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교적 전통이 지배해온 아시아 국가들도 예외가 아니다. 최근 마잉주(馬英九) 대만 신임 총통의 부인 저우메이칭(周美靑)의 퇴직 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이 빚어졌을 때도 대만 유권자들은 ‘총통 부인이 되더라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둘 필요가 없다’는 데 더 많은 표를 던졌다.
정치적 야심을 가진 직업여성들 역시 대통령 주변의 조연에 만족하지 않고 직접 주연으로 발탁되려고 나서는 경우가 늘어날 전망이다. 스스로의 정치적 비전으로 정면승부를 거는, ‘제2의 힐러리’를 목표로 뛰는 퍼스트레이디가 더 많이 생겨날 것이라는 얘기다. 그 대표적 인물이 지난해까지 10년간 영국 노동당 정부를 이끈 토니 블레어 총리의 부인 셰리 블레어 여사다. 셰리는 정치적 이력이나 대중적 지명도에서 ‘제2의 힐러리’라 해도 손색이 없을 만한 잠재능력을 갖췄다.
힐러리보다 못할 것 없다?
셰리는 여러 면에서 힐러리와 비교된다.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젊은 나이에 퍼스트레이디가 됐다. 셰리가 다우닝가 10번지 총리공관에 입성한 것은 43세가 되던 해였다. 클린턴이 취임했을 때 함께 백악관에 입성한 힐러리도 45세에 불과했다.
두 사람 모두 외향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을 지녔으며 언론과 대중의 시선을 끌 만한 미모의 소유자라는 데에도 별 이견이 없다. 호탕하게 웃고 대중 앞에서 자신감 있는 제스처를 쓴다는 점에서도 닮았다. 더욱이 ‘정치적 야심이 큰 유명 변호사 출신’이라는 공통점에 이르면 세계 언론들이 셰리에게 ‘영국의 힐러리’ ‘제2의 힐러리’라는 별명을 붙인 것도 지나치지 않다.
게다가 셰리는 힐러리에게서 찾아보기 어려운 ‘따뜻한 어머니’ 이미지도 갖고 있다. 힐러리는 바람둥이 남편의 외도 때문에 화목한 가정을 이끄는 어머니의 이미지를 얻는 데는 실패했다. 이에 비해 셰리는 블레어 총리를 뒷바라지하면서도 4남매를 모두 훌륭하게 키워냈다. 가끔씩 뜨개질로 자녀들의 옷을 만들어 입히는 장면이 공개되기도 했다. 그래서 셰리는 ‘영국 여성들을 가장 스트레스 받게 하는 여성’이라는 말도 들었다. 고액 연봉의 변호사 업무와 자녀 양육 두 가지 모두 완벽하게 해내 직업과 가정 사이에서 고민하는 많은 여성에게 열등감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토니 블레어의 현직 총리 시절부터 이렇게 언론의 조명을 받던 셰리가 다우닝가 10번지를 떠난 지 1년이 채 안 돼 최근 자서전을 펴냈다. 제목은 ‘나 자신을 말한다(Speaking for Myself)’. 셰리는 이 책에서 블레어와의 결혼 생활, 아이들과의 관계 등 사생활은 물론 노동당 내 정치역학, 특히 블레어가 물러나기 직전까지 갈등을 빚은 고든 브라운 현 총리와의 권력암투 비화 등을 자세하게 털어놓았다.
‘자서전 정치’
현직 총리 부인 때부터 튀는 행동으로 언론의 관심을 끈 셰리가 400쪽이 넘는 두꺼운 자서전을 펴냈으니 신변잡기에 열광하는 영국 신문들이 이를 그냥 놓아둘 리 없다. ‘더 타임스’와 ‘더 선’ 이 연재에 나섰고 공영방송인 BBC 라디오도 며칠에 걸쳐 자서전 내용을 그대로 소개하는 특집 프로그램을 방송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 자서전에 대한 영국 언론들의 총체적 평가는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특히 혹평의 대상이 된 것은 독자의 흥미를 자극하기 위한 직설적 묘사와 표현. ‘스코틀랜드 여행길에 피임도구를 챙기지 않아 마흔다섯에 막내아들을 가졌다’거나 ‘그날 이후 남편 토니를 더 잘 알게 됐다’는 등의 에로틱한 표현들이 구설에 올랐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서평란에서 ‘셰리 블레어가 정치적 폭로를 예고해놓고서는 정작 성적인 암시를 통해 책을 팔려고 한다’고 비난을 퍼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