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7월호

오천일 살부(殺父)사건

패륜 삼대(三代), 법의 심판에 앞서 천벌을 받다

  •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입력2008-07-07 14: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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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만여 평의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 오명보가 살해됐다. 그는 살해당하기 몇 달 전까지 면장으로 일했다. 소작료를 가혹하게 징수해 원성을 샀고, 면장도 벼슬이라고 거드름을 피우다 인심을 잃었다. 엄청난 재산으로 고리대금을 일삼다가 이웃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네 명의 첩을 거느리는 것도 모자라 수시로 젊은 아낙네들을 농락해 물의를 일으켰다. 금품 관계, 치정 관계가 난마처럼 얽혀 있었다. 그의 아들 오천일이 피의자로 지목돼 재판을 받았다. 1심에서 무기징역, 2심에선 무죄 판결. 그러나 3심에서 결국 사형을 선고받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오천일 살부(殺父)사건

    오천일 관련 사건 동아일보 기사들. 일제 강점기 재판은 1심 지방법원, 2심 복심법원, 3심 고등법원 순으로 진행됐다.

    1929년 7월22일. 자정이 지나도 찜통 같은 무더위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쉰다섯 초로의 전직 면장 오명보는 네 번째 첩 김씨와 함께 평양 교외 대동군 율리면 고래등 같은 기와집 안채에서 문이란 문은 모조리 열어젖힌 채 모기장만 쳐놓고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다. 새벽 2시, 검은 복면을 쓴 괴한이 오명보의 집 담장을 넘어 들어왔다. 괴한은 대문 빗장을 열어두고 주인 내외가 자는 안채로 조용히 다가갔다.

    “애고머니!”

    인기척에 눈을 뜬 김씨가 놀라 소리쳤다. 괴한이 품에서 시퍼렇게 날이 선 식칼을 빼어들고 모기장을 향해 돌진했다. 김씨는 남편을 깨울 겨를도 없이 모기장을 빠져나와 괴한이 달려드는 쪽과 반대 방향으로 문지방을 넘어 달아났다.

    “으악…으악…악…악…아…으….”

    맨발에 옷고름 풀린 속옷 차림으로 마당을 가로지르던 김씨의 등 뒤에서 나이든 남자의 비명이 들렸다. 김씨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별채를 향해 내달렸다. 별채에는 오명보의 큰아들 오천일이 두 번째 첩 하복녀와 함께 자고 있었다. 오천일은 평양에서 정미소를 경영했는데, 어쩐 일인지 몇 달 전 고향에 돌아와선 그대로 눌러앉았다.



    “천일이! 이봐, 천일이!”

    오천일이 눈을 비비며 방문을 열고 나왔다. 서른다섯 살의 오천일은 김씨보다 네 살이나 많았지만 아버지의 애첩을 깍듯이 대했다.

    “작은어머니가 이 시간에 웬일이세요?”

    “가…가…강도가 들었어!”

    김씨가 숨을 헐떡거리며 간신히 말을 맺었다. 오천일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아버지의 안부부터 물었다.

    “아버님은요? 아버님은 어떻게 되셨어요?”

    어린 서모(庶母)는 난처한 듯 고개를 숙이고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쳤다. 오천일은 대청 기둥에 걸어둔 낫을 들고 안채로 달려갔다. 안채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괴한은 이미 달아났고, 오명보는 마구 찢긴 모기장을 뒤집어쓰고 검붉은 선혈을 흘리며 널브러져 있었다.

    “아버지! 아버지!”

    오천일은 핏덩어리가 된 아버지의 육신을 부둥켜안고 오열했다.

    미궁에 빠진 살인사건

    “젠장, 도대체 이 인간은 인생을 어떻게 산 거야!”

    평양경찰서 사법주임 고야마(小山) 경부가 살해당한 오명보의 원한 관계 보고서를 들척이다가 책상 위에 거칠게 내던지며 분통을 터뜨렸다. 친인척 몇 명을 제외하곤 율리면 주민 태반이 오명보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다. 오명보는 율리면 일대 5만여 평의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였고, 살해당하기 몇 달 전까지 그곳 면장으로 일했다. 소작료를 가혹하게 징수해 원성을 산 데다, 면장도 벼슬이라고 거드름을 피우다 인심을 잃었다. 수십만원에 달하는 재산으로 고리대금을 일삼다가 이웃들에게 미움을 받았고, 네 명의 첩을 거느리는 것도 모자라 수시로 젊은 아낙네들을 농락해 물의를 일으켰다. 금품 관계, 치정 관계가 난마처럼 얽혀 있었다.

    오천일 살부(殺父)사건

    1심과 2심 재판이 열린 평양지방법원과 평양 복심법원.

    “혹 단순 절도범의 소행은 아닌가?”

    수사 상황을 보고하러 온 전규태 경부보에게 고야마 경부가 물었다.

    “그럴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오명보의 집 안방에는 수천원 상당의 현금과 패물이 흩어져 있었지만, 범인은 일원짜리 지폐 한 장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가슴을 7번이나 찌른 것을 보면 원한에 의한 살인이 분명합니다.”

    “범행 도구는 찾았나?”

    “아직….”

    “사건이 발생한 지 사흘이 지났는데 뭣들 하고 있는 거야? 당장 범행에 사용된 식칼부터 찾아와!”

