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7월호

북한 통일전선부 출신 탈북자가 증언한 ‘대남공작부서의 모든 것’

‘우리민족끼리’는 ‘햇볕정책 역이용 전략’, 강온 이중전술로 경제실리 만 챙겨라!

  • 정리·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입력2007-07-09 14: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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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정보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소가 6월초 발행한 내부간행물 ‘북한조사연구’에 주목할 만한 보고서가 실렸다. ‘북한의 통일전선사업부 해부’라는 제목의 이 보고서는 그간 상당부분 베일에 가려 있던 북한 대남공작조직의 구체적 현황을 공개하며 그 총괄기관으로 조선노동당 통일전선사업부를 지목했다. 보고서를 작성한 장철현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연구위원은 통전부에서 간부로 일하다 수년 전 탈북했다. 보고서는 통일전선사업부의 세부 조직도와 위장명칭, 서해교전 등 2000년대 이후 주요 사건의 기획의도 등도 처음 공개했다. 장 연구위원은 1990년대 말 이후의 대남공작 기조를 ‘햇볕정책 역이용 전략’으로 규정하며, 북한이 남측의 포용정책 기조를 이용해 경제적 이익을 얻는 것은 물론 대남공작에도 전략적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증언했다. 보고서의 주요 내용을 정리해 소개한다.

    1998년 김정일 특별지시 “햇볕정책 역이용 전략을 수립하라”

    햇볕정책 이후 2배 커진 대남공작 ‘두뇌부서’ 통전부

    남조선문제연구소, 한국경제·주요인물 동향 보고서 주1회 김정일에 제출

    30년 동안 ‘조선일보’만 분석한 노동당 연구요원



    조총련 부담으로 일본 자재 수입해 남한 신분증 위조하는 813연락소

    인터넷 맡은 26연락소 뜨자 기구(氣球) 담당 310연락소 절반 축소

    통전부에 전교조, 범민련, 통일연대 담당과…한총련 담당과는 2001년 폐쇄

    서해교전 계획안 보고받은 김정일, “햇볕정책 역이용하는 새로운 전선” 극찬

    “개성공단 인력과 시가지에 제대군인 5만 배치해 군사기지화 강구하라”

    경협 창구 ‘아태’는 건물도 없는 유령조직…통전부 정책과 위장명칭일 뿐

    인민군에는 군사회담 정책부서 없어… ‘군부 강경론’은 통전부 전술


    북한 통일전선부 출신 탈북자가 증언한 ‘대남공작부서의 모든 것’

    조선노동당 통일전선부, 대외연락부, 작전부 등 대남공작부서들이 모여 있는 ‘3호청사’의 위성사진. 2004년 6월 미국 디지털글로브社가 촬영한 것이다.

    오늘날 남북관계는 사실상 남한 정부와 북한 통일전선사업부의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정치·경제·안보·민간교류에 이르기까지 모든 남북관계를 총괄하는 부서가 바로 통일전선사업부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통일전선사업부는 대남공작부서들 중 대남정책을 기획하는 ‘두뇌 부서’로서 선두구실을 한다. 이는 권력의 집중화를 통해 조직관리를 최대한 단순화·실용화하는 북한 특유의 유일독재 방식과 맥을 같이한다.

    남한에서는 흔히 통전부의 정식명칭이 통일전선부라고 하지만, 통전부의 정확한 명칭은 통일전선사업부다. 이전까지 인민무력부가 주도하던 대남전략과 전술은 1970년 초 김일성이 고려연방제를 내놓으면서부터 변하기 시작했다. 대외적으로나마 군의 강경 주도권을 일부 약화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특히 김대중 후보가 통일 문제를 대선(大選)공약으로 제기해 많은 지지표를 얻은 당시의 남한 내 정치상황도 이러한 변화에 일조했다. 김일성은 남한 내 민주화운동과 통일 열망을 잘 접속시킨다면 대중혁명 방식으로도 적화(赤化)통일이 가능하다고 판단했고, 민주화운동을 적화공간으로 확대시키려면 보다 전술적인 유화책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남한 내 민주화 역량을 지휘, 조종할 수 있는 지능부서가 필요했고, 이 전략전술을 별도로 수행할 당 주도의 대남공작부서가 필요했던 것이다. 북한, 남한, 해외를 포괄해 김일성을 구심점으로 하는 광범위한 ‘민족통일전선체’ 형성을 주 목적으로 하는 통일전선사업부는 이렇게 탄생했다.

