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트콩 구정(舊正) 대공세 때 시가지 교전 중 생포 ● 생지옥 포로수용소에서 태권도 시범으로 인기 ● 北 강제송환 중 탈출, 캄보디아 국경 스파이 혐의 체포 ● 캄보디아 군형무소 격투시합 제패해 재소자 장악 ● 미 CIA, 한국 정부 개입으로 502일 만에 생환 ● 가난 벗으려 미국행, 수의사에서 태권도 전도사로 ● 합기도·유도 가미한 ‘실전 태권도’로 숱한 도전자 제압 ● 全美동양무술대회에서 띠술·지팡이술, 손가락 송판 격파 시범 ● ‘태권도 대부’ 최홍희 장군의 ‘북한 시범 동행’ 제안 거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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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통계로 본 베트남전쟁과 한국군’에 따르면 참전 한국군 중 3명이 포로가 됐다가 귀환했다. 장교가 한 명이고 병사가 2명이다. 반면 실종자는 모두 8명. 군당국은 이 중 3명을 순직 혹은 전사 처리했다. 나머지 5명 중 3명은 월북(越北), 한 명은 헬기 추락사, 한 명은 현지 탈영으로 추정한다.
국방부 인정 첫 베트남전 포로
박정환(66)씨는 포로 3명 중 유일한 장교 출신이다. 1967년 10월 베트남전에 태권도 교관으로 파견될 당시 최연소 태권도 공인 5단이었다. 이듬해 1월 전투 중 베트콩에게 잡힌 그는 캄보디아 군형무소를 거쳐 1969년 6월 502일 만에 풀려났다. 한국에 돌아와 보니 병적기록부가 말소돼 있었다. 전사 처리된 것이다. 베트남전 사망자와 부상자는 있어도 포로나 실종자는 있을 수 없다는 군당국의 방침 때문이었다. 박씨의 귀환은 군당국이 베트남전 포로를 인정하는 계기가 됐다.
월북 포로 문제도 마찬가지다. 2000년 7월 박씨가 기자회견을 열어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 포로 상당수가 북한으로 끌려갔으며 이 중 9명이 생존해 있다”고 폭로할 때까지만 해도 이 문제는 일종의 금기였다. 박씨의 주장에 대해 “금시초문”이라고 부인하던 국방부는 뒤늦게 월북 포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통계에 넣었다.
박씨의 주장은 미 CIA 문서에 근거한 것이지만, 자신의 체험과도 관련돼 있다. 월맹군에 의해 북한으로 강제 송환되던 도중 탈출을 시도한 전력이 있기 때문. 당시 그는 탈출에는 성공했지만 길을 잘못 들어 캄보디아 민병대에 체포돼 스파이 혐의로 기소됐다.
생지옥 같은 포로생활과 목숨을 건 탈출은 ‘한국판 빠삐용’이라 할 만하다. 그가 오랜 수감생활을 견딜 수 있었던 데는 무술 실력이 한몫했다. 베트콩 포로수용소와 캄보디아 군형무소에 갇혀 지낼 때 그는 태권도 시범과 실전 격투시합으로 인기를 끌었다. 포로 신분으로 베트콩과 재소자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치기도 했다.
군에 복귀한 지 2년 만인 1971년 중위로 전역한 박씨는 미국에 건너가 태권도 보급에 나섰다. 그가 뉴욕의 흑인 밀집지역에 태권도 도장을 차릴 때만 해도 미국인들에게 태권도라는 무술은 낯설었다. ‘코리안 가라데’라는 간판을 내걸고 출발한 그는 숱한 실전 대결을 치르며 태권도의 입지를 굳혔다. 현재 미국에서 그가 운영하는 태권도 도장은 20여 곳. 제자들이 차린 도장을 합하면 60여 곳에 이른다. 그 중 상당수는 미국인 제자들이 차린 것이다. 그동안 그가 길러낸 제자는 10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특기할 점은 박씨가 태권도인이면서 합기도 고수라는 점. 그의 태권도 도장에는 합기도반이 따로 있다. 그가 베트콩 포로 시절 목숨을 건 격투 시합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은 것은 꺾고 밀치고 엎어뜨리는 합기도의 실전적 기술 덕분이기도 했다.
1995년 국기원 승단심사를 거쳐 태권도 9단에 오른 박씨는 미국 플로리다주 한인회장을 역임했다. 사업 목적으로 일시 귀국한 그를 만나 베트남전 비화와 미국 태권도 개척사를 들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