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7월호

‘허준’ ‘올인’ ‘주몽’…연타석 홈런 드라마작가 최완규

갈고 닦은 ‘극적 본능’으로 ‘시청률 괴물’과 맞짱

  • 장세진 자유기고가 sec1984@hanmail.net

    입력2007-07-06 11: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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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청률은 작가에 대한 ‘간섭’과 ‘자유’ 가르는 리트머스”
    • “내 작품과 맞붙은 작가, 배우들에게 미안”
    • 작가 30명 거느리고 미국 드라마 시스템 지향
    • 병원에서 2년 숙식하며 쓴 ‘종합병원’으로 화려한 데뷔
    • “천재 시인은 있어도 천재 작가는 없다”
    ‘허준’ ‘올인’ ‘주몽’…연타석 홈런 드라마작가 최완규
    여의도 작업실 문을 밀치고 들어섰을 때 그는 통화 중이었다. 인터뷰를 시작한 후에도 그의 휴대전화는 쉬지 않고 몸부림을 쳤다. 불과 20분 사이 그는 다섯 통의 전화를 받았고, 그중 두 통은 심각한 내용인지 내실로 들어가서 통화를 하고 나왔다. 올림픽대로를 줄지어 달리는 자동차들과 한강을 오가는 유람선이 한눈에 들어오는 작업실 창가에 서서 그가 급한 불 끄기를 기다렸다. 방송작가에게 저렇게 급한 일이란 대본말고는 없을 터.

    시청률은 ‘萬事’

    한참을 여기저기 통화하고 나서 마주앉은 그는 기다리게 한 것이 미안했는지 묻지도 않은 말을 불쑥 꺼냈다.

    “방송동네라는 곳이 시청률만 높으면 시비 거는 사람이 없어요. 그런데 시청률이 예상보다 저조하면 별의별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고 사공이 많아집니다. 그래서 작가에게 어느 정도의 시청률은 외부의 간섭 없이 극을 이끌어갈 수 있는 담보가 됩니다. 시청자 불만이 많고 극의 개연성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사람이 많아도 시청률이 높으면 방송사 관계자나 연기자들도 작가에게 불만을 토로하지 않죠.”

    작가 최완규(崔完圭·43)가 시청률 얘기를 꺼낸 것은 MBC 드라마 ‘에어시티’와 관련한 전화를 받은 때문이었다. 출입제한구역이 많은 인천공항 내에서 주로 촬영되는 탓에 현장 진행속도가 더딘데다, 최지우와 이정재라는 특급배우들을 기용했지만 동시간대에 맞붙는 KBS1의 ‘대조영’에 밀려 10%대 초반의 시청률에 머물고 있다.



    더 이상 꼬치꼬치 묻지 않았다. 그의 말 행간에서 ‘시청률이 만사’라는 방송판의 ‘진리’를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시청률이라는 족쇄는 이쪽 밥을 먹는 사람에겐 피치 못할 숙명이다.

    시청률 얘기를 하자면 그는 어느 작가 부럽지 않다. 4%로 시작해 50%로 종영한 ‘야망의 전설’을 시작으로, ‘국민 드라마’라 불리며 시청률 50%를 훌쩍 넘겨 롱런한 ‘허준’ ‘올인’ ‘주몽’이 그의 손끝에서 창조됐으니 말이다. 그런 그가 다른 드라마의 높은 시청률에 치여 애면글면하는 것을 보면서 인생의 묘한 순환을 실감한다.

    “네티즌들은 참 엉뚱한 통계를 잘 냅니다. 얼마 전 인터넷 서핑을 하다 시청률 최하위 작품 목록을 발견했는데, 10개 중 9개가 ‘허준’ ‘올인’ ‘주몽’ 때 맞붙은 작품이었어요. 예전 같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겠지만, 이제 저도 제작자의 처지가 되고 보니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가 않더군요. 그때 저와 맞붙은 작가나 제작사, 출연배우들이 받았을 스트레스를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작가에게 시청률은 상대 프로그램을 밟고 일어서야 하는 전쟁이다. 과거의 그라면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태도였겠지만 경륜이 쌓이고 회사의 대표가 되면서 최완규 작가는 확실히 변했다.

