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7월호

北은 왜 한반도 종단철도(TKR)를 두려워하나

유훈통치 망령 사로잡힌 김정일은 남북철도 못 잇는다

  • 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

    입력2007-07-09 14:49: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동해선과 연결되는 북한 철도 개량에 2조원 이상 필요
    • 동해선 잇는 데 10년, 4조원 이상 필요
    • 2002년 이전엔 경의선, 이후엔 동해선 고집한 북한
    • 푸틴, 중국 통과하는 TSR 노선 결사 반대
    • ‘혁명의 수도’ 개방에 자신 없는 북한
    • 인민군은 청년이천선 활용에 반대
    • 개성공단 근로자 수송 위해 한국 열차 가야 할 듯
    北은 왜 한반도 종단철도(TKR)를 두려워하나

    5월17일 경의선에서는 남측 열차(왼쪽)가, 동해선에서는 북측 열차가 비무장지대를 통과해 철도를 달리는 1회성 이벤트가 있었다.

    한마디로 북한의 상황은 열강에 둘러싸인 조선 말기와 흡사하다. 그 열강 가운데 한 나라가 한국이다. 한국과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은 “문을 열라”며 계속해서 북한을 두드리고 있다. 대원군은 외세가 무서워 개방하지 못하다 며느리인 민비(명성황후)와 싸우는 내분을 겪었고, 그 결과 조선을 멸망의 길로 몰아갔다. 지금 김정일은 대원군과 비슷한 처지가 아닐까.

    지난 5월17일 남북은 56년 만에 철도를 잇는 1회성 이벤트를 열었다. 이날 금강산역에서 북한 열차를 타고 한국 동해안의 제진역까지 온 북한의 김용삼 철도상은 동승한 이용섭 건설교통부 장관에게 “러시아 측에서 철도를 연결하는 데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이 장관이 “우리는 경부선이 잘 발달돼 있는데, 이를 활용하면 (연결에)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자, 김 철도상은 “(남측) 경부선으로 하면 러시아는 못 간다. 기술적으로 어렵다”라고 대꾸했다.

    南 경의선, 北 동해선의 동상이몽

    이에 앞서 금강산역에서 열린 기념행사에서 박정성 북측 철도성 국장은 격앙된 목소리로 “동해선 철도 완전 연결을 위해서는 많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며 “동해선 전 구간의 철도를 연결해 민족 공영에 기여하자”고 원고에 없던 내용을 말했다. 우리는 남북 철도 잇기를 경의선 연결로 이해하고 있는데 북한은 일제히 동해선 연결을 강조하고 나선 것이다.

    남북 철도 잇기는 군사분계선으로 잘린 한반도 종단철도(TKR)를 부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철도를 러시아의 시베리아횡단철도(TSR)에 연결해 유럽까지 잇자는 것이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일관된 정책이었다. 한국은 TSR에 연결할 TKR로 부산-대구-대전-서울-문산-개성-평산-세포청년-원산-고원-함흥-청진-나진-두만강을 잇는 노선을 생각했다. 두만강역에는 러시아의 하산역을 잇는 철도가 연결돼 있는데 여기서부터는 TSR이다.



    그런데 북한이 내놓은 노선은 전혀 다르다. 북한은 부산-포항-삼척-강릉-금강산-원산-고원-함흥-청진-나진-두만강을 잇는 철도를 TKR로 생각하고 있다. 원산 이북 지역에서는 남북이 생각하는 TKR 노선이 같지만, 원산 이남의 일부 북한 철도와 한국 철도에 대해서는 180도 다른 것이다. 문제는 북한이 주장하는 이 노선은 중간에 철도가 깔려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北은 왜 한반도 종단철도(TKR)를 두려워하나

    TKR에 대한 남북 노선도 차이

    일제는 동해안을 따라 부산에서 원산(안변)을 잇는 동해선을 계획했다. 그에 따라 1935년 부산에서 포항을 연결하는 ‘동해남부선’을 완성하고, 1937년에는 함경남도 원산(안변)에서 강원도 양양을 연결한 ‘동해북부선’을 완공했다. 이로써 ‘동해중부선’이라고 할 포항과 양양 사이가 남게 됐는데,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 매몰된 일제는 동해중부선을 잇지 못하고 패망했다.

    6·25전쟁 휴전협상 결과 한국은 동해북부선의 끝부분을 차지하게 됐다. 북한과 연결돼 있는 동해북부선은 한국엔 무용지물이었다. 휴전선에 꼬리표처럼 달린 이 철도를 활용하려면 한국은 포항과 양양 사이를 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 지역에는 이렇다 할 산업이나 대도시가 없어 철도 연결은 전혀 경제성이 없었다.

    한국은 반대의 선택을 했다. 유사시 남침한 북한군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비무장지대에서 양양까지의 동해북부선 철로를 걷어버린 것이다. 대신 영주에서 묵호(지금의 동해시)까지 들어와 있던 영동선을 강릉까지 연장했다. 그리고 산업물자 수송을 위해 묵호에서 그 남쪽에 있는 삼척까지 철도를 닦았다. 삼척에서 묵호를 거쳐 강릉까지 새로 철길을 닦은 것인데, 한국은 이 철도를 동해북부선으로 불렀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 노선은 과거에 놓기로 한 동해중부선의 일부로 봐야 한다.

