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4월호

현직 외교관의 ‘한일관계 新패러다임’ 제언

日 국민성으론 반성 불가능, 대일 햇볕정책이 유일한 대안

  • 정연택 외교통상부 외교역량평가단 팀장 ytjeong91@mofat.go.kr

    입력2008-04-05 12: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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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용주의’를 내건 새 정부가 출범했다. 우리 외교의 아킬레스건이라 할 수 있는 한일관계 역시 ‘실용의 시대’에 발맞춰 나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과거사 갈등 문제를 털어내는 과정이 필수다. 현직 외교통상부 공무원이 한일 과거사 갈등의 근원을 독특한 시각으로 분석하고 그 해법을 제안해왔다.
    현직 외교관의 ‘한일관계 新패러다임’ 제언
    이명박 정부가 출범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으로 보면 향후 5년은 산업화, 민주화를 관통해온 ‘이념의 시대’를 뒤로하고 선진화로 대변되는 ‘실용의 시대’가 도래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 외교의 아킬레스건이라 할 수 있는 한일관계 역시 예외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지금껏 한일관계를 관통해온 ‘이념의 시대’를 끝내고 ‘실용의 시대’를 맞으려면 과거사 갈등 문제를 어떻게든 털어내는 과정이 필수불가결하다.

    일본은 1953년 한일회담 교섭 초기 구보타 간이치로(久保田貫一郞) 대표의 망언(“일본의 통치는 한국인에게 은혜를 베푼 것”)을 필두로 끊임없이 과거사를 미화하고 부정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제는 과거사로 인한 갈등이 연중행사가 돼 양국의 진정한 협력과 발전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이는 결코 양국관계 증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소모적인 외교전에 발전적 에너지를 낭비할 뿐이다.

    한일관계는 아무리 양국 정상 간에 ‘한일간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채택하고, 표면적 우호를 유지한다 해도 과거사 갈등을 국민이 수긍할 수 있도록 명쾌하게 해결하지 않고는 진정한 협력을 기대할 수 없다. 또한 긴밀한 한일 협력 없이는 동북아의 진정한 평화도, 번영도, 안전보장도, 견고한 공동체 형성도 이뤄질 수 없다.

    과거사 문제로 양국 간 갈등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데에는, 그러한 갈등을 생산하는 ‘깊은 원인’이 반드시 존재할 것이다. 또한 그 원인은 다분히 정신적인 것과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 싶다. 필자는 이런 점에 유의해 다양한 자료와 문헌을 검토한 결과 한일 과거사 갈등과 연관된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인의 정신적 요소(국민성) 다섯 가지를 추출했다. 일본인의 이 다섯 가지 국민성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국내외 학자가 연구한 바 있으므로 그 연구 성과에 기반을 두고 일본 국민성과 한일 과거사 갈등의 연결고리를 찾아보고자 한다.

    이러한 접근이 타당한지에 대해 이론(異論)이 있겠지만, 과거사를 부정·미화하는 일본인의 성향을 특정해내는 데에는 상당한 효용성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일본인에게는 우리와는 다른 성질, 즉 특성(trait)이 분명히 존재하고, 그것이 우리들과는 너무나 다른 과거사 인식 태도를 형성하고 있음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神道와 천황제

    일본인의 정신 원형에 다가가려면 무엇보다 먼저 일본인의 정신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종교의식을 살펴봐야 한다. 일본인의 종교관엔 다른 민족의 종교관과는 다른 특이한 면이 있다. 일본인 개개인은 별다른 종교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대부분의 일상생활이 매우 종교적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예컨대 신생아에게 신도(神道)사원의 축복을 받게 하고, 결혼택일은 불교승려로부터 받고, 결혼식은 기독교식으로 하며, 장례식과 제사는 불교식으로 한다. 또한 거의 모든 가정에 부쓰단(佛壇)이나 가미다나(神柵)를 비치해 조상과 영웅, 자연의 영들을 모신다. 특히 조상신이 집안을 보호한다고 생각하며, 각 가정은 지역의 신사나 절(불교 종파)에 소속되어 조상의 원혼을 기리고 숭배한다.

    이러한 종교적 관용성은 원시시대 때부터 비롯됐다고 하는데, 그 중핵은 신도다. 일본 문화청에서 발행한 ‘종교연감(2006)’에는 ‘신도’가 “일본민족의 고유한 신 및 신령에 관련된 신념을 기반으로 발생 전개되어온 종교를 총칭하는 말이다. 또한 신과 신령에 관련된 신념 및 전통적인 종교적 실천뿐 아니라 널리 생활 속에 전승돼온 태도나 사고방식까지 포함한다”고 설명돼 있다.

    그런데 신도의 가장 고유한 모습은 고신도(古神道)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본어의 ‘가미(神)’는 어원상 ‘가미(上)’와 통한다. 그것은 선악 귀천 강약 대소와는 상관없이, 초인간적이냐 아니냐를 불문하고 어떤 의미에서든 위력 있는 존재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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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인에게 천황을 부정하는 것은 일본인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이다.

    우주 삼라만상 가운데 위력을 발현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미’가 될 수 있는데, ‘야오요로즈노가미(八百萬神)’라는 관념이 그것이다. 즉, 천체 산 들 강 바다 바람 비 등을 비롯해 새 짐승 벌레 수목 풀 금속 돌 등 자연현상이나 자연물에까지 ‘가미’라는 명칭이 붙여지는 것이다. 위인이나 영웅 귀족 등이 ‘가미’로 여겨지기도 하며, 자연이나 인간의 여러 능력이 신격화한 경우도 적지 않다.

    신도는 대륙으로부터 전래된 불교, 유교, 도교의 영향을 받아 오랜 세월 수정과 변용을 거듭해왔으나 본질적 내용은 오늘날까지 일본인들 마음속에 계승되고 있다. 그러한 신도의 현실적 표상으로서 천황제(天皇制)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천황제는 초기 일본의 국가 형태(씨족국가)에서 비롯됐다고 보이는데, 초기 일본 천황의 권력은 매우 미약했다. 그러나 율령국가시대를 거치면서 점차 그 권위가 확립됐다. 즉 씨족의 상징적 수장에서 유교적 이념의 근거를 지닌 율령적 천자(天子)의 모습으로 변화하게 된 것이다. 중세 및 근세 막부시대에는 귀족계급이 성장하면서 천황의 권위가 약화됐으나, 19세기 메이지 유신을 계기로 유신세력 집권을 위한 명분 및 근대국가 형성을 위한 국민통합의 상징으로 다시 권위를 회복했다.