    1979~80년대 통전부는 민주화운동을 폭력혁명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남한 내에 지도세력을 구축하고 대중을 상대로 고려연방제를 찬양하도록 선동하는 대남 심리전을 중점적으로 전개했다. 또한 정권 전복 차원에서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 아웅산 테러, KAL기 폭파사건 등을 함께 기획하기도 했다. 그러나 1990년대 말에 이르러 통전부의 전략은 ‘햇볕정책 역이용 전략’으로 급선회한다. 내부적으로는 1998년부터 이를 추진하다가, 2000년 6·15 정상회담에서 민족공조를 부각하며 ‘우리민족끼리’라는 표현을 쓴 다음부터는 이를 아예 통일전략으로 공식화해 2001년 신년 공동사설에서 발표했다.

    이후 통전부는 대외적으로는 ‘우리민족끼리’라고 표현했지만, 오늘날까지도 적(敵)들과 ‘끼리’할 수 없다는 체제원칙을 내세워 대내적으로는 ‘햇볕정책 역이용전략’으로 명명하고 있다. 김대중 정부가 처음 햇볕정책을 발표한 1998년만 해도 통전부는 무조건적인 반대 입장을 고수했지만, ‘햇볕정책을 역이용하라’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에 따라 이를 새로운 정책으로 연결한 것이다.

    햇볕정책 역이용 전략의 핵심은 현재의 경제난을 인정하고 정세가 성숙할 때까지 한국의 경제를 북한의 발전에 이용한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동구권 붕괴 이후 어려운 상황에 놓였던 북한 지도부는 한국 정치권의 대북정책이 햇볕정책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장기화하리라는 판단하에 이 전략을 구체화했다. 체제유지를 위해 전면 개방이 아니라 특구 개방 정책으로 경제난을 해소하려는 국가발전 전략도 깔려 있다.

    1960년대엔 인민무력부 적공국 주도

    북한 통일전선부 출신 탈북자가 증언한 ‘대남공작부서의 모든 것’
    6·25전쟁 이후 북한의 권력은 인민무력부를 중심으로 하는 군이 담당했고, 이 시기 대남공작과 침투, 도발 등 모든 대남정책기획 및 전략을 인민무력부 작전부의 주관하에 인민무력부 적공국이 주도했다. 남북 긴장을 조성하기 위해 1968년 청와대 기습사건,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등 강경책으로 일관하던 시기다.

    그러나 1970년대 김정일이 당 조직비서 사업을 시작하면서 모든 권력은 당 조직부로 집중됐다. 대남정책을 이용한 인민무력부의 권력주도 및 정책주도를 차단하려는 목적으로 김정일은 다른 부서와 마찬가지로 인민무력부의 대남정책도 당적 지도권에 소속시켰다. 이에 따라 상징적으로 존재하던 당 대남부서들은 정보수집, 대남침투, 인물포섭, 대남심리전 및 교란, 파괴 등으로 분류돼 전담부서들이 신설됐다.