    따라서 부산에서 제진까지의 동해선을 완성하려면 한국은 포항과 삼척 사이, 강릉과 제진 사이에 철도를 새로 놓아야 한다. 그런데 부산에서 출발한 열차는 중앙선을 따라 북상하다 영주에서 영동선으로 들어와 강릉까지 갈 수 있으므로 강릉과 제진만 이으면 아쉬운 대로 남북을 잇는 철도망을 구축할 수 있다.

    1997년 정부는 강릉과 제진 간 철도를 놓는 경제적 비용을 조사했는데, 그때 산출된 금액이 1조8000여억원이었다. 물가 상승을 감안할 경우 지금은 2조원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달러로 환산하면 20억달러가 소요되는 것이다.

    현재 건설교통부는 포항에서 삼척을 잇는 179㎞ 구간에 철도를 놓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는데 여기에도 2조원 안팎의 돈이 들어간다. 따라서 부산에서 제진을 잇는 동해선을 완성하는 데는 10년 세월에 4조원(40억달러) 정도가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최소 비용 최대 효과’에 철저한 북한

    자연과학에는 ‘법칙(law)’이 많지만 경제학에서 사용하는 법칙은 ‘수요와 공급의 법칙’ 하나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노리는 것’이 경제원칙이다. 이 원칙에 따르자면 한국은 동해선을 이을 이유가 없다. 경부선과 경의선을 이용해 나진을 거쳐 TSR에 연결하는 것이 한국 처지에서는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올리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TKR과 TSR을 이으면 한국 경제가 발전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러나 북한 정세가 불투명한 지금 TSR이 황금알을 낳을 거위가 된다고 누가 자신 있게 말하겠는가. 그렇다면 경부선과 경의선을 이용해 화물을 실어 나르다 이 노선으로 처리할 수 없을 정도로 물동량이 늘어났을 때 동해선을 잇는 게 한국으로서는 가장 경제적인 선택이 된다.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노린다’는 경제의 원칙은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북한도 TKR과 TSR을 이으면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은 잘 알지만, 이것이 ‘황금알 낳는 거위가 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TSR과 연결되는 TKR을 만들려면 북한 철도를 대폭 개량해야 한다. 북한으로서는 이 비용이 여간 부담스럽지 않은데, 만일 누군가가 이를 대신해주겠다고 한다면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노린다’는 면에서 이 안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

    군사분계선으로 끊어진 철도는 경의선과 경원선, 동해선 세 개다. 그런데 동해선은 완성되지 못한 것이라 당장은 TKR 노선이 될 수 없고, 경의선과 경원선만 TKR로 사용할 수 있다. 두 노선은 동해선에 비해 군사적인 밀집도가 높은 지역을 지난다는 특성이 있다. 경의선과 경원선 가운데 남북 양쪽에서 모두 현대화한 것은 경의선이다. 경의선 복원은 서울과 평양을 잇는다는 의미도 있다.

    北은 왜 한반도 종단철도(TKR)를 두려워하나

    한국에서 유럽을 이을 철도는 A, B, C, D 노선을 비롯해 여러 노선이 있다. 러시아는 이 중 중국을 거치지 않는 A노선안을 주장한다.

    남북 화해는 군사적인 신뢰 회복을 전제로 하는 만큼, 경의선 연결은 남북 군사당국간 협조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한국은 경의선을 이어 TKR을 만들 생각을 하고, 2000년 남북정상회담 때 이를 제의해 북한 측의 동의를 받아냈다. 이때 한국은 TSR만큼이나 TCR(중국횡단철도) 연결도 중시했다.

    ‘세계의 공장’인 중국은 항구가 부족해서 몰려드는 화물을 제때에 처리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의 항구는 만성적인 체선(滯船)과 체화(滯貨)를 겪는데, 이것이 중국 업체로서는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중국 철도망과 한국 철도망이 연결된다면 ‘세계의 공장’은 한국의 항구로도 물자를 빼낼 수 있게 된다. 중국 기업들은 숨통이 트이는 것이다.

    北, 정상회담 땐 경의선 연결에 동의

    TSR, TCR을 모두 연결하려면 북한으로서도 경의선을 잇는 게 낫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둔 듯 경의선을 잇자는 김대중 대통령의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해 7월31일 남북은 1차 장관급회담을 했는데 여기서 철도 경의선과 함께 국도 1호선인 도로 경의선을 잇자는 합의가 이뤄졌다.

    ‘쇠뿔도 단김에 뺀다’고 한국은 성급하게 드라이브를 걸었다. 그해 9월18일 북한과 무관하게 철도 경의선과 도로 경의선을 군사분계선까지 복구하는 공사에 들어간 것. 우리 측 구간만 건설하는 것이었으므로 이 공사는 빠른 속도로 진행돼 2001년 말 완료됐다.

