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성신문 1906년 7월13일자 기사는 石島가 獨島임을 증명
- ‘울도군 행정구역은 울릉전도와 죽도 석도 포함’ 명시
- 우산도=독섬=石島=獨島=리앙쿠르島
- 日 정부, 1905년 이전에 두 차례 ‘독도는 한국영토’ 인정
- 1905년 ‘無主地’ 주장은 고의적 침탈…완전무효
최근엔 일본 시마네현이 독도 침탈정책의 하나로 제정한 소위 ‘다케시마의 날’에 맞춰 시마네현 지방신문 ‘山陰中央新報’(2008년 2월22일자)와 ‘죽도문제연구회(竹島問題硏究會)’가 억지주장을 펼쳤다. 이들은 구한말 ‘황성신문(皇城新聞)’ 기사를 사료로 제시하면서 “대한제국 칙령(勅令) 제41호에 의하면 울도군 소관인 석도(石島)는 독도(獨島)라는 주장은 붕괴되며, 따라서 한국의 독도 영유권 주장은 무너진다”고 주장했다.
뒤이어 일본 외무성도 홈페이지에 ‘竹島問題を理解するための10のポイント(다케시마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10가지 포인트)’를 3개 국어(한국어·일본어·영어)로 띄우면서 ‘독도가 일본 고유영토’라는 선전에 박차를 가했다. 지난 5월에는 일본 문부과학성이 중·고등학교 교과 과정에 독도는 일본 고유 영토임을 가르치도록 교사지침서에 이 내용을 넣기로 결정했다.
일본은 중앙정부에선 외무성과 문부과학성, 지방에선 시마네현이 중심이 돼 긴밀히 상호연락하면서 독도 영유권 논쟁을 전개하고 있다. 한국 일각에서 이것을 일본의 지방정부 문제로 보려는 것은 사려 깊지 못하다.
‘범위’와 ‘거리’
일본 측 주장에 의하면, 한국 측 사료인 황성신문 1906년 7월13일자 ‘울도군의 배치전말’ 기사에 울도군의 소관 섬은 울릉도와 죽도(竹島, 현재의 죽서도)와 석도(石島)인데 동서 60리, 남북 40리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1리는 0.4km이니 동서는 24km, 남북은 16km이다. 현재의 독도(일본명 竹島)는 울릉도 남동 92km로서 숫자가 울도군의 범위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한국 측 주장은 붕괴된다는 것이다.
문제의 ‘황성신문’ 1906년 7월13일자 기사는 다음과 같다.
鬱島郡의 配置顚末
統監府에서 內部에 公函되 江原道 三涉郡 管下 所在 鬱陵島에 所屬 島嶼와 郡廳設始 年月日을 示明라 故로 答函되 光武二年 五月 二十日에 鬱陵島監으로 設始하였다가 光武四年 十月 二十五日에 政府會議를 經由야 郡守를 配置하니 郡廳은 台霞洞에 在하고 該郡 所管島 竹島石島오 東西가 六十里오 南北이 四十里니 合 二百餘里라고 얏다더라.
이 기사는 일제 통감부가 대한제국 내부에 공문을 보내 울도군에 소속한 도서 이름과 울도군 군청 설치 일자를 질문한 데 대한, 대한제국 내부의 응답 공문을 보도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첫째, 일제 통감부는 울도군에 소속된 도서의 이름과 군청 설치 시일을 질문했지 울도군 ‘소관’의 면적 범위를 질문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일본 측이 대한제국 답서의 숫자를 처음부터 ‘범위’로 해석한 것은 전적으로 자의적인 억지단정이다.
5월29일 독도연구보전협회 주최로 열린 학술세미나에서 참가자들은 발굴한 새로운 사료들을 근거로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다시한번 입증했다.