    이 시기부터 당에는 업무특성에 따라 대외조사부(현 35호실), 사회문화부(현 대외연락부), 작전부, 통일전선사업부 등이 생겨났고, 인민무력부 적공국도 당의 영도를 받는 하부기관으로 전락했다. 1970년대 이후 벌어진 주요 사건들을 인민무력부가 아니라 당 35호실, 대외연락부가 주관한 데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에는 당 대남공작부서들 가운데서도 직접침투나 남한내 지하조직 결성을 주도한 대외연락부나 35호실이 기본 역할을 했고, 통전부는 대남선전과 심리전, 남북협상과 같은 부차적인 일을 담당했다. 개별 간부들에 대한 김정일의 신임도는 곧 조직의 신임을 의미한다. 강관주 대외연락부장이나 오극렬 작전부장에 비해 통일전선사업부 제1부부장 림동옥에 대한 김정일의 신임도가 떨어진 것도 같은 이유라고 봐야 할 것이다.

    사회주의 동구권이 붕괴한 후 북한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야 했지만, 외화(外貨)부족 현상으로 국제시장 침투나 합작사업이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남한의 경제력을 이용하기 위해 ‘우리민족끼리’라는 이념을 부각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됐다. 또한 미국의 대북강경정책을 와해시키기 위해 한미갈등을 고조시켜야 할 필요성에서 남북 화해 카드가 필요했다. 결국 현재는 남북대화 자체가 대남전략 및 생존전략으로 전환된 셈이다.

    이 때문에 최근 북한의 대남전략은 이전의 침투, 파괴 같은 강성수단보다는 대화를 앞세운 경제이익 창출, 인물 포섭, 정보 수집, 교란 같은 유연한 접근이 우선이다. 대남공작 부서 가운데 유일하게 통일외교 명분으로 합법성을 주장하는 통일전선사업부의 기능이 강조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종전에는 한국민족민주전선을 내세워 음성적으로만 대남사업을 진행해오던 통전부를 양성화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결코 북한의 궁극적 목표인 적화통일 정책과 대남공작부서들의 사명이 변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민족끼리’를 내세워 직접대화와 교류를 통해 적화 목적을 보다 구체화하고 현실화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햇볕정책 역이용 전략’의 목적은 크게 세 가지라고 볼 수 있다. 첫째 남북관계를 경제적 이익에만 국한시키는 것, 둘째 ‘우리민족끼리’ 이념을 통해 남한 내 북한 지지세력을 확산시키는 것, 셋째 남북화해를 전략화해 미군을 축출함으로써 적화통일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이전에는 한국 내 민주주의세력 확산을 목표로 대남심리전이나 공작을 전개했다면, 최근에는 친북·좌익·진보세력 확산이라는 보다 노골적이고 확대 지향적인 목표가 설정됐다.

    남한의 민주화 기간에 통전부의 주요 전략과업은 민주화운동을 부추기는 한편 적화공간으로 활용하는 것이었다. 통전부가 남한 내 민주화세력을 중시한 것은 민주화운동 자체가 곧 반정부운동이었고, 민족의식을 자극해 반미(反美) 정서까지 이끌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통전부의 기본 공작형태는 한국민족민주전선 중심이었고, 지금도 통전부는 평양시 중구역 연화동에 ‘평양주재 한국민족민주전선 대표부’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한편으로 통전부는 조국평화통일서기국을 앞세워 남한 내 민주화운동을 적극 부추기고 대남공작 목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조직을 세분화했다. 이들 공작부서 내 각 과와 연락소는 명칭을 숫자로 표기한다. 조직의 실체와 업무내용을 감추기 위한 일종의 위장이다. 연락소 명칭을 대체하는 숫자들은 조직을 신설할 때 김정일로부터 사인받은 날짜를 그대로 사용하게 돼 있다.

    북한 통일전선부 출신 탈북자가 증언한 ‘대남공작부서의 모든 것’

    통일전선사업부 조직기구 계보<br>‘북한조사연구’ 보고서에서 확인된 조선노동당 통일전선사업부 세부 조직도.

    먼저 101연락소는 일명 ‘대남 문화침투 연락소’로 불린다. 남한 작가 혹은 민중작가 명의로 된 소설이나 시집 등을 창작해 대학가와 서점에 침투시키는 것을 주요 임무로 한다. 주제는 반독재나 민주화부터 고려연방제 찬양, 반미 등까지 다양하다.