    한국이 일방적으로 비무장지대 이남의 경의선 철도와 도로를 완성하고 난 다음인 2002년 4월3일 국정원장 시절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킨 임동원 대통령 외교안보통일특보가,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위원장을 만났다. 이때 김 위원장은 임 특보에게 “한반도 종단철도를 만들려면 동해선을 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한은 애초에 약속한 경의선을 거부하고 동해선으로 방향을 전환하겠다며 ‘오리발’을 내민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서울에 돌아온 임 특보가 4월9일 KBS-1 TV 뉴스라인에 출연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동해선 연결을 제안했다”고 밝힘으로써 사실로 확인됐다. 그러나 이때 한국은 군사분계선 이남의 경의선 철도와 도로 공사를 완성한 다음이었으므로 경의선을 밀어붙였다.

    김정일, 경의선 연결 약속 파기

    2002년 8월27일 남북은 제7차 장관급회담을 열었는데 여기서 북한은 동해선 연결을 주장하고, 한국은 처음 안대로 경의선을 잇자고 주장하다가 ‘경의선과 함께 동해선을 잇는다’는 데 합의했다. 그해 9월18일 남북은 비무장지대 동해선과 경의선을 잇는 공사에 들어갔다.

    군사분계선 북쪽의 공사는 북한이 담당했지만, 레일과 침목 등의 자재는 한국에서 공급받는다는 조건으로 공사를 벌였다. 자본주의를 적(敵)으로 보는 사회주의 북한은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얻는다’는 경제 원칙을 철저히 지킨 것이다.

    이때가 한국으로서는 ‘기로’였다. 북한이 동해선 연결을 요구했을 때 한국은 북한과의 협상을 파기하는 등 강수를 뒀어야 한다. 아니면 햇볕정책 정신을 따라 동해선을 잇기 위해 제진에서 강릉을 잇는 철도 공사를 시작했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은 둘 다 하지 않았다.

    “왜 강릉에서 제진 사이의 동해선 연결 공사를 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속 시원한 대답을 주는 사람은 없다. 다만 한국은 군사분계선까지의 경의선 복원 공사를 마무리했으니 ‘죽으나 사나’ 경의선에 목을 맬 수밖에 없지 않았겠느냐는 해석만 나올 뿐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대북 협상을 담당한 사람들은 ‘단 하나의 카드’, 즉 경의선 연결을 밀어붙일 궁리만 한 것이다. 북한을 다루려면 수가 많아야 하는데 두 정부의 대북 협상가들은 이를 소홀히 했다.

    동해 쪽에서 한국은 시늉만 했다. 도로는 닦았지만 철도는 군사분계선에서 제진역까지만 놓고 그 위에 기관차를 옮겨 놓았다. 어차피 쓰지 못할 철도니 북한이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는 척이나 하자고 한 것인데, 북한은 그 허점을 파고들었다. “경의선은 안 되고 동해선만 된다”며 한국의 팔을 비틀어버린 것.

    북한은 한국을 애 먹이려고 동해선 연결 쪽으로 돌아선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이 의문과 관련해 주의 깊게 살펴볼 것이 러시아의 선택이다. 일반적으로 ‘시베리아 횡단열차’라고 하면 블라디보스토크역과 모스크바역 사이의 9334㎞를 달리는 직통 열차(세계 최장 노선이다)를 가리킨다. 이 때문에 이 열차가 달리는 노선을 TSR이라 하는데, 극동러시아와 유럽러시아를 연결하는 철도는 이 열차가 달리는 노선 외에도 몇 개가 더 있다.

    푸틴 TSR 가치 발견

    北은 왜 한반도 종단철도(TKR)를 두려워하나

    중국은 목극등의 실수로 동해로 진출하는 출구를 갖지 못했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큰 사진은 두만강 하구에서 24km쯤 떨어진 중국 땅 팡촨에서 바라본 두만강 하구. 멀리 동해 바다가 보인다. 철교 오른쪽엔 북한의 두만강역이 붙어 있다. 팡촨에는 ‘중국의 동북 지방을 지키는 전초이니 중국(중화)의 국위를 선양하라(守東北前哨 揚中華國威)’는 장쩌민의 글을 새긴 비석이 서 있다(작은 사진).

    우리가 말하는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극동러시아에서 시작해 러시아를 관통한 다음 유럽 주요 물류 중심부에 이르는 철도를 의미한다. 이러한 철도는 시베리아는 물론이고 유럽과 러시아를 가로지르므로 ‘러시아 횡단철도(TRR)’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시베리아 횡단철도, 정확히 말하면 러시아 횡단철도의 가치를 발견한 이는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다.

    러시아는 국토가 넓어 매우 긴 철도 노선이 존재한다. 이러한 철도 가운데 경부선처럼 러시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제1 도시인 모스크바와 제2 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잇는 것이다. 남북정상회담 1년 후인 2001년은 이 철도를 이은 지 150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리고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주요 구간을 이은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했다.

    이러한 때인 2001년 7월, 김정일 위원장이 푸틴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김 위원장은 열차 여행을 고집해 이른바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이용하느라 24일간 평양을 비우게 된 것. 철도 관련 행사가 많은 기간에 만남이 이뤄진 만큼, 8월4일 푸틴과 김정일은 시베리아 횡단철도(러시아 횡단철도)와 한반도 종단철도를 연결한다는 내용이 담긴 ‘모스크바 공동 선언’을 채택했다.

