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 위에서 그녀들은 집에서 못 느끼던 오르가슴을 느끼고 집에서 맛보지 못한 자유를 만난다. 여행은 일탈이다. 일탈은 일상에서 잠자던 욕망을 일깨운다. 일탈 속 로맨스는 유혹적이지만 완성되는 순간 배반에 직면한다. 일탈 속 사랑은 감미롭지만 유통기한이 짧다. 일탈은 탈주이자 회귀이다.
‘생활의 발견’
하지만 이율배반적이게도 사람들은 돌아오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봉인된 추억을 그리워하지만 그곳이 여행지이기에 추억과 함께 떠오른다. 여행은 일상 속에 침전된 욕망을 추억이라는 이름과 함께 떠오르게 한다. 여행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버리고 떠나올 수밖에 없는, 일탈의 필연성이다. 결국 일상으로 되돌아 올 수밖에 없기에 여행은 추억이 되고 비밀이 된다.
돌아올 곳이 여행지와 같다면, 그러니까 비밀 없이 떠나온 여행지라면 그것은 평범한 지명과 섞여 지도 위의 한 점으로 사위어든다. 하지만 비밀이 있을 때 지명은 추억이 되고, 그곳의 이름은 상처를 남긴다. 그 어느 지명을 말할 때마다, 마음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게 어딘가 아파온다. 그 지명을 속으로 읊을 때 잘못 깨문 입술에서 새어 나온 피 맛처럼 아릿해지는 것이다.
돌아올 곳이 없다면, 여행이 삶이 되어 유랑이 된다면, 이 아릿함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돌아올 곳이 있기에 떠난다. 그곳은 일상이 아닌 다른 영역, 어차피 그곳의 삶이 일상을 침투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우리는 다른 나를 겁 없이 그곳에 내놓는다. 여기, 이곳에서와 다른 나를 묻고 온 곳, 여행지. 당신은 혹시 여행지에서 길을 잃어본 적이 있는가. 당신 마음속의 지도에는 어떤 ‘지명’들이 남아 있는가.
이 남자에게 ‘무진’은 치욕과 상처, 모멸과 자학의 공간이다. 서울에서는 유능한 장인과 아내가 승진 자리를 마련해두고 기다린다. 좋지만 싫은 일이다. 성공과 출세는 남자를 우쭐하게 하지만 처가 덕이라는 꼬리표가 이 남자의 자존심을 건드린다. 남자는 초라해진 자신을 이끌고 고향으로 향한다. 안개가 더 먼저 반겨주는 곳, 무진. 남자는 그곳에서 지금보다 훨씬 더 초라한 모습으로 스스로를 괴롭히던 젊은 시절을 만난다. 그리고 고운 소프라노 목소리로 ‘목포의 눈물’을 부르는 여선생 하인숙과 하룻밤을 나눈다.
‘안개’ 속 ‘생활의 발견’
‘생활의 발견’
남자는 자기의 비겁함을 마주하듯, 자신에게 성큼 한발 다가오는 여선생을 물리치지 않는다. 남자는 “누군가가 자기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주지 않으면 상대편을 찌르고 말 듯한 절망을 느끼는 사람으로부터 칼을 빼앗듯이 그 여자의 조바심을 빼앗”는다.
그리고 남자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고는 서둘러 고향을 떠나 일상이 자리 잡고 있는 서울로 향한다. 또 한 번 남자에게 ‘무진’은 모멸의 공간으로 깊어진다. 이제 지도를 펴고 무진을 볼 때, 남자는 ‘하인숙’이라는 비밀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무진은 씻을 수 없는 모멸과 상처가 되어 남자의 평생을 따라다닐 것이다.
여기 이 남자는 서울에서 실패를 맛보고 무작정 경춘선 열차에 올랐다. 춘천에 있는 선배를 만나는 게 목적이긴 하지만, 실상 여행 자체가 목적이지 선배는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춘천에 간 남자에게 문숙이라는 여자가 다가온다. 문숙은 경수가 찾아간 선배가 마음에 두고 있는 여자다.
