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7월호

‘쩐의 전쟁’ 원작만화가 박인권의 사채업계 5년 체험

“아버지는 자살, 딸은 윤락가로… 사채는 암보다 무섭다”

  • 최호열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honeypapa@donga.com

    입력2007-07-06 11: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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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랜 무명시절 끝 대박 ‘쩐의 전쟁’ ‘대물’
    • 무담보 대출은 없다, 가장 무서운 게 ‘인보증’
    • 사채업자 최고의 ‘봉’은 군인, 공무원, 교사
    • 대부업체 이용자 절반이 20대 여성
    • 찜질방 전전하며 ‘발발이’ ‘박카스’로 뛰는 사채업자 말로
    • 사채 쓰는 건 자기 몸 일부 잘라내는 행위
    ‘쩐의 전쟁’ 원작만화가 박인권의 사채업계 5년 체험
    김대중 정부가 ‘카드대란’으로 임기를 마쳤다면 노무현 정부는 ‘사채대란’으로 종지부를 찍을 모양이다. 대부업체들이 케이블방송은 물론 공중파에서까지 인기 연예인을 앞세워 돈을 빌리라고 부추기는 만큼, 사채로 인한 피해를 호소하는 서민들의 절규도 늘고 있다.

    이런 분위기 때문일까. SBS 드라마 ‘쩐의 전쟁’은 방송 전부터 커다란 관심을 모았다. 사채업자의 독촉에 시달리던 아버지는 자살하고 그 빚은 고스란히 자식들에게 돌아간다. 여기서 상속포기 같은 법적 구제장치는 사채업자들에겐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다. 삶의 처참한 밑바닥까지 떨어진 주인공(금나라)이 사채업자가 돼 돈으로 세상에 복수한다는 내용인데, 남의 이야기 같지 않은 사채 피해 사례가 리얼하게 그려져 시청자의 반응이 뜨겁다. 첫 회부터 가파른 시청률 상승곡선을 그리기 시작해 시청률 40%를 목전에 두고 있는가 하면 벌써부터 16부작에 이은 후속 4부작을 기획 중이다. 이는 드라마 사상 처음 있는 일.

    “돈은 무명 때 더 벌었다”

    ‘쩐의 전쟁’은 같은 제목의 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박인권(朴寅權·53) 화백이 2004년부터 스포츠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만화 ‘쩐의 전쟁’이 그것. 신문 연재가 1000회에 육박하고, 대본소용 단행본이 50권 넘게 출간됐을 만큼 장기 흥행을 하고 있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사채의 폐해와 대응 방법이 구체적으로 그려져 ‘사채 폐해 교과서’라 불릴 정도다.

    박 화백의 화실은 창작에 전념할 수 있는 조용한 공간일 거라는 예상과 달리 경기도 구리시 교문4거리 유흥가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다. 화실이 있는 건물만 해도 단란주점, 노래방, 호프, 성인PC방, 칸막이 이발소 등이 들어서 있다. 그가 추구하는 만화가 어떤 것인지를 짐작케 했다.



    1973년 명랑만화를 주로 그리던 하고명 화백의 문하생으로 만화에 입문, 1980년 ‘무당나비’로 데뷔한 그는 사회성 짙은 작품들을 주로 그리며 독자적인 만화세계를 구축해왔다. 영화 ‘실미도’가 만들어지기 훨씬 전에 만화로 실미도 문제를 다뤘고, 김신조 사건, 조선족들의 선상반란사건, 탈옥수 신창원, 연평해전 등을 다뤘다. 그러다 보니 이현세나 허영만, 박봉성 같은 유명 만화가들에 비해 대중적 인기는 떨어졌다. “무명시절이 길었는데, 만화를 포기할 생각은 안 해봤냐”고 묻자 “독자에게 사랑받는 좋은 작품을 쓸 때까지 나가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몇 년간 무인도에 들어가 살기도 했다”며 웃었다.

