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7월호

CEO들이 열하(熱河)로 간 까닭은?

경제난국 돌파구는 인문학에… 대륙으로 가라! 연암을 느껴라!

  • 고승철 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cheer@donga.com

    입력2008-07-09 16: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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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물가, 저성장, 비전 부재…수렁에 빠진 한국경제

    서울대 인문학 최고지도자과정 CEO들, “아드 폰테스(원천으로)!”

    골프, 쇼핑, 한식당 없는 3박4일 공부여행

    험준한 고북구 만리장성에서 심신을 씻어내다

    건배사 “인사불성!”…‘인문학 사랑하면 불가능이 성공으로’



    이구동성 “생애 가장 보람 있는 해외여행”

    한국경제가 어렵다. 고물가, 저성장 소식에 온 국민이 우울하다. 기업의 운명을 책임진 최고경영자(CEO)들의 어깨는 또 얼마나 무겁고 그들의 고뇌는 오죽 깊으랴. 이맛살을 찌푸린 채 앉아 있기만 해서는 해법을 찾지 못한다. 그렇다. 드넓은 대륙으로 달려가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키우자. 200여 년 전 연암 박지원 선생이 남긴 ‘열하일기’에서 창조성과 실용정신을 배우자. 인문학으로 경영 화두를 풀자. 이런 각오와 열정을 품은 CEO 20여 명이 중국 청더(承德·열하의 현재 지명)로 답사여행을 떠났다. 고승철 전문기자가 동행 취재했다.
     


    CEO들이 열하(熱河)로 간 까닭은?
    최고경영자(CEO)들이 열하(熱河)로 간 까닭은?

    이 물음은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영화를 연상시킨다. 1989년 제42회 로카르노 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작인 이 영화는 여러 평론가에게서 ‘한국 영화사상 최고 명작’이란 평가를 받았다. 배용균 감독의 이 작품은 구도를 향한 승려들의 치열한 수행 과정을 환상적인 영상미로 구현했다.

    한국의 CEO 및 CEO급 인사 28명은 5월29일~6월1일, 3박4일 일정으로 중국 청더를 찾았다. 조선이 낳은 불세출의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朴趾源·1737~1805)의 발자취를 찾아서…. 1780년(정조4년) 연암은 청나라 황제 건륭제(1711~99)가 머무는 열하를 방문하고 역대 최고의 기행문이라는 ‘열하일기’를 남겼다. 열하일기는 ‘거대한 북’과 같은 책이다. 자그마한 북채로 두드리는 사람은 작은 소리만 듣지만 큼직한 북채로 힘껏 때리면 웅장한 소리로 화답한다. 그 속엔 경제, 외교, 국방, 생활, 문화 등에 관한 온갖 방책이 담겼다.

    CEO들은 연암의 고뇌를 가슴으로 느끼고, 연암의 지혜를 머리로 받아들이려 열하 순례에 나섰다. 연암의 정기를 이어받아 험난한 경영환경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불태웠다. 오늘날 경영 여건은 어떤가. 국제 원유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지 않는가. 철광, 알루미늄, 곡물 등 다른 원자재 값도 춤춘다. 원화 약세가 지속돼 원자재 수입대금을 결제하는 업체는 허리가 휜다.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주택 담보대출) 사태의 여진(餘震)도 만만찮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지 석 달이 지났건만 경제정책에선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 애써 마련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미국산 쇠고기 회오리바람 때문에 허공으로 날아갈지 모른다. 일상적인 방법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복잡계 상황이라 할 만하다. CEO들은 이런 내외 변수로 가슴이 옥죄어진다.

    “연암의 눈으로 돌파구 찾자”

    “예서 머무를 수 없다. 국제경제 탓만 할 게 아니다. ‘기업 프렌들리’를 외치는 정부 말만 믿고 팔짱을 끼고 기다릴 수 없다. 우리가 나서자. 아이디어를 짜내자. 대륙에 가서 한국을 쳐다보며 돌파구를 찾자. 우리에겐 위대한 스승 연암 박지원 선생이 있다.”

    CEO들은 이렇게 외치며 의기투합했다. 이들은 제2기 서울대 최고지도자 인문학과정 수강생들이다. 2007년 하반기에 제1기 과정이 개설되자 경영인들이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이색적인 모습 때문에 이목을 끌었다. 오래전부터 경영인들을 사갈시(蛇蝎視)하는 학풍을 지닌 서울대 인문대에서 이 과정을 열었다는 점도 파격이었다. 인문대 교수 상당수는 ‘인문학의 위기’가 돈을 좇는 풍조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한다. 새 과정의 명칭은 중세 네덜란드의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1466~1536)가 갈파한 “아드 폰테스(Ad Fontes·원천으로)!”란 명구를 빌려 AFP(Ad Fontes Program)라 붙였다.

    제1기 수강생으로 김우식 한석수력발전 회장, 김인철 LG생명과학 사장, 백경호 우리CS자산운용 대표, 유문선 유진기업 사장, 이민화 기술거래소 이사장, 이철우 롯데쇼핑 사장, 주장건 ㈜세종 회장 등의 CEO들이 등록했다. 김병일 전 기획예산처 장관, 한갑수 전 농림부 장관, 허상만 전 농림부 장관 등 전직 장관 3명도 인문학 공부에 동참했다.

    매주 화요일 오후 6~10시에 진행되는 강의가 문·사·철(文史哲)을 골고루 아우르는 알찬 콘텐츠이며 “이를 통해 경영 현장에서 응용할 수 있는 무궁무진한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입소문이 퍼지자 2008년 상반기의 제2기 수강생 모집 때는 쟁쟁한 지원자들이 몰려들었다. 경쟁률이 3대 1에 달했다.