    천손강림

    천황의 의미를 보다 정확히 이해하려면 지금도 천황 즉위식에서 행해지는 대상제(大嘗祭)를 살펴봐야 한다. 신도 행사로 진행되는 즉위식은 ‘센소(踐祚, 3종 신기 전수)’ ‘즉위의 예’ ‘대상제(즉위종교행사)’ 세 가지 절차로 진행된다. 이 중 특기할 만한 절차가 대상제다. ‘덴노레이(天皇靈)의 접착’이라 하는데, 일본의 기키신와(記紀神話, 천황가에서 정한 일본신화) 가운데 천손강림(天孫降臨)을 재현하는 의식이다.

    이 의식은 새 천황이 되는 자가 한밤중에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유기덴(悠紀殿)이라는 일본 전체를 대표하는 ‘덴(殿)’에 혼자 들어가 아마테라스(태양신)와 함께 그해에 난 신코쿠(新穀)를 먹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후 천황은 니니기(일본의 개국 시조)가 강림할 때 뒤집어썼다는 마도코오후수마(眞床追衾)를 덮고 잠을 잔다. 즉, 천손강림을 재현하는 것인데, 이때 전임 천황에 접착하고 있던 덴노레이가 신임 천황에게로 옮겨 접착된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마도코오후수마라는 이불 속에서 신임 천황이 여신인 아마테라스와 성적인 관계를 맺는 의식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어느 누구도 참가할 수 없는 비의(秘儀)다.

    이처럼 대상제는 선진국 일본의 국민 처지에서도 믿기 힘든 정령숭배(애니미즘) 의식이다. 하지만 그런 절차를 통해 천황은 자격을 얻고, 일본인이 요구하는 초자연적인 존재가 되며, 또 예배의 대상으로 발전해 아라히토가미(現人神)로 나아가는 것이다.

    천황은 이른바 평화헌법에 의해 일본과 일본국민 통합의 상징이라고 규정되어 있으나, 실은 이전부터 그러한 상징이었다. ‘만세일계’의 천황이 일본의 상징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일본이라는 국가와 민족이 아득히 먼 옛날부터 존재했다는 의미다. 일본이라는 민족의식, 국가의식이 성장한 것은 근대에 들어서면서부터이지만 천황은 이미 이러한 관념을 통해 일본문화와 역사의 상징이 될 뿐 아니라 스스로 그 존재 근거를 획득한다.

    메이지 유신 이후 서양의 발달된 기술문명과 강력한 실력의 원인이 기독교에 있다고 생각한 일부 국학자들은 천황과 국체(國體)에서 기독교에 대한 대안을 발견했다. 따라서 천황은 순수하게 일본적인 것을 상징하게 됐으며, 특히 천황이 중심이 되는 신도는 순수한 일본을 상징하게 됐다.

    역사상 일본을 크게 변화시킨 두 사건이 있다. 하나는 에도시대 300년간의 쇄국정책을 무너뜨린 페리 제독의 ‘흑선래항(黑船來港)’이며, 또 하나는 제2차 세계대전 패배다. 두 번의 혁명적 계기는 이전 시대와는 180도 다른 일본을 만들었다. 이런 극적인 전환을 가능케 한 정신적 힘이 바로 천황제에 있다고 일본인들은 느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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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진, 쓰나미 등 일본의 자연재해는 일본인에게 인간적 반성과 역사적 사고를 할 수 없는 가치관을 심었다.

    즉, 천황은 국가를 초월한 역사적 상징이며, 일본과 일본문화 그 자체로서 일본인의 마음을 깊숙이 지배하며, 일본의 역사와 민족의 피가 되어 면면히 흐르는 원리다. 그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일본인의 자부심(정체성)의 정점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러한 천황이 지배한 20세기 전반의 역사를 부정하고 반성하는 것은 일본인들에게 그리 간단치 않은 일이다. 천황제가 일본인 마음(귀속의식)의 본향이며, 일본인 자신의 정체성까지 규정하는 상황에서 이를 부정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일본인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적 집단의식

    일본인의 가정, 사회적 집단, 또는 취미나 친구 등의 동아리모임에서 ‘우리(我ク)’라는 감정의 발현이 폭넓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거기에는 개인의 역할의식이나 개성,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생각보다는 일체감, 귀속감, 동아리정서 같은 것이 우위를 점한다. 어떻게 하든 ‘와(和)’를 중요하게 여기고 전원일치를 요구하는 경향을 보인다.

    또한 일본인은 몇 명만 모여도 저절로 일체감을 가진 집단이 되고, 자기의 생각을 표현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에 대해 동조적 자세를 취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삶의 방식이 일본인에게는 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지며, 또 그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고 알려져 있다.

    다른 민족의 경우 특별한 상황에 놓이거나 의도적으로 조작할 때에 집단의식이 발현하는 데 반해 일본인에게서는 평상시에도 집단의식이 잠재된 정서로서 지속된다. 이런 독특하고도 뿌리 깊은 ‘일본적 집단의식’이 형성된 기원을 찾아보면 다양한 역사적, 환경적 요인을 들 수 있으나 무엇보다도 일본인의 종교관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일본인들은 말(言)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었다. 이를 언령신앙(言靈信仰)이라고 하는데, 사람이 말을 하면 말한 사람의 영혼이 말에 옮겨 붙어 말의 영혼이 되고 그 말해진 사물에 도달해 그 사물의 영혼이 된다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말(言, 고토)과 사물(事, 고토)의 일체성이 확보된다. 결국 말을 한 사람과 불려진(이름 붙여진) 사물이 똑같은 영혼을 공유하는 ‘한 무리(동아리)’로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만물이 개개의 사물로 있으면서 동시에 영혼, 즉 생명을 같이하는 ‘같은 무리(仲間)’로 느낀다는 것이다. 이러한 언즉사(言卽事)의 일체감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한 동아리, ‘우리 감정’을 강화시켜왔으며, 그것이 오늘날의 일본적 집단의식이 된 듯하다.

    언령신앙은 신도와 결합돼 집단의식을 더욱 발달시켰다. 가장 흔한 형태가 그 지역의 신사를 중심으로 형성된 우지코(氏子)라는 신앙집단이다. 우지코는 특정 신사가 있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 그 신사를 받들고 있는 신자의 무리를 가리킨다. 즉 일본인이라면 자동적으로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 신사의 우지코가 된다. 그중 가장 큰 것이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신도다.

