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인 반란, 정두언 폭로에 이은 정보전쟁
- 이재오 측, 기다렸다는 듯 이상득 공격
- MB, 이상득에 “행동반경 넓히지 말라” 당부설
4월8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이낙연 민주당 의원이 ‘이상득 의원과 노건평씨가 박연차 회장의 세무조사 등 패밀리 문제를 거래했다’는 내용의 한 주간지 기사를 읽고 있다.
그러잖아도 가뜩이나 ‘형님 정치’‘상왕 정치’ 논란에 휘말려온 이 의원에게 이 대통령이 모종의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소문도 나돌던 시점이다. 이 대통령 형제 측 사정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대통령이 형에게 ‘이런저런 말이 나오니 너무 행동반경을 넓히지 말고 정치 분야에 국한해서만 나를 도와주시라’는 취지의 당부를 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정치권의 친이 핵심들이 정치권력 다툼뿐 아니라 정부 인사 등에 개입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분란이 그치지 않자 결국 이 대통령이 현재 권력의 상당 부분을 점유하고 있는 친형 이 의원에게 활동영역 축소를 당부하기에 이르렀다는 것. 이 관계자는 “SD가 친박근혜계 등 정치권을 중심으로 광폭행보를 보인 것은 정권 2년차의 길을 닦겠다는 목적도 있지만 이 대통령의 당부와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이 대통령이 이 의원에게 행동반경 축소를 권유한 것은 정치권의 협력을 받도록 해달라는 긍정적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 의원도 이명박 정부에서 자신의 역할을 ‘정치적 조력’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지난해 18대 총선과정에서 퇴진론이 나왔을 때도 속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 대통령이) 정치를 잘 모르는데 나라도 국회에 있으면서 도와야 되는 것 아니냐”는 말을 자주 했다.
이 의원은 정치문제는 청와대의 ‘지시’에만 따라선 안 되고 대화와 타협을 기본으로 하는 정치논리로 풀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다. 2월27일 미디어관련법의 국회 상정 강행 과정에서 자신이 (청와대의 요청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지적에 대해 “내가 이명박이 시키는 대로 하는 똘마니냐, 어떻게 그렇게 얘기하느냐”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대검 중수부가 거명한 “이상득”
경고든 도움 요청이든 이 의원이 이 대통령의 행동반경 축소 메시지를 받은 것으로 전해지는 시점에 박연차 게이트가 터졌고, 여기에 또다시 ‘형님’이 등장했다.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에 대한 검찰 수사 초기부터 ‘SD 개입설’의 연기가 모락모락 나더니 마침내 4월10일 대검 중수부의 브리핑에서 ‘이상득’ 이름 석 자가 나왔다. 검찰은 박 회장으로부터 세무조사 무마 청탁과 함께 2억원을 받은 혐의로 추부길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을 구속기소하면서 추 전 비서관이 지난해 9, 10월 이 의원에게 청탁을 시도했다고 공개한 것이다.
검찰은 “추 전 비서관이 제3자에게 부탁을 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지난해 8월 말부터 올해 2월까지 2520건의 통화내역을 살펴본 결과 이상득 의원, 정두언 의원과 통화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다만 검찰은 “추 전 비서관은 두 차례 모두 청탁을 거절당했다”고 덧붙여 이번 일을 ‘실패한 로비’로 정리하면서 두 의원에게 면죄부를 줬다.
추 전 비서관은 15∼17대 총선 때 경북 포항 남-울릉 선거에서 이상득 의원 캠프의 전략팀장을 맡았던 ‘SD 계열’이다. 또 이 과정에서 이름이 오르내린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과 한상률 전 국세청장도 이 의원과 인연이 있다. 이 대통령의 오랜 친구인 천 회장은 고려대 교우회장으로 이 의원과도 막역한 사이다. 한 전 청장은 지난해 말 경주에서 이 의원과 가까운 포항 기업인들과 골프를 친 뒤 이 대통령의 친·인척과 저녁을 먹으며 자리 보전 로비를 했다는 구설에 올랐던 인물이다.
그런데 박연차 게이트 수사가 진행되면서 여권 내부에 미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음이 감지됐다. 검찰 수사 초기부터 추 전 비서관뿐 아니라 천 회장과 한 전 청장이 ‘박연차 구명 작업’에 연루됐다는 소문이 정가에 나돌았는데 진원지는 대부분 검찰이 아니라 여의도 정가였다.
잡지 기사 뜨자 기정사실화
이와 비슷한 시점에 한 주간지는 2007년 말 대선 직전에 이상득 의원이 노무현 당시 대통령의 형 노건평씨와 ‘빅딜’을 했지만 이번에 깨졌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BBK 사건에 노무현 청와대가 개입하지 않는 대신 이명박 후보가 집권하더라도 ‘로열 패밀리’는 건드리지 않기로 밀약을 맺었다는 내용이다. 이 과정에서 노씨와의 사이에 길을 튼 것은 추 전 비서관이지만 이상득 의원 또한 이 프로젝트에 깊숙이 관여했다는 것이다.
