일은 과연 밝아올 것인가.
개포 주공아파트 단지.
개포동 아파트의 평당 가격은 약 4500만원으로 2위인 압구정동보다 500만원, 3위인 대치동보다는 600만원쯤 비싸다.
최고가를 내놓지 않는 중심에는 평당가 5500만원을 호가하는 개포주공아파트가 있다. 서울의 끝자락 대모산과 구룡산 아래에 있는 강남의 마지막 재건축 대상 저층아파트다. 타워팰리스 66층 펜트하우스 거실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산자락 푸르름 가득한 시골 동네 같은 위치에 갈색톤 낡은 아파트단지가 드러난다. 빙 둘러 초록잎사귀 무성한 산들이 보이고, 그곳에 직접 가보면 공기는 마치 무주구천동처럼 맑은 것 같다.
‘서울의 빈티지’. 건축 소재는 달라도 유럽풍의 고즈넉함이 느껴지는 낡은 아파트가 1만8000가구의 개포주공이다. 1980년대 초 우리나라 아파트의 형태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개포주공은 1982년부터 1984년 사이에 입주한, 4반세기의 세월을 지나온 아파트다.
1단지부터 4단지는 5층짜리 저층 아파트이고 5, 6, 7단지는 14층짜리 중층 아파트다. 8단지, 9단지는 저층인데 공무원 임대 아파트다. 이 중 저층 아파트가 유명한 것은 쾌적하고 학군이 좋으며, 조합설립인가나 안전진단을 받은 대형단지 중 강남구에서 마지막 남은 저층 아파트 재건축 물량이기 때문이다.
저층 아파트는 당연히 대지지분이 많고 개발이득도 많을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개포주공 저층단지는 자기 아파트 평수의 130%를 초과하는 대지지분을 갖고 있으며 누가 봐도 재건축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낡았다. 더욱이 차세대 주거시설의 트렌드가 ‘자연친화형 웰빙하우스’로 바뀌면서 개포주공은 전국에서 몰려드는 재건축 투자자들로 몸살을 앓는다.
덕분에 1998년 1억2000만원이던 방 2칸, 화장실 1곳의 15평 주공아파트는 1999년 1억8000만원으로 오른 뒤 해마다 2억3000만, 2억6000만, 4억5000만, 5억7000만, 5억9000만, 7억, 8억5000만원으로 올랐고, 올해에도 9억원가량의 시세를 보이고 있다. 10년 동안 8배 가깝게 오른 셈이다. 상승에 대한 믿음은 아직도 확고하다. 경기여고, 숙명여고, 개포고, 중동고, 휘문고 등 명문고에 진학할 수 있고 미래가치를 따져보면 더 높은 점수를 받는 곳이 개포주공이다.
개포주공의 재건축 방정식
구룡산 정상에 서면 너른 평야 같은 개포동이 보인다. 서울의 끝자락, 해발 293m 대모산과 283m 구룡산이 없었다면 지금 판교도 분당도 서울이 됐을 것이다. 왼쪽으로는 포이동이, 오른쪽으로는 일원동이, 양재천 건너편에는 도곡동과 대치동이 개포동을 감싸고 있다. 개포주공 아파트 중에서도 재건축을 향해 달려가는 선두 아파트는 환경이 더욱 열악한 저층단지다. 그중에서도 1단지는 조합설립인가를 받아서 제일 빨리 가고 있다.
기존 가구수 5040가구로 단지가 가장 크고 땅도 넓다. 총 대지면적은 11만725평이고 기존 평형은 11, 13, 15, 16, 17, 18평형이다. 재건축 법규가 바뀌기 전 18평형은 65평형을 받을 수 있다는 설이 파다했다. 지금은 50평형이 목표 평형이다. 1982년식으로 가장 먼저 입주했고 동일 평형 대지지분도 타 단지에 비해서 많은 편이다. 단, 투기과열 지구 내에서 조합 설립인가가 난 후에 아파트를 사면 새 아파트 입주시까지 되팔수 없다는 게 현재 조합설립인가가 나 있는 이 단지의 제약이다.
지금 매매 가능한 물건은 2003년 12월31일 이전부터 조합원이 가지고 있는 물건에 불과하다. 조합원의 잦은 매매로 아파트 가격이 올라간다고 판단한 정부는 당시 강력한 재건축 규제를 발동했다. 이에 따라 개포주공 2, 3, 4단지와 개포시영 아파트는 안전진단을 통과해서 조합설립 인가의 신청자격을 갖췄으나 현재도 조합설립인가를 받지 않고 있다. 재건축 진행도 미진한 상황에 조합설립인가를 받아서 재산권을 침해받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팔지도 사지도 못하는 상황에 갇힌 채 보유세금은 높아만 가는 특별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게 개포주공 1단지 주민들의 말이다.