    고야마 경부가 결재서류로 책상을 내려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전규태 경부보는 수사대를 총동원해 범행 장소 30리 이내 지역을 이 잡듯 뒤졌다. 못과 저수지의 물을 퍼내 바닥을 살폈고, 율리면 일대 모든 가구를 호구 조사했다. 하지만 범행에 사용된 식칼도, 뚜렷한 혐의점을 지닌 용의자도 발견하지 못했다.

    오명보의 장례가 진행된 사흘 동안, 맏상제 오천일은 잠시도 눈을 붙이지 않고 빈소를 지켰다. 밤낮으로 곡을 하다가 수시로 아버지를 부르며 오열했다. 조문객들은 오명보가 세상인심은 잃었어도 자식 하나는 잘 뒀다고 칭찬했다. 장례가 끝난 후 오천일은 아버지 소유의 율리면 일대 5만여 평의 토지를 상속받았고, 얼마 전 자신이 아버지 명의로 일본생명보험회사에 들어둔 생명보험 2만원을 수령했다.

    경찰은 몇 달을 두고 떠들썩하게 수사를 벌였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수사가 제자리걸음을 하는 동안, 오천일은 상속받은 토지 대부분을 매도하거나 저당잡혔고, 자신이 경영하던 정미소마저 팔아치웠다. 사건은 점차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갔다.

    “무서워서 못 살겠다”

    1932년 2월, 장의걸의 어린 아들이 물에 빠져 죽었다. 저수지 빙판에서 썰매를 타고 놀다가 봄기운에 녹은 빙판이 깨져 그만 사고를 당한 것이다. 장의걸은 오천일의 외가 쪽으로 먼 친척이면서 오천일이 경영하던 강남정미소의 고용인이었다. 마흔한 살로 오천일보다 세 살 많았지만 고용인 대 피고용인 관계인데다 어려서부터 한동네에서 자랐기 때문에 서로 말을 트고 지냈다.

    하나뿐인 아들을 잃은 장의걸은 매일같이 술잔을 기울이며 신세를 한탄했다. 그의 아내 추학순은 폐경이 지나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었다. 애지중지 키우던 외아들을 잃은 것도 슬픈 일이지만, 대가 끊어지게 된 것이 더 비통한 일이었다. 오천일은 3년 전 아버지가 살해당한 이후 무슨 이유에선지 장의걸과 자주 다투고 사이도 멀어졌지만, 아들을 잃은 장의걸을 깊이 동정하며 수시로 만나 위로했다.

    하루는 장의걸이 오천일과 술을 마시고 밤늦게 귀가했다. 죽은 아들을 그리워하며 울고 있던 추학순이 남편에게 버럭 목에 핏대를 세워 대들었다.

    “내가 너와 자식까지 낳고 살지만 사람 죽인 놈하곤 더 이상 무서워서 못 살겠다.”

    “아니, 뭐라고?”

    “아비가 사람을 죽이니 자식이 대신 벌을 받아 죽은 게 아니냐?”

    “누가 듣겠소. 그 이야기는 다시는 입 밖에 내지 말라고 하지 않았소.”

    장의걸이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고 흥분한 아내를 타일렀다.

    “아이고, 사람 죽인 놈이 감옥소 가기는 싫은 모양이지?”

    장의걸 부부는 밤새 동네가 떠나갈 듯 언성을 높여 싸웠다. 부부싸움은 날마다 이어졌고, 이웃들은 장의걸이 사람을 죽였다고 수군거렸다. 하루는 추학순과 같은 교회에 다니는 여신도 이경재가 추학순에게 조용히 물었다.

    “도대체 어찌된 일이야? 당신 남편이 사람을 죽였다고 동네에 소문이 자자한데.”

    오천일 살부(殺父)사건

    3심 재판은 경성의 고등법원에서 열렸다.

    추학순이 한참 고민하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내 임자에게만 털어놓을게. 대신 비밀은 꼭 지키는 거야. 글쎄 우리 서방이 3년 전 오천일에게 부탁을 받고 오명보를 식칼로 찔러 죽였어. 오천일이가 직접 찾아와 그러더라고. 우리 서방도 인정했고. 불쌍한 우리 아이가 아비 대신 벌을 받아 죽은 거야.”

    아이 이야기가 나오자 추학순이 목을 놓아 울었다.

    이경재는 비밀을 지키겠다고 다짐했지만, 소문은 삽시간에 율리면을 넘어 평양까지 퍼졌다. 소문은 급기야 3년 동안 범인의 뒤를 쫓고 있던 평양경찰서 고야마 경부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1932년 7월, 고야마 경부는 오천일과 장의걸의 집으로 수사대 수십명을 급파했다. 하지만 장의걸은 4월, 오천일은 6월 각각 집을 나간 후 연락이 끊긴 상태였다.

    평양까지 퍼진 소문

    고야마 경부는 사건 발생 직후부터 오천일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지만 증거를 찾지 못해 체포하지 못했다. 하지만 오천일이 공범과 함께 도주한 이상 범행을 시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경찰은 오천일에게 연락이 올 때까지 그의 가족을 감시했다. 허랑방탕한 오천일은 도주할 때 가지고 간 돈으로는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고, 돈이 떨어지면 가족에게 연락을 취할 게 분명했다.