    CEO들이 열하(熱河)로 간 까닭은?
    제2기의 CEO 수강자는 김낙회 제일기획 사장, 김명곤 SK에너지 R&M 사장, 김승범 나다텔 대표, 김영곤 ㈜북21 대표, 김재우 아주그룹 부회장, 김태오 ㈜서브원 사장, 문대원 동화산업 회장, 문성환 ㈜휴비스 대표, 민경조 코오롱그룹 부회장, 박병원 우리금융지주 회장, 서승화 한국타이어 사장, 송인회 한국전력기술 사장, 안경태 삼일회계법인 회장, 유경선 유진그룹 회장, 윤동한 한국콜마 회장, 윤석규 아이케이 대표, 이지형 골드만삭스자산운용 대표, 이현구 까사미아 대표, 이화경 온미디어 사장, 정성립 대우정보시스템 회장, 조성익 증권예탁결제원 사장, 최동수 한영알코비스 대표, 최중희 오월커뮤니케이션 대표, 최창원 SK케미칼 부회장, 허기호 한일시멘트 사장, 허태수 GS홈쇼핑 대표 등 유명 경영인 들이다.

    이 가운데 문대원 회장, 박병원 회장, 최동수 대표 3명은 경기고 67회 동기생이어서 휴식 시간엔 부담 없이 반말로 담소를 즐긴다. 문대원 회장, 문성환 대표, 안경태 회장 등은 서울대 상대 71학번 동기생인데 “이 과정에 등록하자고 사전에 모의한 것도 아닌데 친한 동창들이 함께 수강하게 됐다”고 밝혔다. 유경선 회장은 “동생(유문선 유진기업 사장)이 제1기생이어서 내가 동생의 후배가 되는 셈”이라고 했다.

    이들 대부분은 이미 경영학 최고경영자과정(AMP)을 마쳤다. 어느 수강자는 “기업에 수십년 몸담았기에 AMP 강의는 뻔히 아는 내용인 경우가 많아 때로는 지루했다”면서 “AFP 과정은 강의마다 신선한 내용이어서 큰 자극을 받는다”고 털어놓았다.

    제2기 수강자 45명 가운데는 비(非)경영인도 몇몇 눈에 띈다. 김지철 소망교회 담임목사, 윤세리 법무법인 율촌 대표변호사, 윤홍근 율촌 파트너 변호사, 이동철 내과의원 원장, 이상업 전 경찰대학장, 문재숙 이화여대 교수, 최유경 SK건설부속치과 원장 등이다. 이상업 전 학장은 제23호 김죽파류 가야금산조 인간문화재인 문재숙 교수(사단법인 김죽파류 가야금산조보존회 이사장)와 부부다. 이들 부부의 딸인 미스코리아 이하늬 양은 모델 출연료로 부모의 AFP 등록금을 대는 등 효녀로 알려졌다.

    CEO급 인사로는 김기열 KTF 부사장, 김영섭 LG CNS 부사장, 김영환 KT 전무, 김인환 하나은행 부행장보, 문재우 금융감독원 감사, 유철준 우림건설 부사장, 홍은주 우주U&B 감사, 이백순 신한금융지주 부사장, 임춘수 삼성증권 전무, 장명철 한국전력 전무, 주덕영 한국반도체산업협회 부회장 등이 등록했다. 최창원 부회장과 최유경 원장, 윤홍근 변호사와 홍은주 감사도 부부 수강생이다.

    ‘열하일기’ 완벽 예습

    CEO들은 열하를 찾기에 앞서 열하일기와 연암에 대해 미리 공부해야 했다. 학교 측에서는 두 달 전에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고미숙·길진숙·김풍기 옮김) 상·하권과 ‘연암 박지원과 열하를 가다’(최정동 지음) 등 두툼한 책 3권을 예습 자료로 나눠줬다. 청더 시내를 조감하는 지도도 미리 배포해 지리감을 익히게 했다. 일부 수강자들은 ‘열하광인’(김탁환 지음), ‘허세욱 교수의 속 열하일기’(허세욱 지음), ‘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설흔·박현찬 지음) 등 관련 서적을 찾아 읽는 열성을 보이기도 했다.

    5월27일 정규 강의 시간에는 연암 전문가인 김명호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를 초빙해 ‘연암 박지원의 생애와 사상’이란 특강을 들었다. 또 배경 지식을 늘리기 위해 구범진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로부터 ‘청제국과 조선’이라는 강의도 들었다. ‘연암집’을 국역한 김명호 교수는 강의 도입부에서부터 수강생들의 관심을 끌었다.

    “연암 선생은 우리 문학사의 최고봉에 속하는 위대한 작가입니다. 오늘날 연암과 그의 문학에 대한 지식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갖춰야 할 국민적 교양입니다. 중고교 교과서에 ‘양반전’ ‘허생전’ ‘호질’은 물론 ‘열하일기’까지 소개됐고 연암의 문학사상을 집약한 ‘법고창신(法古創新)’이라는 용어가 고사성어처럼 친숙하게 쓰입니다. 연암이 사또로 재직하면서 ‘열녀 함양 박씨전’과 같은 빼어난 작품을 썼던 안의(安義·경남 함양군 안의면)는 어느덧 학술답사 코스의 하나로 자리 잡았고 중국의 열하까지 탐방하는 여행도 줄을 잇는 실정입니다.