    아마에와 집단정서

    그런데 일본인 조직체에서는 그 조직이 무슨 목적으로 만들어졌든 상관없이 구성원이 그 조직체에 융화되는 것이 선결과제다. 융화에 의해 ‘우리 감정’이 형성돼 마침내 ‘그곳 사람(そこの人)’으로 인정받고 활동이 가능하게 된다. 즉 먼저 ‘우치(內)’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집단의 기초단위인 가족은 가족성원, 즉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등이 생물학적 뿌리를 가진 애정으로 연결돼 있다. 일본 가정에서도 그런 애정관계의 골격은 같지만 여기에 일본적 집단의식이 덧붙여짐으로써 독특한 정서가 생겨난다.

    가족 구성원 사이에는 애정의 끈이 강하기에 고집을 부리거나 싸움을 해도 그 끈이 끊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안심감’이 있다. 이 안심감과 집단의식의 비이성적 경향이 연결되면 자기주장을 무한히 행해도 상관없다고 여기게 된다. 이처럼 가족 내 일본적 집단의식이 비대해져 각 성원의 자기 방종을 용인하거나 용인되는 상태를 일본인들은 ‘아마에(甘え, 응석)’라고 한다. 일본인이 만드는 ‘우치 집단’의 분위기도 가족의 경우보다는 제한되지만, 그 기조는 아마에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즉, 아마에는 일본적 집단의식의 가장 일반적인, 그리고 대표적인 정서(표출양태)다.

    현직 외교관의 ‘한일관계 新패러다임’ 제언

    원폭 피해자를 추모하는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아마에의 ‘우치 집단의식’이 그 집단 내부에 머물러 있을 때 ‘소토(外)’는 무관심한 세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소토가 어떤 형태로든 우치에 작용하거나, 소토에 작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정이 우치에 생겨 집단의식이 바깥으로 향할 때에는 우치와 소토 사이에 긴장관계가 생기게 된다.

    소토가 우치에 대해 융화적인 자세를 보이면 문제가 없다. 하지만 동화를 거부하거나 적대적인 경우 아마에는 배타적 감정, 우월감, 경멸감, 적의, 성냄 등의 집단 분위기로 변해 소토에 대해 공격적이 된다. 우치에 고양된 집단의식은 구성원의 객관적 판단력을 억제하기 때문에 소토를 공정하게 수용할 수 없게 되고, 이를 배제 또는 파괴하려 함으로써 우치의 집단의식은 더욱 강화된다.

    일본의 패배로 전쟁이 종결된 이후 일본인은 다시 우치 집단사회 속에서 하루바삐 부흥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에게 전쟁에서 일어난 일들은 아득한, 무관심한 소토의 일처럼 되어버렸다. 강렬한 공격성으로 치달았던 집단의식이 평상시로 돌아와서는 폐쇄적인 우치 집단의식으로 이행했다.

    대개 전쟁으로 인해 팽창했던 집단의식이 사라지면 전쟁에서 일어났던 자신의 행위가 집단의식인 ‘우리 감정’적인 것으로 희석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개인의 일로 각인된다. 여기서 심한 양심의 가책이 생긴다. 그러나 일본인은 집단의식에 대한 친화성이 강하기에 평상생활로 돌아오더라도 각각의 가정이나 직장에서 우치 집단에 몰입해 ‘우리 감정’을 주된 정서로 해서 살아간다. 따라서 과거의 일은 개인의 일로 각인되지 않고 막연하게 되어버린다. 우치 집단에 숨어 개인의 책임을 느끼지 못하는 정신구조가 형성되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흔히 과거를 ‘물에 흘려보내’는 것을 좋아한다. 일본인 특유의 ‘쉽게 잊어버림’의 원인은 일본인들이 일본적 집단의식에 늘상 침윤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때문에 자신들이 아시아에서 자행한 압박, 수탈, 잔학행위에 대해 반성하는 기운이 자발적으로 생겨나지 않는 것이다. ‘여행 중에 당한 창피는 버리고 오면 된다’ 같은 속담에서도 이와 같은 일본적 집단의식의 무책임한 메커니즘이 관찰된다.

    자연순응적 현실주의

    일본의 자연은 부드러우면서도 때로는 큰 재해를 가져다준다. 지진, 태풍, 번개, 해일(쓰나미), 냉해, 한발 등 자연재해는 일본인에게 늘 두려운 존재였다. 그것이 하루빨리 지나가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영향이 ‘자연에 순종하기만 하면 만사가 잘된다’는 가치관을 낳았다. 이런 생각이 집단을 가장 우선순위에 두는 일본인의 삶의 원리인 것이다. 즉 ‘자연의 질서에 묵묵히 순종하다가 죽어가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는 종교의식 같은 것이 되고 말았다. 이는 구체적으로 자신의 소속 집단에 대한 절대적 귀속위식으로 나타났으며, 신도는 그 중심사상이다. 이것이 자기중심적 세계관을 지닌 민족을 형성케 했다.

    이런 일본이기에 인위적인 재난도 자연재해처럼 보는 사고방식이 자라났다. 중요한 것은 그 쇼크로부터 하루바삐 벗어나서 파괴되고 잃어버린 것을 신속하게 되돌리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자연재해와 같다고 생각해버리기에 인간적 반성이 없고, 결과적으로 역사적 측면에서 사고할 수 없게 된다.

    흔히 일본인은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대응 자세가 세계에서 제일 훌륭하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폐허와 대혼란을 눈 깜짝할 사이에 극복해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된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그런데 ‘자연에 순종하는 삶’이라는 가치관은 그대로 일본인의 역사의식이 되어 나타났고, 타민족에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규범이 되었다. 원래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출발한 신과 조상에 대한 숭배는 철저하게 현실주의로 변해 일본인의 의식을 지배했다.

    일본인의 현실인식은 개인의 내면적 문제보다 현실사회를 향하고 있다. 일본인의 가장 큰 관심은 현재의 안정된 생활을 어떻게 보호할까, 당면한 문제를 어떻게 하면 이른 시일 내에 해결할 수 있을까다. 따라서 어제까지의 태도나 입장은 상관없는 것이라고 생각할 만큼 무책임한 태도 변화를 보이기도 한다. 한마디로 어제의 제국주의자가 오늘은 아무렇지도 않게 민주주의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현실의 변화에 신속히 적응해가는 일본인의 방법이다.

