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는 박현채가 쉰아홉에 쓰러져 가까스로 환갑을 채우고는 곡절 많고 한 많은 세상을 떠난 지 13년이 되는 해다. 박현채는 그의 생애 속에 시대가 가로질러간 우람한 산봉우리 같은 존재다. 그는 재야에서 강단을 훌쩍 뛰어넘은 민족경제론의 주축이었고, 실천적 지식인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박현채, 그의 이론과 사상은 그의 실천적 활동과 치열했던 삶의 궤적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그는 광복 이후 남북분단과 6·25전쟁에 이르는 현대사의 파란 속에서 불과 16세의 어린 나이로 빨치산 소년중대 문화부 중대장으로 ‘발탁’됐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소년전사 조원제의 이야기는 ‘박현채 평전’의 소년기에 해당한다. (‘고 박현채 10주기 추모집·전집 발간위원회’ 엮음, ‘아, 박현채’, 해밀)
생전에 박현채와 가까웠던 송기숙은 조정래와 함께 ‘박현채의 10대 후반’으로 역사기행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박현채가 활동했던 전남 화순군 백아산 등이 대상이었다. 빨치산 동지들이 달 밝은 밤 산마루에서 주고받은 얘기며, 허름한 주막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늘어놓던 땀 냄새 물씬 나는 얘기는 박현채의 놀라운 기억력에 힘입어 ‘태백산맥’ 후반부에 생생하게 재현되기도 했다. 지리산 세석평전 드넓은 분지에 가을 달빛이 교교하던 날의 추억을 조정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소주잔에 담긴 달빛까지 마시며 이어지던 선생님의 슬프고 안타까운 이야기는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고 그는 회상했다.
생사를 건 ‘산 생활’ 중 박현채는 총알을 직통으로 맞아 죽을 뻔했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나기도 했다. 바지 뒤쪽 호주머니에 어머니가 넣어준 지폐뭉치에 총알이 박혔는데, 총알은 지폐뭉치의 거의 마지막 장에 멈추었다. 간신히 살아남은 박현채는 1952년 ‘하산’, 전주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입학했다.
1959년부터 1964년까지 박현채는 ‘한국농업문제연구회’ 간사로 있었다. 당시의 활동을 그의 회갑기념논문집인 ‘민족경제론과 한국경제’(창작과비평사, 1995)에 실린 ‘박현채 연보’에서 인용한다.
“농지개혁의 실패와 잉여농산물 도입, 한국경제와 농업에 관한 연구에 주력하고 실천적으로는 전근대적 생산양식을 극복하기 위해 협업농업의 양성을 주장함. 한국농업문제연구회는 농업문제뿐 아니라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문제, 원조경제의 본질, 자본주의 세계경제하의 국민경제의 독자적인 존재 가능성 등을 검토함으로써 새로운 이론의 온상지 역할을 하였음. ‘한국농업문제연구회’는 주석균(회장), 유인호, 김병태, 김낙중, 박현채 등 비판적 농업경제학자들로 구성되었음.”
“박현채, 그 사람 수상감이야”
지식산업사도 1995년 박현채의 회갑기념논문집 ‘한국경제:쟁점과 전망’을 발행했다. 이 논문집의 서문에서 지금은 뉴라이트 계열의 좌장 격으로 있는 안병직은 박현채를 일컬어 “그는 나의 인생을 크게 바꾸게 한 유일한 스승이었다”고 술회했다. 그러나 14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안병직은 그때와 180도 다른 길을 가고 있다.
1964년 박현채는 도예종, 정도영, 김병태, 김금수 등과 주한 외국군 철수, 남북한 서신교환, 문화·경제교류를 통한 평화통일을 목표로 ‘인민혁명당’을 결성한 혐의로 검거됐다. 세칭 ‘제1차 인혁당 사건’이다. 박현채 등은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항소심에서는 도예종(제2차 인혁당사건으로 사형선고 후 바로 집행. 2008년 무죄선고)을 은닉시켜준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로써 박현채는 제도권과 학계에서 ‘페르소나 논 그라타(기피인물)’가 되었다.
인혁당사건은 한일회담 반대투쟁이 대학가에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가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중앙정보부가 연출한 첫 ‘작품’이었다. 한일회담 반대투쟁을 북한과 연계된 인혁당이 배후에서 조종한 것으로 조작해 정치적 위기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던 각본이었다.
노무현 정부 시절 노사정위원장을 지낸 김금수는 박현채와 인혁당사건 공범자로 몰려 한 오랏줄에 묶여 취조를 받았다. 김금수의 회상에 따르면 이 상황에서도 박현채는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좀 과장해서 표현한다면, 마치 자기 집 안방에서처럼 행동했다.” 거대권력과의 대결이 마치 신나다는 듯 행동했다. 검찰 취조가 끝날 무렵 담당검사가 혼잣말처럼 했다. “당신들이 정권을 잡는다면 박현채, 그 사람이 수상이 될 거야.”
1951년 말 지리산 지역에서 전개된 대규모 공비토벌 작전으로 생포된 빨치산들.
1978년에 나온 ‘민족경제론’은 ‘신동아’를 비롯해 ‘창작과 비평’ ‘대화’ ‘세대’ ‘정경연구’에 발표한 18편의 평론을 모은 책이다. ‘신동아’에 발표된 글만도 ‘쌀의 반세기’ ‘경제발전과 농업발전의 제문제’ ‘차관과 경제발전’ ‘자원민족주의의 역사와 현실’ ‘다국적기업의 논리와 행태’ 등 다섯 편이다.
