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이상촌 건설’이라는 미명 아래 조선 농민은 변두리로 내쫓고, 그들이 일궈온 비옥한 토지는 일본인 이주민에게 불하했다. 동척에 반항하는 소작인의 권리를 빼앗아 ‘척식청년단’이니 ‘소작인 향상회’니 하는 어용단체 회원에게 넘겼다. 정든 고향 땅은 죄다 일본인 아니면 일본인 앞잡이의 손으로 넘어갔다. 나석주는 동척이 무슨 억하심정으로 자신과 가족, 조선 농민을 사지로 내모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손에 폭탄 하나만 쥐어주면 당장에라도 달려가 동척을 폭파시켜 버리고 싶었다.
“뭐요? 당신.”
수위가 제지하자, 사내는 서툰 조선어로 방문 목적을 설명했다.
“나…리이영요우…만나러…왔어”
“뭐라고?”
“리이영요우!”
사내는 ‘리이영요우’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하며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켰지만, 수위는 무슨 뜻인지 도통 알아듣지 못했다. 사내는 하다못해 종이에다 ‘李永祐’라고 적어 보여주었다.
“아, 이영우! 근데 이영우가 누구야?”
“여기…일해…리이영요우.”
“이보쇼. 동척 직원이라면 내가 모르는 사람이 없소. 그런 사람 없으니 썩 나가시오. 여기가 어디라고.”
사내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뒤돌아서서 사옥 밖으로 나갔다. 세모를 앞둔 도심 거리는 인파로 북적였다.
폭탄 3용사와 폭탄기념일
오후 2시5분. 동척에서 쫓겨난 사내는 전찻길 남쪽으로 돌아 남대문통 조선식산은행 본점(지금의 외환은행 본점 자리)으로 들어갔다. 연말인데다 연휴 끝까지 겹쳐 은행 창구는 대만원이었다. 12월25일 크리스마스는 원래 공휴일이 아니었지만 다이쇼(大正) 일왕이 사망하는 바람에 26일까지 임시공휴일이었고 27일은 일요일이었다. 은행원들은 한꺼번에 몰려든 고객에 치여 아침부터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수위가 어지럽게 뒤엉킨 고객들의 줄을 정돈하느라 자리를 비워 중국옷을 입은 사내는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정문을 통과했다. 철책으로 둘러싸인 대부할인계 창구에는 김병조, 도시마(登島亮), 이토(伊藤貞澄) 세 명의 직원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퉁, 탁. 둔탁한 물건이 창구 철책을 넘어 날아와 대부할인계 뒤쪽 벽면 기둥에 맞고 바닥에 떨어졌다. 김병조는 고객과 상담하느라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도시마와 이토 역시 뭐가 날아왔는지 살필 겨를이 없었다.
“이봐요. 뭘 던진 게요!”
창구 앞에서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던 아사히(朝日)양조 점원 나카무라(中村)가 중국옷 입은 사내를 가리키며 외쳤다. 사내는 아무 대꾸 없이 쏜살같이 은행 밖으로 뛰쳐나갔다. 나카무라의 고함을 듣고 수위가 달려왔다.
동양척식주식회사(위), 조선식산은행(아래)
나카무라가 큰소리로 수위를 다그치자 은행 안의 시선은 일제히 대부할인계 쪽으로 옮겨갔다. 김병조는 그제야 상담을 멈추고 의자 뒤쪽을 살펴보았다. 바닥에 떨어진 것은 돌멩이가 아니라 붉은색 쇳덩이였다.
“이게 뭐죠?”
“글쎄, 처음 보는 물건인데….”
은행원들은 사내가 던진 쇳덩이를 에워싸고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호기심 많은 은행원은 쇳덩이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어루만지며 정체를 추측하기도 했다.
“썩 물러서!”
서무과에 근무하는 퇴역 육군 중좌 오다(小田)가 쇳덩이 주변에 모여든 은행원과 고객을 거세게 밀치며 외쳤다. 오다는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얘져서 입술을 뗐다.
“포…포…폭탄이다!”
은행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고객들과 은행원들은 앞다퉈 출입문 쪽으로 몰려갔다. 오다는 폭탄을 찬찬히 들여다보더니 안심한 듯 길게 한숨을 한번 쉬고 일어나 출입문 쪽을 바라보며 외쳤다.
“서두르지 않아도 돼요. 지금까지 터지지 않은 것을 보면 불발탄인 것 같소. 하여간 위험하니 모두들 천천히 은행 밖으로 나가시오.”
오다는 은행원들을 폭탄에서 멀찍이 물러나게 한 후, 본정경찰서에 전화를 걸어 식산은행에 폭탄 투척 사건이 발생했다고 신고했다. 김병조는 도시마, 이토와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며 죽다 살아난 기쁨을 나눴다. 이후 세 사람은 ‘폭탄 3용사’로 불렸고, 매년 12월28일 ‘폭탄기념일’이 되면 함께 모여 축배를 들었다.
식산은행에서 다시 동척으로
오후 2시15분. 식산은행에 폭탄 투척 사건이 일어난 지 10분이 지났다. 본정경찰서 수사대는 아직 현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폭탄이 터지지 않은 탓에 세모를 앞두고 남대문통을 쏟아져 나온 사람들은 식산은행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길 건너편 동양척식주식회사도 평화롭기만 했다.
