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4월호

탄생 100주년, 윤봉길 상하이 의거의 재구성

“던지지 않은 도시락 폭탄을 돌려달라”

  • 정현상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doppelg@donga.com

    입력2008-04-05 13: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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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거 선서식 날짜, 장소 잘못 알려졌다
    • ‘고향 동포가 일본인에게 박해받는 데 분개해 해외서 독립운동키로’
    • 100주년탄신기념사업회 “윤 의사 도시락 폭탄 돌려달라”
    • 문화재청 관계자 “도시락 폭탄 봉환되면 문화재 지정 가능”
    • “루쉰공원 기념관 ‘매정(梅亭)’은 ‘매헌정(梅軒亭)’으로 바꿔야”
    • “양재 시민의 숲도 ‘매헌공원’으로”
    탄생 100주년, 윤봉길 상하이 의거의 재구성

    의거 전 한인애국단 ‘선서식’을 하고 태극기 앞에서 수류탄과 권총을 들고 기념 촬영을 한 윤봉길 의사. 아래는 일본 내무성 보안과의 ‘윤봉길 폭탄 사건 전말’ 보고서.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사내 대장부는 집을 나가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1930년 3월

    독립운동에 헌신하기 위해 이런 비장한 글을 남기고 조국 산천을 떠나 중국 상하이에서 의거를 감행한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1908~1932) 의사. 1932년 4월29일 스물다섯 청년 윤봉길의 상하이 훙커우(虹口)공원(현 루쉰(魯迅)공원) 의거는 당시 이름만 유지하던 임시정부를 되살리고, 한민족의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독립의지를 크게 북돋우는 전기가 됐다.

    올해는 그가 태어난 지 100주년(2008년 6월21일)이 되는 해다. 윤봉길의사탄신100주년기념사업회는 ‘도시락 폭탄’ 봉환, 다큐멘터리 제작, 국제학술회의, 전기 발간, 북한 유적지 답사, 윤봉길상 제정, 매헌공헌 추진 등 윤 의사의 뜻을 기리기 위한 다양한 행사를 준비 중이다. 우정사업본부는 6월20일 기념우표를 발행하고, 조폐공사도 ‘한국을 대표하는 인물 100명’에 윤 의사를 포함시켜 4월중 기념메달을 만들 계획이다.

    이런 시점에 ‘신동아’는 일본 내무성 보안과가 1932년 7월 작성한 ‘상하이 윤봉길 폭탄사건 전말’ 보고서를 입수한 뒤 추가 취재를 통해 그동안 의거 전의 선서식 날짜와 장소가 잘못 알려져 있었다는 것과 상하이 망명 동기를 최초로 확인했다. 이 보고서는 일본 헌병대가 작성한 것으로 의거 상황, 윤 의사의 경력 및 가족관계, 상하이에 건너간 동기, 의거 경위, 사용한 폭탄 구조 등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김구 선생과의 관계, 윤 의사의 성격 등은 의도적으로 왜곡했다.

    윤 의사의 조카인 100주년기념사업회 윤주(尹洲·61) 부회장은 “당시 일본은 윤 의사 의거를 빌미로 독립운동을 더욱 탄압하기 위해 억지로 배후를 캐는 데 집중했다. 그래서 이 문서에선 사실을 왜곡해 백범(白凡)의 교사 또는 사주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했다. 윤 의사는 훙커우공원 행사에 대한 신문기사를 보고 자신의 의지로 백범 선생을 찾아가 의거 결행을 논의했기에 백범은 윤 의사의 ‘협력자’ 정도로 보는 게 옳다”고 설명했다.



    이 보고서는 윤 의사의 한인애국단 가입 및 의거 결행 선서식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보여준다. 사단법인 매헌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가 펴낸 ‘매헌기념관 전시도록’ 등 주요 자료에는 선서식이 1932년 4월26일 열렸고, 장소는 대형 태극기가 걸려 있는 거류민단 사무실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내무성 보고서는 26일 윤 의사가 김구 선생을 만나 선서문을 쓴 것은 맞지만 사진 촬영은 날씨 때문에 27일 진행했고, 장소도 거류민단 사무실이 아니라 안공근(安恭根·안중근 의사의 동생) 선생의 집이라고 적고 있다. 다음은 보고서 내용이다.

