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53년 서울 출생<br>▼ 홍익대 서양화과 졸업<br>▼ 고마이화랑(도쿄), 엘가위머 갤러리(뉴욕), 갤러리 현대(서울), 더글라스 우델 갤러리(캐나다) 등에서 개인전 14회<br>▼ 제2회 대한민국무용제 무대미술상, MBC 이달의 작가
하지만 이런 상황을 모르는 요즘 사람들에게 그냥 ‘청년문화’라는 단어를 던져주면 대부분 같은 의미로 받아들인다. 이렇듯 언어 자체의 상징인 글자, 즉 기표(記標)와 그 글자가 의미하는 기의(記意) 사이에는 상상 이상의 편차가 있다. 언어 또는 상징은 하나의 의미 또는 기호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역사적, 문화적, 정치적인 주변들이 작용하면서 각각 다르게 전이된다.
역마살의 특권
아무튼 뽕짝조의 대중가요가 포크 계열로 변화한 것이 한국 청년문화의 주류이던 시절, 지금은 화단의 중추로 자리매김한 이상남, 이일(재미), 고영훈, 김장섭 등 홍익대 미대 72학번 동기 4인이 패기 있게 모여 신문회관화랑에서 ‘종횡전(縱橫展)’을 열었다. 개학을 앞둔 대학 3학년 겨울방학 때였다.
대중가요의 변화만으로 청년문화를 설명하기에는 좀 부족하다 싶던 청년문화론자들은 이들의 행보를 주시했다. 이들의 전시 브로슈어 제작 경비를 ‘청년문화’라는 단행본을 낸 출판사가 지원했을 만큼 이들은 미술계 청년문화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화단이 이들을 주목한 것은 단순히 청년문화의 기수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핵심은 조형과 회화의 파격이었다. 당시는 회화의 전면성과 물성이 강조되던 시기였다. 벽지처럼 은은한 색 일색의 회화나 화면의 질감에 천착하는 우윳빛 그림이 ‘집단개성’이라는 언어로 설명되던 시대였다. 반면 그들이 내건 그림들은 확연히 달랐다.
그런 시절에 고영훈의 덩그러니 그려진 현무암 덩어리, 기계부속들이 뒤엉켜 전혀 작동할 수 없는 엔진 같은 이일의 그림, 3분의 1쯤 열린 창문을 희미하게 찍은 이상남의 사진은 파격이었다. 김장섭의 마티에르로 뒤덮인 평면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반항은 청년문화의 특징인 일탈과 저항 그 자체였다. 그러나 미술계 주류가 우려와 함께 이들을 용인하고 흡수함으로써 그들의 새로운 활동에 다른 젊은 작가들이 동조하는 걸 차단했다. 하지만 이들로부터 시작된 변화는 거역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었다. 기성세대와는 다른 감수성과 환경에서 자라난 그들을 제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상남은 발군의 역량으로 자신의 입지를 넓혀나갔다. 당시 한국 현대미술의 중심이라 할 ‘에꼴 드 서울’전에 최연소 일원이 된다. 또 일본에 거주하던 미국 미술비평가 조지프 러브와 나카하라 유스케(中原佑介) 등 일본 비평가들과의 만남은 한국이라는 한정된 세계를 벗어나 세계로 향하려는 그의 운명적 역마살을 자극하는 계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