    21세기에 들어선 오늘날까지 연암에 대한 관심이 갈수록 고조되는 까닭은 대체 무엇일까요? 무엇보다도 그의 문학이 금강산 일만이천봉처럼 기기묘묘하게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연암이 열하일기에서 제시한 실학사상은 청나라의 선진문물 수용을 통한 부국책입니다. 당시 조선 양반들은 경제보다 도덕을 우선시하는 유교사상으로 인해 상공업이나 농업의 실무에 무지하고 무관심했습니다. 또 청나라는 오랑캐요, 조선은 소중화(小中華)라는 인식이 골수에 박혀 청나라의 선진문물조차 싸잡아 배격했습니다. 그러므로 실학사상을 받아들이려면 양반들의 고루한 사고방식부터 바꿔놓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구범진 교수는 “조선은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의 위상을 애써 깎아내렸지만 청 왕조는 268년 동안 중국을 지배한 거대한 제국이었다”면서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을 보면 병자호란 항복조인식에서 청 태종이 인조로부터 술잔을 받고 오줌을 누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청 태종의 오랑캐 만행을 부각시키려 한 것으로 사실(史實)을 왜곡시켰다”고 지적했다. 구 교수는 청을 ‘키메라의 제국’으로 규정했다. 사자 머리, 염소 몸, 뱀 꼬리 모양의 키메라는 한 몸속에 몇 가지 유전자(DNA)를 가진 전설적인 동물이다. 청 제국은 몽골과 명 왕조를 함께 계승한 성격을 지녔다는 것이다.

    ‘달리면서 공부하자’

    CEO들이 열하(熱河)로 간 까닭은?

    제2기 서울대 최고지도자 인문학과정을 수강하는 CEO들은 3박4일 일정으로 연암 박지원의 발자취를 찾아 중국 청더를 방문했다.

    AFP 2기생 가운데 열하 기행에 나선 참가자는 28명. 배우자와 함께 여정에 오른 수강자 커플은 17쌍이었다. 불참자들은 국내외 회사 업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여행을 포기하고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다니는 소망교회의 김지철 목사는 일요일이 낀 여행 일정 때문에 참가하지 못한 듯했다.

    5월29일, 중국 베이징 공항에 도착하자 8월에 열리는 올림픽 분위기가 벌써 느껴진다. 새 공항은 거대한 용 모양의 외양으로 현대적 감각을 살려 지었다. 참가자들은 1호차, 2호차로 구분된 버스를 타고 베이징에서 230㎞ 가량 떨어진 허베이(河北)성 청더로 향했다.

    AFP 수학여행의 특징은 버스 안에서도 강의가 진행된다는 점이다. ‘달리면서 공부하자’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3월 22~23일 안동 하회마을 답사여행 때도 이태진 서울대 인문대학장, 이강재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등 AFP 전담 교수진은 마이크를 잡고 강의했다. ‘관광안내’ 수준이 아니라 준(準)학술 수준의 강의다. 강의자료도 사전에 배포한다. 버스 안에서 자료를 봐가며 수강한다. 베이징~청더에서도 AFP 부주임 교수인 이강재, 배철현 교수가 열강했다. 한국사 분야의 석학인 AFP 주임교수 이태진 학장은 사정상 이번 여행엔 불참했다. 대신 연암 전문가인 김명호 교수가 동참했다.

    중국 고대언어 및 ‘논어’ 전문가인 이강재 교수는 베이징에서 2년간 유학한 경험도 있는 만큼 대륙에 발을 딛자마자 더욱 활기를 보였다. 버스 안에서 마이크를 잡은 이 교수는 “배포한 교재를 참고하면서 강의를 들어달라”고 말문을 연 뒤 ‘중국의 문자 정책과 한자 사용’을 주제로 강의를 시작했다.

    “한자는 획수가 많고 복잡해서 쓰고 기억하기에 불편하지요? 중국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오래전부터 한자를 쓰기에 편하도록 바꾸어왔습니다. 아편전쟁 패배 직후엔 한자를 없애고 라틴문자로 음을 표기하려는 운동도 벌어졌습니다. 문호 루쉰(魯迅·1881~1936)은 ‘한자를 없애지 않으면 중국은 반드시 망한다(漢字不滅, 中國必亡)’라는 극단론을 펼치기도 했지요.

    1949년 이후 많은 노력과 시행착오 끝에 △표준어를 통한 공동언어 사용 △문어체를 구어체로 바꾸는 것 △문자를 간단하게 만드는 것 △표음 방법을 알파벳 자모로 만드는 것 등 4가지 측면의 문자정책 방향이 정해졌습니다. 오늘날 한국인이 읽기 어려운 간화자(簡化字)가 본격적으로 만들어졌지요. 간화자 패턴을 익히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한자 음성을 알면 활용도가 높습니다. 소나무 그림은 누구를 칭송할 때 씁니다. ‘소나무 송(松)’과 ‘칭송할 송(頌)’이 발음이 같기 때문이지요. 대나무는 축하용이지요. ‘대나무 죽(竹)’과 ‘축하할 축(祝)’이 중국어로는 동음입니다. ‘새우 하(鰕)’와 ‘화합할 화(和)’도 동음이므로 새우 그림은 화합을 상징하지요.

    한자는 시각적 활용도도 매우 높습니다. 원래 사물 모양에서 비롯된 글자이므로 로고 디자인에서 다양하게 활용될 수 있습니다. 문자 자체가 예술이 될 수 있지요. 한자는 재미있게 생각하는 순간부터 쉽게 느껴집니다. 현대 중국 간체자도 이제 반드시 익힐 필요성을 느끼지요? ‘마음이 없으면 보이지 않는다(心不在焉, 視而不見)’는 말을 뒤집으면 ‘마음만 있으면 한자는 보인다, 즐겁게 행복하게…’라고 할 수 있겠지요?”