    그해 9월, 오천일이 하얼빈에서 돈을 보내라는 편지를 본처 앞으로 보냈다. 고야마 경부는 하얼빈으로 수사대를 급파해 오천일을 체포했다. 경찰은 사건 개요를 이렇게 설명했다.

    오천일은 평양 부내 선교리에서 강남정미소를 경영하다가 실패한 후 친부 오명보에게 금전을 청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친부의 많은 재산과 친부 명의로 가입한 생명보험금 2만원에 눈이 멀어 정미소 고용인 장의걸에게 오명보를 죽여주면 6000원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1929년 7월22일 새벽 2시, 장의걸은 첩 김씨와 모기장 속에서 자고 있던 오명보를 식칼로 찔러 죽였다. 오천일이 100원만 주고 약속했던 6000원의 지급을 차일피일 미뤄 장의걸은 불만이 컸지만 살인한 몸이라 달리 해결할 방법이 없어 몇 해 동안 시치미를 떼고 지냈다. 오천일은 친부의 죽음을 내심으로 기뻐하면서 초상을 치르고 친부의 유산을 마음대로 처분해 미두와 주색잡기로 모두 탕진했다.(‘실부 살해사건 속보’, ‘조선일보’ 1932년 11월30일자)


    그러나 오천일을 체포했다고 해서 3년 넘게 미궁에 빠진 살인 사건이 종결된 것은 아니었다. 경찰은 사흘에 한 번씩 검속 기간을 연장해가며 강도 높게 문초했지만 오천일은 좀처럼 범행을 자백하지 않았다. 공범 장의걸의 행적 역시 오리무중이었다.

    3차례에 걸친 신문에서 초지일관 범행을 부인하던 오천일은 11월23일, 4번째 신문에서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

    유일한 증거는 자백

    오천일은 이미 범행을 자백했다고 하는데, 증거라고는 자백뿐이요 도무지 움직일 수 없는 물적 증거가 없어 평양경찰서에서는 그물에 걸린 고기를 처치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래서 사건 해결의 유일한 열쇠인 공범 장의걸의 소재를 팔방으로 찾고 있다. 오천일의 자백에 의하면 장의걸은 자기보다 먼저 만주로 도주해 노령으로 갔다고 하나 그 이후의 종적이 지금까지 판명되지 않았다. 결국 장의걸이 살아 있는 한 언제나 자기에게 공포와 불안을 주는 존재라 하여 오천일이 만주에 가서 장의걸마저 죽여 버리지 않았나 하는 것이 지금 평양경찰서에서 문초하고 있는 내용이라고 한다.

    오천일은 범행을 자백한 후 유치장에서 자살을 도모했다. 그는 죽는다고 하면서 머리가 깨어지라고 유치장 벽에 머리를 부딪쳐 앞이마가 깨어지면서 유치장 속에 피가 흩어졌다. 오천일은 뇌진탕이 일어나 기절했지만 경찰이 즉시 응급조치를 취해 회생하고 상처는 지금 완치되었다. 경찰은 그가 아비 죽인 죄로 양심의 고통을 견디지 못해 자살을 도모한 것이라 보고 있다.

    오천일은 아비의 생명보험금 2만원을 위시해 전가족의 보험금 11만2000원을 전부 사취하기 위해 온 가족을 자살 혹은 독살할 무서운 음모마저 꾸민 혐의도 있다.(‘친부살해 피의사건’, ‘동아일보’ 1932년 12월16일자)


    오천일은 자살 시도 후 또다시 범행을 부인했다. 10차례에 걸친 피의자 신문에서 제4회와 제6회 신문에서만 범행을 자백하고 나머지 8차례의 신문에서는 범행을 완강하게 부인했다. 1933년 1월21일, 경찰은 오천일을 검거한 지 4개월 만에 존속살인 및 사기죄로 검사국에 송치했다. 열흘 후 하시모토(橋本) 검사는 평양지방법원에 예심을 청구하고, 신병이 확보되지 않은 장의걸에게는 기소중지 처분을 내렸다.

    오천일이 일관되게 범행을 부인하고 어떠한 물적 증거도 없어 예심은 1년 4개월 동안 지루하게 이어졌다. 고시오(越尾) 예심판사는 부족한 물증과 확실한 심증 사이에서 고민하다 1934년 5월30일, 오천일이 경찰 신문에서 두 차례 범행을 자백한 것을 이유로 유죄를 인정하고 정식 재판에 회부했다.

    희대의 ‘보험마(保險魔)’

    오천일 살부(殺父)사건

    조선중앙일보 1936년 6월27일자에는 ‘오천일이 처분한 재산반환청구 소송 재판’소식이 보도됐다.

    1934년 7월5일, 평양지방법원에는 아침부터 방청객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오천일의 존속살인 및 사기사건 공판이 거행될 제1호 법정은 방청석이 50여 석에 불과해 방청을 신청한 일반인은 대부분 입장을 거부당하고 법정 부근을 배회했다. 방청석에는 오천일의 누이, 고모, 본처, 장모 등이 보였고, 대동경찰서와 평양경찰서 사법주임, 오천일과 보험금 반환소송을 진행하고 있는 일본생명보험회사 직원 등도 눈에 띄었다. 이와기(岩城) 검사와 주간흠·오숭은 변호사는 긴장된 표정으로 공판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피고인 오천일은 2년 가까운 미결 생활에도 불구하고 막 공사판에서 달려온 노동자처럼 건강해 보였다.