수많은 투기세력이 몰린 1982년 11월 개포 주공아파트 분양권 당첨자 발표현장. 일부 중개업자는 즉석카메라로 당첨자 명단을 인화해 ‘복부인’들에게 건네는 서비스를 제공했다.
나무가 울창한 개포공원을 사이에 두고 2단지와 붙어 있는 개포주공 3단지는 2단지와 동시에 입주했으며 11, 13, 15평형, 1160가구로 구성돼 있다. 대지면적은 1만9347평으로 개포주공 중 가장 작은 단지다. 3단지는 작지만 전철역과 버스정류장이 인접해 있으며 개포시립도서관과 경기여고, 수도전기공고가 가까워 학교에 다니는 자녀를 둔 수요자들이 특히 선호하는 단지다.
개포주공 4단지는 11, 13, 15평형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서민 아파트다. 2840가구이며 총 대지면적은 6만6423평이다. 개포시영 아파트는 1984년식이며 1970가구의 5층 아파트로 10, 13, 17, 19평형이 있다. 단지와 이어지는 달터공원이 있어 녹지 공간이 풍부하고 쾌적하다.
경기여고의 추억
개포주공 저층단지의 기존 용적률은 70~80%다. 200% 가까운 용적률로만 재건축이 돼도 개발이득이 충분히 있을 만하다. 그러나 주민들은 270~300%의 용적률을 이뤄낸 잠실, 반포와 비교하면 억울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고밀도로 개발해야 그만큼 조합원들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
그러나 순수하게 주거가치만 고려한다면 용적률이 낮을수록 새로 짓는 아파트 단지 또한 훨씬 더 쾌적할 것이다. 어쩌면 낙후된 상가시설만 보완된다면 지금 그대로가 가장 편하고 아름다울지 모른다.
강남구 개포동 152번지. 교훈 ‘진 선 미’ ‘참되고 착하고 아름다워라’. 두 말이 필요 없는 대한민국 최고의 여자고등학교. 개포주공 3단지와 담장을 맞댄 경기여고는 1988년 정동1번지 덕수궁 돌담길 끝자락에서 개포동으로 옮겨온다. 1976년 경기고, 1980년 서울고가 강남에 새 터를 잡은 것에 비하면 상당히 뒤늦은 이전이었다.
1960, 70년대 허리를 졸라맨 교복 차림새의 경기여고생들은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넘버원 공립학교 배지를 단다는 것은 얼마를 주어도 아깝지 않은 그 시대 최고의 프라이드였다. 경기여고가 옮겨 오면서 이름도 낯설던 개포동은 뜨는 동네가 됐다. 경기여고를 나온 엄마들과 경기여고를 우러러본 추억이 있는 아빠들은 초등학생, 중학생 딸을 경기여고에 넣기 위해 일찌감치 이곳으로 주거지를 옮겨왔다.
경기여고 덕에 개포초, 개원초, 개포중 등도 덩달아 명문이 됐다. 고교 평준화 30년이 지났지만 경기여고의 명문대 진학률은 공립여고 중에는 아직도 톱 클래스이며 동창회 파워 또한 여전하다. 교정은 단아한 정동 분위기를 그대로 이어왔고, 유흥가나 업무시설이 없어 주변의 학습 환경 또한 최고수준이다.
경기여고 정문 앞에는 분당선 연장선 개포동역이 3년 전 개통됐다. 개포동역은 3호선 도곡역과도 연결되며, 선릉역에서 2호선과 환승된다. 분당선은 내후년쯤 강남구청, 압구정동, 뚝섬, 왕십리로 뻗어 나갈 계획이다.
7.5평의 행복
2004년 여름, 38세의 인테리어 업자 S씨는 이혼했다. 10억원이 넘는 전 재산을 아내와 열 살짜리 아들에게 주고, 행복하게 살라는 말을 남긴 채 주민등록증만 가지고 집을 나왔다. 친구 집에서 며칠을 보내고 있는데 헤어진 아내로부터 문자가 왔다.
“당신 통장에 3억원 넣었어. 오피스텔이라도 한 채 구해봐. 고마웠어, 그리고 안녕.”
“오피스텔이라…, 나도 고마워.”