    ‘긴 것에는 감겨라’

    현직 외교관의 ‘한일관계 新패러다임’ 제언

    정한론을 주장하는 일본 정객들. 탁자를 치며 열변을 토하는 이가 정한론의 주창자 사이고 다카모리다.

    일본인은 자연현상이든 인위적인 것이든 늘 과거를 잊는 것으로 현재의 상황에 대처해왔다. 이것이 오늘날 일본의 번영을 만들었지만, 동시에 일본의 가장 큰 약점으로 지적된다.

    일본이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과거 중에 20세기 일본제국주의시대가 있다. 그러나 오늘날 일본인들은 천황을 절대신으로 신봉하고, 국가를 위해 생명을 버릴 수 있다는 의식을 심는 교육을 하며, 아시아인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준 그 시대를 까맣게 망각하고 있다. 지금의 교과서에 침략시대의 기록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의 일본인은 그런 사실이 있었는지조차 모른다. 교육받은 일도 없거니와 과거의 일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일본은 세계 유일의 원자폭탄 피해국이다. 물론 자신들이 초래한 결과였지만 피해는 대단히 컸고, 군인이 아닌 선량한 국민을 살상한 것은 국제법상으로도 문제가 있다. 미국은 원자폭탄 투하 즉시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들어와 구체적인 조사를 벌였다. 즉 일본을 첫 원폭실험장으로 활용한 것이다.

    이에 대해 미국에 격렬히 항의할 만도 한데 일본은 ‘이미 지나간 일’이라며 잊어버리고 있는 상황이다. 반핵시위는 꾸준히 하고 있으나, 미국에 대한 직접적인 항의나 배상요구는 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행한 일뿐 아니라 당한 일도 나쁜 것은 잊어버리는 일본인의 태도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개인적인 면에서 봐도 과거의 자신을 돌아본 뒤 현재의 자신을 파악하지 않기 때문에 반성할 게 없고, 그저 모든 것을 자연현상적인 우연의 문제로 돌려버린다. 이것이 대부분 일본인의 역사의식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인이 자주 쓰는 속담 중에 ‘긴 것에는 감겨라(長ぃものには卷かれろ)!’가 있다. 권력이나 세력 있는 것에는 반항하지 말고 참고 따르는 것이 득이 된다는 뜻이다. 일본인 특유의 완곡어법을 살려 미화했지만 결국은 ‘강자에겐 굴복하라’는 지극히 현실주의적인 메시지다. 이런 일본인들이 약자에게 배려심을 발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만약 한국이 세계 최강국이거나 적어도 일본과 대등한 국력을 가진 강대국이었다면 일본은 일찌감치 과거사를 진지하게 사과했을 것이다. 지금처럼 과거사를 부정하거나 미화하는 등의 망언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2007년 3월 아베 총리의 위안부 발언소동 때도 아베 총리는 피해 당사국인 한국이나 중국이 아니라 미국의 부시 대통령에게 자신의 진의가 왜곡됐다고 해명한 바 있다.

    서로에 대한 우월감

    조선 태조(이성계)는 즉위하자마자 일본의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에 국교 수립을 요청했다.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가 이에 응해 1404년 양국 사이에 국교가 맺어졌다.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은 중국으로부터 일본국왕 칭호를 얻었기 때문에 조선 왕과 대등한 입장에서 외교를 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1573년 무로마치 막부를 타도하고, 그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1590년 일본 전국을 통일했다. 히데요시는 다음 목표를 ‘입당(入唐, 명나라 정벌)’에 두고, 먼저 쓰시마로 하여금 조선국왕이 자신을 배알할 것과 복속할 것을 교섭하도록 명령했다. 그는 조선국왕을 쓰시마처럼 일본 국내의 센고쿠다이묘(戰國大名, 지방정권)로 보았던 것 같다.

    1589년 조선에 파견된 쓰시마 사절은 히데요시의 명령을 그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새 정권에 대한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는 교섭에 나섰다. 조선 정부도 왜구 잔당의 침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통신사 파견을 결정했다.

    그러나 1590년의 통신사 일행에 대한 히데요시의 답서는 국가 간의 의례를 갖추지 않은 불손한 것이었다. 우선 자신은 ‘태양의 아들’임을 강조하고, “내가 명나라에 들어가는 날, 사졸을 이끌고 군영에 임해 더욱 더 인맹(隣盟)을 다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라며 명나라를 정벌하는 데 길안내를 해줄 것을 분명하게 요청했다. 조선이 이를 거부하자 히데요시는 1592년 4월 15만명의 군대를 동원해 조선 침략을 개시했다.

    일본의 조선침략 후 조선과 일본은 한동안 국교단절 상태가 지속됐다. 히데요시 사후 실권을 장악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중단된 조·일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쓰시마 영주인 소씨(宗氏)에게 조일강화를 교섭하게 했다. 1606년 조선은 에도 막부(江戶幕府)의 강화 요구에 대해 두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하나는 조선을 침략했을 때 조선국왕의 묘를 훼손한 범인을 붙잡아 조선으로 보내고, 다른 하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먼저 조선국왕에게 국서를 보내라는 것이었다. 두 번째 것은 일본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였다.

    현직 외교관의 ‘한일관계 新패러다임’ 제언

    일본의 과거사 반성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식의 대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러나 국교 회복이 지연될 것을 두려워한 쓰시마 영주는 이에야스의 국서를 위조하고, 능묘를 파헤친 도적으로 쓰시마의 죄인 3명을 포박해 보냈다. 이에 조선은 일본이 두 가지 요구에 응했다고 평가하고, 1607년에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로서 정사 여우길, 부사 경섬, 종사관 정호관을 삼사로 하는 467명의 대사절단을 파견해 국교를 회복했다.

    조선은 1636년에 처음 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한 이후 1811년까지 아홉 차례에 걸쳐 통신사를 파견했다. 통신사는 ‘신의(信義)를 주고받기 위한 사절’이라는 뜻으로 양국 관계가 대등함을 나타내는 외교형태다. 그러나 실상은 자신을 중화문화의 계승자라고 생각하는 조선과,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화이질서 속에서 조선을 바라본 막부가 서로에 대한 우월감을 배경으로 성립된 것이었다.