    그리고 8월14일 두 나라의 철도 책임자가 ‘북-러 철도 상호협력협정’을 체결했는데 이 협정에는 러시아가 북한의 철도를 현대화하기 위해 북한 철도를 조사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러시아가 TSR의 가치에 눈을 돌린 데는 한국 측의 자극도 주효한 것으로 보인다. 북-러 철도상호협정 조인 한 달 후인 9월 한국에서는 손학래 철도청장이 러시아를 방문해, 한-러 철도 협력에 관한 협정을 맺는다는 데 합의했다.

    그리고 같은 달 러시아 철도부의 뱌체슬라프 발라킨 대외협력국장이 북한을 방문하고, 10월7일에는 5박6일간 한국을 방문했다. 발라킨 국장은 부산항을 견학했는데 주지하다시피 부산항은 컨테이너 처리 기준으로 세계 3~5위를 달리는 항구다. 부산항은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에서 발생한 화물을 끌어모아 유럽이나 미주로 수송하는 허브(Hub, 중심)항이다.

    발라킨 국장은 부산항의 규모를 보고 감탄했는데 이때 안내하던 사람이 “한국은 광양항을 부산항과 비슷한 규모로 키워가고 있다”고 하자 더욱 놀라워하며 “부산항이 처리하는 컨테이너 양의 10%만이라도 TKR과 TSR에 실어 운반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내비쳤다고 한다. 발라킨은 TKR과 TSR의 잠재 가치를 꿰뚫어본 것이다.

    러시아 처지에서 TSR에 연결할 수 있는 가장 짧은 TKR은 동해선이다. 한국이 포항과 삼척, 강릉과 제진 사이를 잇고 남북이 제진과 금강산역 사이만 이어준다면 부산항에 모여든 화물은 이 철도를 따라 두만강역과 하산역을 거쳐 유럽으로 수송될 수 있다. 부산항을 출발한 배에 실린 화물이 유럽 항구에 도착하는 데 10일이 걸리니, 러시아로서는 이보다 짧은 시간에 (TSR을 이용해) 부산항의 화물을 유럽의 물류 중심지에 내려놓아야 한다. 그러니 되도록 짧은 노선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발라킨 러 철도국장의 감탄

    한국의 총 철도 길이는 3374㎞이나 러시아의 총 철도 연장은 9만여 ㎞이다. 이러한 러시아로서는 300㎞ 가량의 동해선 연결은 일도 아닌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러시아는 이러한 생각을 북한에 통보하고, 남쪽의 동해선에 연결돼 하산역까지 가는 북한 철도에 대한 조사에 들어갔다.

    북한은 비무장지대 북쪽의 금강산역에서 원산까지의 철도를 동해선으로 부르지 않고 ‘금강산청년선’으로 부른다. 금강산청년선은 원산에서 평강을 거쳐올라온 강원선을 만나 고원으로 이어진다. 고원에는 평양에서 나진으로 이어지는 북한 최장 철도인 평라선이 지난다. 나진에서 조금 더 가면 두만강역이 있는데 두만강역에서 철교(두만강)를 건너면 러시아의 하산역이다.

    발라킨 러 철도국장의 감탄

    나진에는 러시아로부터 공급받은 원유를 정제하는 웅기정유공장 등으로 구성된 승리화학이 있으므로 이곳에는 표준궤와 함께 러시아의 광궤(廣軌) 철도가 들어와 있다. 러시아의 광궤는 표준궤보다 8.9㎝ 더 넓은데, 북한은 광궤와 표준궤를 함께 놓는 혼합궤를 이 지역에 깔아놓았다. 러시아는 북한 철도를 현대화하면서 표준궤로 하는 것이 좋을지 광궤로 하는 것이 나을지 검토했는데, 북한 전역에 깔려 있는 표준궤가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북한 철도를 여러 차례 조사한 러시아는 TKR을 위해 북한 철도를 개선하는 데 24억~25억달러(2조원 정도)가 들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러시아는 소련 시절 북한에 39억루블을 빌려준 적이 있는데, 북한 경제의 붕괴로 이 돈을 돌려받기 어렵게 됐다. ‘못 받을 돈이라면 인심이라도 쓰자’는 식으로 러시아는 이 차관의 80%를 탕감해줄 테니 대신 북한 철도 현대화사업을 달라고 요구해, 양측은 지금까지 협상을 거듭하고 있다.

    반대로 러시아는 구소련 시절 한국으로부터 14억7000만달러를 빌려갔다가 갚지 못했다. 원리금이 계속 늘어나는데도 러시아가 상환하지 못하자 2003년 한국은 ‘6억6000만달러는 면해주고 2억50000만달러는 현물로 상환받는다’는 탕감안을 내놓아 러시아와 합의했다. 이로써 그 시점에서 러시아가 갚아야 할 원리금 총액은 13억3000만달러가 됐다.

    러시아는 이 차관에 눈독을 들였다. 즉 한국에 갚아야 할 차관이나 현물 가운데 일부를 활용해 북한 철도를 현대화하자고 한 것이다. 북한에 제공되는 레일이나 침목, 신호장비는 전부 러시아에서 제작해 들어가니 러시아는 한쪽으로는 빚을 갚고 한쪽으로는 공장을 돌리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이러한 아이디어에 대해 북한은 찬성을 표시한 듯 2002년 이후 줄기차게 동해선 연결을 강조했다.