S씨는 이왕이면 서울을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매어 있는 사업체가 문제였다. 이곳저곳 살 만한 집을 찾아 헤매다가 얼마 전에 인테리어를 해준 기억이 있는 개포주공 7.5평을 떠올렸다. 지난 삶에 대한 회한과 가슴에 가득 담은 열을 식혀줄 곳은 산속에 있는 작은 아파트가 최고라는 생각을 해냈다. 그해 7월, 직접 인테리어를 새로 할 요량으로 개포주공 7.5평을 2억6000만원에 샀다. 당시에도 평당 3500만원 가까이 되는 비싼 아파트였다.
“엄청 비싸네. 방 한 칸짜리 아파트가 금값일세….”
“그 돈 주고 왜 그렇게 작은 평수를 사냐? 나 같으면 강북에 34평을 사겠다.”
은마아파트. ‘전국적인 관심’을 끌고 있는 강남 중층 재건축 대상이지만 미래는 불투명하다.
“내 인생에 기름을 뺄 필요가 있어. 될수록 작은 공간이 필요해. 그동안 내가 너무 방만하게 산 것 같아서….”
“어이구, 차라리 절로 들어가지?”
침실 1칸, 보조주방 1칸, 낡은 창틀, 곧 떨어질 것 같은 화장실 문짝, 때에 전 변기 하나, 세면대 하나, 싱크대 1개, 4평짜리 모노륨 바닥이 이 아파트의 전부였다. S씨는 영화에서 본 ‘빠삐용 감옥’이 떠올랐다고 한다. 딱 여섯 발자국 불러서면 벽과 마주치는 공간, 다행인 것은 2층집이어서 창밖으로 나무가 보인다는 점이었다.
개포주공 2단지에는 7.5평짜리 소형아파트 460가구가 있다. 4평짜리 방 1칸과 1.4평짜리 주방공간이 있고 화장실 크기는 0.72평, 0.5평짜리 베란다도 붙어 있다. 평수는 박지만 개포주공 2단지에서는 대우받는 아파트다. 일단 총 가구수가 460가구로 2단지 전체 가구수 1400가구의 30% 이상을 점유하는 대표 평형이다. 따라서 7.5평짜리 아파트 집주인들의 허락 없이 개포주공 2단지의 재건축은 요원하다.
7.5평 소유자는 당초 기대 용적률 278%로 시뮬레이션을 했을 때 25평형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2005년 2월, 개포주공 저층 아파트 재건축 용적률을 177%로 한 강남구청 주민공람이 시행되면서 예상평형은 18평형으로 내려앉았다.
“18평 받아가지고는 재건축 안 할 겁니다. 요즘 누가 새 아파트 18평에 살아요? 지금 우리 집은 초소형 평수라 더 이상 낡을 것도 없어요. 보증금 500만원에 38만원 월세 받고 있는데 그 정도면 버틸 만해요. 될 때까지 기다려볼 겁니다.”
개포주공 7.5평이 전 재산이라는 인근 슈퍼마켓 아주머니의 생각이다. 그래도 재건축 덕분에 아파트 가격은 쑥쑥 올랐다. 2000년 1억원을 시작으로 1억4000만, 1억9000만, 2억3000만, 2억7000만, 3억3000만, 3억6000만원으로 해마다 올랐고, 올해도 4억3000만원대를 유지하고 있다. 연 평균 20%의 상승률이다.
S씨는 녹음이 짙은 개포공원 벤치에 캔 커피를 손에 들고 앉아 씩~웃음짓는다.
“7.5평 아파트가 오르면 얼마나 오르겠어요. 이 아파트 가지고 투자니 재테크니 옥신각신한다는 게 우습잖아요. 그냥 이대로 자연 가까이에서 묻혀 살다가 상황 변하면 떠나는 거죠 뭐. 이곳에 와서 마음이 차분하게 정리됐습니다.”
그가 ‘딱’소리를 내며 커피 캔 뚜껑을 연다. 커피 향과 대모산 청정공기가 어우러지고, 내가 밟고 있는 이 시간의 소박한 행복이 느껴진다. 세상 모든 게 생각하기 나름이다. 사람들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이 ‘바로 지금’이란 걸 잘 모르는 듯도 하다.