    날씨 탓 선서식 촬영 하루 연기

    ‘4월26일 윤봉길이 약속대로 사해다관에 갔을 때 김구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 즉시 프랑스 조계의 패륵로 신천상리(新天祥里) 20호의 모 조선인 집(주: 조선인 안공근의 집)에 들어가 사진촬영을 준비했다. 김구는 소형 트렁크에서 태극기 하나, 폭탄 하나, 권총 하나와 선서문을 쓴 서양종이를 꺼내 윤으로 하여금 선서문에 서명토록 했다. 촬영은 날씨 관계로 중단하고 다음날 다시 이 집에 모이기로 약속했다. 또한 그 후 김구는 윤에 대해 다음날인 27일 패륵로의 동방공우에 숙소를 정하도록 말하고 이어서 시라카와 대장, 우에다 중장의 사진 및 보자기 한 장을 구입했다.’

    위 내용에서 김구 선생이 미리 선서문을 써와 윤으로 하여금 서명토록 한 것처럼 적어놓았지만 선서문은 윤 의사가 직접 썼다. 내무성 보고서는 또 27일 사진촬영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탄생 100주년, 윤봉길 상하이 의거의 재구성

    윤 의사가 의거 당시 소지했던 ‘도시락 폭탄’.

    ‘4월27일(시간 미상)에 전기한 조선인 집에서 윤봉길은 양복 차림의 독사진 한 장, 가슴에 선서문을 붙이고 왼손에 폭탄, 오른손에 권총을 들고 태극기를 배후로 한 사진 한 장, 또 김구가 뒤에 서 있는 사진 한 장을 각각 촬영했다. 그때 김구가 이 폭탄은 이봉창이 소지하고 간 것과 동일하다는 말을 했다. 그 후 김구는 윤봉길을 무궤도 전차가 있는 곳까지 배웅했으나 폭탄의 구입처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윤봉길은 즉시 공동조계인 오송로(吳淞路)의 일본인 상점에 가서 보자기 한 장을 구입하고 숙소로 돌아왔다가 동방공우로 옮겼다. 오후 7시 반경 김구가 내방하여 시라카와 대장 및 우에다 중장을 어제 제시한 폭탄으로 살해할 것, 투척할 때 끈을 잡아당기면 소리가 난 후 4초 안에 폭발한다는 것, 사용할 폭탄은 29일 아침에 직접 건네줄 뜻을 전하고 다음날인 28일에 중국 YMCA 청년회관에서 재회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신문, 잡지 보며 치욕 깨닫고…’

    윤 의사는 27일 오후 1시께 훙커우공원 열병식장을 사전 답사하고 숙소인 동방공우 여관으로 돌아왔다. 이때 김구 선생이 찾아와 “최후를 앞두고 경력과 감상 등을 써달라”고 하자 평소 갖고 다니던 중국제 소형 수첩에다 ‘이력’과 유촉시(遺囑詩) 4편을 써서 김구 선생에게 건넸다. 하나같이 가슴을 아릿하게 할 만큼 진정성이 담긴 글들인데, 특히 ‘훙커우 공원을 답청하며’라는 ‘거사가(擧事歌)’는 윤 의사의 민족애가 절절하게 느껴진다.

    ‘처처(??)한 방초(芳草)여 / 명년에 춘색(春色)이 이르거든 / 왕손(王孫)으로 더불어 같이 오게 / 청청(靑靑)한 방초여 / 명년에 춘색이 이르거든/ 고려(高麗) 강산에도 다녀가오 / 다정한 방초여 / 금년 4월29일에 / 放砲一聲으로 명세하세’

    여기서 ‘4월29일에 / 放砲一聲으로’ 구절은 이날 폭탄을 투척하겠노라는 것을 의미한다. 보고서에는 윤 의사가 상하이에 건너간 동기를 담은 대목도 나온다. 윤 의사의 직접적 망명 동기는 처음 확인된 것이다.

