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거 전 한인애국단 ‘선서식’을 하고 태극기 앞에서 수류탄과 권총을 들고 기념 촬영을 한 윤봉길 의사. 아래는 일본 내무성 보안과의 ‘윤봉길 폭탄 사건 전말’ 보고서.
독립운동에 헌신하기 위해 이런 비장한 글을 남기고 조국 산천을 떠나 중국 상하이에서 의거를 감행한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1908~1932) 의사. 1932년 4월29일 스물다섯 청년 윤봉길의 상하이 훙커우(虹口)공원(현 루쉰(魯迅)공원) 의거는 당시 이름만 유지하던 임시정부를 되살리고, 한민족의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독립의지를 크게 북돋우는 전기가 됐다.
올해는 그가 태어난 지 100주년(2008년 6월21일)이 되는 해다. 윤봉길의사탄신100주년기념사업회는 ‘도시락 폭탄’ 봉환, 다큐멘터리 제작, 국제학술회의, 전기 발간, 북한 유적지 답사, 윤봉길상 제정, 매헌공헌 추진 등 윤 의사의 뜻을 기리기 위한 다양한 행사를 준비 중이다. 우정사업본부는 6월20일 기념우표를 발행하고, 조폐공사도 ‘한국을 대표하는 인물 100명’에 윤 의사를 포함시켜 4월중 기념메달을 만들 계획이다.
이런 시점에 ‘신동아’는 일본 내무성 보안과가 1932년 7월 작성한 ‘상하이 윤봉길 폭탄사건 전말’ 보고서를 입수한 뒤 추가 취재를 통해 그동안 의거 전의 선서식 날짜와 장소가 잘못 알려져 있었다는 것과 상하이 망명 동기를 최초로 확인했다. 이 보고서는 일본 헌병대가 작성한 것으로 의거 상황, 윤 의사의 경력 및 가족관계, 상하이에 건너간 동기, 의거 경위, 사용한 폭탄 구조 등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김구 선생과의 관계, 윤 의사의 성격 등은 의도적으로 왜곡했다.
윤 의사의 조카인 100주년기념사업회 윤주(尹洲·61) 부회장은 “당시 일본은 윤 의사 의거를 빌미로 독립운동을 더욱 탄압하기 위해 억지로 배후를 캐는 데 집중했다. 그래서 이 문서에선 사실을 왜곡해 백범(白凡)의 교사 또는 사주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했다. 윤 의사는 훙커우공원 행사에 대한 신문기사를 보고 자신의 의지로 백범 선생을 찾아가 의거 결행을 논의했기에 백범은 윤 의사의 ‘협력자’ 정도로 보는 게 옳다”고 설명했다.
이 보고서는 윤 의사의 한인애국단 가입 및 의거 결행 선서식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보여준다. 사단법인 매헌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가 펴낸 ‘매헌기념관 전시도록’ 등 주요 자료에는 선서식이 1932년 4월26일 열렸고, 장소는 대형 태극기가 걸려 있는 거류민단 사무실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내무성 보고서는 26일 윤 의사가 김구 선생을 만나 선서문을 쓴 것은 맞지만 사진 촬영은 날씨 때문에 27일 진행했고, 장소도 거류민단 사무실이 아니라 안공근(安恭根·안중근 의사의 동생) 선생의 집이라고 적고 있다. 다음은 보고서 내용이다.
날씨 탓 선서식 촬영 하루 연기
‘4월26일 윤봉길이 약속대로 사해다관에 갔을 때 김구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 즉시 프랑스 조계의 패륵로 신천상리(新天祥里) 20호의 모 조선인 집(주: 조선인 안공근의 집)에 들어가 사진촬영을 준비했다. 김구는 소형 트렁크에서 태극기 하나, 폭탄 하나, 권총 하나와 선서문을 쓴 서양종이를 꺼내 윤으로 하여금 선서문에 서명토록 했다. 촬영은 날씨 관계로 중단하고 다음날 다시 이 집에 모이기로 약속했다. 또한 그 후 김구는 윤에 대해 다음날인 27일 패륵로의 동방공우에 숙소를 정하도록 말하고 이어서 시라카와 대장, 우에다 중장의 사진 및 보자기 한 장을 구입했다.’
위 내용에서 김구 선생이 미리 선서문을 써와 윤으로 하여금 서명토록 한 것처럼 적어놓았지만 선서문은 윤 의사가 직접 썼다. 내무성 보고서는 또 27일 사진촬영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