    역지빙례와 정한론

    18세기 들어 조일 교린의 정신을 흐리게 하는 두 가지 경향이 나타났다. 하나는 역지빙례(易地聘禮) 문제였으며, 다른 하나는 신국(神國)사상의 등장이었다. 역지빙례는 조선통신사를 영접하는 장소를 수도인 에도(江戶)에서 쓰시마로 바꾸자는 것으로, 여기에는 일본 자체의 사정(기아, 흉작 등으로 인한 경비 부담)과 함께 조선에 대한 하대관이 작용했다.

    역지빙례에 직접 영향을 준 책은 일본의 주자학자 나카이 지쿠잔(中井竹山)의 ‘초모위언(草茅危言, 1789년)’ 10권으로, 이 책에서는 “진구(神功)의 원정 이래 한국이 우리에게 복속되어 조공을 바친 것은 역사적으로 오래된 일인데, 지금의 사정은 그와 다르다”라는 인식을 대전제로 “원래 변방의 보잘것없는 사절에게 막대한 비용을 들여서 응접할 필요는 없으나, 한인의 내빙은 인교(隣交)에 없어서는 안 될 일”이므로 쓰시마에서 응접해야 한다는 제안을 했다.

    또한 18세기는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와 그의 문하를 자청한 히라타 아쓰타네(平田篤胤)의 국학(國學) 사상이 풍미한 시기였다. 노리나가는 ‘겸광인(鉗狂人)’에서 “원래 황국(皇國)은 사해만국을 비춰주는 아마테라스 오카미(天照大神)가 태어나신 본국으로서, 그 황손의 생명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천지와 함께 영원히 다스리는 나라이며 만국의 시원이다”라고 쓰고 있다.

    이런 신국사상은 대(對)조선 외교를 에도시대의 ‘일본국 대군’과 ‘조선 국왕’의 대등한 관계를 일본의 ‘황제’와 조선 ‘국왕’의 상하관계로 전환시키려고 하는 의도, 즉 에도시대의 교린관계에 이의를 제기하고 정한론(征韓論)이 대두하는 사상적 배경이다.

    19세기 중엽 러시아, 영국, 미국 등이 통상을 요구하자 막부는 1854년에 미일화친조약을, 1858년에 미일수호통상조약을 맺었으며, 네덜란드 러시아 영국 프랑스와도 같은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들은 영사재판권을 인정했으며, 관세 자주권을 갖지 못한 불평등조약이었다.

    그 후 1863년 쓰시마번의 무사 오시마 도모노조(大島友之允)가 구미열강의 침략에 앞서서 일본이 조선을 침략해야 한다는 건의서를 막부에 제출하자, 막부도 이를 받아들여 조선의 국내사정을 탐색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메이지 유신 직전 막부의 대조선 외교는 구미세력의 압도적인 영향력에 의해 크게 변질될 조짐을 보였다. 당시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천황 중심의 국가체제 건립의 기운이 왕성해 조선은 천황에 당연히 복속되어야 할 존재로서, 그때까지 쇼군과 조선국왕 간의 대등한 외교는 있을 수 없다고 여겨졌다.

    이후 메이지 신정부는 1875년 강화도사건을 일으켜 이듬해 2월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를 체결함으로써, 마침내 정한(征韓)의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러한 조선침략정책을 구체화하는 데 중요한 정치적 이념의 틀을 제공한 인물이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다. 그는 ‘탈아론(脫亞論)’(1885.3.16)과 ‘조선민중을 위하여 나라의 멸망을 축하함’(1885.8.13)이라는 사설을 통해 조선에 대한 멸시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이를 일본 국민에게 각인시켜 나갔다.

    청일전쟁을 문명진보의 시비를 묻는 싸움으로 본 후쿠자와의 탈아론 주장과 조선 멸망론은 그 후 일본인의 대국의식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일본인의 한국인에 대한 민족차별의식은 일본의 한국침략에 박차를 가하게 했고, 이후 일본인의 한국관을 형성해왔다. 탈아의식과 조선 멸시관은 정책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일본 국민 의식 속으로 깊이 침투했으며, 36년간의 식민지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렀다.

    1941년 12월8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태평양전쟁은 시작됐다. 미국은 1944년 7월7일 일본군의 태평양 지배 근거지이던 사이판을 함락했고, 1944년 가을부터는 미공군 B-29 장거리 폭격기가 사이판을 발진기지로 삼아 도쿄를 비롯한 일본 주요 도시를 주야로 무차별 폭격했다. 일본 전국이 불에 탄 들판처럼 보였다.

    피해자의식

    현직 외교관의 ‘한일관계 新패러다임’ 제언

    일본에서 불고 있는 혐한류를 보여주는 만화들. 한국에 대한 왜곡된 시선을 바로잡기 위해 일본인에 대한 과거사 교육이 필요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미·영·소의 첫 회동은 1943년 11월 테헤란 회담이며, 두 번째가 1945년 2월 얄타 회담이었다. 이 회담에서는 극동 및 동남아시아에 관한 밀약이 체결됐다. 소련은 독일 항복 후 3개월 이내에 대일(對日)참전을 약속하고, 그 대가로 러일전쟁 이전에 러시아 제국이 확보하고 있던 만주에서의 권리와 남사할린, 지시마(千島) 등을 되돌려받는 데 대해 미·영의 승인을 받아냈다. 이것은 1941년 체결된 일·소 중립조약과 모순된 비밀협정이었다. 소련은 1945년 4월7일, 일·소 중립조약을 파기했다.

    1945년 8월8일 대일선전포고를 하며 만주로 진격한 소련군은 공격 첫날에 소련 국경, 만주 국경에 굳건히 구축해놓은 일본군의 요새를 분쇄했다. 난공불락과 무적을 자랑하던 일본관동군 국경경비대가 괴멸됐다. 소련군은 개전 후 수일 만에 400km 이상 진격하며 만주의 중심부까지 제압, 일본관동군에 치명적 타격을 안겨줬다.

    전후에 밝혀진 당시 일본 기록에 의하면, 일본 항복의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원인은 원폭 투하가 아닌 소련의 대일참전에 있었다. 이런 점에서 일본의 배신감은 지울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일본의 피해는 소련의 대일참전이라는 배신뿐 아니라 만주에서 벌어진 소련군의 잔악한 살상과 뒤 이은 일본인의 시베리아 강제연행으로 더욱 더 확대됐다. 이는 종전 후에도 일본인 가슴에 아픈 기억으로 남아 피해자의식으로 각인되었다.