    ‘범인의 자백에 의하면 고향에서 동포가 일본인에게 박해받는 데 분개하여 해외에 가서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사상을 품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즉 17, 18세경부터 신문, 잡지를 읽기 시작하여 조선은 그 고유의 문화를 가지고 자기 힘으로 훌륭히 통치해 나갈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일본에 복종하여 그 통치를 받아야 하는가, 세계문명이 진보하고 있는 오늘날 타국에 합병되어 있는 것은 치욕이라는 생각을 갖기에 이르러, 신문지상을 통해 상하이에 독립운동의 기관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곳에 가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하기 위해 건너갔다고 한다.’

    이 대목은 윤 의사가 상하이로 간 동기를 압축적으로 보여주지만, 사실 윤 의사는 이 시기에 참으로 많은 일을 벌였다. 어려서부터 글공부를 했던 윤 의사는 16세 때부터 혼자 일본어를 익히고 부지런히 신학문을 접했으며, 19세 되던 해 야학당을 개설하고 ‘각곡독서회’를 조직해 문맹퇴치와 농민계몽운동을 펴나갔다. 20세 되던 1927년엔 야학교재인 ‘농민독본’을 지어 야학 교재로 사용했고, 농촌부흥·협동조합 운동 모임인 ‘목계후생회’를 조직해 구매조합과 증산운동, 영농기술 개발 및 보급, 양돈 양잠 등 부업 장려, 생활환경 개선 등을 위해 힘썼다.

    ‘토끼와 여우’ 공연으로 日警 감시

    목계후생회 회관인 부흥원(復興院·흔히 부흥원이 단체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님)을 건립해 매년 1회 학예회를 열기도 했다. 부흥원에서 학예회를 열고 촌극 ‘토끼와 여우’를 공연했는데, 문화활동이 흔치 않던 당시 농촌에서 관객이 많이 모여들자 윤 의사는 일본 경찰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28년 3월엔 농촌 청년들의 협동심을 기르고 정정당당한 경쟁심과 패기를 북돋우기 위해 ‘수암체육회’도 만들었으며, 집앞에 있는 수암산 기슭 냇가 3300㎡(1000여 평)를 마을 청년들과 함께 일궜다. 효문화운동을 위해 ‘위친계’도 조직했고, 농촌 부흥과 구국독립운동을 위한 월진회(月進會)도 만들었다. 이처럼 많은 일을 이끌다가 1930년 3월6일 상하이 망명길에 오른 것이다. 거사 이틀 전인 1932년 4월27일 자신의 신상에 관한 기록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 직접 쓴 유서인 ‘이력’에 보면 망명길에 오르던 때의 각오가 언급돼 있다.

    ‘23세, 날이 가고 해가 갈수록 우리의 압박과 고통은 증가할 따름이다. 나는 한 가지 각오가 있었다. 뻣뻣이 말라가는 삼천리 강산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수화(水火)에 빠진 사람을 보고 그대로 태연히 앉아 볼 수는 없었다. 각오는 별것이 아니다. 나의 철권(鐵拳)으로 적(敵)을 즉각으로 부수려 한 것이다. 이 철권은 널(棺) 속에 들어가면 무소용이다. 늙어지면 무용이다. 내 귀에 쟁쟁한 것은 상해가정부(上海假政府·상하이 임시정부)였다. 다언불요(多言不要·말이 필요 없음), 이 각오로 상하이를 목적하고 사랑스러운 부모 형제와 애처애자와 따뜻한 고향 산천을 버리고 쓰라린 가슴을 부여잡고 압록강을 건넜다.’

    탄생 100주년, 윤봉길 상하이 의거의 재구성

    윤봉길 의사는 훙커우 공원 행사에 대한 신문기사를 보고 백범을 찾아가 의거 결행을 논의했다. 한인애국단 선서식 때 백범과 윤 의사(오른쪽).

    내무성 보고서 가운데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윤 의사가 의거의 필요성을 직접 진술한 부분이다. 이 내용은 2001년 ‘동아일보’가 단독 보도했다. 전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현재 조선은 실력이 없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일본에 반항하여 독립하기가 불가능하다. 만약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강국이 피폐될 날이 도래하면 그때 조선은 물론 각 민족이 독립을 얻을 것이다.