    26연락소는 남한 내에서 방송되는 것처럼 위장된 한민전 산하 ‘구국의 소리’ 방송을 담당한다. 남한식 억양과 발음으로 훈련된 아나운서들을 내세워 민주화운동을 호소하거나 유언비어를 유포하고 남한 정부의 정책을 왜곡하는 등의 전파침투를 맡았다. 26연락소는 자체적으로 칠보산전자악단을 운영하며 운동권 가요를 창작하거나 남한의 유명 가요 가사를 바꿔 전파를 통해 침투시키기도 했다. 운동권 가요 가운데 작자 미상으로 돼 있는 상당수 노래는 이 무렵 통전부의 문화 침투 흔적이다.

    813연락소는 출판연락소로 남한에 실존하는 시민단체들의 조직명칭을 도용해 각종 전단지와 도서, 인쇄물을 제작하고 310연락소를 통해 남한에 배포했다. 그밖에도 월북자들로 구성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를 통해 남한 연고자들을 이용한 편지 발송, 인물 포섭, 정보수집 등이 진행됐다.

    이처럼 통전부의 당시 대남사업을 고발하면 한국의 민주화운동도 고발당하는 부분이 있다. 남한 내 ‘주사파’의 확산, 아직까지 과거를 숨기고 있는 밀방북 경력자들, 최근까지 거론되는 일부 386세대의 과거 조선노동당 입당설, 반미, 국가보안법 철폐 주장, 친북 및 좌익세력 확대 등은 결코 통일전선사업부의 민주화 이용전략과 떼놓고 생각할 수 없다.

    북한에서 가장 큰 남한자료 도서관

    ‘햇볕정책 역이용 전략’이 수립된 이후 통전부의 대남전략은 이전과는 달리 ‘실리추구’를 중심으로 변화했다. 과거에는 남한이 ‘인도적 지원’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 자체를 도발로 생각했지만, 현재는 햇볕정책 역이용 전략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최대한 지원을 끌어내려 하고 있다. 그러나 거듭 강조하지만, 이러한 대화나 교류, 군사안보에 이르기까지 모든 남북관계는 예외 없이 통전부의 권한에 해당한다. 심지어 남북 경협권을 갖고 있는 김정일의 당 자금조달조직 38호실도 통전부의 정책감시를 받는다. 각종 대남사업의 종합적인 관리와 단일화를 통해 전략적인 유동성을 확보하려는 조치다.

    김정일의 햇볕정책 역이용 전략 지시를 실현하기 위해 통전부는 1998년경 조직확대 제의서를 김정일에게 올려 사인을 받았다. 이후 인원은 1500명 규모에서 3000명으로 확대됐다. 햇볕정책을 역이용하기 위해 대화와 교류의 범위를 확대시킨 만큼 그에 필요한 인력을 충당하기 위한 조치였다. 실제로 남북간 ‘민간’교류의 경우 남한에서는 진짜 민간인들이 방북하지만, 북한은 철저하게 통전부 인력으로 대체한다. 또한 인터넷이 광범위하게 도입된 남한 현실에 맞게 사이버 침투를 위한 컴퓨터 인력도 대거 편입시켰다.

    이후 통전부의 조직 변화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통전부 본부의 모든 기능과 역할을 함축시켜 일명 ‘어머니 연락소’로 불리는 조국평화통일서기국(조평통)이 있다. 기본적으로 통일외교의 합법성을 주장하며 막후에서 대남전략을 기획하고 실천하는 조직이다. 주로 회담과 관련한 연구와 실행, 인물 포섭, 정보수집 등을 전담한다. 통전부의 간부는 대부분 조평통 성원들이 추천되며 대우도 매우 좋다. 월북자들이나 대남침투 경험이 있는 작전부, 인민군 정찰국, 대외연락부, 35호실 퇴직 성원들도 요직에 배치돼 각종 대남공작을 추진하고 있다.