식산은행을 재빨리 빠져나온 중국옷 차림의 사내는 다시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찾아갔다. 신문지로 말아 싼 뭔가는 왼쪽 옆구리에 그대로 끼고 있었지만, 도드라지게 튀어나왔던 웃옷 오른쪽 호주머니는 홀쭉해져 있었다. 눈빛에는 초조함과 비장함이 감돌았다. 15분 전 그를 내쫓았던 수위는 자리를 비우고, 대신 조선부업협회(朝鮮副業協會) 소속 잡지기자 다카키(高木吉江)가 수위실 책상에 앉아 수첩에다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사내가 다카키를 노려보았다.
“뉘쇼?”
시선을 의식한 다카키가 고개를 들어 사내에게 물었다. 사내는 아무 말 없이 옆구리에 끼고 있던 신문지를 풀어헤치고 물건을 꺼냈다. 스페인산 10연발 권총이었다. 화들짝 놀란 다카키는 목이 잠겨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사내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안전장치를 풀고 다카키의 가슴을 겨눴다.
“사…살려주시오, 내겐 처자식이 있소, 제발….”
탕.
사내가 방아쇠를 당기자, 다카키는 양손으로 가슴을 감싸며 꺼꾸러졌다. 선혈이 우윳빛 대리석 바닥을 적셨다. 사내는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 채 2층으로 뛰어올라갔다. 다카키는 손으로 가슴에 난 상처를 틀어막고 계단을 올라가는 사내의 등에 대고 힘없이 중얼거렸다.
나석주
동척 사원 다케치(武智光)는 수위실 바로 옆 구내식당에서 늦은 점심식사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가다 총성과 비명을 들었다. 두려움이 엄습했지만 스물두 살 혈기로 억누르고 총성이 울린 곳을 향해 달려갔다. 처음 보는 30대 중반의 남자가 피투성이가 돼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이봐요. 괜찮아요? 정신 차리세요. 아무도 없어요? 사람이 총에 맞았어요.”
다케치가 흔들어 깨우자 다카키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위…층….”
다케치는 다카키가 일러준 대로 괴한을 쫓아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계단을 올려다보니 중국옷을 입은 사내의 뒷모습이 보였다. 다케치가 팔을 치켜들어 앞뒤로 크게 흔들면서 외쳤다.
“거기 서!”
다케치가 시킨 대로 중국옷 사내는 걸음을 멈추고 몸을 획 틀었다.
탕, 탕.
두 발의 총탄이 다케치의 가슴에 정확히 날아와 꽂혔다. 다케치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다케치는 피를 토하며 자신의 경솔함을 자책하다 정신을 잃었다. ‘맨손으로 어쩌겠다고 내가 총 든 괴한을 불러 세웠지?’
동척에 휘몰아친 피바람
2층 첫 방은 ‘토지개량부 기술과장실’이었다. 야마다(綾田豊) 기술과장은 오모리(大森太四郞) 차석과 회의탁자 앞에 앉아 업무를 협의하다 총성을 들었다.
“오모리 차석, 자네도 들었나?”
“아무래도 총성 같습니다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한번 나가보지 그래?”
오모리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두 번째, 세 번째 총성이 연이어 들렸다. 오모리는 동척에 입사한 지 10년이 넘은 서른아홉 살 먹은 중견사원이었다. 관록이 아깝지 않게 스물두 살 난 다케치보다 신중했다. 오모리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말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 과장님도. 총 든 놈을 맨손으로 어떻게 맞서요? 그냥 하던 일이나 합시다. 정 궁금하시면 과장님이 한번 나가보시고요.”
“사람하고는. 무슨 겁이 그리 많나?”
꽝.
야마다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누군가 사무실 문을 발길로 힘껏 걷어차고 들어왔다.
“어떤 놈이야!”
야마다가 문을 향해 눈을 돌리자, 중국옷을 입은 사내가 매캐한 화약 냄새를 풍기는 총구를 겨누고 꼿꼿이 서 있었다.
‘백주돌발(白晝突發)한 근대초유의 대사건’이라는 제목으로 나석주의 폭탄 투척 사건을 보도한 ‘동아일보’ 1927년 1월 13일자 호외.
오모리가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얘져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탕.
사내는 대답 대신 방아쇠를 당겼다. 이번에도 총탄은 정확히 오모리의 가슴을 뚫었다. 오모리는 의자에 앉은 채 뒤로 넘어졌다. 야마다가 회의탁자 아래로 잽싸게 몸을 피했다.
탕…틱.
총알이 회의탁자 다리에 맞고 튕겨나갔다. 표적에 명중하지 못한 첫 번째 총탄이었다. 사내가 아쉬워하는 사이 야마다가 사무실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사내가 문 밖으로 쫓아 나오자 야마다는 뒤돌아서서 사내에게 살려달라는 애절한 눈빛을 보이며 뒷걸음질쳤다.
탕. 탕.
총탄이 야마다의 가슴과 오른쪽 팔에 날아와 박혔다. 야마다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사내는 주머니에서 총알을 꺼내 빈 약실을 채우며 옆방 ‘토지개량부 기술과’ 사무실로 천천히 다가갔다.