    옛 열하인 청더에 도착하니 수려한 산으로 둘러싸인 고도(古都)의 풍모가 돋보인다. 이곳의 별궁에서 강희제(1654~1722) 이후 청 황제들은 여름 몇 달을 보냈다. 한여름에도 최고 기온이 24℃를 넘지 않아 시원한 지역이다. 황제들은 단순히 피서용으로만 거대한 별궁을 지은 게 아니다. 몽골, 티베트, 위구르 등 북방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몸소 국경지대 가까이에 머문 것이다. 외교 전략 요충지로 열하를 활용했다.

    청으로 간 조선 외교사절단

    연암이 열하를 방문할 즈음의 시대 상황을 살펴보자. 조선은 병자호란으로 청에 국토를 처절하게 유린당한 후 1637년(인조 15년)에 청나라와 수교했다. 이후 19세기 말까지 250여 년 동안 조선 정부는 연 평균 2회 이상 외교사절단을 청에 보냈다. 지금의 오키나와인 유구(琉球)가 2년에 1회, 태국이 3년에 1회, 베트남이 4년에 1회, 라오스나 버마가 10년에 1회 사절단을 파견한 것에 비하면 매우 빈번한 교섭을 가진 셈이다. ‘조공을 바치러 청에 갔다’고 비하하는 시각도 있지만 특산품을 주고받는 조공무역 성격이었으므로 조선이 일방적으로 불리한 것만은 아니었다.

    장기간에 걸쳐 청과 접촉했으니 지금까지 알려진 견문록만 해도 200여 종이 넘는다. 이를 통칭해서 ‘연행록(燕行錄)’이라 한다. 베이징을 연경(燕京)이라고도 하는데 연행록은 연경을 다녀온 기록이라는 뜻이다. 연암의 열하일기는 수많은 연행록 가운데 단연 우뚝 선 저술이다. 1780년 음력 5월25일 연암은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 생신을 축하하는 사절단의 일원으로 중국 땅으로 출발했다. 사절단 단장 격인 정사(正使) 박명원은 자신의 팔촌동생인 연암의 견문을 넓혀주려 비공식 수행원인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 데려갔다. 당시 44세인 연암은 탁월한 문인이었지만 벼슬을 하지 못한 선비에 불과했다.

    CEO들이 열하(熱河)로 간 까닭은?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사절단 일행은 그해 6월24일 압록강을 건너 광활한 벌판을 걷고 험준한 산을 넘어 8월1일 베이징에 도착했다. 그 무렵 건륭제는 열하의 별궁에 머물고 있었으므로 생신 축하 행사도 그곳에서 진행됐다. 조선 사신은 베이징에서 열리는 망하례(望賀禮)에만 참석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조선 사신도 열하에 오라는 황제 특명이 내려왔다”는 통보를 받았다. 사절단 일부는 8월5일 열하로 서둘러 출발했다. 조선 사절단은 그전에 열하에 한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베이징에서 만리장성의 한 관문인 고북구(古北口)를 거쳐 열하까지 가는 길은 험한 산길이었다. 시일이 너무 촉박해 하룻밤에 9번이나 격류를 건넌 적이 있었다. 그날 상황을 기록한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는 열하열기 가운데 압권으로 꼽힌다. 한글로 풀어쓴 이 부분을 옮겨보자.

    물가에 다다랐으나, 길은 끊어지고 물은 아득히 넓어서 도무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저 허물어진 집들 너덧 채만이 물을 의지하여 서있을 뿐이었다. 제독이 말에서 내려 손수 문을 두드렸다. 수백 번 호통을 치고 나서야 겨우 주인이 얼굴을 내민다. 그러고는 문 앞에서 곧장 물 건너는 법을 가르쳐준다. 돈 500 닢으로 그를 고용하여 정사의 가마를 인도하게 해 마침내 물을 건넜다. 강이 어찌나 험하고 구불구불한지, 무려 아홉 번이나 건너고 나서야 겨우 물을 벗어날 수 있었다. 물 밑바닥의 돌엔 이끼가 끼어서 몹시 미끄러운 데다 물이 말의 배까지 넘실거리는 바람에 다리를 옹송거리고 두 발을 모은 채 한 손으로 고삐를 잡고 또 한 손으론 안장을 꽉 잡았다. 끌어주는 이도 부축해주는 이도 없건만, 그래도 떨어지지 않는다. 이로 인해 비로소 말을 다루는 데도 방법이 있음을 깨달았다.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목숨을 걸다시피 한 강행군이 이어졌다. 잠도 거의 자지 못했다. 연암은 8월8일 일기에서 “객점에 이르니 곧 밥을 내어 왔으나 심신이 피로하여 수저가 천근이나 되는 듯 무겁고, 혀는 백근인 양 움직이기조차 거북하다”며 “상에 가득한 소채나 적구이가 모두 잠 아닌 것이 없을뿐더러 촛불마저 무지개처럼 뻗쳤고 광채가 사방으로 퍼지곤 한다”고 적었다. 사절단 일행은 드디어 8월9일 열하에 도착했다. 이들은 11일에 건륭제를 알현했다. 연암도 배석했다.