    북한에서 가장 큰 남한자료 도서관을 갖추고 있는 남조선문제연구소는 조국통일문제연구소로 위장해 있다.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문화, 군사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진행하고 남한 정세분석 보고서를 작성한다. 한국 경제의 시장조사, 주가분석, 인플레 현황 등을 체크해 향후 예측까지 전망하는 경제보고서의 경우 매주 한 번씩 김정일에게 보고한다. 한국 각 분야의 대표적인 인물들에 대한 분석보고서도 매주 한 번씩 김정일에게 보고된다. 대부분 평생직으로 신분을 보장받는 연구원들의 업무는 매우 세분화돼 있는데, 사회문화부서에는 ‘조선일보’만 30년 동안 분석한 연구원도 있다. 이 연구원들은 대부분 남한의 신문·잡지를 참고하거나 별도의 첩보를 토대로 보고서 요지를 작성한다.

    대남심리전과 대내심리전

    북한 통일전선부 출신 탈북자가 증언한 ‘대남공작부서의 모든 것’

    2006년 6월29일 오전 경기도 평택 해군2함대사령부에서 열린 서해교전 전사자 4주기 추모식.

    통전부 산하 101연락소는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대남심리전을 통한 문화침투를 주로 담당한다. 한편으로는 위장기지를 이용해 대내 주민들을 상대로 남한의 친북(親北)정서나 친(親)김정일 정서를 날조해 역선전하기도 한다. 자체적으로 한국측 인사 명의의 서사시나 논설 등을 만들어 ‘로동신문’ 5면 등 언론매체에 싣는 것이다. 101연락소는 2002년 이후 5국과 인터넷 담당부서를 26연락소로 넘겼다.

    ‘구국의 소리’ 방송을 담당했던 26연락소는 최근에는 한국내의 간첩이나 통전부 영향하에 있는 친북세력에게 전파를 통해 지령을 전달하는 일에 주로 종사하고 있다. 한국의 인터넷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이후에는 101연락소 산하였던 5국을 넘겨받아 인터넷침투 연락소로 발전시켰다. 또한 칠보산전자악단을 북극성전자악단으로 개칭해 남한에서 제작된 것처럼 위장된 해돋이 비디오 등 동영상 제작물을 주민들에게 선전하는 등 대내 심리전용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강남출판사, 평양출판사, 목란출판사 등으로 불리는 813연락소는 남한 생산품과 똑같은 출판물을 제작하는 조직이다. 여기에는 각종 도서와 전단지는 물론 위조 신분증도 포함된다. 이들은 정교한 모조품 생산을 위해 모든 자재를 일본 조총련을 통해 들여오는데, 그 비용은 조총련 산하 대동무역회사에서 부담하고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각종 인쇄물은 310연락소가 날리는 기구(氣球)를 통해 남한에 침투된다. 310연락소는 개성과 해주에 본부가 있다. 주로 군사분계선 인근에서 활동하는 310연락소 성원들은 당 마크를 팔에 붙인 전투복을 착용한다. 그러나 인터넷을 통한 26연락소의 침투공작이 더 인정을 받아 최근에는 인원이 50명 규모로 축소됐다.

    평양 주재 한국민족민주전선대표부는 초기 월북자 출신들로 조직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후속기관으로서 노동당 적화통일정책의 전위부대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남한을 북한의 일부로 규정하고 한국의 민심을 위장 대변해 적화통일을 지지하는 역할을 한다. 현재는 이러한 한민전 활동에 더해 범민련 활동을 추가했다.