쾅…. 탕 탕 탕 탕.
사내는 문을 박차고 들어가 권총을 난사했다. 기술과 직원들은 옆방에서 울린 총성을 듣고 모두 책상 밑으로 숨은 상태여서 총탄은 허공을 갈랐다. 사내가 불뚝 튀어나온 왼쪽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폭탄을 꺼내 사무실 중심부를 향해 던지고 뒤돌아서서 계단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책상 밑에 숨어 있던 사원들도 기겁을 하고 일제히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1초, 2초, 3초…10초…1분.
어쩐 일인지 이번에도 폭탄은 터지지 않았다.
총성은 이어지고
계단과 복도는 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다카키와 다케치도 총격을 당한 자리에 그대로 널브러져 신음하고 있었다. 다케치보다 조금 늦게 식사를 마치고 구내식당에서 나온 직원이 황금정파출소에 서둘러 신고했지만, 수사대는 아직 동척에 도착하지 않았다. 1층으로 내려온 사내는 정문 수위실을 지나쳐 동문 쪽으로 달려갔다.
동척 사옥 우측은 조선철도주식회사가 임차해 쓰고 있었다. 동문 입구 조선철도 수위실에는 예순 살 난 마쓰모토(松本筆一) 수위가 앉아 있었다. 마쓰모토는 얼마 전 큰마음 먹고 용산 천진당시계점에서 손목시계 하나를 외상으로 구입했는데, 때마침 시계점 점원 기무라(木村悅己)가 외상값을 받으러 와서 함께 얘기를 나누던 참이었다. 기무라는 교토에서 태어나 조선으로 돈 벌러 온 스물아홉 살 청년이었다.
“영감님, 이게 무슨 소리죠?”
건물 서편에서 연이어 들려오는 총성을 듣고 기무라가 물었다.
“글쎄, 동척에 무슨 일이 났나? 이런 일은 처음인데.”
마쓰모토는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동척 쪽을 살펴보았다.
“시계 값은 여기 있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으니 자네는 그만 가보게.”
“영감님 혼자서 괜찮으시겠어요?”
“설마 돈 없고, 힘없는 나 같은 사람이 무슨 일 당하기야 하겠어? 내가 동척이나 조선철도 사장도 아니고. 하긴 나도 이제 환갑이니 살 만큼 살았지.”
“여…영감님…저…저기!”
기무라가 눈짓으로 가리킨 방향에서 중국옷을 입은 사내가 권총을 겨누고 다가왔다.
탕 탕.
‘혜성’지 1931년 12월호에 보도된 ‘나석주 사건 때에’.
마쓰모토가 동문 밖으로 나간 후 기무라도 몽롱해지는 정신을 다잡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왼쪽 가슴에서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듯 선혈이 콸콸 쏟아졌다. 기무라는 양손으로 총구멍이 난 가슴을 감싼 채 비틀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시야가 흐릿해 계단 위에 쓰러져 있는 마쓰모토를 지나쳐 터벅터벅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온갖 상념이 뇌리를 스쳤다.
‘등이 축축해. 총알이 관통한 거야. 이대로 죽는 걸까? 교토에 계신 어머님은 얼마나 놀라실까? 땅 설고 물 설은 조선에서 아내와 아이들은 나 없이 어떻게 살아갈까? 아, 내가 무슨 영화를 보자고 고향 떠나 조선으로 건너온 거지?’
마쓰모토는 동척 건너편 나카니시(中西) 자전거포 앞에서 정신을 잃었다. 동척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백주 도심의 총격전
중국옷 사내는 오른손에 권총을 든 채 황금정 거리를 내달렸다. 행인들이 화들짝 놀라 길옆으로 물러섰다. 행인들 사이에 정복을 입은 경찰 한 명이 끼어 있었다. 경기도 경찰부 소속 다바타(田畑唯次) 경부보(경위)는 시내로 외근 나왔다가 우연히 권총을 든 괴한과 맞부딪쳤다. 다바타가 허리춤에 찬 권총집으로 손을 가져갔다.
탕.
다바타가 미처 권총을 뽑기도 전에 총탄이 날아와 가슴을 뚫었다. 다바타는 황금정 동척 건너편 길에 큰대자로 널브러졌다. 동척에 총기 사고가 발생했다는 제보를 받고 출동한 본정경찰서 도시(士師), 요코타(構田), 노구치(野口), 아오키(靑木), 후루카와(古川), 박용하 순사가 동척 사옥 정문에 도착했을 때 길 건너편에서 총성이 울렸다. 정복을 입은 경찰 한 명이 쓰러졌고, 중국옷을 입은 사내가 전찻길을 건너 동쪽으로 내달렸다. 수사대가 사내를 추적했다.
“서라!”
탕 탕 탕 탕.
수사대는 총탄을 퍼부으며 사내를 추격했다. 사내도 달리다 뒤돌아서서 응사하고 다시 달리기를 반복했다. 백주 서울 한복판 황금정 거리에서 한바탕 총격전이 연출됐다. 사내와 수사대 사이가 점점 좁혀졌다. 사내는 숨이 목구멍까지 차올랐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황금정 2정목 삼성당약국 앞에 다다랐을 때 사내는 전봇대 뒤로 몸을 숨긴 채 풀썩 주저앉았다. 수사대가 전봇대 주위를 에워쌌다.