    ‘주몽’과 선배 작가의 죽음

    무너져가던 ‘드라마 왕국’ MBC의 숨통을 시청률 고공행진으로 틔워준 최근작 ‘주몽’은 그에게 여러 가지를 생각케 했다.

    “방영 2주 만에 시청률이 25%를 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30% 중반까지 가파르게 올라갔어요. 생각지 않게 시청률이 30%, 40%를 넘어갈 때마다 방송사에서 꽃바구니를 챙겨 보냈어요. 그런데 ‘주몽’을 시작하고 열흘도 안 돼 조소혜 선배가 세상을 떴습니다.”

    2006년 5월24일 그는 참담하게 우울했다. ‘첫사랑’(1997년)으로 한국 드라마 역대 최고 시청률 기록(65.8%)을 세운 선배작가 조소혜씨가 영면에 든 날이기 때문이다. ‘젊은이의 양지’ ‘엄마야 누나야’ ‘회전목마’ 등 시청자의 사랑을 듬뿍 받은 작품을 쓴 조씨는 고작 쉰 해를 채우고 세상을 떠났다.

    드라마 작가모임에서 친하게 지내던 선배이자 동료였던 조소혜 작가는 프랑스에 장기간 머물 계획으로 출국했다. 소화가 안 돼 현지 병원을 찾았다가 프랑스 의사의 권유로 급히 귀국해 종합검진을 받은 끝에 말기 간암 판정을 받았다. 이미 손쓸 도리가 없었고, 입원한 지 한 달 만에 세상을 등졌다.

    ‘허준’ ‘올인’ ‘주몽’…연타석 홈런 드라마작가 최완규
    다른 원인도 있겠지만 조 작가의 죽음에는 과도한 시청률 스트레스가 작용했다고 그는 믿고 있다. 조 작가는 짧은 투병 기간 병문안을 온 한 방송 연출자에게 “아침마다 받아보던 ‘맨발의 청춘’ 시청률표가 말기 간암 판정보다 더 두려웠다”며 시청률 스트레스를 토로하기도 했다. 조 작가는 ‘맨발의 청춘’이 시청률이 저조해 조기 종영되면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고, 이를 만회하기 위한 작품을 구상하려고 프랑스로 떠난 것이었다.

    “임종을 지켜보고 나오는데 걷잡을 수 없이 우울해지는 겁니다. 내 사는 꼴이 보이는 거예요. 저는 조 선배보다 더하면 더했지 나을 게 없었어요. 가정도 꾸리지 않았고, 건강도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였어요. 저도 선배처럼 시청률과 일의 덫에 허우적거리다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뜨고 마는 건 아닐까 싶어 정말 가슴이 콱 막히더군요.”

    그는 건강이 좋지 않다. 1년째 약으로 버티고 있는 당뇨가 언제 합병증을 일으킬지 모른다. 두 달에 한 번씩 병원을 찾지만 의사는 “무조건 쉬라”는 말을 되풀이하며 야단을 친다. 몸무게를 지금보다 15kg은 줄여야 하는데, 숨쉬기운동만 하는 그에게 다이어트도 여의치가 않다.

    선배의 죽음 이후 ‘주몽’은 승승장구했다. 조기 종영이라는 초강수로 작가를 내친 방송사는 꽃바구니를 보내고 일찌감치 연장 방송을 검토했다. 시청률이 모든 것을 말하는 방송동네의 생리는 그렇듯 냉혹했다.

