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들의 삶에도 이러한 음예공간의 시절이 있다. ‘음예공간예찬’의 미학적인 설명을 얻어 오지 않더라도, 인생의 구름이 마음의 하늘을 덮는 시기가 간헐적으로 찾아온다. 그 음예를 통해 아름다움이 탄생한다.
장편소설 ‘혀’를 읽고, 광화문에서 작가 조경란(趙京蘭·39)을 만나 와인 두 잔을 마시고, 메모하고, 그녀를 먼저 보냈다. 그녀는 신경숙을 만나 종로로 영화를 보러 갔다. 나는 자작나무가 보이는 광화문의 와인집에 홀로 앉자 음예공간을 떠올렸다.
조금 전, 그녀가 앉았던 자리에 떨어져 머문 이야기가 윙윙 귓가를 맴돌았다. 마치 잠자리처럼 날아오르는 음성들, 어떤 것은 눈에 보이기도 한다. 그 순간에 눈에 보이는 음성을 나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촛불이 타오를 때 주변 공기의 결을 떨리게 하는 공기 물결 같다.
그녀는 고등학교 3년과 20대 초반의 5년, 두 시절을 음예의 공간으로 보냈다. 그녀는 이 시절을 어둠으로 보고 다시는 되돌리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거기에는 엷은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건 분명히 음예다. 그 음예의 공간에서 그녀는 물 밖에 나온 물고기처럼 뒤척였던 것이다. 완전한 어둠 속에서는 뒤척일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 그 시절이 오늘의 작가 조경란을 만들었다.
피차 커피에 관심이 있어, 내 친구이기도 한 커피 이야기로 긴장을 풀었다. 그녀는 내내 단정하고 예쁘게 앉아 있었다.
무방비 상태인 여자
좋은 와인을 생산한다는 프랑스 어떤 지역에서는 일부러 포도나무를 척박한 땅에 심는다고 한다. 지표면에 물이 많이 고이고 토양이 좋은 곳에서는 포도나무 뿌리가 지표면의 오염된 물을 빨아들이기에 일부러 거칠고 마른 땅에 심는다. 그러면 뿌리는 살기 위해 더욱 깊이 내려가고, 깊은 곳에서 빨아올린 맑은 물로 좋은 포도 열매를 맺는다. 우리나라에도 ‘비가림 포도’가 있다. 흙에 물이 고이는 것을 농부가 가려줌으로써 포도나무 뿌리가 지표면의 물을 마시지 못하게 한 포도다. 조경란의 음예는 이러한 포도나무와 같았다.
“제겐 청춘이 없었어요. 친구들이 푸른 기운을 내뿜으며 활개를 치고 다닐 때 전 뭘 해야 할지 몰랐고, 그래서 방 안에서 책을 읽었어요. 가끔 광화문 교보문고나 서울대 앞 대학서점에서 책을 사는 게 외출의 전부이던 시절이었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어요.”
5일도 아니고, 5개월도 아니고, 5년을 방 안에 ‘처박혀’ 있었던 그녀. 외로움은 길들지 않는다. 뿌리가 있어 흙이 척박할수록 더욱 깊이 뿌리를 내리는 법이다.
그녀의 외로움은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알 수 없어 하던 그녀에게 찾아온 다정한 손님이었다. 그 손님과 한참 마주 앉아 있었다. 벙어리 같던 손님이 말했다. 책 읽어.
“책 속에 길이 있다고들 하잖아요. 정말로 책 속에 길이 있었어요. 그 시절에 책을 읽어 이 길을 걸을 수 있었어요. 철학책과 심리학책들을 읽곤 했는데, 간혹 문학서적을 읽기도 했지요. 문학은 창작보다 평론을 먼저 읽었어요. 그때 만난 영혼의 멘토가 작고하신 김현 선생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