“너는 포위됐다. 총을 버리고 투항하라!”
탕.
사내는 대답 대신 총성을 울렸다. 수사대는 본능적으로 몸을 숙였다. 그러나 총탄은 어느 쪽으로도 날아오지 않았다.
탕 탕.
두 번째, 세 번째 총성이 울렸지만 이번에도 총탄은 날아오지 않았다. 대신 전봇대에 기대 주저앉아 있던 사내의 가슴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사내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수사대를 향해 남은 탄환 2발을 마저 쏜 후 정신을 잃었다. 사내가 길바닥에 쓰러지자 품에서 66발의 탄환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오후 2시45분, 백주 도심에서 벌어진 총격전은 조선식산은행에 불발탄이 투척된 지 40분 만에 종료됐다.
자기가 쏜 총탄을 가슴에 3방이나 맞고도 사내는 숨이 붙어 있었다. 경찰은 죽어가는 사내의 몸을 포승으로 동여맨 후 경찰차에 싣고 총독부병원으로 이송했다.
동척 사옥 내부와 동문 밖, 그리고 황금정 2정목 길거리 등 사건 현장에는 핏자국이 낭자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을 연출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마경관과 무장경관들이 삽시간에 황금정 일대를 에워쌌다. 실내와 길 위에 피를 흘리며 신음하고 있는 피해자들을 들것과 자동차에 실어 잇따라 병원으로 옮기는 광경은 전쟁터와 같은 아수라장이었다. 다바타 경부보는 총알이 심장을 관통해 병원으로 옮기는 도중 자동차 안에서 절명했고, 머리에 총을 맞고 문 밖 돌계단 위에 쓰러져 있던 수위 마쓰모토와 가슴에 총을 맞고 길 건너편 나카니시 자전거포 앞에 쓰러져 있던 시계점 점원 기무라는 총독부병원으로 옮겨 치료했으나 끝내 절명해 사망자는 도합 3명이었다. (‘동아일보’ 1927년 1월13일자 호외) |
“내가 나석주다, 공범은 없다”
가슴에 두 군데 총상을 입고, 계단에서 굴러 떨어진 동척 사원 다케치, 가슴에 관통상을 입은 동척 토지개량부 기술과 차석 오모리는 총독부병원으로 옮겨져 사경을 헤매다 겨우 회복됐다. 조선부업회 기자 다카키도 가슴에 관통상을 입었으나 총탄이 폐와 심장 사이로 피해간 덕분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동척 토지개량부 기술과장 야마다는 오른팔과 가슴에 총상을 입었지만, 총알이 갈비뼈에 맞은 덕분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경찰은 중국옷 입은 사내를 총독부병원 외과 수술실로 옮겼다. 사내가 자기 가슴에 쏜 세 발의 총탄 중 두 발은 관통했고, 한 발은 폐에 박혔다. 출혈이 심해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이 기적이었다. 그때까지 사내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해외에서 들어온 ‘테러리스트’라고 막연히 추측할 뿐이었다. 사내가 이대로 죽는다면 그의 신원을 밝히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었다.
총독부병원 오다(小田) 외과과장은 지혈주사를 놓은 후 1분에 1대씩 식염주사를 놓아 환자의 목숨을 간신히 이어갔다. 총독부 경무국 야마구치(山口) 고등과장 이하 10여 명의 경찰간부가 침상을 둘러싸고 초조하게 환자의 의식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신문을 해야 하니 잠깐 동안이라도 의식이 돌아오게 조치해주시오.”
종로경찰서 고등계장 미와(三輪) 경부(경감)가 오다 외과과장에게 사무적으로 말했다.
“이 상태로 신문을 받는 것은 무리요. 회복되면 연락할 테니 그만 나가주시오.”
“어차피 죽을 목숨이오. 당장 조치를 취하란 말이오.”
오다 외과과장은 마지못해 혈압을 일시적으로 높이는 캠퍼 주사를 놓았다. 잠시 후 환자의 의식이 돌아왔다.