    그가 만화 독자들 사이에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2002년 스포츠신문에 만화 ‘대물’을 연재하면서. 지금도 스포츠신문 두 곳에 ‘쩐의 전쟁’과 ‘대물’을 장기 연재 중이다. 한 작가가 두 작품을 동시에 연재하는 것은, 더구나 몇 년째 장기 연재하는 것은 전례 없는 일이다. 게다가 ‘쩐의 전쟁’에 이어 ‘대물’도 12월경부터 드라마로 방영될 예정이다.

    “원래는 ‘대물’이 먼저 드라마로 기획됐어요. 그런데 아무래도 선거를 앞두고 여성 대통령을 소재로 한 드라마를 한다는 게 부담스러웠던 모양이에요. 대선 이후로 방영을 미루고, 대신 ‘쩐의 전쟁’을 먼저 하자고 하더군요.”

    북한강에 뛰어든 가장

    ‘대물’은 정치권의 암투를 그린 작품이다. 청와대 요리사가 의문사를 당한다. 이에 검사인 큰아들이 아버지의 죽음을 추적하다 역시 의문사를 당한다. 망나니였던 주인공은 가족의 의문사 진실을 밝히기 위해 무소속 대통령후보이던 여성 정치인을 도와 대통령에 당선시킨다. 그는 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 된 그녀에게 아버지와 형의 죽음에 얽힌 의혹을 풀어달라고 부탁하는데, 사실 두 사람을 암살한 사람은 바로 그녀라는 줄거리다. 듣고 보니 방영이 미뤄질 만한 소재다.

    왕성하게 활동하는 인기 만화가이니 수입도 크게 늘었을 터. 하지만 그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오히려 1980~90년대가 수입이 더 좋았다는 것.

    ‘쩐의 전쟁’ 원작만화가 박인권의 사채업계 5년 체험

    ‘쩐의 전쟁’은 시청자에게 사채의 위험성을 일깨워주면서 화제를 모으고 있다.

    “그때가 만화의 황금기였어요. 지금은 지독한 침체기죠. 당시 저는 무명이었는데도 수입은 오히려 지금보다 더 좋았어요. 가령 지금 제가 받는 신문연재 고료가 월 1000만원이에요. 그런데 1990년대에 제 커리어 정도면 월 3000만원은 받았어요. 그때는 그렇게 많이 줘도 신문만화를 안 하려고 했어요. 그 시간에 대본소용 만화를 그리는 게 수입이 더 좋았거든요. 지금은 월 1000만원 받아도 신문만화 그리는 게 대본소 만화 그리는 것보다 수입이 낫죠. 그 정도로 만화시장이 침체해 있습니다.”

    자신의 작품을 드라마로 보는 기분이 어떠냐고 묻자 뜻밖의 답이 나왔다.

    “제가 ‘쩐의 전쟁’을 그린 건 우리 사회의 아픔을 이야기하고 싶어서였어요. 그래서 돈에 대한 이야기만 했지 사랑 이야기는 하지 않았어요. 사랑이 있다면 그건 가족사랑이죠. 그런데 드라마에선 남녀간의 사랑을 큰 기둥으로 세웠더라고요. 시청자의 요구 때문이라면 할 말이 없지만, 그게 진지함을 희석하는 것 같아 매우 아쉬워요.”

    ‘쩐의 전쟁’을 그리게 된 계기가 있었다고 한다. 빚에 쪼들린 한 가장이 북한강에 투신자살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는 모든 소지품을 양복주머니에 넣고 가방까지 손에 꼭 쥔 채 강물로 뛰어들었다. 딱 하나 꺼내둔 게 있었다. 가족사진이었다.

    “가족만큼은 차가운 물에 젖게 하고 싶지 않은 아버지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어요. 제가 이야기하려는 포인트는 바로 그런 가족사랑이었어요. 지금 여기저기서 가족이 해체되고 있는데 그게 바로 돈, 사채 때문이거든요.