    11시50분, 고바야시(小林) 재판장은 개정을 선언하고 곧장 피고인 심문에 들어갔다.

    “피고인은 친부 오명보의 유산과 생명보험금을 사취하고자 장의걸을 시켜 오명보를 살해하고 그 사실이 발각되자 만주로 도주했다는 공소사실을 인정하는가?”

    통역이 조선어로 옮기자 오천일은 우렁찬 목소리로 답변했다.

    “그런 사실 없습니다. 억울합니다, 재판장님.”

    “피고인은 1924년 오명보에게 10만원을 받아 평양부 선교리에 강남정미소를 차리고 운영하다가 2만원의 손해를 보고, 손실을 만회하고자 미두 투기에 손을 대 또다시 7000원의 손실을 보았다지?”

    “예.”

    오천일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변했다.

    “피고인은 오명보가 죽은 후에도 미두 투기로 수만원의 손해를 보았다는데?”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피고인은 왜 그처럼 재정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3500원이란 거액의 보험료를 들여 아버지 오명보를 위시해 첩 심봉녀와 하복녀, 누이 오일성, 아들 오진하, 심지어 너희 집 서사 명의로까지 총 11만2000원에 달하는 거액의 생명보험에 가입했나?”

    “재판장님이 보험을 잘 몰라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투자로 치면 보험만한 것이 없지요. 피보험자가 죽으면 보험금을 받아 장례나 치러주면 나머지는 죄다 수익자 차지가 되는데 그 좋은 것을 왜 안 합니까.”

    방청석에서 “저 자식 보험마(保險魔) 아니야!” 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남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까?”

    재판장이 또다시 정숙하라고 주의를 주고 심문을 이어갔다.

    “1932년 6월, 피고인은 무엇 때문에 만주로 도주했나?”

    “부채가 많아 채권자들의 닦달이 심했습니다. 일단 소나기는 피하고 보자는 심정으로 친구 김병주에게 재산정리를 부탁하고 만주로 피신한 것이지 경찰을 피해 도주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만주에서는 무엇을 했나?”

    “아편 장사를 하려 했으나 경찰에 체포되는 바람에 하지 못했습니다.”

    재판장이 갑자기 말을 돌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처럼 재정이 곤란에 처하자 보험금을 사취하고자 장의걸을 모란봉에 데리고 가서 보험금 2만원 중 6000원을 줄 테니 아버지를 죽여 달라고 하며 착수금 명목으로 10원을 주어 식칼과 손전등을 사게 한 것이 아니냐? 그래 가지고 1929년 7월22일 밤 율리면 자택에서 자고 있던 오명보를 찔러 죽인 것이지?”

    “아닙니다.” 하고 오천일은 간단히 그러나 힘 있게 부인했다.

    “그러면 어찌하여 경찰에서는 그렇게 자백했나?”

    “경찰이 심한 고문을 하니 아버지를 죽인 게 아니라 그 이상의 짓이라도 했다고 자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만일 고문 때문에 거짓 자백을 한 것이라면 전후 10회의 문초를 받는데 10회 모두 범행을 저질렀다고 시인할 것이지 제4회와 제6회 두 번만 시인하고 제7회부터 제10회까지는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다시 부인한 것은 어찌된 까닭인가. 그때도 고문을 했을 텐데.”

    “제7회 이후 부인한 것은 흉기 등 증거품을 내놓으라고 하는데 암만 거짓말을 하려 해도 할 수가 있어야지요. 할 수 없이 또 부인했습니다.”

    “피고인이 경찰서에서 자살하려다 못하고 그 다음 문초받을 때 자살하려던 이유로 ‘아버지 죽인 죄를 자백한 이상 무슨 낯으로 살겠소. 차라리 죽으려 했습니다’고 했다는데 그것이 너의 본심이 아니었던가?”

    “아닙니다. 그저 경찰에게 둘러댄 것입니다.”(‘의문의 弑父 사건(1)’, ‘조선중앙일보’ 1934년 7월7일자)


    재판장은 고삐를 늦추지 않고 계속해서 몰아붙였다.

    “추학순이 경찰서, 검사국, 예심정에서 일관되게 진술한 바에 의하면, 어느 날 피고인이 추학순을 찾아와서 ‘만일 이 일이 경찰에 발각돼 문초를 받게 되거든 우리 부친과 당신이 간통하는 현장을 남편 장의걸이 발견하고 분김에 죽였다고 해주면 6000원을 주겠다’고 사정했다는데?”

    “그런 사실 없습니다.”

    “추학순이 아들을 잃은 후 장의걸과 크게 싸우고 이혼하겠다며 피고인을 찾아와 50원을 꾸어달라고 했더니 피고인은 200원 수표를 써주지 않았나?”

    재판장이 검사가 증거품으로 제시한 수표를 보여주며 질문을 이어갔다.

    “이 수표는 피고인이 추학순에게 약점이 잡혔기 때문에 써준 것이 아닌가?”

    “모두 그 여자의 거짓말입니다. 돈은 사업자금으로 빌려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추학순은 기독교 신자로 거짓말을 하지 않고 또 피고인과 사이도 나쁘지 않다고 하니 남의 생명이 달린 거짓말을 할 까닭이 없지 않은가?”

