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0년 평양에서 개최된 고위급회담. 왼쪽 첫 번째가 강영훈 전 총리다.
전두환 정부 출범 후 강 전 총리는 영국 대사를 맡게 된다. 이 과정에는 그의 육사 교장 시절 제자이던 최창윤 전 총무처 장관과 박용옥 전 국방부 차관, 그리고 노신영 외무부 장관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자유민주주의의 발상지인 영국 대사를 맡는다는 건 외교관에게 커다란 영광으로 꼽힌다. 그는 후일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당시 제자 신세를 좀 졌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런데 3년 반쯤 되던 때 대사관 직원 한명이 공금 5만달러를 횡령한 뒤 귀국명령에 불복하고는 가족과 더불어 미국으로 도주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감독책임을 지고 사표를 제출했다. 정부는 이 문제를 덮고, 가톨릭 신자인 그를 바티칸 대사로 발령냈다. 그로서는 불감청고소원이었다.
그가 후일 노태우 정부 두 번째 총리를 맡은 것은 바티칸 대사 시절과 연관 있다는 말이 있다. 바티칸을 찾은 당시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에게 강 대사가 전 대통령의 국정방향에 대해 쓴 소리를 했는데, 노 대표가 이때부터 그를 마음속으로 존경하게 돼 후일 총리로 기용했다는 이야기다. 이에 대해 강 전 총리는 기억에 없다며 선을 그었다.
그의 총리 시절(1988.12~1990.12)은 88올림픽 이후 각계의 욕구가 폭발적으로 분출되던 시기였다. 5공청산과 맞물려 노동계의 투쟁이 본격화했다. 그럼에도 정국은 여소야대와 대통령의 우유부단한 통치 스타일로 되는 일도 없고, 안되는 일도 없는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부동산 가격이 본격적으로 널뛰어 분당, 일산 등에 신도시를 급히 만들던 때였다.
▼ 총리를 맡게 된 과정을 말씀해주시죠.
“당시 나는 13대 국회의 민정당 전국구 초선의원으로 있었어요. 그런데 12월 초 청와대로 와달라는 연락을 받았어요. 대통령께서 국정 전반에 대해 의견을 듣고 싶다는 거였어요. 대통령께서 저더러 민정당 대표를 맡아달라는 겁니다.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거절했지요. 초선 의원이 어떻게 집권당 대표를 맡습니까. 그런데 그날 오후에 다시 부르시더니 국무총리를 맡아달라는 겁니다. 당시 총리감으로 강원룡 목사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특정 종교의 성직자에게 총리를 맡기는 게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해 제게 부탁한다는 겁니다. 나는 군대 외에 행정 경험이 없다고 말씀드렸더니 대통령께서 ‘누구는 경험이 있어서 합니까? 하다 보면 경험도 생기는 것 아닙니까’라고 하면서 극구 권하시더군요. 미국에서 공부한 민주정치 발전이론을 현실에 적용해볼 수도 있겠다 싶어 수락한 겁니다.”
▼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별명이 ‘물태우’였지요.
“물은 세상의 근본이니 나쁜 뜻이 아니지요. 전임 대통령과 비교해 유하게 정국을 이끌어 그런 별명이 붙은 것 같은데 사실은 원칙주의자입니다. 총리에게 맡긴 일은 일절 터치하지 않았어요. 결코 자잘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또 저 자신은 언제든지 그만둘 각오로 소신껏 일했다고 자부합니다.”
‘김일성 주석 각하’
그에게 총리 시절 가장 자부심을 느끼게 해준 일은 3차례에 걸친 남북총리회담이라고 한다. 남북한 간에 총리급 회담이 열린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는 자신이 군인, 학자, 외교관 등을 지낸 것이 모두 총리회담을 준비하기 위한 과정이 아닐까 싶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총리회담 중 두 가지 일을 겪게 된다. 하나는 김일성 주석의 호칭 문제이고, 또 하나는 북한에 살던 누이동생을 만난 일이다.
▼ 김일성 주석과의 면담은 예정된 일이었나요.
“1차 서울회담 때 북한 연형묵 총리가 청와대로 노 대통령을 예방, 면담했기에 나도 평양에 가면 주석궁을 방문할 기회가 있겠거니 생각했지요. 2차 회담 이틀째인 날 오후 3시에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널찍한 홀을 지나 한참 걸어가니까 응접실같이 보이는 문 앞에 김 주석이 서서 기다리고 있더군요. ‘이 사람이 6·25를 일으킨 사람이로구나’ 생각하니 적지에서 적군 사령관을 만난 듯한 긴장이 느껴지더군요. 그러나 거만하거나 무례하지도 않았고 먼 길 온 친구를 맞아주는 촌로의 인상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