    금나라의 실제 모델이 있냐고 묻는 사람이 많은데, 금나라 집안처럼 아버지는 카드빚(사채빚)에 허덕이다 자살하고 딸은 유흥업소로 팔려가고, 아들은 평생 신용불량자가 되는 식으로 가정이 파괴된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어요. 제 주위에도 사채 때문에 가족이 해체된 사람이 둘이나 있어요. 그 친구들의 사연에다 그동안 취재한 내용을 버무려 금나라란 인물을 만든 거죠.”

    그는 사채의 세계를 제대로 알기 위해 2년 가까이 취재를 했다고 한다. 연재를 시작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사채 피해자들은 물론 사채업자들도 만났고, 자신이 직접 전주(錢主)가 돼 사채를 운용해보기도 했다. ‘남자는 상처를 남기고 돈은 이자를 남긴다’ ‘밥보다는 주먹, 주먹보다는 돈’ ‘인류는 망해도 돈은 살아남는다’ 등은 이 과정에서 탄생한 ‘쩐의 전쟁’ 명대사들이다.

    사채업 체험이 낳은 명대사들

    “사채의 위험성을 체험하기 위해 악덕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릴 생각도 해봤는데, 너무 위험하더라고요. 악덕 사채업자들이 만화가라고, 취재 때문에 돈을 빌려 봤다고 해서 저를 봐줄 리 없잖아요. 파멸의 끝이 어디인지 뻔히 보이니 그 속으로 뛰어들 수가 없더라고요. 그렇다고 건전한 사채업자에게 빌려보는 건 별 의미가 없고…. 그래서 친구에게 5000만원을 빌려주고 그걸로 사채놀이를 하게 했어요.”

    사채놀이를 오래 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만화가가 사채를 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곱지 않은 시선을 느꼈기 때문이다.

    “3개월쯤 하다 그만뒀어요. 급히 정리를 하느라 원금을 20% 정도밖에 회수하지 못했어요. 처음엔 돈을 빌려주면 바로 갚을 줄 알았는데, 빌려간 사람들이 제 맘 같지가 않더라고요. 이러니 채무자가 돈을 안 갚으면 폭언, 폭행도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렇다고 제가 그렇게 할 수는 없고, 알아서 갚아주길 바랄 수밖에요(웃음). 지금도 가끔 제 통장에 모르는 이름으로 입금이 될 때가 있어요. 고맙죠.”

    드라마에 나온 ‘싸구려 사채업자는 서류에 연연하지만, 유능한 사채업자는 오직 인간 심사만 한다’는 명대사는 이때의 체험에서 나온 것이다.

    “사채업자에게 가져오는 서류라는 게 대부분 전세계약서 같은 거예요. 금융권에선 담보가 안 되는 것인데 사채업자는 받아주거든요. 2000만원짜리 전세계약서를 가져오면 집주인의 동의를 받아 30% 범위 내에서 대출을 해줘요. 그런데 그런 담보는 의미가 없어요. 전세금을 빼내려면 그 가족들을 거리로 내쫓아야 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합니까.”

    돈을 갚을지 안 갚을지에 대한 판단은 담보서류보다는 사람을 보는 게 더 확실하다는 게 그가 사채를 운영하면서 터득한 노하우다. 예를 들어 타고 온 차 실내가 엉망이거나 너무 깨끗하면 그 사람은 막장인생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 또한 거리낌 없이 사무실 문을 두드리면서 큰소리로 “여기 돈 빌려주는 데 맞습니까” 하고 묻거나 돈 꾸러 오면서 친구와 함께 오는 사람도 안 갚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빚을 창피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채 관련법에 대해 지나치게 많이 아는 사람, 말이 많은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 반면 말이 없는 사람, 행동이 적은 사람, 몇 번씩 전화하며 돈을 꿀까 말까 한참을 주저하는 사람, 혼자 조용히 찾아오는 사람에게는 돈을 떼인 적이 거의 없다고 한다.