    러시아가 TKR 연결을 위해 나선 것은 한국으로서는 반길 일이다. 그러나 러시아가 제시한 24억~25억달러가 과연 적정한 비용인지는 따져보아야 했다. 2003년 4월 러시아는 남북한 철도 관계자를 불러 “국제컨소시엄으로 북한 철도를 현대화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했다. 이 컨소시엄에 투자할 나라는 한국뿐이라는 것을 암시한 것인데, 북한 측은 한국이 돈을 댄다는 것에 펄쩍 뛰며 반대했다.

    한국도 “무엇을 근거로 24억~25억달러가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왔냐”면서 명세서 제시를 요구하며 반대의사를 내비쳤다. 한국은 “러시아가 단독으로 한 조사를 근거로 컨소시엄을 만들 수 없다. 한국도 참여한 조사라야 인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은 북한을 직접 조사해야겠다고 한 것이니, 북한은 더욱 펄쩍 뛰며 반대했다. 이 회의에 참석했던 사람에 따르면 “러시아는 남북이 알아서 합의하면 북한 철도를 깔아주겠다는 매우 고압적인 자세였다”고 말했다.

    돈 안 들이고 TSR 연결하려는 러시아

    러시아 주장대로 TKR을 만들면 한국은 러시아에 빌려준 차관 일부를 탕감해주고 그와 별도로 4조원을 들여 동해선을 완성해야 한다. TKR에 TSR을 연결하면 한국 북한 러시아 모두가 이익인데, 한국만 6조원가량을 투자해야 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한국만 ‘봉’이 되라는 것인데, 이는 상식적으로도 받아들일 수 없는 처사다.

    부산과 유럽을 잇는 철도는 짧을수록 경제성이 높다. 그렇다면 굳이 극동러시아로 돌아갈 것이 아니라 경부선-경의선을 거쳐 압록강을 건넌 다음에 몽골 동쪽을 지나 러시아를 관통하는 것이 낫다. 그것이 가장 짧은 노선이다. 이것이 여의치 않으면 중국 만주리에서 러시아의 치타로 들어가는 것이 차선책이 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중국도 열차 운송비를 챙길 수 있고, 한국도 경의선을 TKR로 이용하게 되니 그야말로 ‘불감청 고소원’이 아닐 수 없다.

    이 아이디어에 대해서는 푸틴 대통령이 강하게 반대한 것 같다. 푸틴은 목하 극동러시아가 무인지경이 돼가는 데 매우 고민하고 있다고 한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4000여㎞를 달리는 동안 만날 수 있는 인구 100만 이상의 도시는 노보시비르스크 하나뿐이다. 노보시비르스크는 대전과 비슷한 러시아 3위의 도시이자 과학도시로 인구는 140여만명이다.

    반면 중국의 동북3성에는 창춘과 선양 지린 다롄 등 인구 500만이 넘는 도시가 즐비하다. 동북3성의 다른 도시도 인구가 넘쳐난다. 중국인들은 러시아에 들어가 생필품 장사를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현상 때문에 2000년 시베리아 아무르 주의 블라고베시첸스크를 방문한 푸틴 대통령은 “정신 차리지 않으면 중국어가 이 지역의 공용어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중국인들이 극동러시아로 들어오는 것을 막으라고 한 것이다.

    요즘 극동러시아에 출입한 사람들에 따르면 이 지역의 물가가 지난해보다 많이 올랐다고 한다. 생필품을 공급하던 중국 상인들의 발길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중국 상인들은 비자 없이 러시아에 들어와 장사하는 경우가 많은데 러시아는 적발하는 즉시 이들을 쫓아내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올해를 ‘중-러 친선의 해’로 정했다. 그런데도 러시아는 비자 없이 입국한 중국인들을 대거 추방해,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총리가 항의하는 지경이 됐다. 이러한 중국의 반발을 러시아는 다른 이유를 대며 피해가고 있다.

    1991년 독립한 아르메니아는 CIS 국가 가운데 대표적인 농업국가다. 지금 아르메니아 출신 마피아가 모스크바의 농산물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푸틴은 아르메니아 농업 마피아를 제거하기 위해 불법으로 입국한 아르메니아인들을 쫓아내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아르메니아인에게만 표적을 맞출 수 없으니 “모든 불법 입국자를 추방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비자가 없는 중국 상인까지 함께 내쫓은 것이다. 러시아는 중국을 통과하는 TSR을 원치 않는다.

    푸틴은 ‘러시아인에 의한 강한 러시아 건설’을 목표로 한다. 이런 까닭에 마피아의 힘이 뻗치던 철도와 가스·전력·통신 원유를 전부 국영기업화해 최측근을 대표로 앉혔다.

    푸틴은 3선 금지조항 때문에 내년 초 물러나야 한다. 그러나 올해 9월3일 마감하는 노벨평화상 후보로 등록해 노벨평화상을 받는다면 지지율이 매우 높은 그로서는 개헌을 해 3연임을 하거나, 3선을 한 것과 같은 위치에 놓일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그와 그의 측근들은 업적을 늘리는 데 전력투구하고 있고 그 가운데 하나가 중국을 통과하지 않는 TSR 노선 구축이다.