    당시 만주지역에는 관동군 78만명, 일반인 72만명 등 150만의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중 소련군의 만주침략으로 숨진 사람은 34만3000여 명이나 되었는데, 정전(8월19일) 이후 사망자가 27만8000여 명(시베리아 연행 후 사망자 5만5000여 명 포함)에 달했다.

    일·소 정전협정체결 후 만주에 주둔하던 일본군 60만명에 대한 시베리아 강제연행이 시작됐다. 정전 4일 후인 8월23일 스탈린이 “일본군 포로 최저 50만명 이상을 소련 국내로 이송, 시베리아 등지에서 강제노동에 종사시킬 것”을 명령했기 때문이다. 이는 포로의 취급에 관한 국제법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었다. 시베리아 강제연행자들이 일본으로 귀환한 것은 1949~1950년으로 이들은 4년여 동안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오늘도 일본인들은 당시 소련의 잔인무도함을 기억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연합국은 전쟁을 일으킨 일본에 대하여 군사법정을 열어 전쟁 책임을 단죄했다. 이 판결에서 교수형 7명, 종신금고형 16명, 20년 금고형 1명, 7년 금고형 1명이 각각 언도됨으로써 피고 28명 중 사망자(2명)와 정신병자(1명)를 제외한 25명 전원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일본인(특히 우파)들은 이 판결에 대해 “일방적 보복재판”이며, 국제법을 무시한 재판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전범으로 규정된 이들이 평화조약이 발효되기도 전에 연합국에 의해 목숨을 잃은 것은 부당한 일이고, ‘전범’이라는 규정 자체가 전쟁이 끝난 후 재판 때 만들어진 것이어서 ‘죄형법정주의’에 위배되기 때문에 재판으로 성립될 수 없다고 말한다.

    인식의 대전환

    특히 ‘전범’을 규정한 ‘평화에 대한 죄’란 자위전쟁이 아닌 전쟁을 개시하는 일을 말하는데, 그러한 명목으로 국가의 지도자를 처벌하는 일은 ‘그때까지의 국제법 역사에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도의 팔 판사가 국제법상의 근거를 충족시키지 못하므로 피고 전원의 무죄를 주장했는데도 연합국 총사령부(GHQ)는 팔 판사의 의견 공표를 금하고, 재판에 대한 비판을 일절 허용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일본인들이 갖고 있는 피해의식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앞에서 살펴본 일본 국민성을 감안할 때 과연 일본은 한일 과거사 갈등 문제에 있어 우리가 기대하는 수준의 진정한 사과와 반성을 할 수 있을까. 필자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한다. 그것은 지난 60여 년간 일본 정치 지도자와 일본 정부가 취한 태도와 문제 발언(소위 망언)을 종합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그들의 생각과 입장은 일시적이거나 가변적인 것이 아니다. 그들의 정신 밑바탕에 자리 잡은 고유한 일본적 요인들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너무나 확고해서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변화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 국민과 정부가 한목소리로 일본을 비난하고 사과와 반성 요구를 끝없이 되풀이하는 일은 무의미할 수도 있다. 일본에 대한 대책을 새로이 냉철하게 세워나가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피해자라는 도덕적 정당성(명분론)을 근거로 일본에 대해 메아리 없는 외침을 계속해왔다. 그러나 그들의 정신적 구조(현실론)는 그것을 수용할 수 없는 상태다.

    새로운 대일정책은 대일외교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수준의 획기적인 것이라야 한다. 이제 일본이 자발적으로 변하기는 사실상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막연한 대일인식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즉, 우리 국민의 눈과 마음에 덧씌워진 당위론의 명분과 피해의식, 열등감, 증오심을 가슴에 묻고 숙명적으로 영원히 사이좋게 지내야 할, 이 세계에서 가장 독특하고도 불가사의한 이웃을 끌어안을 수 있는 인식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그러한 발상의 대전환은 과거 우리 정부가 시행한 대북 햇볕정책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2006년 8월15일 노무현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북한이 저지른 전쟁과 납치 등 지난날을 용서하자’는 취지의 발언을 통해 ‘조건 없는 용서’를 하자고 주장한 바 있다. 2007년 6·25전쟁 57주년 참전용사 위로연에서도 노 대통령은 “끊임없이 상대를 경계하고 적대적 감정을 부추겨서는 신뢰를 쌓을 수 없고, 화해와 협력의 대화도 이뤄질 수 없다. 상대를 인정하고 포용해야 한다”면서 “그러기 위해서는 가슴속에 남아 있는 증오의 감정도 어떻게든 지워나가야 한다. 우리는 6·25가 남긴 뼈아픈 교훈과 참전용사들의 희생을 잊지 않으면서도 과거의 원한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필자는 ‘같은 민족’이라는 요소만 제외하면 일본과 북한의 경우가 매우 유사하므로 결국 우리가 두 까다로운 이웃을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일본에 대해서도 북한에 대해서처럼 과감하게 ‘용서’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와 관련해 세계적인 지휘자 벤더민 젠더의 일화가 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던 날 유대인 할아버지로부터 “지금부터 우리 가족은 독일인을 증오하는 말을 하지 말고, 그런 글도 쓰지 말며, 그런 마음조차 갖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의아해 하는 가족에게 할아버지는 “독일이 우리 미래까지 불행하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증오는 증오의 대상보다 증오하는 주체에게 더 해롭고, 증오심에 사로잡힌 사람의 정신건강만 나빠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일본을 미워한다고 해서 우리의 앞날에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특히 다음 세대를 짊어질 젊은이들이 일본에 대한 반감과 증오심 속에서 성장한다면 그들은 적어도 일본에 대해서는 정신적 장애자가 되기 쉽고 균형 잡힌 지혜를 갖추기 어렵다. 이는 벤더민 젠더의 할아버지가 한 말처럼 일본이 우리의 미래까지 불행하게 하는 큰 손해를 가져오는 단서가 될 수도 있다.

    대일 햇볕정책의 필요성

    필자는 이제 일본에 대해 마음으로부터의 ‘용서’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것이 지금껏 답보상태에 있는 한일관계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일본에 대한 ‘용서’는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점에서 추진할 필요가 있으며, 결국은 우리 국익에 많은 이익을 가져다줄 것으로 확신한다.

    본질적으로 일본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과거에 대한 진정한 반성이 불가능한 민족이다. 그런 일본에 대해서 세세한 명분과 논리를 따지기보다는 대국적 견지에서 피해자인 우리가 가해자인 일본에 ‘관용’을 베푸는 것이 오히려 그들에게 반추의 기회를 줄 수 있다고 본다.

