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1년 말 지리산 지역에서 전개된 대규모 공비토벌 작전으로 생포된 빨치산들.
1978년에 나온 ‘민족경제론’은 ‘신동아’를 비롯해 ‘창작과 비평’ ‘대화’ ‘세대’ ‘정경연구’에 발표한 18편의 평론을 모은 책이다. ‘신동아’에 발표된 글만도 ‘쌀의 반세기’ ‘경제발전과 농업발전의 제문제’ ‘차관과 경제발전’ ‘자원민족주의의 역사와 현실’ ‘다국적기업의 논리와 행태’ 등 다섯 편이다.
1960년대 사회운동의 대부
애당초 박현채의 삶 자체가 대학이나 특정 학문집단에 둥지를 트는 것과는 생리상 맞지 않았는지 모른다. ‘산 생활’에서 비롯된 역마살은 학문세계에까지 고스란히 연장됐다. 박현채는 이제 학문세계에서도 유격전의 전사처럼 활약했다. 그의 활동은 겉으로는 지식운동가에 국한된 것처럼 보였지만, 실천에 대한 의지는 여느 사람보다 강력했고, 시선은 잠시도 운동 현장을 떠나본 적이 없었다. 특히 주체적, 민중적 삶의 현장에서 그는 한 치의 오차도, 흐트러짐도 없이 살려 했다. 말이 필요한 자리에는 주저하지 않고 연사로 나섰고, 글을 요청받았을 때는 사양치 않고 쓰고 또 썼다. 글을 쓰되 원고지 칸이나 메우기가 아니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썼다.
박현채, 그는 삶을 통해 사회운동에 관심을 보였지만, 섣부르게 조직을 만든다거나 뛰어드는 일은 매우 경계했다. 그러면서도 1960년대 이후의 사회운동치고 그와 무관한 경우는 드물었다. 그는 조직을 만들지 않고도 대중운동을 지도하는 남다른 묘법을 체득했다. 살아 있는 운동을 형식의 틀 안에 가둘 때 운동 자체가 질식사한다는 사실을 그는 어느 누구보다 유연성 있게 해석했다. 자유로운 형식 안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독특한 사회운동방식이 그에 의해 창안됐다.
인혁당사건 이후 옥고를 치른 것은 후배들의 조급증, 이론과 현실의 변증법적 통일성에 대한 이해 부족, 대중성과 현실 적합성에 대한 판단오류 등에 따른 무리수로 말미암은 것으로, 실제로 박현채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었다. 어쨌든 박현채가 1960년대 이후 한국 ‘사회운동의 대부’였다는 사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 시대의 고전’으로 선정
1960,70년대 한국 경제학계는 박정희식의 경제개발정책에 직접·간접으로 참여, 동조하는 일반 경제학자나 관변의 평가교수단 등이 한 축을 이뤘다. 이에 반해 박현채를 비롯한 비판적 경제학자들은 외국자본에 의한 경제개발계획에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비주류 진영이었다. 앞의 진영은 선진국이 겪은 과정을 똑같이 경험함으로써 우리도 근대화라는 지점을 통과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박현채 등은 한국처럼 선진 경제권의 피식민지 경험을 한 후진국은 외연적 성장이 아니라 내포성 산업화를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중심에 박현채가 수문장처럼 버티고 있었다. 유인호, 조용범, 김병태, 전철환, 정윤형, 안병직, 이경의, 이대근 등이 조금씩 입장차는 있었지만 동심원을 그렸다.
식민지 지배가 우리 민족에게 남겨준 모순은 분단과 빈곤(혹은 불평등)이었고, 국가 형성 프로그램은 이 두 가지 문제를 극복해야 했다. 박정희시대에는 ‘개발독재’로 표현되는 근대화 프로젝트가 국민경제 형성의 기본논리였다. 그러나 개발독재는 분단체제에 의존한 대외지향적 근대화였으며, 국가에 의해 하향적으로 동원된 근대화 논리였다.
‘민족경제론’은 근대화 프로젝트와 대척적인 지점에 섰다. 민족경제론은 국민경제 형성의 이론이다. 실천적으로는 국가 형성 프로그램이다. 민족경제론에서 민족경제란 자주적, 민주적, 민족적인 국민경제를 지향한다. 민족경제론은 1960년대 후반 이후 종속적 메커니즘 속에서 한국 자본주의가 파행적으로 전개돼가던 과정에 민족적 자주성과 민주적 의사 결정성, 민중적 삶의 건강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현채는 ‘민족경제론’을 통해 “경제이론에서의 인간복권, 특히 광범한 직접 생산자의 참여가 보장되는 경제발전, 민주주의적 집회와 절차에 의해 결정되고 집행되는 경제계획에 의한 국민경제의 운용”을 내세웠다. ‘민족경제론’은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에 기초를 두고 있지만, 한국의 현실이 요청한 것은 현실 적합성의 문제였다. 이런 요청을 바탕에 깔고 마르크스이론을 한국적 현실에 접목한 것이 1970년대 ‘민족경제론’으로 엮어져 나온 것이다. 이 책은 박현채에게 민족경제론의 대표적 주창자란 호칭을 안겨준 기념비적 저술로 평가받기에 이르렀다.
‘교수신문’은 2001년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을 ‘우리 시대의 고전’ 2차분(언어학, 문학, 철학, 경제학, 정치학)으로 선정했고, ‘출판저널’은 20세기를 마감하며 지난 100년 동안의 대표적 저작물 35책에 ‘민족경제론’을 넣었다. 박현채는 또 ‘대중경제론’의 밑그림을 그린 몇 안 되는 필자다.
의식화의 텍스트로 ‘불온시’
한국 출판계에서 경제학 저서는 베스트셀러가 될 수 없다는 것이 통념이었다.‘민족경제론’은 이 통념을 깨뜨렸다. ‘판금(販禁)’이란 ‘불온딱지’가 더할 수 없는 광고효과를 발휘했다. 대학가와 민주화운동권에서 ‘민족경제론’은 이른바 의식화의 텍스트가 됐다. 판금으로 ‘민족경제론’은 수난의 대상이 됐지만, 민주·민족·민중을 역사의 수레바퀴로 생각한 젊은이들과 운동권에서 박현채는 한때 ‘사상의 은사’이기도 했다.
경제학계에서 ‘민족경제론’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다. 2003년 ‘교수신문’에서 펴낸 ‘오늘의 우리 이론 어디로 가는가:현대한국의 자생이론 20’에서 이병천은 ‘민족경제론의 죽은 것과 산 것’을 통해, 민족경제론이 금융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소용돌이를 헤쳐나갈 어떤 이론적 요소를 제공할 수 있을까 반문하면서, 그 긍정적 유산을 이렇게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