그런데 이 여자가 경수에게 말을 걸어온다. 그녀는 빈속에 마시는 소주처럼 빠르게 흡수돼 남자의 일상을 일탈로 끌고 간다. 경수는 뱀처럼 자신에게 감겨드는 여자를 마다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하룻밤, 춘천의 일탈이었던 여자가 그 이상을 요구하는 것이다. 남자는 당황스럽다. 그래서 숨가쁘게 춘천을 떠나 부산으로 향한다. 재미있는 것은 그 다음이다. 부산으로 가던 경수는 못미처 경주에서 내리고 만다. 자신에게 말을 걸고 유혹하더니 어느 새 훌쩍 경주에 내려버린 선영 때문이다.
별 볼일 없고 구차한 일탈
‘바이브레이터’
흥미롭게도 홍상수의 여행 영화에서 남자들이 택하는 로맨스는 결국 방석집에 가서 여자들과 놀거나 성매매 여성을 불러 하룻밤을 때우는 것이다. 로맨스를 꿈꾸지만 결국 그들이 행하는 일탈은 별 볼일 없고 때론 구차하다.
‘강원도의 힘’의 한 장면은 이 구차함을 잘 보여준다. 여행 일원인 두 사람은 여자를 사서 숙소로 불러들인다. 그런데 한 남자의 여자는 몸매도 미끈하고 얼굴도 예쁘다. 주인공 남자의 파트너는 그보다 못하다. 주인공 남자는 툴툴거리기 시작한다. 실소를 흘릴 수밖에 없는 이 장면들은 그들이 여행지에서 행하는 일탈이라는 게 이렇게 우습다는 것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낯뜨겁다.
더 재미있는 것은 이런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남자가 둘도 없이 가정적인 남편과 아버지 노릇을 한다는 것이다.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듯이 ‘집’에 돌아온 남자는 남편으로 되돌아온다. 대문을 열고 나서면 또 다른 애인과 만나고 여행지에 가면 로맨스를 꿈꾸지만 집에서는 다른 사람처럼 군다.
김수용 감독의 ‘안개’가 여행지에서의 일탈을 아릿한 추억과 배반의 모멸감으로 장식하고 있다면 홍상수 감독의 ‘강원도의 힘’은 그 일탈을 우스운 것으로 비웃는다. 그런 점에서 ‘생활의 발견’은 남자들이 여행지에서 꿈꾸는 일탈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먼저 말했다시피 춘천의 여자 문숙은 먼저 경수를 유혹해 하룻밤을 보내고 고백까지 했다.
경주의 여자 선영은 어땠을까. 선영은 경수의 애를 태우다 태우다 하룻밤을 허락한다. 하지만 그 이상은 허락하지 않는다. 경수는 그 이상을 원하는데 선영은 가차없다. 경수는 춘천에서 자신에게 집착하는 문숙을 “미친년”이라고 욕하며 떠나왔다. 그런데 경주에서 경수는 춘천에서 보았던 문숙의 모습과 하나 다를 바 없다.
친구가 좋아하는 여자가 나를 선택해 유혹하고, 우연히 기차 옆자리에 동승한 미녀가 말을 걸어오는 일. 사실상 이는 혼자 여행하는 남자들이 꿈꾸는 로맨스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그녀가 하룻밤의 쾌락까지 허락한다면 남자가 꿈꾸던 여행의 일탈은 완성된다.
그런 점에서 홍상수 감독의 ‘생활의 발견’은 여행에서 꿈꾸는 남자들의 유치한 욕망의 전시장이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쉽게 준 여자는 금세 잊고, 끝까지 애를 태우는 여자 옆에서 전전긍긍하는 모습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여행지에서 로맨스를 꿈꾸지만 결국 그것도 스캔들이자 추문, 일탈에 지나지 않은 것. ‘안개’와 ‘생활의 발견’ 사이에 그 가역반응이 놓여 있다.
덜덜거리는 트럭 위에서
‘더티 댄싱’
로버트에게 이 로맨스는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못한 낭만적인 비밀이었다. 영화 속에서 로버트와 니콜이 나눈 로맨스는 나나 무스쿠리의 ‘사랑의 찬가’와 함께 신화화한다. 노을 지는 바닷가에서, 일상을 벗어던진 두 연인은 영원과 같은 입맞춤을 나눈다. 10년 전의 일탈을 신화로 기억하는 것은, 그것을 간직한 로버트 자신이다. 일탈은 기억 속에서 낭만적 신화로 자리 잡는다.