    “글쎄 남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까?”

    오천일은 간단히 답변할 뿐 굳이 변명하려 들지 않았다. 입회한 오숭은 변호사는 기가 막힌 듯 부채로 책상을 쳤고, 참다못한 오천일의 고모가 벌떡 일어서며 “방청하는 사람도 말 좀 하게 해주오” 하고 무슨 말을 하려다가 법원경찰에게 제지당하고 법정 밖으로 끌려나갔다. 소동이 정리되자 재판장이 심문을 이어갔다.

    가짜 차용증서

    “오명보가 죽은 후에 피고인이 친구 김한성더러 8000원짜리 가짜 차용증서를 써달라고 한 것은 무슨 까닭이냐? 이는 생명보험 2만원쯤은 우습게 여길 만큼 재산이 많은 것처럼 가장하려 했던 것이 아닌가?”

    “경찰이 장부 조사라도 하면 미두 투기로 손해를 입은 것이 발견될 텐데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그랬습니다.”

    “경찰이 장부는 왜 조사해?”

    “혹시 내가 생명보험금을 타내려고 아버지를 어떻게 하지 않았는지 의심해서…….”

    “그럼 너도 그런 의심을 받을 만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로구나?”

    재판장이 중요한 단서를 잡은 듯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것으로 재판장의 심문이 끝나고 검사와 변호인의 보충심문이 이어졌다. 주간흠 변호사는 보충심문을 마친 후 ‘추학순은 기독교 신자라고 하나 교단에서도 아주 평판이 나쁘고 거짓말을 잘 한다고 하니 추학순이 다니는 교회 황보덕삼 목사를 증인으로 채택해달라’고 신청했다. 재판장은 변호인의 증인 신청을 승인하고 오후 2시40분 폐정을 선언했다. 퇴정당한 오천일의 고모에게 무슨 말을 하려 했느냐고 기자가 묻자 오씨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글쎄 재판장이 추학순이가 왜 그런 거짓말을 하겠느냐고 물을 때 그 애가 아무 말도 못하니 그런 답답한 일이 있소. 그년이 그런 거짓말을 한 데는 다 까닭이 있습니다. 그년의 아들이 물에 빠져 죽었을 때 그 애비 장의걸이가 술 먹고 자꾸 통곡을 하니까 천일이가 위로하느라고 ‘그렇게 서러워 할 것이 있느냐? 지금 아내가 폐경이 지나 아이를 못 낳으면 첩을 얻으면 그만이 아니냐?’ 했다지 뭐요. 그래 자기 남편 보고 첩 얻으라고 부추겼다고 그년이 천일이를 죽도록 미워한답니다. 그래서 그런 거짓말을 한 것이지요.” (‘의문의 弑父 사건(3)’, ‘조선중앙일보’ 1934년 7월9일자)


    공판은 7월12일 오후 2시 평양지방법원 제7호 법정에서 속개됐다. 아침부터 방청객이 몰려들어 방청석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고바야시 재판장은 장의걸 부부에게 집을 세 준 이경순부터 증인 심문했다.

    “장의걸 부부가 세 들어 사는 동안 부부 사이가 어떠했는가?”

    “매일같이 동네가 떠나갈 듯 시끄럽게 싸웠습니다.”

    “추학순의 평소 소행에 대해 아는 대로 정직하게 말하라.”

    “추학순은 예수교를 믿는다 하나 거짓말을 잘하고 정신병자 같아 보이는 믿을 수 없는 여자입니다.”

    이어 재판장은 추학순을 증언대에 세웠다. 추학순이 눈치를 보지 않고 증언할 수 있도록 재판장은 오천일을 잠시 퇴정시켰다.

    “증인은 장의걸과 어떻게 만났나.”

    “저는 경상도에서 태어나 열다섯 살 때 문둥병자에게 시집을 갔다가 도망쳤습니다.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 뚜쟁이의 꾐에 빠져 평양 유곽으로 팔려왔습니다. 그곳에서 장의걸을 만나 살림을 차렸습니다.”


    추학순의 애매한 증언

    “증인과 장의걸의 사이는 어땠나.”

    “제가 예수 믿는 것을 남편이 싫어해 평소 갈등이 심했습니다. 어린 아들이 물에 빠져 죽은 이후에는 남편과 헤어질 생각으로 잠자리를 거부해 더욱 사이가 나빠졌습니다.”

    “1931년 6월24일 오천일이 증인을 찾아와서 ‘만일 우리 아버지가 살해당한 사건으로 경찰의 문초를 받게 되거든 당신과 우리 아버지가 간통하는 현장을 남편이 발견하고 분김에 죽였다고 그래주면 장의걸은 6년가량 징역을 살 따름이고 당신에겐 내가 6000원을 사례비로 줄 테니 부탁한다’고 당부하고 돌아갔다고 증인은 일관되게 진술했지?”

    “그런 부탁을 들은 것은 사실이나, 오천일과 남편이 정말로 범행을 저질렀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하였던가?”

    “처음에는 충격을 받아 들어주겠다고 했지만 나중엔 그럴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예심정에서 증인은 여러 번 오천일이 부탁했지만 거절했더니 오천일이 ‘그렇게 매정하게 거절하면 나도 죽고 당신 남편도 죽는다’고 했다고 증언하지 않았나?”

    “잘 기억이 안 납니다.”