15평 아파트와 종부세
20년 전만 해도 개포주공 고층 단지에는 잘사는 사람들이, 저층단지에는 서민들이 살았다. 지금은 저층단지가 오히려 비싸다. 주거시설은 여전히 열악하다. 난방시설이던 연탄아궁이가 도시가스로 교체되긴 했어도 방 2칸, 화장실 1곳의 낡은 아파트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이 작은 평형 아파트 단지에도 불청객은 찾아왔다. 15평 이상 아파트에 종합부동산세가 예고됐다. 자진신고 납부기간은 2007년 12월1일부터 15일까지. 노무현 정부가 주고 가는 마지막 선물이다.
올해 주택공시가격은 작년 대비 평균 40% 이상 올랐다. 15평형 기준으로 총 공시가격은 약 7억원. 덕분에 15, 16, 17, 18평형은 종부세 부과 대상 아파트가 됐다. 이런 추세가 이어진다면 2008년엔 11, 13평형도 종부세를 내야 할 것 같다. 최고 평수인 18평형의 올해 종부세는 1000만원이 넘는다.
공판장, 공중목욕탕, 은행 없는 상가, 거실과 주방에 달린 30와트 백열등, 아파트 관리비 10만원 고지서, 전세금 1억2000만원, 월세 70만원의 서민 아파트에 날아들 종부세 고지서. 낡고낡아 페인트 벗겨지고 뚜껑 다 떨어진 아파트 우편함에 종부세 고지서가 웬말인가.
2005년 8·31 대책으로 인해 종부세 과세는 본격화됐다. 2007년에는 과표적용률이 80%이고 2008년에는 90%, 2009년에는 100%가 된다. 가만히 있어도 몇 년 뒤면 지금보다 많은 보유세를 내게 돼 있다. 종부세 입법 논의가 활발하던 2003, 2004년 기준으로 고가였던 ‘6억원’짜리 집은 이미 서울에서 ‘고가’ 타이틀을 붙이기 민망한 수준이다.
강남의 한강변 재건축 대상 아파트들 중에는 한강 조망이 탁월한 입지를 가진 곳이 많다.
개포주공 주민들이 더욱 혀를 차는 ‘황당 사건’은 2006년 5월24일에 생겨났다. 재건축초과이익환수에 관한 법률의 제정이 그것으로, ‘재건축’이라는 이름으로 발생한 이익은 정부가 세금으로 거둬갈 수 있게 됐다. 재건축사업 시작 시점인 추진위원회 승인일이나 재건축조합인가일로부터 재건축사업 종료일인 준공인가일까지의 아파트가격 상승금액이 정상주택가격의 상승분보다 높을 경우 그 차액의 최대 50%를 세금으로 부과할 수 있다는 게 주요 내용이다. 소형평수의무비율, 개발부담금, 임대아파트, 기반시설부담금제에도 무덤덤하던 개포주공 주민들이 공판장 앞 치킨 집에서 생맥주잔을 놓고 쓴소리를 낸다.
“기가 막히구만. 별의별 법을 다 만드네. 아예 집을 가져가든가…쯧쯧.”
개포주공은 어찌 보면 온갖 풍상을 다 겪는 것 같기도 하다. 잠실주공과 반포주공이 누린 재건축 성공신화를 지켜보았고, 재건축 기대감을 소재로 10년 동안 아파트 가격은 꾸준히 올랐다. 하지만 무차별 규제의 한가운데에서 점차 재건축이 현실 불가능한 사업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누르기만 하는 정부와 온갖 루머를 퍼뜨리며 기대치를 부풀리고 차익을 실현하려는 하이에나 같은 투기꾼들, 그리고 투자와 주거 사이에서 방황하는 실거주자들. 갈 길 잃은 개포주공은 강남의 마지막 ‘어린 양’이다.
은마아파트는 총알받이?
대치동. 국내 최대의 학원가이며 명문학군의 대표지역이다. 이곳에 7만3000평의 큰 땅이 있다면 평당 얼마쯤 할까? 시행사나 건설사들에게 입찰을 부쳐 아파트를 짓게 해준다면 틀림없이 1평당 1억원 이상을 써내는 회사가 있을 것이다. 3호선 대치역과 적당히 상업화한 당대 최고 학군을 낀 아파트타운, 특급 주거지. 그곳에 네모반듯한 평지 7만3000평을 깔고 앉은 재건축 대상 중층 아파트가 은마아파트다.