황성신문 기사는 대한제국 내부가 울도군에 소속한 석도는 울릉도로부터 ‘합 200여리’에 있는 섬임을 통보한 것으로, 이를 km로 환산하면 ‘합 80km+餘(알파)km’이다. 현재의 실측으로는 울릉도로부터 독도까지 거리가 92km이므로, ‘餘(알파)’가 12km에 해당하는 것이다.
여기서 논의돼야 할 것은 오식의 문제다. ‘동서 60리, 남북 40리, 합 200여리’에서, 동서 60리가 160리의 오식인지, 혹은 합이 100의 오식인지, 앞의 두 숫자와 합이 일치하지 않는 점이다. 이것이 앞으로 연구해야 할 과제다.
獨島와 石島
독도로부터 동서 60리, 남북 40리는 울도군수 심흥택이 보고한 ‘울릉도로부터 100여 리의 독도’를 연상케 한다. 울도군수 심흥택은 일본이 자국의 통치 행정관리 지역인 독도를 몰래 일본영토로 편입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듣고 1906년 3월 강원도 관찰사를 거쳐 중앙정부에 올리는 긴급보고에서 ‘本郡所屬 獨島가 在於本部外洋 百餘里옵더니…(울도군 소속 독도가 울릉도의 바다 밖 100여 리니)’라고 하여 울도군에 소속되어 울도군수가 행정적으로 관리하는 독도가 울릉도로부터 100여 리의 거리에 있음을 밝힌 바 있다.
지리적으로 보면 동해의 중앙 수역에는 큰 섬이 울릉도와 독도밖에 없다. 죽서도는 울릉도에 지극히 가까운 작은 바위섬에 불과하다. 울릉도에서 60리든, 100리든, 200리든 존재하는 섬은 석도(독도)밖에 없다. 그 다음으로는 독도로부터 392리(157km) 동남쪽에 일본의 오키섬(隱岐島)이 처음 나온다.
따라서 대한제국의 1900년 칙령 제41호에서 울릉군수가 소속 관리하는 섬이 울릉도와 죽도와 석도라고 했으니, 황성신문 1906년 7월13일자 기사(대한제국 내부의 공문서)에서 울릉도로부터 석도까지의 거리가 ‘합 200여리’라고 했다면 석도가 곧 독도임을 가리키는 또 하나의 좋은 증명자료가 되는 것이다.
‘석도=독도’임을 좀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의 제정 공포과정을 알아보기로 한다. 대한제국 1900년 칙령 제41호는 처음부터 국제적으로 일본의 한국 영토에 대한 도발 방지를 동기로 하여 제정 공포된 것이다.
일본이 청일전쟁(1894~95년)에서 승리하자 일본인들은 불법으로 개항장이 아닌 울릉도에 떼를 지어 밀입국해 거류하면서 벌목과 어업에 종사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대한제국 내부대신은 1899년 9월15일 외부대신에게 일본공사관에 요구하여 울릉도에 침입한 일본인들을 기한을 정해 돌아가게 하고, 불통상(不通商)항구에 밀수한 것을 조사 처벌해 영구히 두절시켜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외부대신은 내부대신의 요청사항을 일본공사에게 요구했다.
대한제국 정부의 이러한 요구에 일본공사는 9월22일 ‘불통상항구의 외국인 밀무역에 대한 단속은 귀국 지방관의 직권이므로 대한제국 정부에서 지방관에게 일본인들의 철수를 알리도록 권고한다’는 매우 오만불손한 회답을 보내왔다.
이에 대한제국 정부는 1899년 10월 내부관원 우용정을 책임자로 한 국제조사단을 울릉도에 파견하여 사정을 정밀히 조사하기로 했다. 이 조사단에는 부산해관세무사인 영국인 라포트(E. Laporte, 한국명 라보득)와 재부산일본부영사관보 아카쓰카 쇼스케(赤塚正助) 및 일본인 경부(경찰, 渡邊鷹治郞)가 참가해 1900년 6월1일부터 5일간 울릉도 일대의 사정을 조사했다.
국제적 고시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에 항의하는 시민단체 회원들.