    “네 다리를 자를지도 모르잖니…”

    ‘쩐의 전쟁’ 원작만화가 박인권의 사채업계 5년 체험
    만화를 연재하면서 사채업자들로부터 협박도 여러 번 받았을 터. 그는 황당한 사례를 들려주었다.

    “만화에다 여자 사채업자 이름을 향숙이라고 썼다가 진짜 향숙이란 이름의 사채업자로부터 항의전화를 받은 건 차라리 애교예요. 악덕 사채업자 사무실 번호를 별생각 없이 아무 번호나 쓰면서 그중에서 숫자 두 개에 *표 표시를 했는데, 전화가 왔어요. 자기가 사채업자인데 자기 사무실 번호랑 똑같다며 의도적으로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거예요.”

    사채의 폐해가 사회 문제가 되면서 요즘 방송광고를 하는 대부업체들이 지탄을 받고 있다. 그런데 박 화백은 “그나마 그런 업체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편”이라고 한다. 진짜 조심해야 할 것은 미등록 사채업자들 중 일부 악덕업자들이라고. 사실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악덕 사채업자는 소수에 불과하다. 문제는 누가 악덕사채업자인지 모르기 때문에 누구나 그들에게 당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 악덕 사채업자의 특징은 무엇일까. 그는 돈을 빌려주는 모양새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했다.

    “양심적인 사람일수록 돈을 주는 데 뜸을 들여요. 합법적인 방법으로 돈을 회수하는 장치를 마련하기 위해 이것저것 확인하기 때문이죠. 반면 무조건 무담보로 빌려주겠다는 업자가 있어요. 찾아가면 일단 돈부터 탁 꺼내놔요. 그것도 현금을 뭉치째. 그리고는 당장이라도 꿔줄 듯이 여직원에게 돈 담을 봉투를 가져오라고 해요. 눈앞에 현금이 있으니 빌리려는 사람은 혹하죠. 하지만 쉽게 빌려줄 리가 없죠. 거기서부터 시작이에요. 무담보라는 것은 없어요. 가족을 포함해 5명의 인(人)보증을 세우라고 해요. 사람이 가장 확실한 보증이니까요. 안 된다고 하면 코앞에 놓여 있던 돈을 도로 치워요. 그러면 열 중 여덟아홉은 마음을 바꿔 인보증을 세우죠.”

    사채업자의 악랄함을 상징하는 게 이른바 ‘신체포기 각서’다. 이를 근거로 신장 등 장기를 떼어내 빚을 갚게 하거나 여성의 경우 윤락업소에 팔아넘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신체포기 각서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게 박 화백의 이야기다. 신체포기 각서를 강요했다가는 7가지 죄목으로 처벌을 받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은 직접적인 폭력, 폭언뿐 아니라 전화, 문자 협박도 형사처벌 대상이다. 욕설만 해도 구속사유가 된다. 자해를 하는 것도 공포감을 조성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처벌대상이다.

    따라서 요즘은 사채업자들도 정도 이상의 협박이나 폭력을 자행하지는 않는다. 몇 달 전에 한 사채업자가 채무자 집에 찾아가 협박을 하면서 생각 없이 습관처럼 칼로 손톱을 깎다가 신고를 받은 경찰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현행범으로 체포됐다고 한다.

    하지만 법이 강화된 만큼 악덕 사채업자들의 협박 수단도 그만큼 지능화했다고 한다.

    “지난해 한 교장선생님이 실제로 당한 일이에요. 사채업자가 교장실로 찾아와 적당히 소란을 피우곤 술이나 한잔 하러 나가자고 했답니다. 교사들 보기 민망해 따라나와 술을 마셨는데, 옆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시비를 걸었어요. 그쪽을 봤더니 ‘기분 나쁘게 쳐다본다’며 주먹을 휘두르고 나가버렸대요. 이때 사채업자가 피투성이가 된 교장선생님을 부축하면서 그러더래요. ‘내 돈 안 갚으면 언제 어디서 주먹이 날아올지 몰라요’라고. 순간 정신이 번쩍 드는 거죠. 그렇게 계획적으로 폭력을 써요. 그렇다고 폭력을 사주했다는 증거가 없으니 고소할 수도 없어요.”