    그러나 시청률이 높다고 작가가 마냥 즐거울 수는 없었다. ‘주몽’을 두고 역사 고증 문제와 연장방송으로 인해 느슨한 극의 전개, 허술한 전투신 등에 대해 드라마 게시판에 신랄한 비판이 쏟아졌다. 작가는 시청자의 지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베테랑이 될수록 이런 비판은 더 뼈아프다.

    “고증 문제에 대해서는 별 자책감이 없어요. 역사가 없는 그 시대를 누가 철저하게 고증하고 진실 여부를 판가름하겠습니까. 저는 역사를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역사를 현재에 되살려내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런 비판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극의 밀도가 떨어지고 긴장이 풀어졌다는 지적은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반성하고 있습니다. 시청률이 높았던 것은 운이 좋았죠. 쉽고 단순하게, 그리고 많은 사람이 즐길 수 있는 드라마를 쓰자는 첫 기획의도가 먹혀든 것 같아 만족해요.”

    작가의 한계도 있었지만 연출에서도 규모에 맞지 않은 전투신이나 연출로 욕을 먹었다. 그는 “연출력의 문제가 아니라 방송환경 문제”라고 지적했다.

    “일주일에 두 편의 사극을 제작하는 일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에요. 한정된 제작비와 촉박한 방송일정에 맞춰 그만한 퀄리티의 작품을 내놓은 것은 제작진이 기적 같은 일을 해낸 겁니다. 방송환경 전체를 놓고 가할 비판이 ‘주몽’ 제작진에 쏟아지는 것은 가혹하죠.”

    작가, 그 이상으로 산다는 것

    그는 자주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비벼 끈 꽁초가 반 갑 가까이 됐다. 보루째 사다놓은 담배꾸러미가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시간을 내 맘대로 쓸 수 없는 것이 가장 힘들어요. ‘주몽’ 연장 방송을 하면서 대본을 쓸 때도 힘들었지만,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았어요. 괜히 욕심을 부린 것 같아요.”

    왜 아니겠는가. 작품 하나에 매달려 있을 때에도 부단히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자학에 가까운 글쓰기를 하는 그가 요즘처럼 여러 작품에 매달려 시간을 쪼개 쓰는 일이 쉽지 않을 터다. 혼자 사는 오빠를 위해 일주일에 한두 번 들러 살림을 돌봐주는 막내 여동생이 그가 전화기에 매달린 사이 “거절을 못하는 성격이라 고생을 사서 해요”라며 측은한 눈길을 보낸다.

    작가 최완규는 ‘홀몸’이 아니다. 그는 30명이 넘는 작가를 거느린 ‘에이스토리’의 대표를 맡고 있다. 미국식 작가 시스템을 동경해 만든 에이스토리는 그에게 감당하기 버거울 만큼의 일을 안겨주고 있다.

    “2005년 회사를 설립해 3년째 실험을 하고 있어요. 전문성을 갖춘 ‘ER’이나 ‘24’ 등 미국 드라마는 십수 명의 작가가 붙어서 퀄리티 높은 드라마를 만들어내고 있잖아요. 전문 직업군(群)을 다룬 드라마를 작가 혼자서 만드는 시대는 갔습니다. 작품성 있는 연속극이나 대하 드라마라면 한 작가가 일관성을 가지고 가야겠지만, 전문성이 필요한 주간 단막극이나 미니시리즈는 미국식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최고의 흥행을 기록하는 드라마 작가가 독불장군 대신 한국 드라마에 발전적 모델을 제시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시행착오로 치러야 하는 금전적, 정신적 손실이 생각보다 크다. 그는 드라마 작가의 저변이 넓지 않은 점과 공동창작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실정을 그 이유로 꼽았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파이’다. 많은 작가가 함께 일하면 한정된 집필료를 나눠 갖느라 배가 고파질 게 뻔하다.

    ‘허준’ ‘올인’ ‘주몽’…연타석 홈런 드라마작가 최완규

    최완규의 대표작 ‘허준과’ ‘올인’.

