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사카와 다쿠미의 묘지. 망우리공원에 있는 유일한 일본인 무덤이다.
아사카와는 조선총독부 농공상부 산림과 임업시험장(현 국립산림과학원)에서조선의 산림녹화에 힘썼고, 개인적으로는 조선의 민예를 수집하고 연구했다. 단지 그것뿐이라면 그가 여기 묻혀 있는 이유가 되기에 부족하다. 당시 이 땅에서 그들만의 사회 속에서 살다 돌아간 대다수의 일본인과는 달리 그는 조선말을 하고 조선옷을 입고 조선인의 이웃으로 살며 진정으로 조선의 마음에 접한 사람이었기에 죽어서도 이 땅의 흙이 됐다.
유일한 일본인 무덤
아사카와의 무덤 앞 상석에는 ‘삼가 유덕을 기리며 명복을 빕니다’라고 쓰여 있다. 이는 1997년 임업연구원 퇴직자 모임인 홍림회가 아사카와의 고향인 야마나시(山梨)현 다카네초(高根町)와 함께 세운 것이고, 오른쪽 작은 비석 ‘아사카와 다쿠미 공덕지묘(淺川巧功德之墓)’는 1966년 임업시험장 직원 명의로 세운 것이다. 오른쪽의 항아리 모양 묘표는 아사카와가 생전에 좋아한 청화백자추초문각호(靑華白磁秋草文角壺)로 그의 형 아사카와 노리다카(淺川伯敎·1884~1964)가 아사카와 타계 1주기 때 세운 조각품이다. 형 노리다카는 동생보다 먼저 조선에 와 조선의 도자기를 연구했는데, 전국 700여 곳의 가마터를 답사해 조선 도자의 역사를 정립하고 광복 후에도 조선 도자를 계속 연구한 일본 최고의 조선 도자 전문가였다.
왼쪽에 서 있는 검은 단비는 1984년 8월23일에 임업시험장 직원들이 세운 것으로 앞면에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 뒷면에 ‘아사카와 다쿠미 1891.1.15 일본 야마나시현 출생, 1914-1922 조선총독부 산림과 근무, 1922-1931 임업시험장 근무, 1931.4.2 식목일 기념행사 준비 중 순직(당시 식목일은 4월3일). 주요업적: 잣나무 종자의 노천매장발아촉진법 개발(1924), 조선의 소반(1929), 조선의 도자명고(1931) 저술’이라고 적혀 있다.
외국인, 그것도 국치(國恥)의 시대 일본 관리를 지낸 사람의 묘지에 한국인이 직접 쓴, 그리고 두 나라의 관리가 공동으로 제작한 비석이 나란히 서 있는 것이 이채롭다. 아마 한국의 어떤 곳에도 이런 무덤은 없으리라. 과연 아사카와 다쿠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역사의 시곗바늘을 그가 살던 시대로 돌려보자.
1923년 9월 어느 날. 서울 청량리 임업시험장의 관사에는 밤늦도록 불이 켜져 있었다. 방 안에는 ‘폐허’ 동인 오상순, 염상섭, 변영로가 보이고, 집 주인인 또 한 사람은 30대 청년이다. 조선옷을 입고 조선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미뤄 영락없는 조선인. 하지만 그는 임업시험장의 일본인 직원 아사카와 다쿠미였다.
아사카와는 ‘폐허’ 동인들뿐 아니라 많은 조선인과 교유했다. 그의 일기에 따르면 아사카와는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1889~1961)가 일본에서 보낸 광화문 철거 반대 기고문을 당시 동아일보 장덕수 주필에게 넘겨 게재하게 했고, 동아일보 김성수 사장과는 정원사를 소개하고 자기 집의 나무를 선물한 인연으로 저녁식사를 함께 하기도 했다(1922년 4월2일).
그날 임업시험장 관사에서 아사카와와 오상순은 야나기 무네요시의 아내 야나기 가네코의 음악회 준비를 협의하고 있었다. 가네코는 일본의 유명 성악가로 1920년 5월4일 동아일보가 주최한 첫 번째 음악회를 시작으로 조선에서 음악회를 수차 열었고, 거기서 나온 수입은 주로 조선민족미술관 건립 등을 위한 비용으로 사용했다. ‘폐허’ 동인 민태원의 ‘음악회’라는 소설은 1920년의 첫 번째 음악회와 관련된 이야기다. 그들이 협의한 1923년 11월 예정의 음악회는 가네코의 병으로 일정이 연기된 끝에 1924년 4월3일 경성의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렸다. 그 수익금은 1923년 9월1일의 관동대지진으로 무너진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 재건을 위해 기부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