    몇백만원이 1년 만에 1억 넘어가

    자녀들을 협박하는 수법도 있다. 특히 어린아이나 과년한 딸은 채무자에게 아킬레스건이다. 아이의 학교 앞으로 찾아간다. 물론 아이에게 대놓고 협박하면 법에 저촉된다. 인상을 쓰면서 아이의 목덜미를 잡고 살짝 흔들면서 “아버지 힘드시니까 잘해드려라, 아버지에게 다른 데서 돈 쓰지 말라고 해라, 다 우리 같지 않아서 돈 안 갚으면 언제 어디서 사시미칼(회칼)이 날아올지 모른다, 그리고 잠잘 때 아버지랑 한방에서 자지 마라, 사채업자가 네 아버지 다리 자르려다 잘못해서 네 다리를 자를지도 모르잖니, 넌 아직 인생이 창창하잖아…” 하고 위협하면 아이는 겁에 질리게 된다. 하지만 고소를 해도 “정말 걱정이 돼서 한 말일 뿐”이라고 우기면 협박이나 폭력혐의로 처벌하기가 쉽지 않다.

    “서민을 상대로 하는 사채업자들은 보통 자기 돈 5000만원에서 1억 정도 가지고 굴려요. 과거엔 투자자를 모아 돈놀이를 하기도 했는데, 지금 누가 그런 데 돈을 맡기나요. 자기 돈으로 사채업을 하기 때문에 돈을 회수하는 데 더 악착같지요.”

    드라마에서는 금나라가 깡패에게 돈을 빌려줬다가 이자까지 쳐서 받아내는 것이 재미있게 그려진다. 정말 깡패에게 돈을 받아낼 정도로 사채업자들이 극성스러울까.

    사채피해 상담전화

    ▼ 법률구조공단 : 국번 없이 132

    ▼ 경찰청 생계침해형 부조리사범 통합신고센터 : 국번 없이 1379

    ▼ 금융감독원 사금융 피해상담센터 : 02-3786-8655

    ▼ 민주노동당 경제민주화운동본부 피해구제 상담전화 : 02-2139-7853∼4


    “사실 깡패들에게 빌려준 돈은 못 받는다고 봐야죠. 깡패들이 돈 빌리러 왔다는 건 그냥 돈 내놓으라는 이야기예요. 그러면 사채업자는 동생들 앞에서 ‘가오(체면)’ 한번 세운 것으로 만족해야 해요. 경찰에 신고할 수도 없어요. 갓 깡패가 된 녀석을 자기들끼리 ‘삐리’라고 부르는데, 삐리는 ‘칼침’도 놓아보고 감옥도 가보고 해야 ‘깡패 호적’에 오를 수 있어요. 그래서 경험 삼아 두목이 지목하는 사람에게 칼침을 놓기도 하는데, 돈을 안 줬다가 재수 없으면 그 연습대상이 될 수도 있어요. 그게 무서워서라도 돈을 주는 거죠.”

    깡패는 사채업자를 등칠 뿐 아니라 직접 사채를 놓기도 하는 모양이다. 주 대상은 유흥가와 윤락업소의 여성들이라고 한다. 이쪽 여성들에게 돈을 꿔주면서 업주에게 인보증을 서게 한다. 업주들은 이를 반긴다. 사채 때문에라도 깡패들이 감시를 해주기 때문에 여 종업원 관리가 편하기 때문이다.

    “그런 곳엔 일반 사채업자는 명함도 못 돌려요. 자기네들끼리 해먹는 거죠. 그 여성들이 왜 사채를 쓰냐고요? 명품 사고 성형하느라 돈이 필요하니까요. 허한 마음을 그렇게 푸는 거죠.”