    “미국 드라마는 한 작품에 소속된 작가도 많지만, 전체 기획을 하는 크리에이터 아래 검증된 기성 작가가 여럿 있고, 그런 작가들 아래 여러 명의 라이터가 소속됩니다. 실력 있는 기성 작가들이 공동작업에 참여하는 것은 그만한 대우를 받기 때문이죠. 우리의 경우 대표작가 한 사람에 초짜(초보) 작가 서넛이 보조합니다. 지금의 집필료 수준으로는 그렇게밖에 팀을 짤 수가 없어요.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미국 드라마는 시장이 클 뿐 아니라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이 세계적으로 판매되기 때문에 그런 대우가 가능합니다. 다행히 우리에게도 한류를 타고 시장이 넓어졌습니다. 미국이나 유럽을 공략하는 데는 한계가 있겠지만 20억 아시아시장이 있으니 잘 만들면 분명히 팔릴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시스템이 미국처럼 되는 것도 시간 문제겠죠.”

    하지만 현재의 무게가 너무 버겁다. 괜히 총대를 멨다는 생각이 들 법도 하다. 오죽하면 한 달 전쯤에는 모든 것을 버리고 숨고 싶다는 생각도 했을까. 그러나 그는 도망치지 못했다.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가 사라지면 남은 사람들이 겪을 혼란이 얼마나 클 것인지를 알기 때문이었다.

    암전 같은 20대, 그리고 서른 잔치

    그는 확실히 너무 많은 일을 벌여놓았다. 현재 방영되고 있는 ‘에어시티’와 오는 7월 촬영에 들어가는 120억원 규모의 ‘식객’, 주몽의 손자를 주인공으로 한 ‘대무신왕’, 2009년에 들어갈 ‘올인2’, 그리고 논의되고 있는 여러 작품. 그가 사라진다는 것은 드라마계의 재앙이다. 그가 감옥 같은 작업실을 지킬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제 작가 최완규의 과거라는 우물에 두레박을 내려 보낼 시간이다.

    그는 미래에 글쟁이가 될 것이라는 막연한 꿈 하나만 믿고 20대를 보냈다. 사춘기도 좌충우돌이었다. 책은 넘치도록 읽었지만 공부는 늘 뒷전이었다. 소설뿐 아니라 이념·철학서적까지 두루 섭렵한 그는 친구들을 물들이던 불온한 고교생이었고, 통과의례처럼 가출까지 감행한, 커서 뭐가 될까 걱정스럽던 막내아들이었다. 재수 끝에 대학에 진학했지만, 대학시절이라고 방황하는 젊음이 정착할 리 만무했다. 1학년 말 성적은 학사경고.

    이럴 때 군대는 참 편한 돌파구다. 제대 후 학교로 돌아갔지만 끝내 졸업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백수가 됐고, 간혹 공단의 떠돌이 일꾼이 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책을 읽거나 TV 앞을 지키다 20대가 저물어갔다.

    그에게 서른은 청춘의 무덤이자, 새로운 인생의 출발점이었다. 서른이 되던 1993년 MBC베스트극장 드라마 공모에 당선되며 작가의 길이 열렸다. 그러나 생각하던 것처럼 인생을 바꿔놓을 만한 사건은 아니었다. 한 달 50만원의 월급을 받으며 1년간 작가수업을 받는 특전을 부여받았을 뿐이다.

    1년이 지났을 때 그는 함께 공부한 7명 중 낙오된 5명에 속했다. 매달 한 편씩 내야 하는 작품 숙제를 매번 건너뛰었고, 어쩌다 한 편 내는 작품도 탄광촌을 배경으로 한 무겁고 어두운 주제의 작품이라 평가도 후하지 않았다.