    ‘민화협’은 교류1과, 종교단체는 2과

    그 밖에도 통전부 교류1과 소속으로 조평통 산하에는 전교조, 민주노총, 범민련, 통일연대 등의 남한 단체 담당과들이 존재한다. 2001년에는그간 존재하던 한총련 담당과를 폐쇄했는데, 이는 과거처럼 대학생들을 이념화할 수 없다는 판단하에 배후 조직관리에 힘을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통전부는 이러한 조직들을 통해 남북협상에서 유리한 협상국면을 만들어내기 위한 남한 내 여론 확산을 시도한다. 최근에는 한국 내 영향력 있는 시민단체들을 흡수, 조종할 목적으로 담당과를 계속 신설하고 있다. 이들은 이번 일심회 사건에서도 보듯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미군기지 평택이전 반대 등 현실문제와 결부시켜 전략을 실현하고 있다. 교류1과는 이 과정에서 ‘민족화해협의회(민화협)’라는 위장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단군민족통일협의회’라는 위장명칭을 사용하는 교류2과에는 북한의 종교단체들이 주로 구성돼 있다. 민족의 시조인 단군이념 아래에는 오직 민족만이 있으며, 종교를 떠나 민족애로 뭉쳐 통일조국을 건설하자는 것이 이 위장명칭의 의미다. 이들 교류2과 소속 각 종교조직은 남북 경제교류와 인물 포섭을 기본 목적으로 한다. 대외적으로는 불교, 기독교 등의 이름을 허용하지만 대내적으로는 1국, 2국으로 명명된다. 각 종교조직 요원들은 소속종교의 ‘직업적 세뇌’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담당종교의 ‘해독성 논문’을 작성, 발표하고, 남한 정부나 민간단체들로부터 인도적 지원을 끌어들이기 위한 연구와 사업을 벌인다.

    이산가족 상봉 응한 까닭

    이제부터는 이렇게 구성된 통전부의 각 부서가 어떻게 햇볕정책 역이용 전략을 구체적으로 펼쳐왔는지 살펴보겠다.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서해북방한계선(NLL) 문제다. 김정일은 1999년초 통전부에 남한과의 교전을 지시했다. 처음에는 육전 형태로 교전을 준비했지만, 그 경우 남한의 대북지원 및 남북경협에 차질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지역을 바다로 옮겨 서해교전을 택했다. 김정일은 서해교전 계획안을 보고받고 “대화와 대북지원을 유지하는 방향에서 햇볕정책을 역이용하면서도 체제갈등을 유발할 수 있는 새로운 전선”이라고 극찬했다.

    통전부는 이를 통해 대북지원을 계기로 흡수통일을 추진하려는 남한 정부의 체제 자신감을 억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또한 남한 정치권에 햇볕정책이나 평화번영정책이 고착되도록 만드는 동시에 상호주의를 사전에 차단하는 완충효과도 노렸다. 전략 전술에 따라 군의 강경카드를 내세워 협상력에서 우위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점도 고려됐다.

    북한 통일전선부 출신 탈북자가 증언한 ‘대남공작부서의 모든 것’

    2006년 4월 열린 19차 남북장관급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북측 대표단을 이끌고 부산을 방문한 권호웅 내각참사(왼쪽)가 이종석 통일부 장관과 환담을 나누고 있다. 북한은 이 회담에서 철도 시험운행 일정에 합의했다가 후에 번복하는 해프닝을 벌였다.

    이산가족 상봉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햇볕정책을 역이용하는 차원에서 활용됐다. 남한측이 이산가족 상봉을 제기할 때마다 김정일은 이를 ‘내부로부터의 와해전술’로 규정하며 강력 저지하라고 지시해왔지만, 1999년 5월 통전부가 이를 이용해 남한을 ‘우리민족끼리’ 전략에 말려들게 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전술안을 제의하자 생각을 바꿔 비준했다. 남북화해를 부각시켜 남한 내 좌익세력을 확산시키고 친북 정서를 주입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또한 남한 정치권이 햇볕정책을 계속 유지하도록 유도하고 동시에 대북지원에 대한 대가성 카드로 활용할 수 있다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역으로, 필요한 경우 이산가족 상봉을 차단함으로써 남한 정치권을 압박하는 카드로 활용할 수도 있게 됐다.