이 청의는 1900년 10월24일 의정부회의(내각회의)에서 8대 0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이에 대한제국 정부는 다음날 전문 6조로 된 칙령 제41호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한 건’을 관보에 게재하고 전국에 반포했다. 이 칙령에 의해 울릉도는 강원도 울진군수의 행정을 받다가 이제 강원도의 독립된 군으로 승격됐다. 그리고 울도군의 초대 군수로는 배계주가 임명됐다.
1900년 칙령 제41호에서 주목할 것은 제2조 ‘울도군의 구역은 울릉전도와 죽도 석도를 관할할 일’라고 한 부분이다. 여기서 죽도는 울릉도 바로 옆의 죽서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석도는 독도를 가리키는 것이 틀림없다.
당시 울릉도 주민의 절대다수는 1883년 울릉도 재개척 정책에 의해 이주한 전라도 경상도의 남해안 출신 어민들이었다. 그들은 종래의 우산도가 두 개의 큰 바윗돌로 구성된 암서(岩嶼)임을 주목해 그들의 관습대로 ‘돌섬’이란 뜻의 사투리인 ‘독섬’이라고 불렀다.
대한제국 정부는 칙령 제41호에서 울릉도 주민들의 호칭인 ‘독섬’을 의역하여 ‘石島’라 한 것이다. ‘독섬’을 뜻을 취해 한자 표기하면 ‘石島’가 되고, 발음을 취해 한자 표기하면 ‘獨島’가 되는 것이다. 즉 ‘우산도=독섬=石島=獨島=리앙쿠르島(프)’인 것이다.
울릉도 어부들의 이러한 명명방식은 독도를 리앙쿠르島라고 이름 붙인 프랑스 탐험선 리앙쿠르(Liancourt)호의 명명 방식과 일치한다. 이 탐험선은 우산도=독도를 자기 배의 이름을 따되, Liancourt ‘Islands’라고 하지 않고 Liancourt ‘Rocks’(岩嶼)라 하여 ‘바윗돌섬’이라고 명명했다. 이것을 울릉도 어민들의 방식으로 보면 역시 리앙쿠르岩=‘돌섬·독도·岩嶼’인 것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일본 해군성 수로국이 1882년(메이지 15년) 발행한 ‘日支韓航路里程一覽圖’에서는 독도를 아예 리앙쿠르‘石’이라고 표기해 수록했다는 사실이다.
대한제국 정부가 관제를 개정해 울릉도를 군으로 승격시킬 때 국제조사단에 참가한 영국인 부산해관 세무사 라포트의 복명서도 참조했다. 그는 영국인이었기 때문에 서양인이 제작한 한국지도에 친숙한 인물이었으며, 우산도를 리앙쿠르‘Rocks’(岩, 石)라고 부른 표기에 친숙했을 것이다. 대한제국 정부가 칙령 제41조를 발표할 때 각 섬의 명칭을 약간씩 수정했는데, 울릉도를 울도라 개칭하고, 죽서도를 죽도라고 했으며, 우산도에 대한 어민들의 명칭인 ‘독섬’ ‘독도’를 의역해 한자로 ‘石島’로 번역 표기했다. 이때 국제조사단의 영향으로 서양인이 우산도를 ‘리앙쿠르石島’라고 호칭한다는 사실도 참고한 것이다.
대한제국이 1900년 칙령 제41호로 독도(石島, 獨島)의 울도군수 행정관리를 통한 영유를 중앙정부의 관보에 게재한 것은 ‘국제적 고시’의 성격을 갖는다. 왜냐하면 중앙정부 관보는 의무적으로 대한제국의 체약국 공사관에 발송되고, 각국 공사관도 이 중앙정부의 관보를 반드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한제국의 1900년 칙령 제41호의 관보 고시는 대한제국이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를 재선언한 것이었다. ‘재선언’이라고 한 것은 이미 15세기에 ‘동국여지승람’에서 우산도(독도)의 조선 영유가 당시 조선의 교역국가에 선언됐기 때문이다.