    “증인이 경상도 본가에 간다고 해서 오천일에게 200원 수표를 가져다 50원은 증인이 가지고 150원은 남편에게 맡겨 오천일에게 주게 한 일이 있지 않은가?”

    “그런 일이 있습니다.”

    “그 돈 50원은 오천일이가 부탁한 일도 있고 해서 그 대가로 얻은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다.”

    “1932년 4월5일 증인은 남편과 싸우고 집을 나가 남편의 형 장신걸의 집에서 10여 일 묵은 일이 있는가?”

    “네 그렇습니다.”

    “그때 그 동네 사는 이경재에게 우리 남편이 오천일에게 돈 6000원을 받고 오명보를 죽였다고 한 일이 있지 않은가?”

    “말한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천일은 동네에서 효자라고 소문난 이로 그리하였을 리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언제 남편이 사라진 것을 알았는가?”

    “4월7일 집을 나간 것만 알지, 어디로 갔는지는 전혀 모릅니다.”(‘시부범 오천일 공판기’, ‘동아일보’ 1934년 7월15일자)


    추학순은 방청석에 앉아 있는 오천일의 친척들 눈치를 살피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증언했다. 재판장은 추학순의 증인 심문을 마치고 오천일을 다시 법정으로 불러 심문했다.

    “추학순은 피고인이 오명보를 살해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피고인이 그와 관련해 거짓 진술을 해달라고 부탁한 것은 확실하다고 한다.”

    “그런 부탁 한 적 없습니다.”

    오후 4시10분 재판장은 증인 심문을 마치고 폐정을 선언했다. 증인으로 채택된 황보덕삼 목사는 그날 공판에 출정하지 않았다.

    1심 무기징역, 2심 무죄

    7월17일 오전 11시, 평양지방법원 제1호 법정에서 결심공판이 열렸다. 이와기 검사는 ‘피고인이 법정에서 범죄 사실을 부인하지만 경찰 조사에서 두 차례 자백한 바 있다. 경찰의 수사가 시작되자 만주로 도주했고, 사건 전후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아버지와 가족 명의로 거액의 생명보험에 가입했다. 추학순의 증언 등으로 볼 때 피고인이 아버지의 유산과 보험금을 노리고 장의걸을 사주해 오명보를 살해한 것이 분명하다. 이처럼 범죄 사실이 확실함에도 피고인은 부인으로 일관하고 반성하는 빛을 보이지 않아 엄벌에 처할 수밖에 없다’며 사형을 구형했다.

    주간흠 변호사는 ‘피고인이 자백한 것은 경찰의 고문에 의한 것이고, 만주로 도주한 것은 미두 투기에 실패해 만주에 가서 아편 장사라도 할 생각 때문이었다. 거액의 생명보험에 가입한 것은 아버지의 생명보험금 2만원을 수령한 후 보험회사 직원의 권유에 따랐을 뿐이다. 추학순은 정신이상자로서 증언을 신뢰할 수 없는 데다가 그런 추학순조차 피고인이 아버지를 살해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증언했다’며 1시간30분 동안 검사의 논고를 조목조목 비판하고 무죄를 주장했다.

    7월24일 오전 11시 개정한 선고공판에서 고바야시 재판장은 유죄를 인정하고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오천일은 무죄를 주장하며 항소했고, 검사국은 사형이 마땅하다며 부대항소했다.

    항소심 공판은 9월25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열렸다. 2심에서도 오천일은 범죄 사실을 전면 부인했다. 추학순에 대해서는 ‘그 여자는 미친 여자로 모든 진술이 거짓말’이라고 주장했다.

    1심과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되던 공판은 10월19일 개정한 결심공판에서 추학순이 진술을 번복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추학순은 재판장의 질문에 “전번에 무엇이라고 말했는지 생각 안 난다.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얼버무렸다. 심지어 자신의 어린 아들이 물에 빠져 죽었는지에 대해서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요코다(橫田) 검사는 1시간30분에 걸친 장황한 논고 끝에 사형을 구형했다. 주간흠 변호사는 추학순의 증언마저 신뢰할 수 없다면 오천일의 범죄 사실을 입증할 증거가 전혀 없다며 무죄를 주장했다. 야모토 재판장은 선고공판을 두 차례 연기하더니 10월30일 돌연 심리 재개를 선언했다.

    주간흠 변호사는 피고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증인으로 미두상 이이다(飯田萬吉)를 신청했는데 요코다 재판장은 이를 채택하는 동시에 직권으로 평양경찰서 고야마 경부, 사법차석 전규태 경부보, 후쿠다 순사, 이경재, 임신화 등 5명을 소환 심리하기로 결정했다. 재판장 직권으로 오천일의 신문을 담당했던 경관 3명을 소환하기로 결정한 것은 오천일이 경찰에서 2심 공판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범행을 부인함에도 평양경찰서에서는 어찌하여 그를 범인으로 인지했는지, 어찌하여 유죄의견으로 송국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이며, 이경재, 임신화를 소환한 것은 추학순이 경찰에서 1심 공판까지는 자기 남편 장의걸이 오천일의 의뢰로 오명보를 살해했다고 증언했음에도 복심정에 소환돼 와서는 자기는 그런 공술을 한 기억이 없다고 부인할 뿐 아니라 제 남편이 행방불명된 것과 제 자식이 사망한 것조차 뚱딴지같은 답변을 해 오천일이 주장하는 것처럼 추학순이 정신이상자가 아닌지 알아보기 위해서이다.(‘시부 공판에 사법주임 등장’, ‘동아일보’ 1934년 11월2일자)


