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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드라마 ‘웨스트윙’ 통해 본 노무현 정부의 코드 정치

정적(政敵) 끌어들이는 포용력 대신 ‘야당에 떠넘기기’ 기술만 배워

  • 고재열 시사저널 정치팀 기자

미국 드라마 ‘웨스트윙’ 통해 본 노무현 정부의 코드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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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드라마 ‘웨스트윙’ 통해 본  노무현  정부의 코드 정치
노 대통령이 자신을 변호하며 예로 든 웨스트윙의 에피소드는 시즌4의 15회, ‘캘리포니아 의원선거’편이다. 재선(再選)에 성공한 민주당 바틀렛 대통령이 캘리포니아 47번 선거구에 하원의원으로 출마한 백악관의 샘 보좌관 지원유세에 참석해 마이크를 잡는 내용이었다. 노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드라마에선 끊어졌지만 연설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 아니냐”며 국내와 미국의 정치상황을 비교했다(드라마에선 대통령이 유세연단으로 올라가는 장면에서 화면이 바뀐다). 미국이 현직 대통령이 드러나지 않게 뒤에서 개입하는 방법을 썼다면 노 대통령은 앞에서 개입하고 이를 정당화하는 방법을 쓴 셈이다.

웨스트윙의 에피소드 중에서는 노 대통령과 관련된 일련의 정치적 논쟁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 많다. 알코올 중독과 약물 중독 문제로 사퇴 압력을 받는 비서실장 리오 멕게리를 보호하는 장면은 교육부총리에 임명됐다가 논문 표절 논란으로 낙마한 김병준 전 정책실장을 떠올리게 만든다.

드라마 에피소드 중에서도 우리 정치 현실과 겹치는 부분이 많다. 멘도자 대법관 임명을 관철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대목은 전효숙 헌법재판소장 지명자를 임명시키기 위해 청와대가 사력을 다하는 모습과 닮았다.

라틴아메리카계 하층민 출신으로 뉴욕 경찰을 거쳐 판사가 됐고, 동성결혼에 우호적인 판결을 내린 전력 때문에 의회의 인준에 많은 어려움이 예상되지만, 멘도자를 마침내 차기 연방대법관으로 지명하듯 노무현 대통령도 여성인 전효숙 재판관을 헌법재판소장으로 임명한다.

통치에 복속된 정치



웨스트윙의 매력은 바틀렛 대통령의 부드러운 카리스마에 기반을 둔다. 웨스트윙의 크리에이터 아론 소킨은 영화 ‘대통령의 연인’의 시나리오도 쓴 작가다. 그는 인간적이면서도 강한 카리스마를 가진, 대다수 국민이 갖는 ‘지도자에 대한 로망’을 만족시킨다.

웨스트윙은 ‘권력에 대한 로망’ 혹은 ‘백악관에 대한 로망’을 담고 있다. 거칠게 표현해서 대통령제에 대한 판타지라 할 수 있다. 내부 권력 투쟁도 없고 자기 사람 심기도 없다. 권력을 다루면서도 암투가 배제돼 있다. 모든 문제는 논쟁을 통해 결정하고 논리적으로 맞다면 정적(政敵)의 주장도 받아들인다. 드라마 속 대통령과 참모들은 늘 자신들이 소수자의 편임을 자부한다.

정치철학과 관련해 웨스트윙은 정치부 기자로서 후한 점수를 줄 수 없는 드라마다. ‘내가 하면 정치공학, 남이 하면 정치공작’ 식으로 정치공작이 미화됐기 때문이다. 드라마를 보면 ‘정치 드라마의 탈을 쓴 마피아 드라마’라 할 만큼 기자와 뒷거래하기, 의원 협박하기 등이 무시로 등장한다.

백악관의 참모들이 주인공인 까닭에 드라마에서 의회 정치보다 백악관 정치가 우선시된다. 정치보다 통치에 주안점을 둔 웨스트윙은 정치를 통치에 복속시킨다. ‘현대판 철인정치’를 구현하는 셈인데, 이는 현실과는 동떨어진다. 소수 정권이면서도 국회와 대립각을 자주 형성했던 노무현 정부 초기의 난맥은 혹시 이런 웨스트윙식 철인정치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웨스트윙을 보면 이 드라마가 대통령뿐 아니라 대통령을 따라 이 드라마를 애청한 청와대 비서진에게도 교본이 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당으로부터 ‘무슨 선도반이냐?’는 비난을 산 청와대 386 참모들의 적극적인 정치 개입 행태는 드라마 속 비서실 차장 조쉬와 공보차장 샘의 다양한 정치 공작과 겹친다.

특히 이들이 부통령을 다루는 방식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백악관 참모들은 차기 경쟁자가 될지도 모르는 부통령을 철저하게 길들이려 든다. 이 장면은 청와대 참모들이 정동영, 김근태 전 의장 등 여권 대선주자를 다루는 방식의 교본이 된 것 같다. 집권기간 내내 대통령에게 끌려다니며 아직도 홀로서기를 통한 자기 정치를 하지 못하고 열린우리당을 나가지도, 안 나가지도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그들 역시 청와대에 길들었기 때문은 아닐까.

소수파 의식을 공유한다는 점도 비슷하다. 이들에겐 사방이 적(敵)이다. 야당은 물론 여당 의원들도 적이고, 심지어 부통령도 적이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칼자루는 짧고 칼날은 길다. 하지만 칼날을 잡은 사람이 많다고 해서 칼자루를 쥔 사람이 다치는 것이 아니다. 결국 칼자루 쥔 사람이 칼날 잡은 사람을 베는 것이 권력의 생리다. 친노 정치인들은 이 평범한 진리를 외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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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열 시사저널 정치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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