청천벽력 같은 사건이 돌발한 이래로 해외에서 활동하는 요시찰 인물 명부에서 우선 이러한 일을 저지름직한 인물을 10여 명 추려낸 종로경찰서 미와 경부는 다수의 상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신문을 시작했다.미와 경부 : (요시찰 인물 명부를 들여다보면서) “네가 상하이 가정부(假政府, 임시정부)에서 보낸 이 아무개가 아니냐?” 범인 : (눈을 감고 누운 채) “아니다.” 미와 경부 : “그러면 만주에서 온 김 아무개가 아니냐?” 범인 : (여전히) “아니다.” 미와 경부 : “그러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온 최 아무개냐?” 범인 : “아니다.” 이때 범인의 명맥이 자꾸 엷어져 수십 대의 식염주사를 놓은 후 20여 명의 성명을 불러보았으나 범인은 역시 일관되게 부인했다. 그러다가 악에 받친 미와 경부가 “그러면 네가 상하이 의열단에서 보낸 나석주가 아니냐?”라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범인은 그제야 나직하나 굳센 어조로 대답했다. “그렇다!” “공범은 없나?”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끝까지 “공범은 없다. 오직 나 한 사람의 독자적 행동이다”고 주장했다. 의식이 몽롱한 중에도 “죽을 사람은 어서 죽어야 한다”며 말 한 마디라도 더 듣기 위해 자꾸 식염주사를 하려는 것을 완강히 반대했다. “내가 나석주다, 공범은 없다”라는 말밖에는 도무지 입을 열지 않다가 그다지 고민하는 빛도 없이 오래지 않아 절명했다. (‘나석주의 임종’ ‘삼천리’ 1931년 7월호) |
사건 17일 만에 보도금지 해제
죽은 사내가 자신이 나석주라고 자백은 했지만, 의열단의 핵심 인물인 나석주를 보호하기 위해 거짓으로 자백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려웠다. 경기도 경찰부는 죽은 사내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나석주 관련 사건을 5년간 전담해온 황해도 재령군 북율면 주재소 안익훈 순사를 총독부병원으로 불러들였다. 안익훈 순사는 사체를 찬찬히 살펴보곤, 큼지막한 얼굴, 왼뺨의 흉터자국, 금니의 위치 등을 볼 때 나석주가 틀림없다고 확인했다. 동아일보 최용환 기자가 찾아가 나석주에 대해 묻자 안익훈 순사는 이렇게 말했다.
“나석주는 평소 매우 날래고 대담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1921년 황해도에서 일어난 큰 사건은 죄다 나석주와 그 공범 김덕영의 소행이었지요.” “그동안 나석주를 잡고자 경찰이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글쎄올시다. 자세히 말할 수 없습니다만, 막연히 어림잡아 말하면 1921년 1월4일 이래 나석주를 잡고자 동원한 경관이 연인원 만여 명은 될 터요, 통첩(通牒) 서류와 기타 조회(照會) 서류가 약 200여 차례, 수만 통에 달했을 것입니다.” (‘동아일보’ 1927년 1월 13일자 호외) |
사건 발생 직후 경찰은 각 신문에 사건의 보도를 금지하고, 전국 은행에 무장 경찰을 배치했다. 보도금지가 해제된 것은 사건 발생 17일 후인 1927년 1월13일이었다. 경찰은 나석주가 동척과 식산은행에 던진 폭탄이 불발로 끝난 것은 안전핀을 뽑지 않고 던졌기 때문이라고 발표했다. 그렇지만 다년간 군사훈련을 받고 무장단체에서 활동한 나석주가 안전핀을 뽑지 않고 폭탄을 던지는 실수를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저질렀겠느냐는 의혹이 경찰 발표 직후부터 줄기차게 제기됐다. 나석주가 실제로 안전핀을 뽑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중국에서 지니고 온 폭탄 자체에 하자가 있었을 개연성이 더 크다.
자영농에서 소작농으로
나석주는 1890년 황해도 재령군 북율면에서 자영농 나병헌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아래로 두 여동생이 있었지만, 첫째 여동생은 어려서 죽고 둘째 여동생은 스물세 살에 요절했다. 나석주는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1906년 열일곱 살 되던 해에 마을 유지들이 세운 보명학교에 입학해 신학문을 공부했다. 당시 교장이던 김정홍은 훗날 “나석주는 재학 당시 학업 성적이 우수했으며 책임감이 강하고 성격은 유순하나 매우 강직하며 모험을 좋아하고 비밀을 생명으로 알았다. 몹시 건강했으며 날쌔기가 비호같아 무릇 못하는 운동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나석주의 고향 북율면은 조선시대에 여물리(餘勿里)라 부르던 곳이었다. 재령평야 중심에 위치한 여물리 토지는 조선 건국 이래 줄곧 왕실의 궁장토(宮庄土)였다. 광활한데다 토질이 비옥해 왕실 소유의 궁장토 중에서 단연 으뜸으로 손꼽혔다. 여물리 궁장토의 소작료는 영조 50년(1774년) 이래로 한 두락(한 말의 씨를 뿌릴 수 있는 면적으로 보통 마지기라고도 한다-편집자)당 한 석으로 고정됐다. 그나마 세 두락당 한 두락의 소작료를 감해주었다. 1909년까지 무려 125년간 여물리 궁장토의 소작료는 토지의 등급에 따라 생산량의 25~30%로 고정된 셈이었다. 소유권은 비록 왕실에 있었지만, 농민의 경작권 역시 보호됐다. 농민은 경작권을 자유롭게 매매·상속·저당할 수 있었다. 여물리 농민들은 말이 소작농이지 자영농이나 다름없었다.