박연차 게이트를 둘러싸고 ‘SD 연루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배경을 놓고 정가 일각에선 여권 내부의 권력투쟁설이 나돌고 있다. 한 여권 인사는 “이상득 의원의 ‘박연차 게이트 연루설’은 여의도 여권 작품”이라고 말했다. 이 의원과 관련해 정치권에 유포되거나 일부 언론에 보도되는 각종 의혹은 대부분 여의도 여권발(發)이라는 것이다.
이재오 전 최고위원은 지난해 4·9 총선에서 낙마한 뒤 미국에 머물다 최근 귀국했다. 그는 18대 총선 직전 이상득 의원의 한나라당 공천 반납을 요구하는 ‘55인 선상 반란’을 정두언 의원과 함께 주도한 장본인으로 지목돼 이 의원과 사이가 틀어졌다. 이번에 귀국할 때도 이상득계의 견제를 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심지어 이 전 최고위원이 귀국한 시점에 이 의원은 일본에 잠시 가 있을 생각까지 했다고 한나라당 관계자가 귀띔했다. ‘이재오 귀국’을 자신과 연결시켜 이런저런 해석이 나오는 것 자체가 싫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사정을 염두에 두고 들으면, 이 전 최고위원의 핵심 측근인 공성진 최고위원이 4월9일 불교방송 ‘김재원의 아침저널’에 출연해 이상득-노건평 밀약설을 마치 기정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비아냥거리듯 말한 것은 의미가 깊다. 공 최고위원은 “저도 이 보도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만약 전·현직 대통령 주변에서 연결고리의 일환으로 ‘패밀리’가 버젓이 등장했다면 대단히 안타까운 일 아니냐. 그 사이에 대통령의 형님인 이상득 의원이 깊숙이 관여됐다고 일부 보도에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살펴보겠다”고 말했다.
이어 김재원 진행자가 “이런 내용이 사실이라면 결국에는 국가기관인 검찰의 수사권을 두고, 또 향후에 벌어지는 어떤 사건을 두고 서로 간에 밀약을 했다는 것이어서 걱정스러운 상황”이라고 하자 공 최고위원은 “사필귀정 아니겠느냐”고 맞장구쳤다.
이재오 전 최고위원이 출국하고 정두언 의원도 사실상의 정치적 칩거 상태에 들어간 상황에서 이상득 의원에게 힘이 쏠린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만사형통’(萬事兄通·모든 인사는 형으로 통한다)에 이어, 국회와 여당 운영과정에서 나온 ‘만사형결’(萬事兄結·형님이 말을 하면 논란이 종결된다)이란 신조어에서도 이상득 의원의 파워가 감지된다. 여기다 연초에 박영준 국무차장이 다시 전면에 등장하면서 SD계는 범 친이 진영에서 ‘1극체제’를 구축하다시피 했다.
풀리지 않은 앙금
민주당 신학용 의원은 2월 임시국회 대정부질문에서 한승수 국무총리에게 “세간에는 여권 서열이 1위는 ‘SD’(이상득 의원), 2위는 ‘MB’(이 대통령), 3위는 ‘시중’(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는 것을 아느냐”고 농담 삼아 물을 정도였다. 정가 소식통은 “한나라당 모 인사와 권력기관의 고위간부, 군의 장성급 인사까지 포함된 ‘친SD’ 모임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며 “내가 들은 모임과 유사한 그룹이 몇 개 더 있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지난해 이상득 의원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개혁입법안에 대한 당 소속 의원 성향 기록 문건을 읽고 있는 장면이 카메라에 포착돼 논란이 인 적이 있다. 당시 이 의원은 “점심 때 금융계 인사가 뭘 하나 주기에 받아서, 보지도 않고 있다가 본회의장에 들어와 펼쳐봤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를 두고 ‘SD 비선조직이 만든 문건’이라는 소문이 돌았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곽승준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장(장관급)과 신재민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 박영준 국무차장,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제1차관, 장수만 국방부 차관 등은 2월4일 수요일 밤 처음 회동한 뒤 이 모임을 정례화해 이어오다 언론 보도 후 중단했다. 이른바 ‘4+1 수요모임’ 멤버의 지향점은 아무래도 SD계열일 수밖에 없다.
24인 리스트, 70인 리스트…
이러는 동안 이재오 전 최고위원은 권토중래를 꿈꾸면서 숨을 죽였고 정두언 의원은 암중모색했다. 10개월 동안의 미국생활을 마치고 우여곡절 끝에 3월28일 조용히(?) 귀국한 이 전 최고위원은 “당분간 무악재를 넘지 않고 한강을 건너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칩거 모드에 들어갔다. 정 의원도 이상득계를 겨냥한 권력 사유화 발언 이후 처음으로 2월6일 이 대통령과 독대한 것을 전후해 국회에서 ‘기후변화 전도사’를 자임하고 당의 국민소통위원장을 맡는 등 다시 기지개를 켜고 있지만 아직은 처신에 신중을 기하는 모습이다.