    햇볕정책으로 인해 급증한 민간교류는 남한 내 적화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한 인물포섭이나 고정간첩 접선 및 지령체계 확보를 위해 효과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계산하에 추진됐다.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대북지원 공간으로도 이용됐다. 사람에 따라 방북허가를 차별함으로써 한국의 보수세력을 고립시키는 ‘우리민족끼리’ 전술의 일환으로 쓰이기도 했다.

    금강산 관광이나 개성공단 건설 역시 마찬가지 차원에서 검토된 사업이다. 금강산에 남북 중립지대를 구축함으로써 당장의 경제적 이익을 얻고, 이를 통해 현대아산을 내세워 남한 내 기업이나 민간단체의 대북지원이 활성화되도록 자극하기 위한 모델이었던 셈이다. 서울과 평양을 교환 방문하는 방식 등의 교류는 자칫 흡수통일의 우려가 있었다. 통전부 주도로 중립지역을 구축해 남북대화나 민간교류를 금강산으로 제한하면 이러한 부담 없이도 민간 대북지원 창구를 만들 수 있었다. 고정간첩이나 친북 좌익세력과의 접선·지령공간으로 금강산을 활용하겠다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개성을 준(準)군사화, 정치화하는 공단 사업에는 남북공동의 개방장소를 경제적으로 이용하는 것뿐 아니라 유사시 제1선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군사적으로 기지화하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그러기 위해 김정일은 개성시와 공단 인력 가운데 최소한 5만명을 제대군인으로 배치하라고 지시했다. 2003년 7월 ‘로동신문’에는 김정일이 개성 방어대를 현지 시찰한 사진이 공개된 바 있다. 이는 인민군 총참모부의 ‘개성 시나리오’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더욱이 개성공단 사업은 전략적으로 필요한 경우 남한에 대해 정치·경제적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는 지렛대였다. 김정일은 이 사업을 비준하면서 “남북관계는 북미관계가 회복되기 전까지의 과도기”라며 “지금 개성을 개방하는 것은 역으로 적들이 우리의 전술에 끌려오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전략적 성숙기에는 오히려 북한이 개성을 토대로 정치·경제적 주도권을 쥘 수 있으므로 지금은 개성을 충분히 개방하라는 지시였다.

    이외에도 통전부는 위장명칭을 이용해 다양한 남북교류 사업을 추진했다. 일례로 평양시 모란봉구역 전승동 통전부 청사에는 정문 옆 귀빈실에 통전부 대신 ‘조국평화통일위원회’명패가 붙어 있다. 경제교류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아태)’는 사실상 건물도 없는 유령조직이다. 국제사회의 인도적 지원을 받기 위해 만들어낸 통전부 정책과의 가명(假名)일 뿐이다. 정책과는 남북경제교류나 회담의 유무를 감안해 아태 명의의 사업범위와 내용을 조절한다.

    문제는 아태 명의로 이루어진 남북간의 합의가 법적 구속력을 갖는다는 것이다. 북한은 한편으로는 군부를 이용해 강경론을 주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대외적으로 비정부기구인 아태를 이용해 평화를 주장하는 전술을 구사한다. 이를 통해 남북관계를 정부간 관계가 아닌 남한 정부와 아태 사이의 관계로 구속시키는 것이다. 남한 정부는 북한의 이러한 전략적 의도에 끌려 다닐 것이 아니라 새로운 남북기구를 주장해야 한다.

    햇볕정책 역이용 전략의 핵심 가운데 하나는 남북관계에서 군을 이용해 강경론을 제기하는 것이다. 북한의 체제상 이견을 제기할 수는 있지만 주장할 수 없는 것이 당적 원칙이다. 강경론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사실상 김정일 유일체제를 부정하는 일이 된다.