    AFP 참가자들은 이런 배경 지식을 쌓은 다음 첫 답사 장소인 보녕사(普寧寺)에 도착했다. 228년 전 연암이 강행군했듯이 빠듯한 일정이 시작됐다. 먼저 사찰 직영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절 식당이어서 모든 그릇이 목기였다. 라마 불교 사찰인 보녕사는 1755년 건륭제가 몽골과 티베트와의 관계를 고려해 지은 절이다. 잠재적 적대국인 그들 나라의 국교가 라마 불교여서 그들을 회유하기 위해서다.

    보녕사 입구에는 1994년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는 금속판이 붙어 있다. 이 사찰의 대표적인 문화재는 세계 최대의 목조불상인 천수천안(千手千眼) 관세음보살상. 거대한 나무를 깎아 만들었다는 높이 20m의 이 불상은 몸에 40개의 팔이 달렸다. 팔 하나에 눈동자 25개가 새겨져 모두 1000개의 눈이 붙은 셈이다. 많은 눈으로 중생을 보살피며 그들의 악업을 정화한다는 것이다.

    보녕사에서 나와 멀리 산을 바라보니 거대한 방망이 모양의 바위가 우뚝 서있다. 경추봉(磬錘峰)이라고 하는 열하의 명물이다. 높이가 38m, 지름이 10m라고 한다. 해발 596m인 경추봉 부근까지 올라가는 15인승 소형 전동차를 탔다. 좁은 산길을 얼마나 빨리 달리는지 놀이공원의 청룡열차를 탄 기분이다. 경추봉 입구에서는 가파른 언덕길로 30여 분간 걸어가야 한다. 경추봉 바로 아래에까지 오르니 바람이 워낙 거세게 불어 몸이 날아갈 듯하다.

    “판첸 라마를 알현하라”

    답사여행 이틀째인 5월30일 오전 7시30분경에 호텔 식당에서 일찌감치 식사를 마치고 곧 답사에 나섰다. 첫 도착지는 수미복수묘(須彌福壽廟). 건륭제의 칠순 생신을 축하하러 티베트의 법왕 판첸 라마가 방문하기로 하자 그를 위해 지은 건물이다. 티베트 라사에 있는 시카체를 본떠 세웠다. 연암 일행이 도착하기 직전인 1780년 7월경에 완공됐다. 판첸 라마는 티베트 불교에서 달라이 라마에 이은 제2인자. 최고지도자인 달라이 라마가 어리면 판첸 라마가 섭정을 하므로 때에 따라서는 판첸 라마가 사실상 영도자 노릇을 한다. ‘달라이’는 몽골어로 바다를 뜻하며 ‘라마’는 상인(上人), 즉 ‘덕이 높은 스승’을 의미한다. ‘판첸’은 ‘위대한’이란 뜻이다. 달라이 라마, 판첸 라마는 세습이 아니라 전생(轉生)에 의해 법통을 계승한다 하여 활불(活佛)로 추앙된다.

    황교(黃敎)는 라마 불교의 일파로 총카파(宗喀巴) 스님이 반야중관 사상과 밀교를 융화해 일으켰다. 노란색 옷을 입고 끝이 뾰족한 노란색 모자를 써 황모파(黃帽派)라 불리기도 했다. 그전의 유력 종파는 빨간색 모자를 써 홍모파(紅帽派)라 불렸다. 황교는 몽골이 세운 원(元)에 전파돼 원의 국교가 됐다. 16세기 후반엔 몽골 전역에 퍼져 전성기를 구가했다. 티베트에서도 황교의 교세가 눈부시게 뻗어나 신권(神權)정치 체제가 굳어졌다. 청 왕조는 티베트 불교를 적극 옹호하는 방식으로 티베트와 유화 관계를 유지했다. 청조는 몽골과 중국 내지에서의 황교 포교활동도 장려했다. 1652년 강희제는 제5대 달라이 라마를 베이징에 초빙해 그를 위해 신축한 서황사(西黃寺)에 모시고 대대적으로 환대한 바 있다. 이는 준가르(Jungar)와 같은 몽골부족이 황교를 신봉하므로 몽골족을 달래기 위해서나 티베트와의 동맹을 위해서나 필요한 조처였다.

    CEO들이 열하(熱河)로 간 까닭은?

    1755년 건륭제가 몽골과 티베트와의 관계를 고려해서 지은 절 ‘보녕사’.

    건륭제가 통치하던 시기에 영국은 인도에 진출했다. 영국은 인도 북방에 자리 잡은 티베트에 눈독을 들였다. 청국은 이를 간파하고 티베트를 놓치지 않으려 라마 불교를 더욱 옹호했다. 건륭제가 판첸 라마 6세를 초청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당시 달라이 라마는 8세의 어린이였고 판첸 라마는 40대 중년이어서 제2인자인 판첸 라마가 사실상 티베트 불교를 이끌었다. 판첸 라마 6세는 티베트에서 걸어서 열하까지 오는 데 약 1년이 걸렸다. 그는 열하에 머물다 베이징을 방문했다가 천연두로 사망했다.

    연암 일행이 열하에 도착한 이튿날인 8월10일 건륭제의 군기대신이 찾아와 “서번(西番)의 성승(聖僧)을 만나라는 게 황제의 뜻”이라 전했다. 조선 사절단은 당황해하면서 사양했다. “중국 인사와는 스스럼없이 만나도 되지만 여느 외국 사람과는 함부로 사귀지 못하는 것이 조선 국법”이라고 밝혔다. 군기대신은 돌아갔다가 다시 나타나 “성승 알현은 황제의 명령”이라 잘라 말했다.