    작가를 포기해야 할 기로에 있을 때 드라마 ‘종합병원’ 보조작가 제의가 들어왔다.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닌지라 열심히 기획안을 만들었고, 기획안이 채택돼 병원 현장 취재를 시작했다. 방송 시작 6개월 전부터 그는 병원에서 생활하며 의사들의 삶을 밀착 취재했다.

    그런데 드라마를 쓰기로 한 작가가 사정이 생겨 작품이 무산될 위기에 놓였다. 전문성을 요하는 의학 드라마라 대체 작가를 찾을 수도 없는 상황. 그런 위기에 기회가 왔다. 연출자가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은 표정으로 대본을 써보라고 제의했다. 신인작가에게 주간 단막극을 의뢰하는 일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하지만 그는 거짓말처럼 1년6개월 동안 73회의 ‘종합병원’ 대본을 성공적으로 집필했고, 작가로서 입지도 굳혔다.

    “종합병원은 저를 알린 출세작이기에 특별한 작품이지만, 내 인생에서 그보다 더 치열하게 산 적이 있을까 할 정도로 열심히 만든 것이기에 더 특별한 의미가 있어요. 서른 이전의 꼬이고 불투명한 인생이 이 작품을 계기로 술술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방송운은 줄곧 내 편이었어요.”

    두 번째 작품은 ‘그들의 포옹’이었다. 이영애, 김승우, 안재욱, 최민식 등이 출연했지만 당시 그들은 겨우 얼굴이 알려지기 시작한 신인 연기자들이었다. 어지간한 드라마광이 아니면 기억 못하는 작품이다. 다시 쓴다면 정말 잘 쓸 수 있는 작품목록 첫 번째에 놓아두었다.

    “올해 81세인 노모가 가장 훌륭한 시청자 평가단입니다. ‘종합병원’ 때 소감을 물었더니 좋았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눈물이 핑 돌더군요. 그런데 ‘그들의 포옹’을 보신 후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셨어요. 실패한 거죠. 저는 어머니가 보시기 좋은 드라마 대본을 쓰고 싶어요. 그렇게 쓰면 시청자의 절반이 쉽게 볼 수 있는 드라마가 될 겁니다.”

    가족에게 바치는 선물

    ‘허준’ ‘올인’ ‘주몽’…연타석 홈런 드라마작가 최완규
    세 번째 작품인 ‘간이역’도 아쉽기는 마찬가지다.

    “어릴 때 재미있게 봤던 ‘월튼네 사람들’ 같은 주간 단막극을 써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런 따뜻하면서도 재미있는 가족 드라마를 쓰기엔 제 연륜이나 경험이 너무 부족했어요. ‘간이역’을 좋게 기억해주는 시청자나 연출자들이 있어요. 못내 아쉽죠.”

    두 번의 고배를 마시고 쓴 작품이 ‘야망의 전설’이다. 2004년에 쓴 ‘폭풍 속으로’처럼 형제간의 엇갈린 운명을 통해 현대사를 조명한 작품이다. 이 두 작품의 촬영지는 울진 죽변이다. 바로 그가 태어난 곳이다. 작가에게 고향은 작품의 무대로 삼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지금도 이곳에서 둘째형이 노모를 모시고 살고 있다.

    “칠남매의 여섯째인 저는 집안의 유일한 근심거리였어요. 어머니는 물론 다른 형제들도 저의 끝갈 데 없는 방황 때문에 속을 끓였습니다. 수재였던 큰형님이 서울대 공대에 입학한 후 둘째형은 일찌감치 생활전선에 뛰어들었어요. 대책 없는 20대의 10년 동안 둘째형이 번 돈으로 공부도 하고 용돈도 받아 썼죠. 형에게 늘 마음의 빚을 안고 있었습니다. ‘야망의 전설’과 ‘폭풍 속으로’를 쓰면서 죽변을 촬영지로 삼은 것도 형에게 진 마음의 부채를 조금이나마 갚자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저의 방황을 묵묵히 인내해준 가족들에게 바치는 나름의 선물이었죠.”