    현재의 강국도 나뭇잎처럼 자연도태의 시기가 올 것이 필연적이어서 우리 독립운동자는 국가성쇠의 순환을 앞당기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물론 한두 명의 상급군인을 살해한다고 하여 독립이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따라서 이번 사건과 같은 것도 독립에 직접적인 효과가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단지 목적으로 하는 것은 이것이 계기가 되어 조선인의 각성을 촉구하고 또한 세계로 하여금 조선의 존재를 명료하게 알리는 데에 있다. 현재 세계지도에서 조선은 일본과 같은 색깔로 칠해져 각국인은 조선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하는 상황에 있다. 따라서 이 기회에 조선이라는 관념을 그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주는 것은 앞으로 우리의 독립운동에 있어서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믿는다.’

    동아일보, 상하이 의거 최초 보도

    마침내 윤 의사는 4월29일 천장절(天長節·일본 천황 생일) 관민 합동 축하식장에 폭탄을 투척해 시라카와 군사령관, 노무라 함대 사령관, 우에다 사단장, 시게미쓰 공사, 가와바타 행정위원장, 무라이 총영사 등이 폭상을 입게 했다. 가와바타 위원장은 이튿날, 시라카와 사령관은 5월24일 사망했다. 당시 상황을 내무성 보고서는 이렇게 전했다.

    ‘범인의 자백과 목격자 등의 진술을 종합하면, 범인은 처음 식단을 향하여 우측 후방의 군중 속에 섞여 있다가 폭탄 투척의 결의를 굳히자 먼저 손에 들었던 도시락 모양의 폭탄을 땅에 놓고 어깨에서 물통 모양의 폭탄을 끌러 혁대 끈이 달린 채 오른손에 들고 몇 걸음 앞으로 달려가 기마병의 바로 뒤 부근에서 이를 식단에 투척하고, 다시 지상에 놓았던 것을 집어 투척하려고 돌아올 때 군중에게 밀려 쓰러져 체포됐다. 그리고 당시의 경비 상황은 각 대관의 신변보호에 6명의 기마병이 식장에 면하여 섰고, 그 후방 약 5, 6m 되는 곳에 헌병 및 보조헌병이 배치됐고, 그 뒤에 군중이 있었다고 한다.’

    그날 상하이 시가지는 발칵 뒤집혔다. 처음에는 사건의 진상을 중국인의 소행으로 보기도 했지만 곧 ‘조선인 윤봉길’의 거사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국내에서는 4월30일 동아일보가 가장 먼저 호외를 발행, 의거 사실을 알렸다.

    눈에 띄는 것은 의거 직후 일본 헌병대에 체포된 윤 의사가 자신이 비밀결사체인 한인애국단 소속이라는 사실을 오랫동안 밝히지 않은 점이다. 초기 11시간 동안 함구(동아일보 1932년 5월8일자 보도)했고, “스스로의 정의감의 발로로 했을 것이니 구차스럽게 더 묻지를 말라!”(김학준 ‘매헌평전’)라고 버티며 배후에 아무도 없다고 잡아뗐다. 그러나 헌병대는 가혹한 문초를 계속했다. 내무성 보고서는 이 부분을 이렇게 전한다.

    ‘범인 윤봉길은 체포된 후 헌병대의 문초에 대해, 처음 범행을 획책 및 교사한 자는 이춘산(李春山), 즉 이유필(李裕弼)이라고 진술했다. 그러나 혐의점을 엄중하게 문초한 끝에 드디어 5월11일의 제4회 예심관의 문초 때 본건의 획책 및 사주자(일제 조사관 표현)는 김구라는 진술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 후 제5, 제6회의 문초에서 내용이 판명되기에 이르렀다.’

    5월11일 윤 의사가 배후를 댔다는 얘기는 5월10일 김구 선생이 한인애국단 명의로 ‘홍구공원 작탄(炸彈) 진상’을 발표한 것과 맞물려 이해해야 한다. 즉 한인애국단 명의의 진상 발표가 있은 뒤에야 어쩔 수 없이 그것을 인정했다는 의미다.