    깡패 사채업자에게 유흥업소 여성이 ‘봉’이라면 일반 악덕 사채업자에게 최고의 봉은 공무원, 군인, 교사라고 한다. 이런 직업군(群)의 사람이 사채를 빌린다면 대개 도박에 빠진 경우라고 한다.

    “원래 돈을 빌려주면서 용도를 묻지 않는 게 이 세계 철칙이에요. 하지만 공무원, 교사, 군인들에겐 넌지시 용도를 물어보고 감을 잡아요. 도박 때문이다 싶으면 원하는 대로 100% 빌려줘요. 그리고는 확실하게 뜯어먹죠. 폭력도 서슴지 않아요. 도박 사실이 밝혀져 직장을 잃게 될까봐 신고도 못해요. 법도 무용지물이죠. 이들에겐 고리(高利)의 이자만 뜯는 게 아니에요. 가령 ‘당신 만나러 가다 교통사고가 나 차 수리비가 300만원 들었다’며 내놓으라고 해요. ‘그걸 왜 내가 물어줘야 하냐’고 따지면 ‘그러면 당신네 학교 교장에게 받아야겠네’ 하는 식으로 협박해요. 보통 1000만원 빌려주면 700만원은 뜯어낸다고 봐야죠.”

    신문을 보면 종종 몇백만원의 사채를 썼다가 1억원 넘게 뜯긴 경우를 보게 된다. 이게 가능한 일일까.

    “아무리 고리라 해도 이자만 가지고 그렇게 불어날 수는 없죠. 그런데 악덕 사채업자들끼리 서로 팔아넘기는 수법이 있어요. 그런 식으로 빚을 불려요. 특히 남편 몰래 사채를 쓴 여성의 경우 신고할 확률이 낮으니까 머리채를 휘어잡는 등 폭언과 협박을 하면서 극도의 공포감을 조성해요. 그런 후에 돈을 빌려줄 다른 사채업자를 슬쩍 소개하면 지금의 시달림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얼른 그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리죠. 그러면서 갚아야 할 돈이 두 배로 늘어나요. 그렇게 몇 번 팔리다 보면 몇백만원이 1년 만에 1억원을 넘어가기도 합니다.”

    여성은 ‘걸어다니는 담보’

    박 화백은 사채에서 제일 위험한 게 인보증을 서는 것이라며 주의를 당부했다. 담보가 없으면 처음부터 인보증을 요구하기도 하고, 이자를 못 갚을 때 이자를 유예해주겠다며 미끼로 인보증을 요구하기도 하는데 절대 여기에 넘어가면 안 된다는 것.

    “제가 취재한 바에 따르면 젊은 여성들이 많이 당해요. 인터넷에 ‘여성전문대출’을 앞세운 대부업체가 있을 만큼 여성에게는 무조건 돈을 빌려주는 데가 많아요. 물론 건전한 곳이 대부분이겠지만 개중에 위험한 곳이 적지 않아요. 여성은 ‘걸어다니는 담보’라고 할 수 있어요. 유흥업소로 보낸다든지 하면 바로 현금으로 ‘환전’할 수 있으니까요. 또 채무자 당사자는 물론 가족들을 협박하기도 쉽고요.”

    특히 세상 물정 잘 모르는 여대생들은 인보증을 서달라고 매달리는 친구의 간절한 요청을 거절하기 힘들어한다. 그래서 우정이란 이름으로 보증을 섰다 피해를 보는 경우도 많다.

    “제 만화를 본 한 여성이 하소연을 해왔어요. 성형수술을 하려고 200만원을 빌렸다가 결국 친구 3명을 인보증 서게 만들어 모두 유흥업소까지 가게 됐다고요. 악덕 사채업자들은 인보증을 받아서 한 명에 2000만원씩 받고 유흥업소에 팔아넘겨요. 말은 ‘알바(아르바이트)라도 해서 돈을 갚으라’는 거지만 유흥업소에서 하는 일이 알바라고 다른가요. 더구나 빚에 얽매여 있으니 업주가 시키는 대로 해야죠.”