영화는 추억의 봉인을 뜯고 현실로 틈입한 로맨스의 흔적으로 진행된다. 로버트의 아이를 홀로 키우던 니콜이 죽고, 이제 아이에 대한 책임이 생부인 로버트에게 다가왔으니 말이다. 현실, 일상의 아내에게 10년 전의 비밀을 고백하는 순간 추억은 불륜으로 오염된다. 영화는 난데없이 등장한 남편의 로맨스를 추문이 아닌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한 가족의 노력을 그려낸다.
그렇다면 이 작품이 ‘미워도 다시 한 번’과 같은 멜로드라마일까? 이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상처를 봉합하고 일어서는 가족 드라마가 아니라 바로 아름다운 추억이라고 말하는 편이 옳다. 영화는 현재가 아닌 과거 속 그 사랑의 아름다움을 전경화한다. 제목인 ‘7일간의 사랑’처럼 이 영화의 절정은 과거 ‘7일간’에서 비롯돼 그곳에서 소멸된다. 영화 전체의 애잔함을 이끄는 동인(動因) 역시 7일간의 비밀이 가진 공감대다. 누구나 나름대로 가슴속에 크고 작은 ‘7일간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으니 말이다. 영화 ‘7일간의 사랑’은 비밀스러운 여행의 추억에 낭만적 동의를 구하고 있는 셈이다.
한편 일본 영화인 ‘바이브레이터’는 낯선 남자와의 여행과 그 일탈이 준 새로운 감각을 그려내고 있다. 르포 작가인 여자는 처음 보는 남자의 덤프트럭에 올라타 그와 함께 며칠간의 시간을 보낸다. 그녀는 남자의 트럭에서 먹고, 자고, 정사를 나누며 오로지 길 위에서 시간을 보낸다. 낯선 남자와의 일탈에서 얻는 여자의 쾌감과 충동은 트럭의 덜덜거리는 진동과 함께 고스란히 전달된다.
일탈은 회귀이자 발견
‘델마와 루이스’
그런데 기대치 않은 그곳에서 베이비는 자신이 살던 도시에서는 전혀 경험할 수 없었던 짜릿한 일탈, 쾌감, 비밀과 만나게 된다. 그 비밀의 주인공은 바로 춤. 베이비는 댄스 교사 자니를 만나 새로운 춤의 세계와 사랑, 열정을 경험하게 된다.
영화 ‘더티 댄싱’은 여행지에서 만나는 로맨틱한 사랑이라는 공식을 그대로 따라간다. 특기할 점은 여행지에서의 사랑이라는 공식 속에서 계절은 대부분 여름이라는 사실이다. ‘더티 댄싱’의 계절도 여름이다. 뜨거운 여름, 땀에 젖은 셔츠를 입고 이른바 더티 댄싱이라 불리는 춤을 추는 남자, 자니. 베이비에게는 마치 새로운 세계처럼 그가 다가온다.
1980년대 청춘영화의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을 ‘더티 댄싱’은 ‘베이비’라 불려 마땅한 순진한 소녀와 섹시한 남자와의 연애를 그리고 있다. 여행지, 산장에서 시작해 그곳에서 끝나는 이 연애는 ‘이후 그 둘은 어떻게 되었을까’와 같은 질문과는 거리가 멀다. 처음부터 그들의 연애는 여행지에서의 일탈, 그리고 짜릿함으로 규정돼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설정의 영화는 ‘더티 댄싱’ 이전에도 많았다. ‘피서지에서 생긴 일’이라는 제목처럼 피서지, 여행지, 휴가와 일탈적 연애는 공식처럼 따라다니곤 했으니 말이다. ‘더티 댄싱’의 새로움이라면 여행지에서의 일탈이라는 정서를 몸의 언어인 춤으로 재조명했다는 것일 테다.
춤은 부끄러운 연인들의 접촉을 합리화해준다. 춤이란 애초부터 가슴과 가슴이 닿고, 볼과 볼이 맞닿는 체온의 교류이기 때문이다. 수줍고 순진한 베이비가 한 걸음씩 춤을 배워가면서 자니와의 애정도 깊어가고 둘이 나누는 감정의 밀도도 깊어간다. ‘Be my baby’라는 음악으로 두 사람의 거리는 가까워지고, ‘Time of my life’라는 음악과 함께 절정을 향해 간다. 계층적 차이를 극복한 두 사람의 사랑은 여행지의 감정이 인생 최고의 순간이 되었을 때 관객에게 작별을 고한다. 그들의 사랑은 영원히 여행지의 일탈로서 박제되어 있다.
