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런 분위기 때문일까. SBS 드라마 ‘쩐의 전쟁’은 방송 전부터 커다란 관심을 모았다. 사채업자의 독촉에 시달리던 아버지는 자살하고 그 빚은 고스란히 자식들에게 돌아간다. 여기서 상속포기 같은 법적 구제장치는 사채업자들에겐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다. 삶의 처참한 밑바닥까지 떨어진 주인공(금나라)이 사채업자가 돼 돈으로 세상에 복수한다는 내용인데, 남의 이야기 같지 않은 사채 피해 사례가 리얼하게 그려져 시청자의 반응이 뜨겁다. 첫 회부터 가파른 시청률 상승곡선을 그리기 시작해 시청률 40%를 목전에 두고 있는가 하면 벌써부터 16부작에 이은 후속 4부작을 기획 중이다. 이는 드라마 사상 처음 있는 일.
“돈은 무명 때 더 벌었다”
‘쩐의 전쟁’은 같은 제목의 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박인권(朴寅權·53) 화백이 2004년부터 스포츠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만화 ‘쩐의 전쟁’이 그것. 신문 연재가 1000회에 육박하고, 대본소용 단행본이 50권 넘게 출간됐을 만큼 장기 흥행을 하고 있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사채의 폐해와 대응 방법이 구체적으로 그려져 ‘사채 폐해 교과서’라 불릴 정도다.
박 화백의 화실은 창작에 전념할 수 있는 조용한 공간일 거라는 예상과 달리 경기도 구리시 교문4거리 유흥가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다. 화실이 있는 건물만 해도 단란주점, 노래방, 호프, 성인PC방, 칸막이 이발소 등이 들어서 있다. 그가 추구하는 만화가 어떤 것인지를 짐작케 했다.
1973년 명랑만화를 주로 그리던 하고명 화백의 문하생으로 만화에 입문, 1980년 ‘무당나비’로 데뷔한 그는 사회성 짙은 작품들을 주로 그리며 독자적인 만화세계를 구축해왔다. 영화 ‘실미도’가 만들어지기 훨씬 전에 만화로 실미도 문제를 다뤘고, 김신조 사건, 조선족들의 선상반란사건, 탈옥수 신창원, 연평해전 등을 다뤘다. 그러다 보니 이현세나 허영만, 박봉성 같은 유명 만화가들에 비해 대중적 인기는 떨어졌다. “무명시절이 길었는데, 만화를 포기할 생각은 안 해봤냐”고 묻자 “독자에게 사랑받는 좋은 작품을 쓸 때까지 나가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몇 년간 무인도에 들어가 살기도 했다”며 웃었다.
그가 만화 독자들 사이에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2002년 스포츠신문에 만화 ‘대물’을 연재하면서. 지금도 스포츠신문 두 곳에 ‘쩐의 전쟁’과 ‘대물’을 장기 연재 중이다. 한 작가가 두 작품을 동시에 연재하는 것은, 더구나 몇 년째 장기 연재하는 것은 전례 없는 일이다. 게다가 ‘쩐의 전쟁’에 이어 ‘대물’도 12월경부터 드라마로 방영될 예정이다.
“원래는 ‘대물’이 먼저 드라마로 기획됐어요. 그런데 아무래도 선거를 앞두고 여성 대통령을 소재로 한 드라마를 한다는 게 부담스러웠던 모양이에요. 대선 이후로 방영을 미루고, 대신 ‘쩐의 전쟁’을 먼저 하자고 하더군요.”
북한강에 뛰어든 가장
‘대물’은 정치권의 암투를 그린 작품이다. 청와대 요리사가 의문사를 당한다. 이에 검사인 큰아들이 아버지의 죽음을 추적하다 역시 의문사를 당한다. 망나니였던 주인공은 가족의 의문사 진실을 밝히기 위해 무소속 대통령후보이던 여성 정치인을 도와 대통령에 당선시킨다. 그는 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 된 그녀에게 아버지와 형의 죽음에 얽힌 의혹을 풀어달라고 부탁하는데, 사실 두 사람을 암살한 사람은 바로 그녀라는 줄거리다. 듣고 보니 방영이 미뤄질 만한 소재다.
왕성하게 활동하는 인기 만화가이니 수입도 크게 늘었을 터. 하지만 그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오히려 1980~90년대가 수입이 더 좋았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