    조선 사신들은 낯빛이 사색이 됐다. 유교를 국가통치 이념으로 삼는 조선의 외교관이 남의 나라 승려를 만난다면 귀국 후에 구설에 오를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일부 사신은 “황제가 괴상한 일을 시키는 것을 보니 오랑캐임이 틀림없다”며 투덜거렸다. 황제의 명령을 어기면 운남(雲南)이나 귀주(貴州) 같은 오지에 유배 가는 형벌을 받을지 모른다. 사신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불안에 떨 때 모험심이 강한 연암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운남, 귀주에 가볼 것인가. 그런 곳에 가면 얼마나 진귀한 광경을 많이 구경할 것인가. 열하일기에 따르면 연암은 중국의 낯선 땅 귀양살이를 상상하고 기쁨을 억누르지 못하고 마당으로 뛰쳐나왔다. 그는 눈에 띄는 하인을 불러 “달려가서 술을 사오되 돈을 아끼지 말라”면서 “이제부터 자네와는 이별”이라 외쳤다. 술을 마시고 방안으로 들어온 박지원은 기대와는 다른 이야기를 들었다. 정사 박명원이 판첸 라마를 알현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연암은 실망했다.

    조선 사신들은 8월11일 아침에 판첸 라마를 만나러 수미복수묘에 도착했다. 연암도 따라왔다. 판첸 라마가 기거하는 건물인 길상법희전(吉祥法喜殿) 앞에서 이들은 멈췄다. 연암 일행은 건물 안으로 안내를 받아 들어갔다. 판첸 라마는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연암은 그의 외모를 자세히 살피고 열하일기에 기록했다. 이방인의 외모에 대해 악평을 했다. 이는 귀국 후 조선 사신이 승려를 면담했다는 비난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누런빛 우단으로 만든 관을 썼는데 말갈기 같은 털이 달렸고 관 모양은 가죽신처럼 생겨 높이가 두 자 남짓 됐다. 금으로 짠 선의(禪衣)를 입었는데 소매가 없이 왼쪽 어깨에 걸쳐서 온몸을 옷으로 쌌다. 얼굴빛은 누렇고, 코는 쓸개를 떼 달아놓은 것 같으며, 눈썹은 두어 치나 되고, 흰 눈동자가 겹으로 되어 음침하고 컴컴해 보였다. 비록 몸뚱이가 방에 가득하나 위엄을 볼 수 없고 멍청한 것이 바다 귀신과 같다.(출전)


    수미복수묘에서 가장 돋보이는 건물은 묘고장엄전(妙高莊嚴殿)이라는 전각이다. AFP 답사여행단 멤버들은 이 전각을 내려다보고 저마다 감탄사를 내뱉었다. 금칠을 한 기와가 햇빛을 받아 번쩍거리는 장관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지붕 위에는 용 8마리가 승천하듯 꿈틀거렸다. 이곳을 찾은 서양인 관광객들도 “원더풀”을 연발했다. 용과 기와를 만드는 데 엄청난 분량의 금이 들어갔을 텐데 그것만으로도 당시 청 왕조의 위용을 짐작할 수 있다.

    티베트 사찰 본뜬 ‘보타종승지묘’

    보타종승지묘(普陀宗乘之廟)로 발길을 돌렸다. ‘보타종승’은 티베트어인 포탈라 궁을 음역한 것이다. 달라이 라마가 거주하는 티베트의 포탈라 궁을 재현해 놓았다. 멀리서 보면 티베트 포탈라 궁과 흡사하다. 그래서 ‘소(小) 포탈라 궁’으로 불린다. 건륭제 36년(1771)에 완공됐다. 건륭제는 황태후의 80세 생일, 자신의 회갑(1770)을 맞아 이 건물을 짓도록 했다. 불교의 원력(願力)으로 이들 모자의 장수를 기원하기 위해서다. 보타종승지묘는 티베트 사찰을 본떠 지은 여러 사찰 가운데 가장 크다. 이 사찰이 완공되던 해에 티베트, 몽골, 신강, 청해(靑海) 등의 사절단이 모두 열하에 모여 청에 귀속하는 계기가 됐다.

    서울의 숭례문과 비슷한 크기의 정문 양쪽엔 코끼리 석상이 버티고 섰다. 코끼리는 대승불교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코끼리의 귀와 꼬리는 잘렸다. 청 왕조의 기를 꺾으려고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자른 것으로 추정된다. 정문을 들어서니 거대한 석조 비석이 든 비각이 앞을 가로막는다. 비석에 새겨진 글씨는 한자, 만주어, 몽골어, 티베트어 등이다. 비각 뒤편에는 ‘5탑문’으로 불리는 건물이 나타나고 그 상단부에는 동물 5마리 모형이 앉았다. 티베트 불교의 5대 종파를 뜻한다고 한다. 한가운데가 주력 종파인 황모파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CEO들이 열하(熱河)로 간 까닭은?

    보타종승지묘는 티베트의 포탈라 궁을 재현했다. 그래서 ‘소(小) 포탈라 궁’이라고도 불린다.

    이어지는 계단을 오르니 우뚝 선 9층 건물이 나타난다. 높이 43m, 폭 60m에 이르는 큼직한 건물이다. 내부에 미로처럼 설치된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맨 위층에 가서 바깥으로 나가니 사찰 전체가 눈에 들어온다. 주 건물인 만법귀일전(萬法歸一殿)의 지붕이 눈부시게 빛난다. 황금기와로 덮인 지붕은 햇빛을 받아 번쩍거렸다. 이곳을 찾은 프랑스 단체 관광객들은 “쉬페르브(대단하다)!”라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프랑스 남부지역에서 왔다는 이들 노년층 관광객 가운데 어느 할머니는 “2주일 일정으로 중국 주요 지역을 순방하는데 이곳 열하에 오니 볼거리가 많다”고 말했다.