    성형수술이나 명품을 사기 위해 사채를 쓰는 젊은 여성이 얼마나 될까 싶지만 생각보다 많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실제로 금융감독원이 2006년 말에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대부업체 이용자의 절반이 20대 여성이었다.

    “문제는 사채를 쓴 여성이 빚 독촉에 몰린 후에야 가족들이 알게 된다는 거예요. 당연히 부모로서 화가 나겠죠. 하지만 이미 딸은 직장에서 쫓겨나고, 친구들도 다 잃고, 사채업자에게 시달릴 대로 시달려 정신적 공황에 빠진 상태예요. 그럴 때 야단치고 다그치면 제 발로 유흥업소에 들어가든지 자살 같은 극단적 선택을 하기 쉬워요. 일단은 보듬어줘야 해요. 돈 잃고 나서 딸까지 잃을 수는 없잖아요. 아버지가 사채를 써서 그런 상황이 됐을 때도 마찬가지예요. 가족이 포용해줘야 합니다.”

    그는 “사채를 쓰지 않고 제도권 금융을 이용하는 게 제일 좋지만 어쩔 수 없이 사채를 썼다가 피해를 봤다면 서슴지 말고 관계기관에 신고하고 상담을 받으라”고 충고했다. 가족이 알게 되는 게 두려워 속앓이만 하다 보면 사태를 더욱 키울 뿐이라는 것.

    “그게 더 이상의 피해를 막는 유일한 방법이에요. 스스로 해결하려고 악덕 사채업자들이 시키는 대로 하다 보면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듭니다. 일단 사채의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사채업자의 말로

    문득 사채업자의 말로가 궁금했다. 그렇게 서민의 피눈물을 빨아먹고 그들은 떵떵거리며 잘살까.

    “사채업 하는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들 큰돈을 벌었다고 하는데, 알고 보면 대부분 망했더라고요. 많은 사채업자가 어떤 식으로든 큰돈을 떼이게 되니까요. 찜질방을 전전하며 발발이(사채업자 대신 돈 받으러 다니는 사람)나 박카스 파는 일(도박장에서 급전 꿔주는 사람)을 하는 사람도 많아요. 탈법을 해서 감방 가는 사람도 있고요. 그렇지 않은 사람도 대부분 가정이 파탄 직전이에요. 돈 안 갚는 채무자들 찾으러 밤낮 없이 나다니려니 가정을 제대로 돌볼 수 없죠.”

    사채업자들 중에 금나라처럼 의롭게 돈을 받아내는 사람도 있을까. 아쉽게도 그런 사람은 없는 모양이다. 그렇게 했다간 망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마음 약한 사람은 사채시장 바닥에서 살아남기 힘들다는 게 그의 말이다.

    그가 처음 취재를 시작한 게 2002년부터였다고 하니 벌써 5년이 지났다. 그동안 사채시장은 어떤 변화가 있을까.

    “많이 순화됐다고 봐야죠. 하지만 안타까운 게, 2002년경엔 경제인구 3200만명 중에 금융권에서 돈을 빌릴 수 없는 사람이 400만명이었는데 지금은 700만명으로 오히려 늘어난 것으로 추산되고 있어요. 부동산투기를 잡는다고 은행대출을 엄격히 한 것이 애꿎은 서민층을 사채시장으로 몰아넣은 셈이 된 거죠.”

    그는 사채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사채는 암보다 더 무서운 겁니다. 사채를 쓰는 건 자신의 신체 일부를 잘라내는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액수에 따라 손가락이, 손목이, 또는 다리가 이미 잘려 나간 것이라고요. 그만큼 사채는 위험합니다. 악성 사채업자들로부터 서민이 보호받는 그날까지 저의 ‘쩐의 전쟁’은 계속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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