    11월13일 개정한 제4회 항소심 공판에서 야모토 재판장은 전규태 경부보 등 4명의 증인을 심문했다. 오천일은 경찰의 고문에 못 이겨 거짓 자백을 한 것이라고 거듭 항변했고, 주간흠 변호사는 경찰에서 피고인을 4개월이나 구금한 것은 불법이니 제1회 조서 이후의 조서는 전부 무효라는 법률 해석으로 무죄를 주장했다. 11월20일 평양복심법원 대법정에서 개정한 선고공판에서 야모토 재판장은 1심 판결을 뒤집고 무죄를 선고했다. 요코다 검사는 판결에 불복하고 즉각 상고했다.

    계속되는 논란

    상고심 공판은 이듬해 2월 고등법원에서 개정했다. 기토(喜頭) 재판장은 다마나(玉名) 검사의 사실 심리 요청을 받아들여 또다시 지루한 법정 공방이 이어졌다. 증인으로 소환된 추학순은 뚜렷한 이유 없이 공판정에 출두하지 않았다. 주간흠 변호사는 추학순의 재소환과 정신감정을 요청했지만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4월8일 기토 재판장은 피고의 범죄 사실은 증거가 충분하다며 원심을 파기하고 사형을 선고했다. 통역을 통해 판결 결과를 전해 듣은 오천일은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재판장을 쳐다보며 물었다.

    “정말입니까? 나는 결코 죄를 지은 적이 없습니다.”

    “정말이다.”

    기토 재판장은 귀찮은 듯 짤막하게 대답하고 법정을 떠났다. 5월5일, 오천일은 재심을 청구했지만 새로운 증거를 첨부하지 않은 채 그저 억울하다는 말만 반복한 취지서를 제출했을 뿐이라는 이유로 기각됐다. 재심 청구마저 기각돼 교수대에 오를 날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 추학순이 등기우편으로 고등법원에 진정서를 보냈다.

    제가 평양경찰서, 평양지방법원 검사국, 평양지방법원 공판정에서 오천일이가 자기 아버지를 죽였다는 말을 들었노라고 증언을 한 것은 모두 경찰이 그렇게 말을 해야 된다기에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사실 저는 오천일로부터 아버지를 죽였다는 말을 전연 들은 일이 없습니다. 지난번 고등법원 공판 때 증인으로 호출을 받았으나 몸도 아프고 여비가 없어서 출두하지 못했습니다. 그 뒤 재판소에서 여비라도 부쳐줄까 기다리고 있었는데 사형으로 재판이 끝났다는 소식이 신문에 나서 놀랐습니다.(‘추학순 돌연 위증을 고백’, ‘조선일보’ 1925년 10월9일자)

    추학순의 고백서가 일본어로 번역돼 기토 재판장과 다마나 검사에게 넘어가기는 했으나 재판소로서는 거기에 대해 자진해서 아무런 수단을 취하지 않고 내일이라도 사형집행 결재가 나면 집행을 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다만 그 동안에 오천일이 추학순의 고백서를 근거로 추학순을 위증죄로 고소하고 추학순에 대한 위증죄의 확정판결이 날 때에는 그것을 근거로 삼아 오천일은 재심을 청구할 수 있다. 문제는 오천일의 사형집행 전에 과연 추학순의 위증죄에 대한 확정 판결이 결정되겠느냐는 것과 또 가령 추학순의 위증죄 확정 판결이 내려 재심을 청구한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재판장이 즉시 오천일의 무죄를 시인하겠느냐는 델리케이트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위증고백서가 오천일을 살릴 수 있을까?’, ‘조선일보’ 1935년 10월10일)


    10월23일, 오천일은 추학순을 위증죄로 고소하는 대신 또다시 재심을 청구했다. 재심 청구서에는 오천일이 한글로 직접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인찰지 28장 분량의 탄원서가 첨부돼 있었다. 하지만 12월28일 두 번째 재심 청구 역시 고등법원에서 기각됐다. 논란은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오천일이 교수대에 오를 날만을 기다리고 있던 이듬해 2월 고등법원에 괴투서가 날아왔다.

    추학순은 원래 경상도 여자로 본남편이 문둥병에 걸리자 그를 죽여 버리고 평양으로 도주했다. 평양에 와서는 부외 어느 탄광에 광부와 동거하여 딸까지 낳았는데 그는 원래 음탕한 계집으로 다시 그 남편과 자식을 버리고 장의걸과 정을 통하여 결국 그와 평양 부내에서 살림을 시작했다. 그 집이 바로 오천일의 부친 오명보의 셋방이었다.