    탄생 100주년, 윤봉길 상하이 의거의 재구성

    동아일보는 국내 언론 최초로 상하이 의거를 다음날인 4월30일 ‘호외’로 보도했다.

    ‘매헌평전’에 따르면 한인애국단은 임시정부 산하의 비밀결사적 구국단체로, 실행을 중히 여기고 발언을 피해온 실천적 민족운동단체였다. 활발하던 독립운동이 그 힘을 잃어가고, 임정도 내분과 혼란을 겪으며 침체기에 빠져들자 김구 주석이 1931년 독립운동의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비밀결사조직으로 만들었는데, 암살과 파괴를 행동지표로 삼았다. 윤 의사도 의거를 앞두고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된다. 의거 직전 그가 작성한 ‘선서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나는 적성(赤誠·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정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대한민국 14년(1932년) 4월26일 선서인 윤봉길/ 한인애국단 앞’

    ‘또 하나의 별호는 살가지’

    내무성 보안과 보고서에는 윤 의사를 의도적으로 깎아내리거나 실제와 다르게 기술한 부분이 많이 눈에 띈다. 예컨대 ‘성행 및 그 동정 개요’ 부분에서 윤 의사에 대해 ‘조선에 있을 때는 성질이 온순하고… 사상적 색채를 인정할 만한 것이 없었다’라고 적고 있다. 물론 이는 윤 의사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진술한 것일 수도 있다. 다만 윤 의사는 직접 쓴 이력서에서 자신의 성격을 이렇게 묘사했다.

    ‘8, 9동개(同介) 중에 총명하였으므로 선생과 인근 어른들이 재동이라 호명하였다. 그 반면 또 하나의 별호(別號)는 ‘살가지(狸)’였다. 성질이 남달리 굳세고 조급하였으므로 동배들과 다툼에 패한 적이 없었으며, 혹은 접장한테 맞더라도 울지 아니하고 되레 욕설을 하였으며 서당 규칙 위반으로 선생이 종아리를 치려고 옷을 걷으라 하면 두 눈을 크게 뜨고 말똥말똥 쳐다만 보았다.’

    보고서는 또 윤 의사가 ‘실가에서 농업에 종사했을 뿐 특기할 만한 경력은 없다’라고 썼다. 윤 의사의 농촌운동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것. ‘가업인 농업을 싫어하여 아버지를 속여 그의 소지금 40원을 가지고 1930년 3월 신의주로 가서…’라는 부분도 실제와 다르다. 윤 의사는 앞서 언급했듯 농촌개혁운동에 뛰어들었으며 농민의 긍지와 자부심을 담은 ‘농민독본’을 직접 저술한 바 있다. 아버지를 속여 돈을 갖고 간 게 아니라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아버지에게 앞산을 팔자고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신이 갖고 있던 월진회 자금을 가져갔고, 중국 칭다오에서 그 돈을 월진회에 갚았다.

    내무성 보고서는 특히 폭탄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해 기술했다. 지난해 100주년기념사업회는 윤 의사가 사용한 폭탄이 ‘도시락 폭탄’이 아니라 ‘물통 폭탄’이었다고 주장해 화제가 됐다. 물론 새로운 사실은 아니다. 2005년 발행된 ‘매헌기념관전시도록’이나 ‘백범일지’에도 물통 폭탄으로 언급돼 있다. 다만 초등학교 교과서나 위인전 등에 도시락 폭탄을 던진 것으로 나와 있기에 눈길을 끈 것.

    의거 현장에서 던진 물통 폭탄은 성인 남자 손바닥만한 크기로, 타원형에 가죽끈이 달려 있어 어깨에 멜 수 있도록 돼 있었다. 폭탄은 하얀 헝겊으로 표면을 덮어 물통과 구분할 수 없도록 만들어졌고, 병마개를 손으로 돌려 연 뒤 안에 있는 끈을 잡아당겨 던지면 바로 폭발하게 돼 있었다.