1909년 조선의 토지 개간과 관리를 명분으로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설립되자 궁장토였던 북율면 일대의 토지 소유권이 동척으로 넘어갔다. 동척은 소작료를 생산량의 50%로 대폭 인상했다. 생산량도 그해에 실제로 생산된 양이 아니라 5년 동안 생산량 중 최대·최소 2년치를 빼고 3년 동안의 평균값으로 결정했다. 흉년이라도 들면 소작료는 50%가 아니라 70~80%를 넘기기 일쑤였다. 동척 외에 다른 지주가 소유한 토지도 비슷한 수준의 소작료를 매겼지만, 궁장토의 경작 조건이 농민에게 워낙 유리했기 때문에 북율면 농민들의 충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3년마다 갱신토록 한 소작권도 문제였다. 대대로 물려받은 경작지를 3년마다 갱신토록 바꿔버렸으니 농민들이 반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더욱이 동척은 소작료를 미루거나 다른 소작인에 비해 작황이 떨어지면 3년이 되기 전이라도 가차 없이 소작 계약을 해지했다. 여물리 농민들에겐 나라를 잃은 설움보다 경작권을 빼앗긴 아픔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 동척의 설립 이후 나석주의 집안도 125년간 ‘자기 땅이라고 믿던 땅’의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동척과의 악연
1910년 한일강제합병이 되던 해 나석주는 보명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안악으로 가서 백범 김구가 설립한 양산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때의 인연으로 훗날 김구는 나석주를 “나의 제자이자 동지”라 일컬었다. 1913년 양산학교를 수료한 나석주는 부모를 고향에 남겨두고, 열세 살 때 혼인한 아내 이문성과 응섭·응구 두 남매를 거느리고 압록강 건너 지린(吉林)성 마오얼산(帽兒山)으로 이주했다.
‘나석주의 임종’ 당시 상황을 기록한 ‘삼천리’ 1931년 7월호.
토지조사사업 이전 북율면 일대에는 토지대장에 등재되지 않은 토지가 다수 존재했다. 그런 토지에서 기른 작물은 100% 경작자가 차지했다. 나석주 집안도 토지대장에 등재되지 않은 토지를 경작해 살림에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토지조사사업 이후 동척은 그 땅마저 토지대장에 올리고 50%의 소작료를 징수했다. 추수는 동일했는데 소작료만 늘어난 셈이었다.
참다 못한 나석주는 1917년 가을 동척 사리원지점을 찾아갔다. 동척 직원은 거드름을 부리며 소작인의 면담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나석주는 몇 번이고 찾아가 겨우 직원과 만났다.
“소작료가 너무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시오? 당신 눈엔 조선 농민이 무슨 어육(魚肉)처럼 보이쇼? 흉년이 들었으면 소작료도 깎아줘야 하지 않소. 그리고 일본 농민 이주시키자고 멀쩡히 농사 잘 짓는 소작지는 왜 빼앗아가오. 당신도 우리 같은 소작인 덕분에 책상머리에 앉아 펜대만 돌리고도 먹고사는 것 아니오.”
“쳇. 그렇게 똑똑한 사람이 왜 남의 땅에서 빌붙어 사시오? 내 땅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당신이 무슨 상관이요. 아니꼬우면 다른 땅을 알아보든지.”
동척은 그날로 나석주 집안과 소작 계약을 해지했다. 소유권은 비록 왕실에 있었지만, 100년이 넘게 대물림해온 집안의 경작지를 하루아침에 빼앗긴 것이다. 정미소 운영마저 신통치 않자 나석주는 이듬해 다시 가족을 이끌고 겸이포로 이주했다. 미곡상을 차려 생활의 안정을 찾았지만, 그마저도 이듬해 3·1운동이 발발하자 태극기를 제작해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경찰에 체포되는 바람에 문을 닫아야 했다.
1920년 1월4일 오후 8시, 사리원 시북리 237번지 황해도 일대에서 손꼽히는 부호 최병항의 집에 복면을 하고 브라우닝 권총으로 무장한 여섯 명의 괴한이 나타났다. 두 사람은 대문 밖에서 망을 보고, 나머지 네 사람은 담을 넘어 최병항의 안방으로 몰래 숨어들어갔다. 주인이 겁을 먹고 움찔하자 네 사람은 주인에게 예의를 갖춰 넙죽 큰절을 했다.
“저희들은 강도가 아니라 조국의 독립을 꾀하고자 군자금을 마련하러 온 젊은이들입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였다. 최병항은 대장인 듯 보이는 사내의 복면 밖으로 드러난 눈을 빤히 응시하다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 석주로구나! 그 복면 벗으려무나. 그래 춘부장께선 안녕하시고?”
그날 밤 최병항의 집을 찾은 여섯 명의 복면 괴한은 나석주, 김덕영, 최호준, 최세욱, 박정손, 이시태였다. 그들은 군자금을 모아 해외 무장투쟁 단체로 보내기로 의기투합하고 권총과 탄환을 구입해 황해도 일대 부호들을 찾아 나선 것이었다. 최병항은 젊은이들의 의기를 칭찬하면서 금고를 열어 630원을 꺼내줬다.
“내가 지금 가진 돈이 이것밖에 없구나. 이것이라도 가져가 유용하게 쓰도록 하게.”
네 사람은 다시 한 번 큰절을 하고, 돈을 챙겨 일어섰다. 안방 문을 나서면서 나석주가 당부했다.
“저희가 떠나고 나면 즉시 경찰에 권총강도를 당했다고 신고하십시오. 숨기셨다가 혹여 저들이 눈치라도 챈다면 공연히 어르신께서 봉변을 당하십니다.”