    올해 초부터 이광재·안희정·김형주씨(서울 광진을 국회의원) 등 노무현 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정치인들이 러시아를 방문해 러시아 측과 철도 연결에 대한 대화를 나눴다. TKR과 TSR을 이을 생각이 있었다면 노무현 정부는 노 대통령의 임기 말인 지금이 아니라 4년 전에 동해선 연결 공사를 시작했거나 아니면 진작에 북한의 팔을 비틀어 경의선을 TKR로 받아들이게 하는 조치를 취했어야 한다. 노무현 정부 실세들은 지금 사후 약방문 격으로 뛰어다니고 있다.

    러시아가 한국을 이용해 돈벌이를 계획했다면, 북한도 북한대로 돈 벌 궁리를 했다. 한국이 제공한 자재로 군사분계선상의 경의선과 동해선을 이은 것이 한 사례다. 북한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중국을 끌어들여 러시아와 경쟁시키려고 했다.

    중-러 경쟁시키는 북한

    1712년 백두산 지역의 영유권 문제로 갈등은 빚은 조선과 청나라가 국경 문제를 논의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회담 후 청나라는 일방적으로 ‘백두산 정계비’를 세웠는데, 이 비에는 ‘서쪽으로는 압록, 동쪽으로는 토문을 국경으로 삼는다(西爲鴨綠, 東爲土門)’는 내용이 있었다.

    토문강은 백두산에서 발원해 북쪽으로 흐르다 송화강에 합류하는 강이다. 한민족은 이 문구를 근거로 토문강 동쪽의 북간도는 한민족의 영토라고 주장해왔고, 중국은 토문강은 두만강이라며 두만강 남쪽만 한민족의 영토라는 주장을 펼쳤다.

    1909년 조선을 보호국으로 떨어뜨린 일제는 남만주철도 부설권과 무순탄광 개발권을 얻기 위해 청과 간도협약을 맺으면서 간도 영유권을 중국에 넘겨주었다. 그리고 1931년 만주를 차지하기 위해 만주사변을 일으켰는데 그후 백두산 정계비가 사라졌다.

    우리로서는 간도를 잃은 것이 매우 억울하지만 중국도 비슷하게 억울한 사정을 갖고 있다고 한다. 1712년 조선과 만주지역 영유권을 논의한 청나라 대표는 목극등(穆克登)인데, 목극등은 하인을 시켜 중국의 영토를 표시했다고 한다. 목극등의 지시를 받은 하인은 중국 영토를 표시하는 비석을 지고 두만강을 따라 가다 지쳐서 바다까지 가지 않고, 그 근처에 돌을 내려놓았다고 하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의 팡촨(防川)이다.

    팡촨은 동해에서 24㎞ 떨어진 내륙인데 목극등의 하인이 팡촨에 영토 표석을 내려놓음으로써 중국은 동해로 나가는 출구를 확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두만강 하구는 북한과 러시아가 확보해, 동북3성은 물류를 처리하는 항구를 갖지 못하게 된 것. 이런 이유로 중국인들은 목극등의 처사를 비판한다고 한다.

    바로 이 문제 때문에 중국은 북한 나진항에 대해 눈독을 들여왔다. 중국은 판잉성(范應生)이 이끄는 둥린(東林)경제무역유한공사로 하여금 북한과 접촉해 2005년 5대 5의 비율로 나진항을 개발한다는 데 합의했다. 나진항에는 부두가 세 곳 있는데, 북한은 이 중 3호 부두를 중국 전용부두로 빌려주고 4호 부두 건설권을 중국 측에 줘 50년간 중국이 나진항을 이용하게 한다고 합의했다.

    나진항을 이용하려면 나진에서 원정리 사이에 북한 도로를 개설해야 하는데, 중국은 한국에 이 도로 공사를 함께 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이 사업은 답보를 거듭하고 있다. 이유는 북한이 핵실험을 해 국제적인 문제를 일으켰고, 그에 대해 중국 정부가 북한을 제재하다 보니 이 사업을 진행할 수 없게 된것.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앞둔 중국은 6자회담에서 북한을 압박했으나 러시아는 오히려 반대로 갔다. 북한은 러시아를 상대로 그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전액 빚 탕감 요구

    지난 3월23일 북한과 러시아는 모스크바에서 7년 만에 제4차 북-러 무역경제 및 과학기술협조위원회를 열고, 임경만 북한 무역상과 폴리코프스키 러시아 생태공학 및 원자력감독국 국장이 ‘경제협력에 관한 의정서’에 서명했다고 발표했다. 소식통에 따르면 이 만남에서 임경만 무역상은 북한이 갚아야 빚을 전액 탕감해달라고 요구해, 90%까지 탕감하려 생각했던 러시아 측을 당황하게 했다고 한다.

    북한은 TSR 연결에 전력을 기울이는 러시아를 상대로 그들의 국익을 극대화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에 대해서는 ‘러시아의 요구’라는 것은 밝히지 않고 동해선을 TKR로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TKR을 구성할 경우 김정일은 북한 군부의 움직임도 신경써야 한다. 김정일은 군부를 자극하지 않으면서 챙길 것은 챙기고, 북한 때문에 TKR이 연결되지 않았다는 비난을 피하려는 사전 포석을 두고 있다.