    알루미늄 도시락에 장착한 3kg 폭탄

    그렇다면 당시 윤 의사가 던지지 못한 도시락 폭탄은 그 뒤 어떻게 됐을까. 아직도 많은 사람이 윤 의사 얘기가 나오면 ‘도시락 폭탄’을 먼저 떠올린다. 이 폭탄 사진은 이미 여러 번 공개됐다.

    1932년 5월25일 일제 군법회의 사형판결문의 주문(主文)은 ‘피고인 윤봉길을 사형에 처한다. 압수 물건 중 도시락 상자형 수류탄(증거 제 2호)은 몰수한다’라고 돼 있다. 내무성 보고서에는 이 폭탄은 ‘알루미늄제 도시락에 장치하고 뇌관 부분에 작은 구멍을 뚫어 여기에 발화용 끈을 달았다. 길이는 5치4푼, 폭은 3치4푼, 두께는 1치3푼, 중량은 약 3kg(약 1관, 3.5kg이라는 설도 있음)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보고서는 폭탄의 제조방법에 대해서도 자세히 기술했다.

    ‘폭탄은 무쇠(선철)로 만들고 중앙 양끝으로 통하게 하는 한편 작은 횡혈(橫穴)을 뚫어 구멍의 큰 부분에 점화장치로 삼았다. 폭약은 균제유황(均制硫黃)과 다갈약(茶碣藥)의 합성물로서 약 270g이다. 점화장치는 마찰약 안에 있는 톱니 모양의 쇳조각 한쪽에 끈을 달아 이것을 당길 때 쇳조각의 톱니가 마찰약에 작용, 이를 발화시켜 도화선에 점화하여 다시 완연(緩燃) 도화약을 거쳐 기폭제로 옮겨간다. 이 장치는 중국 육군이 사용하는 것으로 독일, 러시아에서 제조한 것이다. 제조비용이 적게 들어 저렴하게 제작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도시락 모양 폭탄의 외피를 이루는 알루미늄 도시락에 대해 조사한 결과, 상하이 공동조계 오송로의 한 일본인 상점에서 6개를 동시에 판매했다는 것이 판명됐다.’

    도시락 폭탄 반환운동

    탄생 100주년, 윤봉길 상하이 의거의 재구성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중상을 입은 일본 수뇌들. 가와바타 위원장은 이튿날, 시라카와 사령관은 25일 뒤 사망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모양의 폭탄을 미리 만들 수 있었을까. 1932년 4월20일자 ‘상하이일일신문’은 훙커우 공원 축하식 관련 기사에서 일본인이면 누구나 공동조계 안의 훙커우공원 식장에 참석할 수 있으며, 질서유지를 위해 장내에 매점을 설치하지 않았고, 참석시엔 도시락 1개와 물통을 휴대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매헌과 백범도 이 기사를 읽었다. 백범은 이봉창 의사의 1·8 도쿄 의거 때 수류탄을 제공해준 김홍일(金弘壹)에게 다시 부탁했다. 조선 출신이지만 중국군 고급장교로 상하이 병공창에 근무하고 있던 김홍일은 중국인 폭탄기술자 왕바이슈(王佰修)에게 이 폭탄을 주문했다.

    최근 100주년기념사업회 측은 당시 일본군에 압수된 도시락 폭탄 봉환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윤주 부회장은 “윤 의사 의거 당시 상하이 주재 일본 총영사는 관련 사항을 일본 외무성과 육군성에 보고했고, 보고된 모든 문건과 물건(군법회의 재판기록 등 물건)은 현재도 이곳에 잘 보존되어 있다. 따라서 재판시 증거물로 채택되어 몰수된 도시락 폭탄도 외무성 또는 육군성에 보존되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윤 의사를 상징하는 유물인 도시락 폭탄을 돌려받아 윤 의사의 정신을 널리 알리고 애국심을 고취할 수 있었으면 한다”고 희망했다.