최병항은 나석주가 일러준 대로 일행이 떠나고 난 후 사리원경찰서에 신고했다. 화들짝 놀란 경찰은 수사력을 총동원해 6인조 권총단의 행방을 찾아 나섰다. 나석주 일행은 6명이 한꺼번에 몰려다니면 꼬리를 잡힐 위험이 크다고 판단하고 두 명씩 조를 짜서 흩어졌다. 최세욱과 최호준은 봉산군으로 잠입해 최세욱의 친척집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 장연군으로 피신했다가 1월26일 경찰에 체포됐다. 최세욱은 징역 10년, 최호준은 징역 5년을 선고받고 해주형무소에서 복역했다.
그때 나석주는 박정손과 함께 황주군으로 도주했다가 그곳 경찰관에게 발각돼 박정손은 체포되었으나 나석주는 힘이 장사인 관계로 체포하려던 경관과 격투를 벌여 경관을 때려눕히고 달아나 다시 동지 김덕영을 만나 활동을 재개했다. 나석주는 만주에서 잠입한 무장단 10여 명과 함께 각기 모제르총을 휴대하고 평안남도 대동군으로 가서 일본인 순사 한 사람을 총살하고, 즉시 황해도 은율군으로 침입해 은율군수를 살해했다. 무장단원들은 다시 구월산 아래로 갔다가 경찰의 추격을 받고 교전을 벌여 단원들 대부분이 피살되었지만, 나석주만은 살아남았다. 나석주는 그밖에 다수의 사건에 관계했지만 그때마다 교묘히 경찰의 눈을 피해 달아났다.그 후 나석주와 김덕영은 그해 3~4월경 변장을 하고 각기 권총을 휴대한 후 다시 안악읍내에 나타나 장날 대낮에 안악에서 이름난 부호 김응석의 집에 침입한 것을 비롯, 부호 원형낙 등 두 사람의 집에 침입해 거액의 군자금을 가지고 간 사실도 있었다. (‘동아일보’ 1927년 1월 13일자 호외) |
나석주가 황해도와 평안도 일대에서 신출귀몰하며 군자금을 모으고 경찰과 관리를 살해하자, 경찰은 나석주라는 이름만 들어도 간담이 서늘해졌다. 경찰은 사리원, 재령, 안악, 봉산, 장연, 대동, 구월산 일대에 무장 병력을 배치해 수사망을 좁혀왔다. 국내에서는 더 이상 활동하기 어렵게 된 나석주는 1921년 10월 가족을 고향에 둔 채 중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민족혼을 일깨워줘야겠소”
1926년 봄. 톈진에서 의열단 단원으로 활동하던 나석주는 마음이 울적하고 초조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 바쳐 싸워보려고 진남포에서 조그만 나무배를 타고 중국으로 망명한 지도 햇수로 6년이 지났다. 그의 나이도 어느덧 서른일곱. 양산학교 시절 은사 김구의 추천으로 임시정부 경무국 경호원으로도 활동했고, 허난(河南)성 한단(邯鄲)의 중국 육군군관단강습소(陸軍軍官團講習所)에 입교해 사관훈련도 받고, 중국군 장교 노릇도 해봤지만 일본과 맞붙어 싸워보지는 못했다. 무장항쟁을 전개할 목적으로 설립된 의열단은 군자금이 모자라 활동이 지지부진했다.
고향에서 들려오는 소식도 우울하기만 했다. 재작년 가을부터 작년 봄까지 고향사람들이 동척의 수탈에 반발해 벌인 소작쟁의는 별다른 소득 없이 실패로 돌아갔다. 동척은 이상촌 건설이라는 미명 아래 조선 농민은 변두리로 내쫓고 조선 농민이 일구고 경작해온 비옥한 토지는 일본인 이주민에게 불하했다. 동척에 반항하는 소작인의 소작권을 빼앗아 ‘척식청년단’이니 ‘소작인 향상회(向上會)’니 하는 어용단체 소속 회원에게 넘겼다. 이제 정든 고향 땅은 죄다 일본인 아니면 일본인 앞잡이의 손으로 넘어간 셈이었다. 나석주는 동척이 무슨 억하심정으로 자신과 자기 가족, 조선 농민을 사지로 내모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기 손에 폭탄 하나만 쥐어주면 당장에라도 달려가 동척을 폭파시켜버리고만 싶었다.
그해 5월,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 김창숙이 나석주에게 한번 만나자는 전갈을 보내왔다. 독립운동에 뛰어든 대표적 유림(儒林)인 김창숙은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국내로 잠입했다가 석 달 전 중국으로 돌아왔다. 평소 알고 지내던 유림들의 도움을 받으면 20만원의 군자금쯤은 너끈히 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국내로 잠입했지만, 국내 분위기가 가라앉아 목표한 자금 모금이 여의치 않았다. 조선인의 독립 열망을 다시 일깨우려면 주요 시설 파괴, 요인 암살과 같은 자극이 필요함을 절실히 깨닫고, 중국으로 돌아온 직후 무력항쟁단체 의열단과 손을 잡았다.
나석주는 톈진 프랑스 조계지에 있는 푸자오러우(佛照樓) 여관으로 김창숙을 찾아갔다. 김창숙은 나석주를 반갑게 맞으며 김구의 소개장을 보여주며 말했다.
