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안 돈계마을의 유채가 싹을 틔웠다.
약속장소인 주산면사무소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10시. 면사무소 공터에 주차하고 김 국장에게 전화를 했다. 10여 분쯤 지났을까. 그가 파란색 1t 트럭을 몰고 나타났다. 20년 가까이 농사를 지어온 프로 농사꾼이라고 보기엔 다소 왜소한 체격. 첫인상은 농군이라기보다는 시골마을에 묻혀 사는 서생이라고 해야 더 어울릴 것 같았다. 작달막한 키에 빛나는 눈매만 보면 영락없는 녹두장군이다.
수인사를 나누자마자 다짜고짜 유채밭부터 가보자고 했다. 도대체 어디에 유채가 심어져 있다는 것인지 궁금했다. 잠시 후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4만9500여m2(1만5000평)의 유채재배 시범단지가 조성돼 있다는 주산면 돈계마을 앞 들판. 그런데 여기서도 작년 11월에 파종했다는 유채는 눈에 띄지 않는다. 대신 논둑에서 청아한 푸른 바탕에 하얀 빗살무늬가 곱게 수놓인 들꽃이 눈에 띈다. 이 꽃은 이름이 입에 담기가 영 쑥스러워 봄까치꽃이라고도 부르는데 본래 이름은 개불알풀꽃이다.
엄동설한에 피어난 개불알풀꽃의 강인한 생명력에 감탄하고 있을 즈음, 김인택 사무국장이 옷을 갈아입고 성큼 마른 논으로 내려선다. 뒤따라가 논바닥을 자세히 살펴보니 어린 유채가 자라는 모습이 보였다. 냉이처럼 땅바닥에 바싹 엎드려서 자라는데, 잎 빛깔이 TV 화면에 비치던 제주도의 연둣빛 유채와는 딴판이다. 이곳의 유채 잎은 보호색이라도 가진 양 흙빛과 거의 구분하기 힘들 정도의 검푸른색을 띠고 있었다. 같은 월동작물이면서도 추운 겨울을 나는 방법은 보리와 유채가 서로 다르구나 싶었다.
그런데 그 생김새가 얼마 전 아내가 밥상에 올린 유채나물하고는 다르다. 왜 그런가 물었더니, 아뿔싸! 여태 유채의 새순으로 알고 먹던 ‘하루나’가 유채와 유전자가 전혀 다른 작물인 왜갓(하루나는 일본식 표현)이었단다. 제주도 유채꽃을 떠올리며 먹던 유채나물이 실은 ‘왜갓나물’이었다. 왜갓은 생김새는 엇비슷해도 유채하고는 전혀 다른 작물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왜갓이 알싸한 맛이 나 뜨거운 물에 살짝 데쳐서 독성을 제거한 다음 무쳐먹는 반면에 유채는 아린 맛이 없는 대신 달고 고소해서 보통 데치지 않고 겉절이로 먹는단다.
“버릴 게 하나도 없어요”
“너무 어려서 좀 안쓰러워 보이죠? 5월이 되면 이 넓은 들녘이 온통 노란빛으로 물들 겁니다.”
왜 하필 유채냐고 물었더니, 유채는 버릴 게 하나도 없단다. 우선 키우기가 쉽다. 유채는 보통 이모작을 하는데, 가을걷이가 끝난 논에 씨만 뿌려놓으면 웬만한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잘 자란다. 이렇게 자란 봄의 어린 새순은 쌈 채소나 새싹 채소로 입을 즐겁게 하고, 꽃이 피면 훌륭한 관광자원인 동시에 양봉농가에는 소중한 밀원을 제공한다. 또 유채기름은 최고급 식용유나 바이오디젤의 원료로 쓰인다. 공기 중의 질소를 땅에 붙잡아두는 녹비식물이어서 땅을 기름지게 하는 것도 유채의 미덕. 유채를 심었던 논에는 비료를 따로 뿌릴 필요가 없단다. 이 논에서 생산된 쌀의 맛이 유난히 좋은 것도 그 때문이다. 유채는 기름을 짜고 남은 찌꺼기도 가축의 사료나 유기농 퇴비로 활용할 수 있다니 그 은덕은 열 손가락으로도 다 헤아리기 힘들다.
마을회관을 찾으니 지난해 짠 유채기름으로 온갖 전을 굽고 있다. 물론 지난해 각자의 논밭에서 키운 유채꽃에서 나온 것들이다. 트랜스지방산이 없어 이곳의 유채기름은 최고 인기 상품이다. 거기다 유채 퇴비를 먹고 자란 쌀로 지은 밥은 그야말로 꿀맛이다. 화학비료나 농약을 뿌리지 않은 순 유기농 쌀. 한상 가득히 차려진 유채밥과 유채기름 전을 먹고 나니 꿀차가 나온다. 이곳의 유채꽃에서 비롯된 꿀차를 마시니 전날의 취기가 싹 사라지는 듯하다. “유채가 최고여, 최고”라는 한 할머니의 말씀처럼 이곳은 유채가 아니면 그 무엇도 의미가 없다. 적어도 부안에선 ‘꽃이 사람보다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이오디젤이 뜬다!
더구나 최근에는 유가가 급등하면서 유채유를 비롯한 바이오연료가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국제 원유가는 2000년대 초 배럴당 20달러이던 것이 7년여 만에 무려 5배가 올라 100달러를 돌파한 상황이다. 이에 세계 각국은 고갈돼 가는 석유의 대체 에너지원으로 바이오에너지에 주목하고, 오일작물의 재배 면적을 앞 다투어 늘리는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