    대표적인 조치가 1회로 한정한 남북철도 연결 행사를 벌인 것이다. 이 행사는 본래 지난해 하기로 했던 것인데, 북한은 군부가 반대한다는 이유로 취소한 바 있었다. 북한 인민군은 휴전선 서쪽에서부터 4군단-2군단-5군단-1군단을 포진해놓았고, 그 뒤에 기계화군단과 포병군단 네 개를 배치했다.

    북한의 수송체계는 철저한 ‘주철종도(主鐵從道)’다. 철도가 핵심 수송수단이고 도로는 보조수단인 것. 전연 지역에 있는 4개 군단도 철도를 이용해 수송한다. 4개 전연군단은 황해북도 평산에서 강원도 세포청년역을 잇는 140.9㎞의 청년이천선을 통해 물자를 수송하는 것이다. 이 철도는 철길건설대와 청년돌격대, 그리고 군인들이 대거 참여해 1972년 완공했기에 ‘청년’이란 이름이 들어갔고, 이 철도 중간에 있는 역들도 하나같이 ‘청년’을 달게 됐다(세포청년역 식으로).

    경기도에도 이천(利川)이 있지만 강원도에도 이천(伊川)이 있다. 이 철도는 강원도 이천을 지나기에 북한은 이 철도를 ‘청년이천선’으로 이름지었다고 한다.

    북한 철도 공무원들은 군인들과 같은 군사칭호(계급)를 사용한다. 유사시엔 한국도 군이 철도 운영을 관리하는데, 북한은 그 정도가 심해 평상시에도 군이 참여한다. 청년이천선은 북한에서도 손꼽는 군사용 철도다. 군과 민이 공동으로 만들어 사용하는 철도이지만, 전방 4개 군단이 필요로 하는 물자가 이 철도를 따라 수송되므로 군의 입김이 가장 세게 작용하는 철도가 됐다.

    북한에서 동서를 연결하는 철도는 청년이천선과 평양에서 나진까지를 이었다고 하는 평라선 두 개뿐이다. 따라서 경의선을 통해 북쪽으로 올라간 열차가 두만강을 건너 TSR에 연결되려면, 두 철도 가운데 어느 하나를 타야 한다. 평라선은 평양과 신의주를 잇는 평의선과 더불어 북한에서는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철도다.

    청년이천선은 군사용 철도

    김정일로서는 대한민국에서 올라온 화물이 ‘혁명의 수도’인 평양을 통과하는 것을 허용하고 싶지 않다. 한국도 이러한 것은 짐작했기에 청년이천선을 이용하길 원했는데 이 철도를 이용하는 데는 북한군의 전연군단이 강하게 반발했다고 한다. 남조선에서 온 열차가 그들이 닦고 관리해온 철도를 달리는 것을 좌시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주목할 것이 지난 4월 김정일이 2군단장이던 김격식 대장을 총참모장에 임명한 사실이다. 2군단은 요충지인 경기 북부지역을 담당하는 부대인데 2군단 관할 지역 안에 개성공단이 있다. 2군단은 가장 중요한 부대이고 개성공단이 건설되고 운영되는 것을 지켜봐왔으니, TKR을 생각하는 김정일로서는 김격식 대장을 설득하는 것이 다른 부대장을 설득하는 것보다 쉬웠을 것이다.

    북한 전문가들은 김정일은 김격식 대장을 총참모장에 임명하고 그로 하여금 군부를 설득하게 함으로써 1회로 한정한 남북 철도 잇기에 대한 군부 동의를 받아낸 것으로 보고 있다.

    5월17일 남북 철도연결 행사에서 주목할 것이 또 하나 있다. 한국은 이 행사를 ‘남북철도연결 시험운행’이라고 표현했으나 북한은 ‘북남철도연결구간 시험운행’으로 표시한 것이다. 남측은 그냥 ‘철도연결’인데 북측은 ‘구간’을 더 붙였다. 북한은 남북이 철도를 연결한 비무장지대 구간에서만 열차를 운행하는 행사를 원했던 것이다. 아직 북한은 TKR로 달려갈 자신이 없는 것이다.

    ‘혁명의 수도는 열어줄 수 없다’ ‘혁명무력은 남조선 열차의 통과를 지켜볼 수 없다’는 금기사항을 지켜야 한다는 부담, 그리고 한국과 러시아가 몸이 달아서 ‘TKR을 잇자’고 할 때 따라가주는 것이 이익이라는 판단 사이에서 김정일은 주저하고 있다. 이러한 주저가 “이것도 OK” “저것도 예스” 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지난해 10월 한국으로부터 강한 요청을 받은 야쿠닌 러시아 철도공사 사장은 김용삼 북한 철도상을 만나 TKR은 청년이천선으로 한다는 데 합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약속의 이행은 부지하 세월이다.

    북한이 ‘말로만 오케이’를 반복하자 러시아는 서서히 정책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러시아 철도공사 사장 야쿠닌은 푸틴 대통령과 같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으로 푸틴처럼 KGB 요원이었으며 독일에서 푸틴과 함께 근무했다고 한다. 푸틴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꼽혀 철도공사 사장에 임명됐고 지금은 푸틴 뒤를 이을 유력한 차기 대통령후보 3인 가운데 한 명으로 거론되고 있다.