“동지가 잠자고 있는 조선의 민족혼을 일깨워줘야겠소. 민족의 고혈을 빨고 있는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가 동지의 손에 폭파되는 날 일본은 간담이 내려앉아 더 이상 우리 민족을 착취하지 못할 것이오. 대의를 위한 동지의 무운을 비오. 백범 또한 동지의 충절을 철석같이 신뢰하고 동지의 장거를 학수고대하고 있소!”
김창숙은 나석주의 두 손을 불끈 움켜쥐었다.
“평소 꿈꾸던 일입니다.”
나석주는 이승춘, 한봉근, 유자명 등 동지를 규합해 김창숙이 지원한 자금으로 무기를 구입하고, 국내로 잠입할 계획을 세웠다. 항구와 역마다 일본의 군경과 밀정이 지키고 있어, 귀국 배편을 마련하는 데만 6개월이 소요됐다.
마지막 사흘 밤
1926년 12월24일, 산둥(山東)성 출신 중국인 노동자 마중더(馬中德)는 지푸(芝?, 옌타이)에서 중국 정크선 리퉁(利通)호에 승선했다. 지푸를 출항해 다롄을 거쳐 인천으로 향하는 리퉁호에는 중국인 172명, 조선인 3명, 일본인 4명이 탑승했다. 마중더는 꾀죄죄한 중국옷을 입고, 낡고 축 처진 배낭을 둘러메고 있었다. 비좁은 선실에서 마중더는 억센 산둥 사투리로 중국인 노동자들과 웃고 떠들며 어울렸다.
12월26일 오후 2시, 리퉁호는 인천항에 입항했다. 입국 심사를 맡은 일본 관리와 경찰은 조사해봐야 얻을 것도 없는 중국인 노동자들은 대충대충 통과시키고, 중국 상선에 끼어 탄 조선인 세 명만 까다롭게 조사했다. 인천 거리는 세모를 앞둔 토요일 오후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한산했다. 마중더는 같은 배에서 내린 중국인 노동자 스물두 명과 함께 지나정(支那町, 차이나타운)으로 우르르 몰려가 중국 여관 원화잔(元和棧)에 투숙했다. 오후 4시 여관 직원 수현요가 숙박계를 가져오자 ‘山東省人 馬忠大’라는 가명으로 숙박계를 쓰곤 직원에게 중국어로 물었다.
“거리가 왜 이렇게 썰렁하죠?”
“방금 입국하셔서 모르셨구나. 글쎄 다이쇼 천황이 죽었대요, 어제.”
마중더는 피식 웃음이 나는 것을 겨우 참았다.
“뭐가 그렇게 좋으세요?”
“일본 왕이 죽었으면 일본인이나 슬플 일이지 우리 같은 중국인이나 조선인이 슬플 게 또 뭐요?”
마중더는 직원의 물음을 두루뭉수리 얼버무리며 넘어갔다. 원화잔에서 저녁을 사 먹은 중국인 노동자들은 짐을 꾸려 여관을 나섰다.
“주무시지 않고 그냥 가세요?”
“응, 우린 진남포로 장사하러 가야 해.”
여관에는 4명만 남고 마중더와 18명의 중국인 노동자는 서둘러 인천역으로 떠났다. 오후 8시45분 인천발 경성행 경인선 열차를 타고 경성역에 내려 오후 10시55분 경성발 진남포행 경의선 열차로 갈아탔다. 12월27일 새벽 진남포역에서 내린 마중더는 일행과 헤어져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마중더를 바라보며 중국인 노동자들이 수군거렸다.
“저 사람은 왜 여기까지 따라온 거야? 누구 저 사람 아는 사람 있어?”
그날 오전 마중더가 무엇을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마중더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오후 3시 평양역이었다. 마중더는 오후 3시30분 평양발 경성행 열차를 타고 9시55분 경성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마중더는 남대문통 5정목에 있는 중국 여관 동춘잔(同春棧)에 투숙했다. 여관 주인 고학성이 숙박계를 들고 오자 이번에도 ‘江蘇省人 馬仲達’이란 가명으로 숙박계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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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쓰는 신문지 좀 구할 수 있을까요?”
주인이 신문지를 가져다주고 나가자, 마중더는 지푸에서 배에 오른 후 한 번도 등에서 내려놓지 않은 낡고 축 처진 배낭을 풀어헤쳤다. 낡은 옷가지 사이로 차가운 쇠붙이들이 보였다. 10연발 권총 1정, 폭탄 2개, 실탄 100발. 마중더는 신문지로 권총을 말아싸고, 웃옷 호주머니 양쪽에 폭탄을 한 발씩 넣고, 복대에 실탄을 채웠다. 마중더가 갑자기 유창한 조선어로 중얼거렸다.
“일본놈들, 맛 좀 봐라.”
12월28일, 마중더는 아침밥을 든든히 챙겨 먹고 여관 문을 나섰다. 오전 내도록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 앞길을 부지런히 오가다가 오후 2시 동척 사옥 안으로 쑥 들어갔다.
“뭐요? 당신.”
“나…리이영요우…만나러…왔어”
얼마 후 동척과 황금정 일대는 피바다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