1979년식 4424가구로 31평형이 2674가구, 34평형이 1750가구 있는 복도식 아파트다. 31평형은 대지지분이 14.6평, 34평형은 16.3평이다. 31평형은 방 3칸에 화장실 1곳, 34평형은 방 4칸에 화장실 2곳이다. 오래 버텨서 돈 불리기 재건축을 기대한다면 이런 경우 당연히 34평형을 사야 한다. 화장실이 2곳인 데다 재건축에 들어가면 아무래도 더 큰 평수의 새 아파트를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허나 안전진단도 거절당하고 근래 들어 쏟아지는 재건축 규제로 인해 지치고 지친 은마 31평형과 34평형의 시세 간격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앞으로도 은마 재건축은 수월해 보이지 않는다. 이유는 딱 하나. 모르는 사람이 없는 강남 중층 재건축의 대명사가 됐기 때문이다. 시골 사람들도 표지 보상금을 받으면 일단 은마를 산다. 지명도 높고 떠들썩한 것은 뭐가 되도 될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은마의 거주여건은 실상 과히 좋지 않다. 지하주차장이 없어 아파트를 둘러싼 빈 공지는 주민들의 차량으로 발 디딜 곳 없이 꽉 차 있고, 물을 틀면 수압이 약하며, 난방도 열악하다. 설비와 배관이 낡아 거실 라디에이터는 소음을 쏟아내기 일쑤이며 수도꼭지에서 녹물이 흘러나오는 경우도 적지 않다. 복도식 아파트로, 공용공간은 음침하다.
집주인은 대부분 떠나고 교육기반시설을 좇아 각지에서 2억5000만원 이상의 전세금을 내놓고 전입해 온 세입자가 점령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은마는 기존 용적률이 185%로, 현행법상에서 재건축을 하려면 1대 1 재건축밖에 방법이 없는데도 워낙 위치가 좋아 매수세가 여전히 살아 있다. 아무리 찾아봐도 미래가치가 있어 보이는 강남 아파트 가운데 현재 시점에서 전세 끼고 10억원으로 살 만한 물건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은마는 그 유명한 한보가 시공사다. 1977년, 하천 주변 습지에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4424가구의 매머드 단지가 섰다. 때마침 불어닥친 부동산 바람은 한보를 30대 그룹에 올려놨다. 정태수 사장은 수십년간 은마아파트 단지 내 상가 상층부를 한보의 사옥으로 썼다. 시초에 큰돈을 벌게 해준 그곳이 ‘되는 자리’라는 강한 믿음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30년, 승승장구하던 정태수씨는 감옥을 드나들다 고액체납자 1위가 됐고, 한보가 소유한 은마상가는 경매에 부쳐져 새 주인을 찾았다.
재건축이 되기만 하면 동부센트레빌이 안 부러울 은마아파트. 시간이 지날수록 주민들도 새로운 생각을 해내고 있다. 땅이 넓고 복도식이라 리모델링을 해도 좋으련만 재건축만 바라본 은마 주인들에게는 성이 차지 않는다.
“차라리 땅의 절반을 떼줄 테니 남은 땅에 주상복합을 짓게 해주세요.”
잠실주공 5단지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이곳에서도 나온다. 정부도, 서울시도, 아파트 주민도 부동산 가격이 정상화돼야 합리적 사고를 되찾을 것 같다. 지금 당장 풀어줄 것 풀어주고 내놓을 것 내놓고 적정 용적률, 적정 평형으로 재건축한다면 국내 최고 가격 아파트가 들어서고도 남을 만한 위치와 공간. 그렇지만 세월의 변화에 따라 쌓여가는 두려움. 그 적정 시점을 놓치지 않으려는 조바심이 지금 은마의 얼굴에 드리운 그늘이다.
‘한강변 빅3 아파트’의 내일
삼성동 아이파크 옆에는 강변으로 늘어선 3곳의 재건축 대상 아파트가 있다. 청담동 한양과 삼익, 삼성동 홍실. 이 아파트들이 강남에서는 그다지 드러나지 않은 블루칩이다. 가장 큰 이유는 희소가치를 지닌 한강변 아파트라는 것이다.
이들 중 1981년식 청담동 한양아파트가 종전 아파트를 철거하고 ‘GS자이’로 재건축 중이다. 기존의 672가구는 708가구로, 12층은 27~35층으로 거듭나게 된다. 종전 평형은 18, 29, 32평형인데 나중엔 21, 33, 36평형으로 바뀐다.
청담 GS자이는 2001년 안전진단통과 및 조합설립인가를 받았으니 2006년 철거 및 착공까지 딱 5년이 걸렸다. 2010년 1월이면 전가구가 한강을 조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프리미엄 아파트가 한강변에 등장할 것으로 보인다.