    초보 작가 시절이나 흥행작가로 알려진 지금이나 가장 어려운 것이 캐스팅이다. 지금까지 드라마를 쓰며 염두에 둔 배우를 캐스팅한 것은 ‘올인’의 이병헌 정도였다. 배우 복은 없는 편이다. 그런데도 작품은 거의 매번 성공했으니 반대로 배우들에게 작가 복이 있는지도 모른다.

    “배우 캐스팅하기가 힘들어요. 누구든 출연만 해준다면 고마워해야 할 지경입니다. 이병헌을 제외하면 톱스타급 연기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적이 없어요. 특히 사극은 배역 제의를 거절당하는 일이 다반사죠. 캐스팅에 별로 관여하진 않지만, 연출자와 적절한 인물이 누구일까 의논하면서 10순위까지 후보 연기자를 정하고 캐스팅을 하는데, 정말 맨 끝 순위에 올려놓은 배우가 낙점되는 일도 있었어요.”

    김수현 작가의 윤여정, 노희경 작가의 배종옥처럼 그에게도 페르소나 배우가 있을 법한데 없다. 매번 다른 성격의 흥행 드라마를 쓰기 때문이기도 하고, 특별히 선호하는 연기자가 없는 탓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최완규가 쓰는 작품인데도 배우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니 의외다.

    그런데 그는 배우 복만 없는 게 아니다. 십수년이 넘는 동안 많은 작품을 쓰고, 많은 인물을 창조했으면서도 그의 마음을 흡족케 하는 캐릭터조차 없다고 한다.

    “내세울 만한 캐릭터가 없어요. 제 작품들이 인물보다는 스토리 중심이기 때문이죠. 제 작품의 주인공인 허준이나 주몽은 영웅적이며 반듯하고 정의로워요. 사람 냄새는 안 나는 거죠. 김수현 선생의 1986년작 ‘사랑과 야망’에서 어머니 역을 맡은 김용림씨나 김운경 선생이 쓴 ‘서울의 달’에서 한석규가 맡은 역할 같은 게 정말 생생한 캐릭터의 전형입니다. 저도 언젠가는 드라마사(史)에 남을 만한 캐릭터를 창조하고픈 욕심이 있는데, 언제나 가능할지….”

    그나마 애정을 갖는 캐릭터는 ‘허준’에서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한 ‘임오근’이다. 원작에는 아예 없는 인물이고, 초반 몇 회에만 나오기로 돼 있던 미미한 배역인데, 임현식이 맛깔스럽게 연기하면서 재창조됐다. 작가나 연출자도 시간이 지나면서 임오근이라는 캐릭터에 욕심이 생겼고 비중도 높아져 ‘허준’이 끝나는 날까지 살아남았다.

    이야기꾼의 본능

    한 방송평론가는 작가 최완규를 ‘대중의 기호와 성감대를 포착하는 능력이 뛰어난 작가’라고 평했다. 그는 대중이 좋아할 만한 소재를 어떻게 찾아낼까.

    “소재를 찾아내는 일은 본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같은 드라마 작가에게는 극적 본능이란 것이 있습니다. 제겐 다행히 대중이 무엇을 좋아할지 감지하는 극적 본능이 잘 발달돼 있어요. 극적 본능이란 노력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요즘 드라마 작법 수업을 받아서 글 잘 쓰는 친구가 많아요. 그러나 글을 잘 쓴다고 드라마를 잘 쓸 수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재미없는 드라마를 아무리 잘 쓴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런 본능을 타고났다고 좋은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타고난 본능을 부단한 노력이 받쳐줘야 한다.

    “천재적인 시인은 있어도 천재적인 드라마 작가는 없다고 봅니다. 경륜과 경험도 중요하고, 다양한 간접체험도 필요합니다. 기성 작가들이나 연출자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최근 등장한 젊은 작가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랍니다. 당장은 감수성이나 영감으로 버틸 수 있겠지만 길게 보면 그들이 계속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들어요.”