    열차운행 해프닝은 통전부 사전기획

    그럼에도 남북협상에서 북한측 인사들이 “군부가 강경한 입장을 보인다”고 언급하는 것은 군부의 위상이 통전부를 압도할 만큼 우세하기 때문이 아니라, 통전부가 군을 전술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만큼 남북 ‘단일채널’에 빈틈이 없는 것이다. 남한의 대화조직이 통일부나 국방부, 민간교류에 이르기까지 형식과 내용에서 다양한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통전부를 중심으로 하는 종합적인 남북관계 관리를 통해 양면전술이나 강경전술을 그때그때 선택할 여지가 얼마든지 있다.

    통전부는 경제적 실리를 챙길 때는 아태, 민화협, 민경협 등을 내세우고, 전략적인 압박이나 중단이 필요할 때는 군 강경론을 제기한다. 이 때문에 통전부가 가장 아끼는 남북대화 채널이 바로 군사안보 관련 회담이다. 군을 대표하는 인민군 총정치국 산하에 남북관계를 담당하는 부서는 보도국이나 판문점대표부뿐으로, 이들은 독자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통전부가 그리는 대남전술 구사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북한이 지난해 5월에 남북열차 시험운행과 관련해 “군부가 허락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언급한 것도 마찬가지다(2006년 4월 장관급회담에서 열차 시험운행일정에 합의했던 북한은 예정일인 5월25일을 이틀 앞두고 갑자기 이를 취소해 남측을 당혹케 했다-편집자). 이때 북한은 처음부터 시험운행 의지를 갖고 있지 않았기에 시험운행과 관련한 실무접촉 회의를 군사안전보장회의와 동시에 개최하자고 제기했다.

    그러나 통전부는 실무접촉회의에서는 군사안전보장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고 못을 박았고, 군사안전보장회의에서는 남한이 받아들일 수 없는 NLL 문제를 들고 나와 결국 두 접촉을 모두 무산시켰다. 그리고 조만간 시험운행이 이뤄질 것처럼 ‘쇼’를 하는 과정에서 많은 이익을 챙겼다. 우선 남한 정부로부터 비료를 추가적으로 받아냈으며 경공업품 원자재 합의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南은 ‘대화’하지만 北은 ‘대적’한다

    남북대화에서 남한은 ‘대화’하지만 북한은 ‘대적’한다. 한국은 북한으로부터의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사전에 대화비용을 부담하기도 하고 대화과정에서도 대체로 유화적인 태도를 보인다. 반면 북한은 철저히 대적한다는 전제하에 적과 싸운다는 의지와 결심으로 회담에 임한다. 이는 북한으로서는 이념적·제도적 원칙에 해당한다. 이러한 심리와 정서가 대화에 반영되어 예의마저 저버리는 아집과 불손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실제로 대화에 대한 갈증은 남한보다는 북한이 더 절실하다. 우리는 하면 좋고 안 해도 잃을 게 없지만, 북한으로서는 시시각각 생존과 직결돼 있기 때문이다. 북한에 고(高)자세 전략을 제공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남한의 대화 성의가 너무 대단한 데에도 문제가 있다.

    북한의 사회이념이나 선군(先軍) 구조상 전면적인 개혁개방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따라서 북한은 특구 개방정책이나 외부로부터 지원물자를 끌어들이는 전략을 유일한 생존의 길로 갖고 있는 것이고, 따라서 대화전략은 곧 생존전략이 되기 때문이다. 북한의 대남 의존도가 점차 높아지면서 남북관계의 창구 역할을 하는 통전부의 위상이 점차 상승하는 것만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남한이 비료를 주지 않으면 농사도 지을 수 없는 악순환 구조가 고착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북한의 장점이 유일독재의 조직력이라면, 남한의 최대 장점은 바로 돈이다. 북한이 정부 차원에서 필요로 하는 비료와 쌀만 잘 이용해도 남한이 얼마든지 대화의 주도권을 쥘 수 있다. 북한이 원하는 양을 남한이 원하는 시간에 분배하는 것만으로도 대화의 끈을 쥐고 나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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