    이와 관련해 2007년 5월10일 서울대에서 ‘일본의 내셔널리즘과 아시아의 화해’라는 주제로 강연한 일본 ‘아사히신문’ 와카미야 요시부미(若宮啓文) 논설주간은 필자의 생각과 같이 우리 정부가 일본에 대해 햇볕정책을 펼쳐줄 것을 주장한 바 있다. 와카미야 논설주간은 ‘일본의 양심’으로 알려진 대표적인 지한파 인물로, 지난해 보수지 ‘요미우리신문’을 설득해 야스쿠니신사 참배 반대선언을 이끌어내는 등 한일 문제에서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온 언론인이다.

    그런 그가 서울대 강연에서 결론적으로 주문한 것이 우리 정부(국민)의 대일 햇볕정책이다. 물론 그가 이 정책을 추진해야 하는 본질적 논거를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요청은 일본인으로서 우리가 원하는 일본인의 진정한 사과와 반성이 거의 불가능함을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라고 본다.

    지금처럼 우리가 피해자라는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일본을 비난하고 무시하는 것은 아무런 효과가 없고 오히려 그들의 반발과 억지만 부추겨 역효과를 가져왔다. 즉, 개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국가관계에서도 피해자인 우리가 도량을 가지고 용서하고 포용하려고 할 때 오히려 일본의 태도 변화를 유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용서한 뒤 애정을 가지고 일본을 바로 보면, 그들의 장점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장점을 칭찬해주면 일본의 자발적 태도 변화를 충분히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만이 현재의 교착상태를 타개하는 유일한 돌파구라고 생각한다.

    유럽은 지난 50여 년간 EU통합과 CSCE/OSCE(유럽 안보와 협력에 관한 회의) 활동을 통해 지역통합과 역내 분쟁방지를 동시에 달성하고 있다. 또한 세계는 빠르게 글로벌화하는 동시에 지역통합의 방향으로 나아가며 다른 국가들끼리의 자유무역협정(FTA) 등을 통한 경제통합을 추진하고 있다. 동북아시아에서도 중국과 일본이 서로 경쟁하는 가운데 상호보완적인 관계(‘전략적 호혜관계’)를 발전시키기로 합의했다. 2007년 4월 원자바오(溫家寶) 총리는 일본 국회 연설을 통해 과거사 문제에 대한 유화적 입장을 천명함과 동시에 시종일관 ‘과거보다 현재와 미래가 중요하다’는 점을 역설했다.

    도덕적 우위에 의한 용서

    이처럼 냉엄한 국제정치의 역학관계 속에서 우리는 지금도 ‘과거’라는 사슬에 매여 더 이상의 양국관계 발전동력을 얻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과연 일본이 우리에게 그렇게 가치 없고 무의미한 존재인가에 대해 정직한 성찰이 필요하다. 특히 모든 면에서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여 국가 발전의 새로운 추진동력을 시급히 찾아야 하는 상황에서 앞으로 외교전략을 어떻게 구상하고 실천해나갈 것인지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 궁극적인 행태는 동북아 공동체를 통한 독창적인 세계구상과 세계전략이 돼야 할 것이다. 그 첫째 이유는 동북아에서 패권주의 등장은 한반도에서의 갈등과 대립의 격화로, 그리고 우리 민족의 불행으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반드시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세계무역체제 속에서 우리의 교섭력을 높이고, 커져가는 국제금융의 불안정성에 대처해 경제적·금융적 지역공동체 구축을 촉진하기 위함이다.

    셋째는 21세기 세계경제에서 가장 역동적인 지역이 될 동북아에서 역내 자유무역의 확대, 전략적 제휴 강화 등 경제협력 확대를 통해 우리 경제의 제2의 도약을 이뤄 명실공히 선진경제로 진입하기 위해서다. 넷째로는 무엇보다 우리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서다. 통일 문제는 결코 민족 내부만의 문제가 아니며, 동북아 안보공동체와 경제공동체의 구축이라는 ‘큰 움직임’ 속에서 남북통일의 결정적 계기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국가적·시대적 소명 아래 필자는 방어적·수동적 일면외교가 아니라 공격적 능동적 통합외교(군사·통상·문화, 정부 및 민간을 총괄)를 강화해야 한다고 본다. 그 첫걸음으로서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 해결은 불가피한 선결과제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일본에 대해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도덕적 우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다. 그동안 우리 국민과 정부가 일본의 과거사 미화와 부정의 태도에 대해 당당하게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는 피해자이고, 그들의 과거 잔학행위가 인류보편적 가치에 비춰볼 때 매우 비인간적이고 비도덕적이라는 점 때문이다.

    최근 한 일본 지식인은 “한국인은 실제로는 과거사 청산을 원하지 않는다. 일본에 할 말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과거사 제기를 통해) 일본을 도덕적으로 낮은 존재로 여김으로써 만족감과 쾌감을 얻는다”는 심리분석을 내놓았다.

    그러나 우리가 진심으로 일본을 용서하고 포용했을 때는 과연 어떤 말이 나올지 궁금하다. 우리의 용서 행위에 따른 자긍심은 우리 민족의 인격과 품격을 고양시킬 것이며, 한없는 자랑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만일 일본이 먼저 진정으로 사과한다면 그때 우리의 마음은 통쾌하거나 시원한 것이 아니라 무언가 억지로 빚을 받아낸 듯한 느낌을 떨칠 수 없을 것이다.

    일본인은 원래 악인이었고, 그들이 원자폭탄 세례를 받은 것은 잘못에 대한 응징이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는 사고에는 폭력에는 폭력으로 응징한다는 ‘복수’의 사고가 깔려 있다. 폭력과 원한은 어느 한쪽이 끊지 않는 한 종결되지 않는다. 폭력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주체는 피해자 측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은 미국을 용서해야 할 것이며, 한국은 일본을 용서해야 한다. 분노는 결코 사죄를 부르지 못한다.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할 것은, 우리가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에 있어 ‘용서’를 한다고 해서 과거사를 완전히 잊어버리자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진정한 우호의 밑거름이 아니라 또다시 양국 간 불행을 부를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진정한 양국 선린우호관계를 위해 용서는 하되 지난 역사는 기억해야 한다. 후세를 위한 교훈으로 삼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언젠가는 일본이 우리의 진심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에 필자는 다음과 같은 화해를 위한 정책을 제안한다.