무주지(無主地) 선점
대한제국 정부가 1900년 10월 칙령 제41호에 의해 울릉도와 그 부속도서를 하나의 군으로 독립시켜 울도군을 설치하면서 ‘독섬’을 한자로 의역해 ‘石島’로 표기했지만, 당시에도 주민들 사이에서는 음을 취해 ‘獨島’라고도 표기됐으며, ‘石島’와 ‘獨島’가 병용되고 있었다.
보통 ‘獨島’라는 명칭은 일제가 1905년 ‘독도’를 침탈한 사실을 알게 된 울도군수 심흥택이 1906년 3월 중앙정부에 보고서를 낼 때 처음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전부터 울릉도 주민들은 ‘獨島’라고 표기하고 있었다. 그 증거로는 일본 해군이 독도 침탈에 욕심을 내기 시작해 군함(新高號)을 울릉도에 파견, 처음으로 ‘독도’에 대한 탐문조사를 했을 때인 1904년 9월25일자 보고에 ‘리앙쿠르岩을 한인은 獨島라고 쓰고 本邦(일본) 어부들은 약하여 리앙쿠르島라고 칭한다’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松島(울릉도-인용자)에서 리앙쿠르岩 實見者로부터 聽取한 情報. 리앙쿠르岩은 韓人은 이를 獨島라고 書하고 本邦 漁夫들은 ‘리앙꼬島’라고 호칭한다.(‘軍艦新高行動日誌’(日本防衛廳戰史部 소장) 1904년 9월25일)
독도의 일본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 우익단체들.
이 자료는 리앙쿠르島가 곧 獨島로서 이미 1904년 9월 이전에 울도군에 속한 한국영토임을 명백히 증명하는 것이다. 일본이 리앙쿠르島를 ‘영토편입’했다고 하는 1905년 이전의 일이다.
1904년 일본인 어업가 나카이(中井養三郞)가 한국영토인 독도에서의 해마잡이 독점권을 한국 정부에 청원하려고 교섭활동을 시작하자, 이 기회에 러일전쟁으로 말미암아 군사전략상 새로이 가치가 높아진 ‘독도’를 아예 일본영토로 탈취해 여기에 해군망루를 설치하려는 일제의 공작이 일본 해군성과 외무성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일본 정부는 나카이의 청원서를 수용하는 형식으로 1905년 1월28일 일본 내각회의에서 독도를 일본영토로 편입한다고 결정했다. 이 일본 내각회의 결정에서 ‘독도’를 일본영토로 편입한 전제로서 근거가 된 것은 ‘리앙쿠르島(독도)는 다른 나라가 이 섬을 점유했다고 인정할 흔적이 없다’며 임자 없는 ‘무주지(無主地)’라는 점이었다. 즉 ‘한국영토’를 ‘무주지’로 만들어서 지우려 한 것이다.
일본 정부는 일본인이 ‘무주지’를 선점한 것으로 만들어 ‘무주지 선점’에 의한 영토 편입이라는 당시의 국제공법 규정에 맞추려 했다. 따라서 독도가 1905년 1월 이전에 ‘무주지’가 아니라 ‘한국영토’였음이 증명되면, 이 ‘무주지 선점론’에 의거한 일본 내각회의의 결정은 완전히 무효가 되는 것이었다.
태정관(太政官) 공문서
독도는 서기 512년(신라 지증왕 13년) 우산국이 신라에 통일된 이래 계속 한국영토로 존속해왔으므로, 역사적 진실은 ‘한국이라는 주인이 있는 섬’(有主地)이었다. 대한제국 정부의 1900년 칙령 제41호는 국제공법상으로도 독도(石島)가 울도군수의 행정관리 아래 있는 한국영토임을 증명하므로, 1905년 일본 정부의 독도 영토편입 결정은 완전히 무효가 되는 것이다.