어쩌면 여행지에서의 만남, 그 사랑의 유효기간은 7일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7일이 지나 보름이 되고, 보름이 일상이 된다면 그 짜릿함은 휘발되고 비릿한 일상의 맛으로 변질되고 말 터이니 말이다. 상대방의 이름을 알고, 그 이름을 입술을 말아 불러보고, 입술에 입술을 대고, 차가운 피부에 손을 대는 행위가 신선한 일탈이 될 수 있는 유효기간 역시 7일이 아닐까? 짧은 유효기간 안에서 사랑은 낭만적 신화로 각색된다.
로드무비의 대명사 격인 ‘델마와 루이스’는 집을 벗어나 길 위에서야 자신을 찾은 여성들을 그려낸다. 수많은 영화가 여행지의 일탈을 추억으로 기억하지만 때로 어떤 영화는 여행과 전 생애를 맞바꾼다.
델마와 루이스도 마찬가지다. 그녀들은 집에서 느껴보지 못한 오르가슴을 길 위에서 경험하고, 집에서 맛보지 못한 자유를,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만나게 된다. 허공에 뜬 차 안에서 두 손을 맞잡은 그들의 여행은 그렇게 끝나지 않은 채 머물러 있다. 낙하할 것을 알지만 그녀들의 일탈은 곧 회귀이자 발견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데 어쩌면 일탈은 유통기한이 짧게 정해져 있기에 일탈일 수 있을 것이다. 일상으로의 회귀가 없다면 일탈은 영원히 회복 불가능한 이탈이 되기 때문이다. 가령 계속 여행을 하면서 살인행각을 일삼는 ‘캘리포니아’의 주인공들이나 ‘보니와 클라이드’의 주인공들처럼 말이다.
짜릿한 배반의 쾌감
‘캘리포니아’의 인물들은 여행의 자유를 살인이라는 일탈행위로 극대화하고자 한다. 이미 그들의 여행은 일상으로 회귀할 궤도를 벗어난 지 오래다. 보니와 클라이드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여행은 일탈 그 자체의 궤도에 진입함으로써 일탈이 일상을 전복하고 만다. 때로 이러한 일탈은 법과 생활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일상인에게 짜릿한 배반의 쾌감을 준다. ‘이지 라이더’의 주인공들이 멋진 모터사이클을 타고 도로 위를 질주할 때 우리는 발 묶인 우리의 일상에 잠시 환상을 제공하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여행이란 되돌아와야 할 삶이 있기에 짜릿한 탈주가 아닐까. 만일 당신에게 3일간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가족과 함께 일상을 지속할까. 아니면, 어린 시절 살던 마을을 찾아갈까. 그것도 아니면 혼자 조용한 곳에서 살아온 시간을 반추하며 보낼까. 당신이 선택한 여행지는 곧 당신의 추억과 비밀의 장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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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영화 ‘노킹 온 헤븐스 도어’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두 남자를 통해 여행의 의미를 본질적으로 생각할 기회를 제공한다. 그들은 한 번도 바다를 본 적 없기에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그 여행의 과정에 추억이 될 수많은 일을 저지른다. 마모된 삶 끝으로 가는 여행은 곧 천국의 문을 두드리는 여정이 되고, 죽음의 순간 바닷가에서 그들은 천국을 보게 된다. 밥 딜런의 동명 음악이 흐르는 겨울 바닷가에 앉아 마지막 술을 나누는 두 남자의 모습은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 후로도 오랫동안 머릿속 영사막에 남아 있다.
그들은 지상을 떠나기 전 자신의 지도에 그 바다의 이름을 추억으로 새긴다. 어쩌면 두 남자의 여행은 우리가 숱하게 지나치는 작은 여행과 일탈의 압축인지도 모른다. 비밀을 만들고 추억을 저장해 천국으로 가기 위해, 우리는 여행을 떠난다. 그 여행의 기록, 지도는 당신의 존재를 그려 넣을 좌표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