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7월호

‘더 나은 세상을 찾아서’

‘열린 사회와 그 적들’ 저자의 대중 철학 강의

  • 정재영 영국 워릭대 철학박사·사회존재론 seoulforum@naver.com

    입력2008-07-04 15:48: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더 나은 세상을 찾아서’

    ‘더 나은 세상을 찾아서’ : 칼 포퍼 지음, 박영대 옮김, 문예출판사, 424쪽, 1만6000원

    그는 열여섯 살에 학교를 떠났다. 1만 권이 넘는 책이 빼곡하게 꽂혀 있는 집에서 책 읽기를 좋아했던 유대계 소년에게 학교 수업은 지루했다. 그는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에 가입했다. 당시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의 정강은 마르크시즘에 기초했다. 소년은 수납장 만드는 기술을 익혔다. 대학 입학자격시험 대신 기능공 자격시험을 봤다.

    그러나 소년은 공산주의자 몇 명을 만나고 마르크스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후 그는 평생 반(反)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그의 동향 친구 프리드리히 하이예크(Friedrich August von Hayek·1899~1922)와 함께 지난 세기 최고의 자유주의자 전도사로 꼽히는 이 사람은 칼 포퍼(Karl Popper·1902~94)다.

    학교로 되돌아간 포퍼는 비엔나 대학에 입학했다. 당시 비엔나 대학은 모리츠 슐리크(Moritz Schlick·1882~1936)가 이끄는 ‘비엔나 서클’의 심장이었다. 비엔나 서클은 이 세상에 풀 수 없는 수수께끼는 없다고 선언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과학이다.

    콕 집어서 이야기하면, 경험과 논리분석을 결합한 귀납적 경험 과학이다. 전문적인 철학 용어로 말하면 ‘검증가능성(verifiability)의 원리’다. 참인지 거짓인지 검증할 수 없는 모든 진술은 무의미하기 때문에 과학의 세계에서 추방시키고, 검증 가능한 진술만을 귀납적 방법에 의해서 참과 거짓을 가려낸다는 것이다. 비엔나 서클의 철학적 주장은 흔히 논리 실증주의, 또는 신실증주의라고 불린다.

    포퍼는 검증가능성의 원리에 반대했다. 그 대신 ‘반증가능성(falsifiability)의 원리’를 내세웠다. 검증가능성과 반증가능성의 차이는 귀납적 방법이 과연 완벽하게 진리로 인도하는 방법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비엔나 서클은 그렇다고 말한다. 반(反)귀납주의자인 포퍼는 아니라고 말한다.



    포퍼는 과학이 지금까지 우리가 획득한 지식 중에서 가장 신뢰할 만한 지식이지만, 과학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만능 키가 아니며, 과학적 진리가 무오류성을 갖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래서 포퍼는 모든 것을 과학으로 풀 수 있다고 믿는 과학주의자가 아니라고 논리 실증주의와 선을 긋는다. 그는 모든 이론은 하나의 가설이라는 뉴튼의 말에 공감을 표시한다.

    깊은 경륜 돋보이는 대중 철학서

    칼 포퍼를 대중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책은 아무래도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꼽아야 한다. 이 책은 반마르크스주의자이며 자유주의자로서의 칼 포퍼의 면모가 물씬 드러나는 책이다.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요약했다고 할 수 있는 ‘역사주의의 빈곤’도 이러한 계열의 책이다.

    철학의 역사에서 보면 칼 포퍼는 과학철학자로 자리매김하는 게 더 맞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주저로는 ‘탐구의 논리’를 꼽아야 한다. 그러나 과학철학 계통의 책은 일반인이 접근하기에는 녹록하지 않다. 그래서 보통 과학철학자로서의 칼 포퍼는 논리 실증주의의 사촌쯤에 해당하는 실증주의의 아류 또는 변종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번에 우리말로 번역된 ‘더 나은 세상을 찾아서’는 칼 포퍼의 주저는 아니다. 그가 여러 곳에서 했던 강연과 글 16편을 한 권의 책으로 묶은 것이다. 지식인 일반을 대상으로 하는 기념 강연이다 보니 치밀한 논증보다는 깊은 경륜이 더 돋보인다. 개인적 경험도 중간 중간에 슬쩍 흘리고, 때로는 전문적인 철학 논문에서는 펼치기 힘든 용감한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그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다.

    그렇다고 ‘더 나은 세상…’이 신변잡기식 한담, 또는 노년에 접어든 철학자가 자신의 생각을 짧게 요약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해다. 군인은 장군이 되면 병과가 없어지듯이 학자도 대가가 되면 전공 구분이 큰 의미가 없어진다. 이를 거꾸로 말하면, 대가의 이야기는 전공 구분 없이도 들을 수 있고, 읽을 수 있고, 그 요체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철학 책이다.