일본 측에서는 1905년 1월28일 이전에 독도(리앙쿠르島)가 무주지가 아니라 한국영유의 유주지임을 일본 정부 공문서로 증명해준다면 완벽한 증명이 된다고 생각하는 이가 많으므로 2개의 일본 공문서에 의거해 이를 증명하기로 한다.
첫째로 주목해야 할 결정적인 자료는, 메이지(明治) 정부의 외무성과 태정관(太政官)이 독도를 조선의 영유(부속)로 인정한 일본 외무성 자료 ‘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다. 메이지 정부는 도쿠가와(德川) 막부를 타도하고 신정부를 수립한 직후인 1869년 12월 조선과의 국교 확대 재개와 정한(征韓)의 가능성을 내탐하기 위해 일본 외무성 고위관리인 사다 하쿠보(佐田白茅),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 사이토 사카에(齋藤榮) 등을 부산에 파견했다. 이들이 내탐 결과를 보고한 문서가 바로 ‘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다. 여기에서 울릉도(竹島)와 독도(松島)가 조선의 부속령임을 확인했다. 이 자료는 ‘일본외교문서’ 제3권 사항 6, 문서번호 87에 수록돼 있다.
다음으로 주목해야 할 자료는 메이지 정부의 내무성과 태정관이 1877년(메이지 10년)에 독도가 조선영토이며 일본과는 관계 없는 곳이라고 명백하게 결정한 공문서다. 일본 내무성(內務卿 大久保利通)은 1876년 일본 국토의 지적을 조사하고 지도를 편제하는 사업에 임하여, 울릉도와 독도를 시마네현에 포함시킬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질의서(‘日本海內竹島外一島地籍編纂方伺;동해내의 竹島 외 一島 地籍編纂에 대한 質稟’)를 1876년 10월16일자 공문으로 시마네현으로부터 접수했다.
일본 내무성은 약 5개월에 걸쳐 시마네현이 제출한 부속문서뿐 아니라, 겐로쿠(元祿) 연간(조선의 숙종 연간에 해당)에 조선과 교섭한 관계문서들을 모두 조사한 후,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영토이며 일본과는 관계없는 곳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일본 내무성은 이를 내무성 단독으로 결정할 수 없다고 여겨 시마네현이 제출한 문서들과 일본 겐로쿠시대에 조선과 왕래한 외교문서들을 부속으로 별첨해 1877년 3월17일 당시 국가최고기관인 태정관에 품의서를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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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정관에서는 내무성의 품의서를 검토한 후 조사국장의 기안으로 1877년 3월20일 “품의한 취지의 竹島 外 一島의 건에 대하여 本邦(일본)은 관계가 없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것”(伺之趣竹島外一島之義本邦關係無之義ト可相心得事)이라는 지령문을 작성해 이를 결정했다.
이 태정관의 지령 안에서 竹島(울릉도) 그 외 一島(松島, 독도)가 “일본과 관계가 없다”는 것은 그 앞에 “위는 겐로쿠 5년 조선인이 입도한 이래 該國(조선)과 왕복의 결과 일본과 관계가 없다”고 전제한 기록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영토’여서 일본과 관계가 없다고 명백히 밝혀 결정한 것이다. 결국 내무성과 국가최고기관인 태정관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영토이며 일본의 영토가 아니어서 일본은 이에 관계가 없다고 1877년 3월29일자로 재확인해 공적으로 지령했던 것이다.
위에서 든 일본 정부의 1869~70년 내무성과 국가최고기관인 태정관의 공문서와 1877년의 내무성과 태정관의 공문서는 일본 정부가 1905년 2월 이전에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영토이며, ‘무주지’가 아니라 조선이라는 주인이 있는 ‘유주지’임을 명확하게 증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독도를 ‘무주지’라고 전제한 1905년 2월22일의 일본 정부 독도 영토편입 결정은 한국영토에 대한 고의적 침탈이며, 완전히 무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