    오명보 역시 정욕이 강한 남자로 추학순은 또다시 오명보와 정을 통하게 되자 그 남편 장의걸은 질투의 감정으로 오명보를 죽인 것이다. 그 후 추학순과 장의걸이 부부싸움 끝에 추학순의 입에서 이 고백이 나오자 장의걸은 그만 高飛遠走(멀리 달아남)했다. 그런데 추학순이 이 사실을 숨기고 자기 남편이 오천일의 교사로 오명보를 살해했다고 위증한 이유는 추학순이 첫째 자기 구악이 발각될까 두려워했고, 둘째 오명보와 간통했다는 사실을 숨기고자 그러한 것이니 이제라도 추학순을 잡아 족치면 그 사실 전부가 드러날 것이다.(‘고등법원에 온 괴투서’, ‘동아일보’ 1936년 2월13일자)


    괴투서의 내용 중 대부분은 재판 과정에서 알려진 것이고,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도 없어 재판 결과를 뒤집을 수 없었다. 1936년 3월31일, 결국 오천일은 사형이 확정된 지 1년 만에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됐다.

    오천일의 사형이 집행된 지 열흘 후, 장의걸이 만주 톄링(鐵嶺)에서 검거됐다. 6년 동안의 도피생활로 심신이 피로한 듯 경찰 조사에서 장의걸은 “나는 지금 매우 피로하니 간단히 맞춰주시오” 하며 순순히 범죄 사실을 시인했다. 장의걸은 주거침입, 살인미수, 살인, 사기 등의 혐의로 기소돼 1937년 5월 고등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됐다.

    부전자전

    오천일의 사형이 집행된 지 채 100일도 지나지 않은 1936년 6월8일, 오천일의 큰아들 오진하가 ‘조부를 죽인 부친이 조부의 땅을 팔아먹은 것은 불법이니 그 땅의 소유권을 돌려달라’는 엽기적인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오천일은 상속받은 율리면 일대 토지 5만여 평을 살부(殺父) 혐의로 구속되기 이전 대부분 매도하거나 저당 잡혔다. 오진하는 부친이 조부를 살해한 이상 상속인이 될 자격이 없고 상속권은 당연히 장손인 자신에게 있으며 상속권이 없는 부친의 매매 및 저당권 계약은 당연히 무효라고 주장하면서 평양지방법원에 ‘토지소유권 이동 등기 및 저당권 설정 등기 말소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오진하가 제기한 토지소유권 이동 등기 및 저당권 설정 등기 말소 청구소송의 제1회 구두 변론이 6월24일 평양지방법원 사토(佐藤) 재판장 담임으로 개정됐다. 원고 측의 소송 대리인 요코다(橫田), 이학천 두 변호사는 “오천일은 부친 오명보를 살해했으니 가독상속의 권리가 없고 그 권리는 원고의 것이다. 그러므로 오천일의 매매행위는 무효이고 그 땅은 원고에게 돌려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피고 측 대리인인 이기찬 변호사는 “오천일은 작년 4월 사형이 확정됐으므로 그 이전의 매매행위는 유효하다. 그리고 범인의 직계비속은 조선 관습으로 상속권을 가질 수 없다”고 항변하여 결국 7월15일 재차 변론을 열기로 했다.

    이러한 소송은 조선 초유의 진기한 소송으로 그 판결은 신(新)판례가 될 것이므로 각 방면의 주목이 크다. 더욱이 원고 측의 소송 대리인인 요코다 변호사는 평양복심법원 검사로 있을 때 오천일 공소공판에 입회하여 오천일에게 사형을 구형하고, 무죄 판결이 내리자 고등법원에 상고한 사람인데 이제 오천일의 아들 오진하가 그를 대리인으로 세운 것은 일반에게 기이한 느낌을 주고 있다.(‘오천일이 처분한 재산 반환청구 소송 개정’, ‘조선중앙일보’ 1936년 6월27일자)


    오진하는 한때 아버지에게 사형을 구형한 검사에게 아버지가 사형 집행당한 지 100일도 되기 전에 아버지가 처분한 토지를 반환하라는 소송을 맡겼으니, 패륜으로 치자면 보험금과 유산을 노리고 아버지를 살해한 오천일 못지않았다. 하지만 그럴듯한 이 소송은 1심에서 3심까지 연이어 패소했다. 문제의 토지는 오천일이 오명보를 살해하기 이전 이미 오천일 몫으로 지목한 상태에서 명의만 오명보가 갖고 있었다는 게 패소의 이유였다.

    오천일 살부(殺父)사건
    전봉관

    1971년 부산 출생

    서울대 국문과 졸업, 동 대학 석·박사(국문학)

    서울대, 아주대, 한신대, 한성대, 덕성여대에서 강의

    現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 과학부 교수

    저서 및 논문 : ‘1930년대 한국 도시적 서정시 연구’ ‘황금광시대’ ‘경성기담’ ‘럭키 경성’ 등


    재판 과정을 살펴보면 오천일이 아버지를 살해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설령 오천일이 장의걸을 시켜 아버지를 살해했다 하더라도 고문에 의한 자백과 정신이상이 의심되는 증인의 진술만으로 사형 판결을 내리고 집행까지 한 것은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또한 오진하가 청구한 민사소송에서도 오명보가 생전에 상속을 약속했다는 이유로 아버지를 살해한 오천일의 상속권을 인정한 것은 논리가 궁색하다. 오천일도, 오진하도 법적 논리만 놓고 보자면 억울한 구석이 있다. 하지만 윤리적 측면에서 보자면 그들이 받은 판결은 지극히 정당했다. 말하자면 오명보, 오천일, 오진하 삼대(三代)는 법의 심판이 아닌 천벌을 받은 것이다. 그러기에 사람은 똑바로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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