    포퍼의 글은 간결하다. 주장도 선명하고 직설적이다. 여기서도 이러한 포퍼 철학의 특징이 그대로 드러난다. 포퍼 자신도 인정하는 점이지만, 이러한 명료성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는 “마르크스와 레닌이 간단명료하고 직설적인 방식으로 글을 썼다는 것을 인정한다.” 포퍼가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비엔나 서클 철학자들의 글도 간결하고 명료하다.

    그들에게는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더 나은 세상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마르크스와 비엔나 서클은 그것을 공개 선언했다. 마르크스는 1848년 그의 평생 동지 엥겔스와 함께 공산주의가 더 나은 세상이라는 유명한 ‘공산당 선언’을 했다. 비엔나 서클은 1929년 과학적 세계관이 학문의 발전과 인류의 진보를 약속한다는 ‘비엔나 선언’을 했다. 마르크스가 제시한 공산주의 설계도에 반대하고, 비엔나 서클이 주창한 과학적 세계관 설계도에 이의를 제기한 포퍼도 더 나은 세상을 향한 꿈을 노래한다. 마르크스주의와 실증주의처럼 과학을 신뢰하고, 세계의 발전을 믿으며, 합리적 이성을 중시한다.

    포스트 모더니즘 철학 비판

    더 나은 세상을 꿈꾸지 않는 철학자가 있느냐고? 아마 그런 철학자는 드물겠지만, 과학이 오만하며, 우리가 사는 세계는 결코 합리적이지 않으며, 그리고 근대 합리주의를 탄생시킨 이성은 죽었다고 보는 이는 많다. 더 나은 세상을 기획한 근대의 꿈은 허구라고 지적한 철학자는 일일이 거론할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래서 더 나은 세상을 꿈꾼 근대의 기획서에서 사용된 키 워드, 예를 들어 과학, 이성, 진리 등을 무용지물로 만들고 새로운 판을 짜는 이도 많다. 이른바 포스트 모더니즘 철학이다.

    포퍼는 이들을 ‘비합리주의자’ 또는 ‘상대주의자’라고 부르며 지난 20세기를 비합리주의가 유행한 시대라고 진단한다. 그리고 자신을 마지막 남은 계몽주의자라고 부른다. 서구 합리주의 전통을 이어받은 마지막 철학자라고 자부한 것이다.

    ‘더 나은 세상…’에는 두 개의 보너스가 있다. 하나는 포퍼와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대표하는 아도르노 및 하버마스 사이에 있었던 ‘실증주의 논쟁’ 또는 ‘실증주의자 논쟁’에 대한 포퍼의 견해다. 그러나 이 논쟁은 사실 논쟁의 기본 조건조차 갖추지 못하고 겉돈 논쟁이다. 같은 언어(독일어)를 사용하고 같은 시대를 산 철학자 사이에서도 패러다임이 다르면, 소통이 쉽지 않다는 점을 여기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서로의 말에 제대로 귀 기울이지 않고 각자 하고 싶은 말을 했을 뿐이다.

    또 하나의 보너스는 포퍼가 말년에 내놓은 ‘세계 3’에 대한 이론이다. 물질의 세계인 ‘세계 1’, 경험의 세계인 ‘세계 2’, 그리고 이에 대한 ‘생각의 세계’가 세계 3이다. 포퍼는 이 모든 세계가 실재한다고 주장한다. 포퍼 철학을 지지하는 학자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한 ‘세계 3 이론’에 대해서 이 짧은 서평란을 통해서 자세히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여기서는 간략하게 두 가지만 지적하자. 첫째는 다윈주의의 영향이다. 포퍼는 세계 1에서 세계 2, 그리고 세계 3이 시간의 순서대로 탄생했다고 주장한다. 그 원리를 포퍼는 다윈이 사용한 ‘자연 선택’ 이론으로 설명한다. 세계 3은 세계 2에서 발생한, 그러나 질적으로 다른 속성을 가진 것이라고 포퍼는 주장한다. 포퍼는 이것을 ‘창발(emergence)’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둘째는 세계 3의 존재 자체가 세계가 발전한다는 하나의 증거로 보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포퍼는 이 책의 서문에서 말한다.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든 생물체는 더 나은 세상을 찾아본다.’ 포퍼의 이 말은 이 책의 제목 ‘더 나은 세상을 찾아서’가 되었다.

    우리 말 번역은 깔끔하다. 낯선 용어 또는 독자가 어렵다고 여길 만한 대목에는 어김없이 역자의 주를 달았다. 정성을 쏟은 번역임을 알 수 있다. 포퍼 철학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꼭 읽어볼 만한 책이다. 그러나 처음 포퍼 철학을 접하는 이들에겐 역시 포퍼 초기 저작이 더 낫다고 본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