    연암 전문가인 김명호 교수는 연암이 열하를 방문할 때의 상황을 설명했다. AFP 수강생들은 휴대용 소형 마이크를 통해 흘러나오는 김 교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연암 일행이 이곳에 올 당시엔 조선 조정의 재정 상태가 빈약해 사절단에 충분한 여비를 주지 못할 형편이었습니다. 비공식 수행원들은 밀무역으로 경비를 충당하곤 했지요. 조선의 청심환, 한지, 인삼 등이 중국에서 인기 품목이었습니다.

    조선은 만주족이 세운 청에 대해 고개를 숙이지 않겠다는 자존심을 가졌습니다. 그게 지나쳐서 청의 선진 문물을 일부러 폄훼하기도 했지요. 만주족이 즐겨 입는 옷은 몸에 달라붙는 실용적인 복장인데 그런 것도 기피했답니다. 연암은 이런 편견에서 벗어나 청으로부터 배울 장점을 열하일기에 기록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열하일기는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열린 마음으로 드넓은 세계를 보도록 깨우치게 하는 소중한 문화유산이 아닐까요? 세계화의 도도한 물결을 적극 받아들이면서도 그에 표류하지 않고 주인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화두 아니겠습니까?”

    CEO들은 보타종승지묘를 나와 점심식사를 하면서 세계화를 화제에 올렸다. “한미 FTA가 하루라도 일찍 시행돼야 한국에 유리할 것”이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미국 대권 레이스에 나선 버락 오바마 후보가 자신이 당선된다면 한미 FTA를 재검토하겠다고 발언한 만큼 현재의 부시 정부 때 발효시켜야 한다”는 논리였다.

    오후에는 피서산장에 갔다. 정문의 현판 ‘避暑山莊’은 강희제 친필이라고 한다. 피서산장은 넓이 564만㎡로 주변 담장 길이만도 10㎞에 이르는 거대한 별장이다. 편액 글씨 ‘麗正門’이라는 한자 옆에는 몽골, 위구르, 티베트, 만주 등 각국 문자도 병기됐다. 여러 나라를 아우르겠다는 의지를 담은 편액이다. 피서산장 안에 ‘열하(熱河)’란 글씨를 새긴 비석이 있는데 이는 길이 300m의 자그마한 하천의 이름이다. 더운 물이 솟아 겨울에도 얼지 않는다고 한다. 이 하천에서 도시 이름 열하가 비롯됐다. 비석 앞에는 관광객들이 사진을 촬영하려고 줄을 섰다.

    피서산장에서 청 황제들이 집무실로 쓰던 ‘담박경성전(澹泊敬城殿)’은 남목이라는 고급 목재로 지은 건물로 이름처럼 담박하게 보였다. 비가 오면 목재에서 은은한 향기가 난다고 한다. 담박한 마음으로 백성을 공경하며 통치하라는 뜻이다. 시계박물관인 ‘종표관(鍾?館)’에 들어서니 15세기에 제작된 괘종시계 등 각종 벽시계 수십 개가 전시돼 있다. 이탈리아의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1552~1610)가 1601년 가져온 시계가 중국 최초의 서양식 시계였다.

    고북구를 가다

    여행 사흘째인 5월31일, AFP 일행은 오전 8시에 열하를 떠나 만리장성 쪽으로 향했다. 연암이 베이징에서 열하로 올 때 넘었던 고북구 입구에 도착했다. 이곳은 베이징에서 동북 방향으로 126㎞ 떨어진 지점이다. 베이징~열하의 중간 지점에 있는데 만리장성의 중요한 관문이다. 연암은 이곳을 지난 소회를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라는 명문장으로 남겼다. 이 문장은 1900년 연암집을 발간한 김택영이 ‘조선 5000년 이래 최고의 문장’이라 평가한 바 있다. 연암 자신도 “조선에 돌아간 후 누가 여행 소감을 물으면 이 글을 내보일 것”이라 말할 정도로 애착을 가졌다. 그 일부를 발췌해보자.

    무령산을 따라 배를 타고 광형하를 건너 밤에 고북구를 빠져나왔다. 때는 바야흐로 야삼경, 겹겹의 관문을 나와 장성 아래 말을 세웠다. 높이를 헤아려보니 십여 장이나 된다. 붓과 벼루를 꺼낸 뒤 술을 부어 먹을 갈았다. 장성을 어루만지면서 벽 한 귀퉁이에 이렇게 썼다.

    “건륭 45년 경자 8월 7일 야삼경, 조선의 박지원, 이곳을 지나노라.”

    때마침 상현이라 달이 고개에 드리워 떨어지려 한다. 그 빛이 싸늘하게 벼려져 마치 숫돌에 갈아놓은 칼날 같았다. 마침내 달이 고개 너머로 떨어지자, 뾰족한 두 끝을 드러내면서 갑자기 시뻘건 불처럼 변했다. 마치 횃불 두 개가 산에서 나오는 듯했다. 북두칠성의 자루 부분은 관문 안쪽으로 반쯤 꽂혔다. 벌레소리가 사방에서 일어나고 긴 바람이 싸늘하다. 숲과 골짜기도 함께 운다.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사마대(司馬臺) 장성’이라 불리는 이곳은 1990년에서야 관광객들에게 입장을 허용했다. 잘 수리돼 관광객들이 붐비는 팔달령 장성과는 달리 사마대 장성은 허물어져가는 성벽을 그대로 볼 수 있을 정도로 명대(明代)의 원형을 간직한 곳이다. AFP 참가자들은 연암의 ‘야출고북구기’를 머리에 떠올리며 장성을 트레킹했다. 연암이 술을 부어 간 먹으로 썼다는 글씨를 찾으려 장성 벽을 살폈으나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다. 걸음이 빠른 참가자들은 2시간가량 걸어 제12 관문까지 올라갔다.