    혁명의 수도는 열어줄 수 없다

    그가 요즘은 TSR보다는 유럽으로 이어지는 철도 운영에 더 큰 관심을 쏟고 있다. 이유는 러시아 중앙지역에서 생산된 가스를 유럽으로 수송하는 사업 규모가 커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핀란드에서 시작해 우크라이나를 거쳐 이란을 잇는 남북 철도를 두 번째로 중요시하고 있다. TKR과 TSR을 연결하는 사업은 그 다음으로 밀려난 것.

    현재의 대통령선거 구도라면 다음에 들어설 한국 정부는 노무현 정부만큼 북한에 유화적이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차기 한국 대통령은 퍼주기식, 구걸하는 듯한 대북 협상을 자제할 가능성이 높다.

    북한에는 푸틴 정부와 노무현 정부가 있을 때가 호기인데 북한은 이를 놓치고 있다. 내부 의견을 통일하지 못해 중요한 기회를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은 ‘개방을 하면 망할 것이다’는 망령에 사로잡혀 있다. 김정일이 아버지 김일성의 유훈을 받들어 북한을 통치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김일성은 죽기 10일 전인 1994년 6월30일 벨지크(벨기에) 로동당(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을 만나 담화를 나눴다. 이러한 사실은 북한에서 발행한 ‘김일성 저작집 제44권(1992년 1월2일부터 1994년 4월7일)’에서 확인한 것인데, 이 책 470, 471쪽에는 김일성이 벨기에 공산당 중앙위원장에게 했다는 말이 담겨 있다.

    “남조선 자본가들도 북과 남이 경제적으로 어떻게 합작하겠는가 하는 것을 토론하기 위하여 나를 계속 찾아오고 있습니다. 나는 며칠 전에도 손명원이라는 남조선 기업가를 만났고 얼마 전에는 김우중도 만났습니다. 북과 남이 합작만 하면 돈벌이를 많이 할 수 있습니다. 례를 들면 신의주와 개성 사이의 철길을 한 선 더 건설하여 복선으로 만들고 남조선으로 들어가는 중국 상품을 날라다 주기만 하여도 거기에서 1년에 4억딸라(달러) 이상의 돈을 벌 수 있습니다.

    초보적으로 계산해본 데 의하면 우리가 로씨야(러시아)나 중국 흑룡강성에서 수출하는 물자를 두만강역에서 넘겨받아 동해안에 있는 철길로 날라다주면 거기에서 한 해에 10억딸라 이상의 돈을 벌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도 한 해에 약 15억딸라의 돈을 벌 수 있습니다. 지금은 거기에 철길이 한 선밖에 없는데 앞으로 한 선 더 건설하여 복선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13년 전에 이미 김일성은 TKR의 가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김일성이 살아 있다면 지금쯤 남북 철도는 연결됐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말은 김일성의 속셈을 드러낸 것이 아니었다. 속셈은 그 다음 담화에서 나온다.

    이어지는 담화에서 김일성은 “동부 독일은 서부 독일에 흡수 통합되여 망하였는데 우리나라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단호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유훈통치를 하는 한 김정일은 TKR 구성을 수용하기 힘들다. TKR이 구성되면 북한은 내부 모순이 커져 동독처럼 자체 붕괴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정일은 TKR을 할 듯 말 듯하면서 관련 국가들의 지원을 극대화하는 노력만 펼치려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김정일 정권은 조금씩 문을 열어줄 수밖에 없는 처지로 몰리고 있다.

    최근 현대는 개성공단 2단계 분양사업을 추진하고 있는데, 여기에 많은 중소기업이 관심을 보이고 있다. 내년 중 개성공단의 분양이 완료되면 북한 근로자 15만여 명이 개성공단을 출입할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출퇴근 시간에 집중해서 이동하는데, 현재의 개성지역 교통수단으로는 짧은 시간 내에 이렇게 많은 사람을 수송할 방법이 없다. 이들을 수송하려면 이번에 연결한 경의선에 열차를 넣어 개성과 개성공단 사이를 다니게 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다.

    포스트 김정일 시대를 앞당겨라

    그러나 북한의 열차는 힘이 달려 이렇게 많은 사람을 수송하지 못한다. 개성공단의 투자자는 한국이니 결국 한국의 열차가 이곳을 다니며 근로자를 실어나르게 될 가능성이 크다. 한국의 열차가 매일 같이 북한에 들어가 근로자를 실어나르는 것을 허용하는 것은, 북한 처지에서는 큰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것 외에는 대안이 없는 것이 북한의 현실이다.

    한국과 러시아 중국 세 나라와 북한 인민 처지에서 본다면 TSR과 연계된 TKR 구성은 분명 이익이다. 그러나 유훈통치를 해야 한다는 부담과 북한 군부의 반발 때문에 김정일은 TKR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렇다면 남북정상회담을 열어 김정일을 상대로 TKR을 잇자는 설득을 하기보다는 ‘포스트 김정일’을 상대로 그러한 노력을 펼치는 게 더 현명한 선택일 것이다. 그렇게 기다려줄 시간이 없다면 포스트 김정일 시대를 앞당기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이라고 북한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