    화해를 위한 방안

    우선 우리 대통령이 직접 한일 과거사 문제를 더 이상 외교문제화하지 않을 것이며 양국 협력관계를 최고 수준으로 격상시킬 것을 제안하는 내용의 성명을 대외적으로 천명해 향후 대일관계의 획기적 개선을 추구할 것을 선언한다. 이러한 용서와 화해의 정신을 나타낼 가시적인 행사로 일왕의 방한을 추진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참고로 일왕의 중국 방문은 1992년에 실현됐다.

    둘째, 양국 간 실질교류를 대폭 확대한다.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양국관계 발전이 지지부진한 원인은 과거 청산의 미흡 때문이었으며, 그 근본 이유는 서로 상대를 너무도 모르고 있다는 데 있다. 따라서 가장 먼저 확대 추진해야 할 ‘실질’교류사업 분야는 상대방 국민의 정서와 문화 등 정신문화에 대한 이해를 촉진하기 위한 연구다. 이를 위해서 양국 정부가 발 벗고 나서야 할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우선 19세기 중엽 이후부터 1945년까지 약 100년간의 양국 관계사에 대한 대대적인 학술연구를 추진해 철저히 자료에 근거한 객관적이고도 공정한 역사에 대한 시각을 재정립하려는 노력을 시작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지금까지 잘못된 상호이해에서 비롯된 시간과 정력의 낭비를 최대한 줄여나갈 수 있을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진정한 선린우호관계가 싹틀 수 있을 것이다.

    직접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는 (지금까지 거의 시도된 적이 없지만) 서로가 상대국 제작 근현대사 TV 프로그램을 교환 방영하거나, 상대방 국민이 읽을 만한 역사책 등을 상대방 언어로 번역해 상대국의 각급 학교와 도서관 등에 배포하는 등 근본적 대책 수립에 노력한다.

    셋째, 동북아공동체 건설의 추진을 주도한다. 미래지향적인 양국관계 건설을 위하여 한·중·일을 중심(러시아, 몽골 등 포함)으로 하는 동북아공동체 창설을 주창, 역내 통합을 위한 이니셔티브를 취해 이 같은 논의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간다. 특히 한일 FTA 체결을 위한 협상을 조속히 재개, 화해와 동반자로서의 의지를 구체적으로 표명한다. 또한 다양한 분야에서 국제문제 해결을 위해 두 나라가 협조 노력을 배가할 것을 약속한다.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

    물론 과거를 ‘기억’하기 위한 정책도 계속돼야 한다.

    먼저 과거사 청산작업을 위한 진상규명작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한다. 정부는 과거사 관련 일본 정부 및 민간 소장 자료의 공개가 실현될 수 있도록 분위기 조성에 앞장서고, 생존자의 증언을 청취토록 노력한다. 또한 정부가 직접 대규모 학술대회를 열어 논쟁이 되고 있는 각종 역사상 문제들(한일병탄조약에 대한 불법성 논란, 일본군 위안부 강제연행 논란 등)에 대한 객관적 논의를 유도하는 등 역사적 진실 규명을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여나가야 할 것이다.

    둘째, 일본에 대한 직접교육을 시도한다. 일본 정부와 협의(합의)하거나 우리 정부 독자적으로 일본 내에 일제 강점기(태평양전쟁 포함) 박물관(전시관)을 개설하기 위해 노력한다. 독립기념관 등에서 소장하고 있는 각종 자료의 임대 등을 통해 일본 정부가 소홀히 하고 있는 일본 국민의 역사교육을 위한 정책을 수립, 시행한다.

    또한 박물관(전시관) 설치와 병행해 일본 주재 우리 공관(대사관 및 영사관) 시설을 적극 활용, 가칭 ‘일제시대 상설전시관’을 설치해 일본 국민에 대한 상시교육을 시도한다. 그리고 향후 중·장기적 기간을 정해 국내 및 일본 내 저명한 한일 관계사 교수 등 전문가들에 의한 일본 내 역사강연회를 지속적으로 실시해 일본 국민에 대한 직접교육을 시도한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과거사 기억작업을 통한 일본의 자성을 촉구하기 위해 과거 한일 역사 문제에 책임이 있는 미영 등 강대국들에 대해 일본의 바른 역사인식이 동북아 및 세계의 평화·안보에 중요한 관건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고, 유엔 등 국제기구의 진실규명활동에 적극 동참한다.

    필자의 꿈이긴 하지만 우리의 ‘대일 햇볕정책’이 결실을 본다면, 그때서야 비로소 현재의 과거사 갈등(교과서 왜곡 문제, 일본군 위안부 문제, 야스쿠니신사 참배 문제, 독도 문제 등)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될 것이다. 또한 한일관계가 한순간에 가장 좋은 방향으로 진전될 가능성도 있다. 왜냐하면 정치는 생물이며 이는 국제정치에서도 똑같이 적용되는바, 용서와 칭찬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강력한 에너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지만, 필자의 제안처럼 된다면 세계에서 가장 사이좋은 이웃이 되어 지금까지 우리가 겪어보지 못한 미래가 펼쳐질 수 있다. 그때는 더 이상 과거처럼 외세의 침략에 의해 나라의 운명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용서와 관용의 국가 대한민국’으로 명명되어 전세계로부터 존경을 받게 되고, 북한과 일본을 동시에 포용하여 한반도평화체제를 공고히 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동북아공동체를 주도하는 명실상부한 세계의 중심국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아시아의 리더

    현직 외교관의 ‘한일관계 新패러다임’ 제언
    정연택

    1960년 부산 출생

    서울대 사회교육과 졸업, 일본 와세다대 역사학부 수학

    일본 게이오대 법학부 방문연구원

    1991년 외무고시(25기) 합격

    現 외교통상부 외교역량평가단 팀장


    조국 웅비(雄飛)의 그 꿈이 실현되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며, 프랑스 지성 자크 아탈리의 다음과 같은 충고를 새삼 새겨본다.

    “한·중·일 3국을 보다 밀접하게 묶으려는 시도는, 아시아에서 리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중국이나 일본으로부터는 시작되기 어렵다. 중국이나 일본과의 사이에 놓여 있는 한국이 과거 역사나 영토 문제로 인한 현안을 슬기롭게 해결할 수 있다면 중국과 일본이라는 두 경쟁국가를 정치적, 경제적으로 가깝게 만드는 데 견인차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한국은 경제적, 지정학적 상황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으며, 미래에 중심적인 국가로 부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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