정 의원의 경우 권력 사유화 발언 이후 이상득계에게 ‘공공의 적’처럼 돼 있다. 정 의원의 공격으로 청와대를 떠났던 박영준 전 기획조정비서관이 1월 국무총리실 국무차장에 임명돼 6개월 만에 복귀하는 과정에서 화해가 이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앙금을 씻지 못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이 전 최고위원과 정 의원의 이 같은 소극적 행보가 오래갈 것 같지 않다. 5월로 예정된 원내대표 경선을 둘러싸고 친이 세력 내부에서조차 이합집산 조짐을 보이고 있다. 4·29 재·보궐선거 이후의 정국 기류가 불투명하고 내년 지방선거에도 대비해야 되기 때문에 조만간 또 한 번의 권력투쟁이 불가피한 여건도 조성돼 있다.
이런 가운데 권력투쟁의 3라운드가 이미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전혀 다른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3라운드는 박연차 게이트 검찰 수사를 둘러싸고 정보전쟁 형태로 벌어지고 있다. 국회의사당 주변에서 돌고 있는 박연차 회장의 ‘24인 리스트’나 ‘70인 리스트’‘정대근 리스트’‘천신일 리스트’ 가운데 일부는 여권 일각에서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리스트는 여권 내부의 ‘친박’과 전임 정권의 ‘친노’를 동시에 치기 위한 목적에서 만들어졌다는 말이 많았지만, 이후 이상득 의원과 천신일 회장 등이 거명되면서 친이 일부도 함께 겨냥한 것이란 소문이 나돌았다. 여기에다 이상득계의 핵심 인사가 내부 경쟁세력을 치기 위해 뒤를 캐고 있음을 감지한 경쟁자가 반격에 나선 것이란 괴담도 곁들여졌다. 특히 이상득계에서는 드러내놓고 말은 하지 않지만 검찰 수사발표에 앞서 ‘박연차 구명운동 연루설’‘영일대군(이상득)과 봉하대군(노건평) 밀약설’ 같은 내용이 보도되는 배경에는 특정 여권 정치인 계열이 작용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이상득 의원과 가까운 한 의원은 이에 대해 답답한 심경을 토로했다.
“저쪽이 언론플레이 한다”
“이상득 의원은 성격상 누가 전화를 걸거나 붙잡고 말을 하면 아무리 바빠도 뿌리치지 못하고 다 들어준다. 그러나 부당한 청탁에 대해선 한 번도 힘을 써주는 걸 보지 못했다. 저쪽이 이상득 의원이 청탁하는 내용을 귓전으로 흘려서나마 들은 걸 마치 무슨 의혹이 있는 양 언론플레이를 한다.”
이상득 의원은 심혈을 기울였던 친이-친박 화해 시도까지 무산으로 돌아갈 위기에 처해 있다. 경주 재선거 정수성 후보사퇴권유설이 진실게임 양상으로 흐르고 있는 시점에 박근혜 전 대표가 후보사퇴 권유를 기정사실화하면서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우리 정치의 수치”라고 일갈했기 때문이다. ‘경주의 진실’을 놓고는 이 의원이 오히려 당했다는 관측도 나오지만 진위와는 별개로 이상득 의원이 박 전 대표의 마음을 전혀 움직이지 못했음을 확인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런 상황에서 이 의원은 박연차 게이트에 이름이 오르내림으로써 공천 반란 이후 1년여 만에 최대 위기에 봉착했다. ‘55인 반란’은 이 대통령이 이재오 전 최고위원 등을 질책하는 것으로 대신 진압해줬지만 이번에는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예측하기 어렵다. 검찰의 칼이 노무현 패밀리 다음엔 어디로 향할지 가늠할 수 없다. 검사 출신 한 의원은 “보통 이런 수사는 초기에는 ‘상부’의 의도에 따라 시작되는 경우가 많고 어느 정도 조율도 가능하지만 일정 수준까지 진행되면 검찰 자체에서도 조절이 안 되곤 한다”고 설명했다. 검찰 수사가 일정 부분 마무리된 뒤 여당 내에서 ‘정풍운동’이 전개될 가능성도 있다.
이상득 의원은 말을 아끼고 있다. 불거진 문제들에만 간단히 해명한다. “박연차를 알지도 못한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다, 알지도 못하는 회사의 탈세 사건에 개입할 만큼 내가 어수룩하지 않다”고 반박했다. 노건평씨와의 ‘빅딜설’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이상득 의원의 운명에 대해선 이재오-정두언계와 소장파의 협공에 밀려 힘이 떨어질 것이란 예상과, 시련을 견뎌낸 뒤 범 친이 세력의 지주 역할을 계속할 것이란 관측이 엇갈린다.
친이 진영 한 의원은 “MB가 끝까지 믿고 의지할 사람은 SD밖에 없다. 임기 초반인데 벌써부터 SD가 사라지면 여의도가 통제가 안 되고 국정운영에 결정적인 타격을 받는다. SD가 정치게임의 희생자가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