2006년 11월 재건축승인인가를 받아 기반시설부담금, 개발이익환수금의 규제는 피했지만 2층, 3층에는 36가구의 원치 않은 임대아파트를 넣어야 했다. 그러나 종전의 방 2칸, 화장실 1곳의 18평형 소형은 방 2칸, 화장실 2곳, 거실과 양면 발코니를 가진 21평형 아파트로 다시 태어난다. 베란다를 트면 7평 정도의 전용공간이 늘어날 수도 있다.
동·호수 추첨도 상식적이다. 저층부터 상층부까지 종전 층수를 기본으로 낮은 층은 낮은 층을, 높은 층은 높은 층을 배정받을 권리를 갖는다. 다만 평형별로 타입에 따라 한강 조망 방향과 각도가 달라진다.
이런 경우라면 2007년 7월 동·호수 추첨이 있기 직전 매물을 구입해도 비교적 안전하다. 추첨 전이라야 조합원끼리의 동·호수 조정이 가능하기 때문. 동·호수 추첨이 끝나면 로열층에 당첨된 로열평면 아파트는 수억의 프리미엄이 추가로 붙기 쉽다. 그러나 지금 과감히 물건을 사는 데도 제약이 따른다. 2007년 3월부터 시행 중인 총부채상환비율(DTI)의 적용으로 대출이 어렵고 이미 대출된 이주비도 승계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목돈이 있어야 한다.
1980년식 청담동 삼익은 5년 전에 롯데건설을 시공사로 선정했다. 주민들은 당시만 해도 롯데캐슬이 삼성동 아이파크를 능가할 것으로 내다봤다. 아이파크보다 땅 면적이 넓고(약 2만평) 단지 내부가 평지인데다가 청담대교를 따라 강남으로 들어오는 7호선 철교의 열차풍경 등 한강 조망권이 압권이기 때문이다.
처음엔 모든 게 수월했다. 2001년 안전진단을 통과했고 2003년 조합설립인가를 받았다. 그러나 그 다음은 진행이 안 됐다. 지금 이 아파트의 재건축을 막고 있는 것은 전용면적 60㎡ 이하를 총 가구수의 20%, 85㎡ 이하를 40% 지어야 하는 소형평수 의무비율제도다.
2003년 9월에 다시 생겨나 2004년 5월에 확대된 이 제도는 총가구수 888가구로 기존 아파트 평수가 35, 46, 54평형인 삼익아파트 같은 경우에는 최악의 규제다. 용적률을 2배로 늘려주지 않는 이상 전용 25평인 35평형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 전용면적 18평짜리 25평형 아파트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 법이 존재하는 한 중층 아파트인 삼익아파트의 재건축은 거의 불가능하다.
바로 옆 단지 홍실아파트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2002년에 안전진단을 통과하고 조합설립인가까지 받아놨지만 용적률 210%에 소형평수의무비율의 규제가 발목을 잡고 있다. 31, 35, 54평형 384가구로 구성돼 있어, 현행법을 따르면 역시 31평형대 주민은 25평형 미만으로 입주해야 한다.
홍실아파트는 1981년식으로 청화기업이 시공했다. 청화기업은 이태원 청화아파트, 영동 해청아파트, 대치동 청실아파트 등을 건설했다. 홍실은 총층 12층으로 6개동, 7760평의 네모난 부지를 가진 한강 조망권 아파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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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은초등학교가 단지 안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바로 옆에 삼성동 아이파크가 있어 제대로만 지어진다면 신축 후 아파트 가격형성은 걱정할 필요가 없는 입지조건을 갖췄다. 선정된 설계회사는 삼성동 아이파크와 같은 건원건축이고 시공사는 대림산업이다. 대림산업은 2001년 시공사로 선정됐지만 규제에 묶여 재건축 법규가 바뀌기 전에는 ‘키가 닿지 않는 곳에 매달린 포도를 바라보는’ 이솝우화 속 여우와 같은 꼴이 됐다.
강남은 못 말리는 동네다. 남과 다른 생각, 다른 각도로 보지 않으면 들어오기 힘들고, 그 안에서 앞서가기는 더 어려운 특별한 곳. 서울시내 100채의 아파트 중 10채가 강남구에 있고 그 가격은 턱없이 비싸다. 1억원 이상 가는 외제차를 모는 사람의 35%가, 또한 4500개의 입시학원이 이곳에 있다.
정부는 강남 수요 분산을 위해 강남 재건축을 규제하고 동탄 신도시를 내놨지만 상황은 엉뚱하게 바뀌기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