    그가 ‘종합병원’을 집필하며 2년여를 병원에서 숙식하며 취재한 얘기는 유명하다. 심장수술을 하는 수술방과 응급실, 병실에 중환자실까지 그는 병원의 메커니즘을 의사 못지않게 잘 알고 있다. 현장에서 병원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며 이방인이 아닌 그들 자신으로 동화돼 살았기 때문이다. ‘올인’을 쓸 때는 카지노에 들락거리며 적지 않은 돈을 잃었던 것이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단순하게 취재 차원으로 이해하기에는 너무 많은 돈이었습니다. 만일 ‘올인’ 시청률이 낮았다면 문제가 됐을 겁니다. 다행히 시청률이 높아 작가가 경험을 위해 투자한 것으로 이해해주더군요.”

    치밀한 작가적 감성을 가졌다지만 그럴 때는 무모하다. 억대에 가까운 돈을 카지노에서 날리며 취재를 하다니. 그는 주식투자로도 많은 돈을 잃었다. 주식투자에 대한 상식조차 없던 그는 한 지인의 투자 권유로 상당량의 주식을 매집했다 큰 손해를 입었다. 그 뒤로 주식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아는 분이 제 사주를 들고 유명 역술인을 찾아갔더니, 주식이나 도박을 해서 일확천금을 하는 운수가 아니라더군요. 그냥 하는 일만 열심히 하면 걱정 없이 산다는 사주풀이를 들고 와서 공돈 바라지 말고 그냥 대본이나 쓰면서 살라고 했어요. 그런데 작가는 다양한 경험을 해봐야 하지 않나요. 카지노와 주식에서 큰 손해를 봤지만 이것도 작가에겐 자산입니다.”

    현실과 드라마의 이중생활

    그의 일상은 재미없다. 작품 하나 끝마치고 여행 떠나는 것이 유일한 호사. 대본을 쓰거나 취재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TV 앞에서 시간을 보낸다. 재미없는 사람이 쓰는 재미있는 드라마. 아이러니다.

    “저는 그리 재미있는 인생을 살고 있지 않지만 드라마는 얼마든지 재미있을 수 있어요. 저는 TV 보는 일이 재미있어요. 재미있는 드라마를 보면 일주일이 즐겁습니다. 작가가 되기 전에도 TV를 많이 봤어요. 지금도 일하는 시간 외에는 거의 TV를 봅니다. 멍하게 앉아 홈쇼핑이라도 보고 있죠.”

    작가와 연출은 한 방향을 바라보면서도 가치관이 다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인간 최완규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단면이 발견된다.

    “방송을 하면서 체득한 처세술일지 혹은 저 자신이 원래부터 그렇게 생겨먹은 것인지 모르지만,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다툼이 없어요. 감독들은 모두 제가 편하다고 하는데 감독이나 연기자들이 요구하는 부분을 잘 받아들이는 편이에요. 작가의 자존심을 떠나 드라마는 작가의 머리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함께 만들어가는 겁니다.”

    그는 대립을 극도로 싫어한다. 병적일 정도다. 그러다 보니 양보는 그가 자연스레 선택한 처방이다. 아직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것도 부부간에 일어날 갈등을 예견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만나 사랑하는 중에 생겨날 오묘한 감정의 유희보다는 그에 따르는 갈등 상황이 더 두렵다. 습관적으로 갈등을 회피하는 자신이 비겁하다는 것을 그도 안다. 그러나 그는 가능하다면 그런 다툼을 피해가기를 바란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갈등과 긴장관계 조성이 일상적인 드라마를 쓰는지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의 말마따나 현실과 작품은 다른 것이 아닌가. 영웅화한 캐릭터들을 창조하면서도 소심한 이 남자. 최완규는 그런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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