    윤 의사의 유품은 보물 제568호로 지정돼 있어 만약 이 도시락 폭탄을 돌려받게 된다면 그 연장선에서 문화재로 지정될 가능성이 높다. 유품은 의거 현장으로 떠날 때 교환한 백범의 시계와 윤 의사의 시계, 의거 당시 갖고 있던 도장, 안경집, 지갑과 그 속의 중국돈, 손수건 등이다. 친필 이력서 및 유촉(遺囑·죽은 뒤의 일을 부탁함) 글도 보물로 지정돼 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도시락 폭탄은 역사적 가치가 있는 물건이고, 이미 윤 의사의 유품이 보물로 지정돼 있으므로 돌려받을 수 있다면 문화재위원회 논의를 거쳐 문화재 지정이 가능할 것이다”며 “일본 당국과의 협의를 통해 그 소재부터 파악하고, 국가 소유이면 국가 간 협의를 거쳐서, 개인 소유이면 다양한 방법을 통해 반환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도시락 폭탄 반환말고도 논의가 필요한 일이 있다. 상하이 루쉰공원 안 윤 의사 기념관 이름인 ‘매정(梅亭)’의 개칭 문제, 서울 양재동 ‘시민의 숲’ 개칭 문제 등이 그것.

    루쉰공원 내 기념관 ‘매정(梅亭)’은 윤 의사의 호인 ‘매헌(梅軒)’에서 따왔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매헌’이라는 고유명사를 인정하지 않고, ‘헌(軒)’자와 ‘정(亭)’자를 같은 의미로 보기 때문에 중복된다고 ‘헌’자를 뺀 것이다. ‘매헌’은 윤 의사가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공부한 뒤 그곳을 떠날 때 매곡 선생이 지어준 아호다.

    ‘매헌(梅軒)’을 살리자

    탄생 100주년, 윤봉길 상하이 의거의 재구성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 들어선 매헌 기념관. ‘매정(梅亭)’으로 되어 있는 이름을 ‘매헌정(梅軒亭)’으로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윤주 부회장은 “중국 측도 기념관 이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우리측의 요구를 받아들일 것으로 기대한다”라고 했다. 상하이에서 발행된 ‘상하이인민혁명사 서책’에는 외국인 중 유일하게 윤봉길 의사를 소개하고 있을 만큼 윤 의사를 각별히 여기고 있으며, 장제스(蔣介石) 당시 중국군 총사령관도 “중국 30만 대군이 해내지 못한 일을 고려의 한 청년이 해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의거 현장의 매헌기념관 이름뿐 아니라 규모에 대해서도 지적하는 이들이 많다. 상하이 기념관을 방문한 적이 있는 정모 변호사는 “윤 의사가 이룬 엄청난 공적에 비해 기념관이 너무 작고 초라해 눈물이 날 정도였다”고 아쉬워했다.

    양재동 ‘시민의 숲’ 개칭 문제는 이 공원 안에 윤 의사 기념관, 윤 의사 동상, 윤 의사 숭모비, 호를 따서 이름을 붙인 매헌교와 매헌로 등이 있기 때문에 나왔다.

    윤주 부회장은 “서울 시내 대부분의 공원이 시민을 위해 조성된 공원이므로 ‘시민의 숲’을 특정 공원의 이름으로 사용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매헌공원으로 이름을 바꿔 윤 의사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되새기게 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윤 의사 의거 장소인 상하이 훙커우공원도 대문호 루쉰의 이름을 따 루쉰공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어둠의 시대에 등불을 밝히며 시대를 앞서 살았던 윤봉길 의사는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일본 오사카(大阪) 위수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다 1932년 12월19일 총살돼 순국했다. 정부는 윤 의사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그가 꿈꾸던 세상은 곧 지금 우리가 바라는 세상이다.

    ‘사람에게는 천부의 자유가 있다. 우리는 자유의 세상을 찾는다. 개인의 자유는 민중의 자유에서 나온다. 상조상애(相助相愛) 넉 자를 철안(鐵案) 삼아서 굳세게 단결하여 천 가지 만 가지 낡고 물들고 더럽고 못생긴 것을 무찔러버리고 새롭고 순수하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며(개혁하며) 우리들 세상이 잘 살도록 일을 하자. 그리고 앞으로 앞으로 더욱 더욱 앞으로 전진하며 어서 바삐 경제부흥을 실현하자.’(농민운동 시기의 윤 의사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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