    장성에서 내려와 점심을 먹고 베이징으로 이동했다. 버스 안에서 또 강의가 이어졌다. 배철현 교수가 ‘종교의 기원’이란 주제로 특강을 했다. 배 교수는 자신이 미국에서 목사로 활동할 때 작은 교회를 활성화한 사례도 소개했다. 신자 몇 명만 나오는 교회에 홈리스 걸인들을 위한 자선 파티를 열었더니 사람들이 붐비는 곳으로 변모했다는 것이다. 당시에 열성적인 할머니 신자는 100세가 넘었는데 요즘도 가끔 배 교수에게 안부를 전해온다는 것.

    AFP 수강생인 문재숙 교수도 즉석 강의를 요청받고 마이크를 잡았다. 한국 전통음악의 특성에 대해 열강했다. 한국 음악의 느린 박자는 깊은 내면세계에 빠져들게 하는 마력을 지녔다고 강조했다. 속도를 요구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역설적으로 깊은 사유가 필요한데 느린 음악을 들으면 크게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베이징에서는 천주교 성당을 방문해 청대에 전해진 천주교 역사의 현장을 둘러봤다. 성당 마당에서 배철현 교수의 즉석 강의가 있었다. 이렇듯 여행지에서 해당 분야 전문 학자들이 해설을 맡으니 참가자들은 “표피적인 지식만 나열하는 관광 가이드의 설명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감탄한다.

    “인사불성!”

    참가자들은 베이징 시내 호텔 방에 짐을 내려놓고 옷을 갈아입었다. 격조 높은 프라이비트 클럽에서 열리는 만찬에 초대 받았기에 운동화를 벗고 구두를 신었다. 초청자는 AFP 참가자 이화경 사장과 그의 부군인 담철곤 오리온그룹 회장. 오리온그룹은 중국에 진출해 과자 시장 점유율을 높여가는 중이다. 초코파이 등 오리온의 과자는 중국 어린이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마지막 밤인 만큼 약간 여유를 가지고 식사를 했다. 50년 묵은 진귀한 마오타이주로 건배를 했다. AFP 수강자들은 건배할 때 “인사불성!”이라고 외친다. 정신이 나갈 정도로 마시자는 뜻이 아니라 ‘인문학을 사랑하면 불가능도 성공으로’라는 말을 줄인 것이다. 언어감각이 뛰어난 윤동한 한국콜마 회장이 안동 답사여행 때 제2기 회장으로 선출된 직후 건배사로 창작하면서 이제 공식 구호가 됐다. 이날도 “인사불성”이라는 구호가 만찬장 곳곳에서 울려퍼졌다.

    이번 여행에서는 여느 단체여행과는 달리 골프, 쇼핑, 한식당 식사의 3대 관행이 전혀 없었다. 공부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연암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닷새 만에 베이징에서 열하로 갔듯이 AFP 수강생들도 빠듯한 일정을 묵묵히 따랐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인 6월1일, 참가자들의 얼굴엔 만족감이 감돌았다. 김명곤 SK에너지 R&M 사장은 “숱한 해외여행 가운데 가장 보람 있는 여행이었다”면서 “이번에 배우고 느낀 점을 바탕으로 새로운 경영 아이디어를 찾겠다”고 말했다. 김인환 하나은행 부행장보는 “역사에서 교훈을 발견한다는 말의 참뜻을 이해했다”며 “세상 보는 눈을 키워 글로벌 경영환경에 대처할 것”이라 포부를 밝혔다.

    AFP 2기 과정은 7월15일 수료식을 갖는다. 수강자들은 한결같이 “수료 이후에도 인문학에 대한 관심을 갖겠다”고 말한다. 인간에 대한 학문인 인문학을 이해하지 않고는 경영이란 복합적인 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수강자들은 “수치로 계량화할 수 없는 상상력의 원천을 배웠다”고 털어놓는다.

    인문학의 웅숭깊은 맛을 본 수강자들은 수료 직후에 겪을 금단현상을 두려워한다. 매주 화요일 저녁에 공급받던 ‘샘물’을 마시지 못하면 일시적으로 허탈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다. 그래서 일단 7월23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황금의 제국 페르시아’전을 단체 관람하기로 했다. 일부 수강자들은 “내년 초에 문명의 기원을 찾는 답사여행을 가자”면서 회원을 모집하려 한다. 제1기 수료생 일부는 논어 읽기 모임인 ‘시습계(時習契)’를 결성, 공자의 리더십과 삶의 지혜를 함께 공부하고 있다.

    AFP 수강자들이 인문학 발전을 위해 후원하는 사례들도 고무적인 현상이다. 제1기 수료생인 이민화 한국기술거래소 이사장이 앞장서 유망 벤처기업들이 서울대 연구소의 유라시안지역 연구활동을 지원하기로 했다. 2기생인 유경선 유진그룹 회장은 신양인문학술정보관에 시청각 기자재를, 김영곤 북21 대표는 도서 300권을 기증했다.

    AFP 과정이 기대 이상의 호응을 보이는 데 대해 이태진 학장은 “사회 지도층에게 인문학에 대한 갈증이 얼마나 큰지 확인했다”면서 “국가의 기틀에 진정한 영양소가 될 인문학의 발전을 위해 바람직한 발판을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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