1960년대 사회운동의 대부
애당초 박현채의 삶 자체가 대학이나 특정 학문집단에 둥지를 트는 것과는 생리상 맞지 않았는지 모른다. ‘산 생활’에서 비롯된 역마살은 학문세계에까지 고스란히 연장됐다. 박현채는 이제 학문세계에서도 유격전의 전사처럼 활약했다. 그의 활동은 겉으로는 지식운동가에 국한된 것처럼 보였지만, 실천에 대한 의지는 여느 사람보다 강력했고, 시선은 잠시도 운동 현장을 떠나본 적이 없었다. 특히 주체적, 민중적 삶의 현장에서 그는 한 치의 오차도, 흐트러짐도 없이 살려 했다. 말이 필요한 자리에는 주저하지 않고 연사로 나섰고, 글을 요청받았을 때는 사양치 않고 쓰고 또 썼다. 글을 쓰되 원고지 칸이나 메우기가 아니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썼다.
박현채, 그는 삶을 통해 사회운동에 관심을 보였지만, 섣부르게 조직을 만든다거나 뛰어드는 일은 매우 경계했다. 그러면서도 1960년대 이후의 사회운동치고 그와 무관한 경우는 드물었다. 그는 조직을 만들지 않고도 대중운동을 지도하는 남다른 묘법을 체득했다. 살아 있는 운동을 형식의 틀 안에 가둘 때 운동 자체가 질식사한다는 사실을 그는 어느 누구보다 유연성 있게 해석했다. 자유로운 형식 안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독특한 사회운동방식이 그에 의해 창안됐다.
인혁당사건 이후 옥고를 치른 것은 후배들의 조급증, 이론과 현실의 변증법적 통일성에 대한 이해 부족, 대중성과 현실 적합성에 대한 판단오류 등에 따른 무리수로 말미암은 것으로, 실제로 박현채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었다. 어쨌든 박현채가 1960년대 이후 한국 ‘사회운동의 대부’였다는 사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 시대의 고전’으로 선정
1960,70년대 한국 경제학계는 박정희식의 경제개발정책에 직접·간접으로 참여, 동조하는 일반 경제학자나 관변의 평가교수단 등이 한 축을 이뤘다. 이에 반해 박현채를 비롯한 비판적 경제학자들은 외국자본에 의한 경제개발계획에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비주류 진영이었다. 앞의 진영은 선진국이 겪은 과정을 똑같이 경험함으로써 우리도 근대화라는 지점을 통과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박현채 등은 한국처럼 선진 경제권의 피식민지 경험을 한 후진국은 외연적 성장이 아니라 내포성 산업화를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중심에 박현채가 수문장처럼 버티고 있었다. 유인호, 조용범, 김병태, 전철환, 정윤형, 안병직, 이경의, 이대근 등이 조금씩 입장차는 있었지만 동심원을 그렸다.
식민지 지배가 우리 민족에게 남겨준 모순은 분단과 빈곤(혹은 불평등)이었고, 국가 형성 프로그램은 이 두 가지 문제를 극복해야 했다. 박정희시대에는 ‘개발독재’로 표현되는 근대화 프로젝트가 국민경제 형성의 기본논리였다. 그러나 개발독재는 분단체제에 의존한 대외지향적 근대화였으며, 국가에 의해 하향적으로 동원된 근대화 논리였다.
‘민족경제론’은 근대화 프로젝트와 대척적인 지점에 섰다. 민족경제론은 국민경제 형성의 이론이다. 실천적으로는 국가 형성 프로그램이다. 민족경제론에서 민족경제란 자주적, 민주적, 민족적인 국민경제를 지향한다. 민족경제론은 1960년대 후반 이후 종속적 메커니즘 속에서 한국 자본주의가 파행적으로 전개돼가던 과정에 민족적 자주성과 민주적 의사 결정성, 민중적 삶의 건강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현채는 ‘민족경제론’을 통해 “경제이론에서의 인간복권, 특히 광범한 직접 생산자의 참여가 보장되는 경제발전, 민주주의적 집회와 절차에 의해 결정되고 집행되는 경제계획에 의한 국민경제의 운용”을 내세웠다. ‘민족경제론’은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에 기초를 두고 있지만, 한국의 현실이 요청한 것은 현실 적합성의 문제였다. 이런 요청을 바탕에 깔고 마르크스이론을 한국적 현실에 접목한 것이 1970년대 ‘민족경제론’으로 엮어져 나온 것이다. 이 책은 박현채에게 민족경제론의 대표적 주창자란 호칭을 안겨준 기념비적 저술로 평가받기에 이르렀다.
‘교수신문’은 2001년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을 ‘우리 시대의 고전’ 2차분(언어학, 문학, 철학, 경제학, 정치학)으로 선정했고, ‘출판저널’은 20세기를 마감하며 지난 100년 동안의 대표적 저작물 35책에 ‘민족경제론’을 넣었다. 박현채는 또 ‘대중경제론’의 밑그림을 그린 몇 안 되는 필자다.
의식화의 텍스트로 ‘불온시’
한국 출판계에서 경제학 저서는 베스트셀러가 될 수 없다는 것이 통념이었다.‘민족경제론’은 이 통념을 깨뜨렸다. ‘판금(販禁)’이란 ‘불온딱지’가 더할 수 없는 광고효과를 발휘했다. 대학가와 민주화운동권에서 ‘민족경제론’은 이른바 의식화의 텍스트가 됐다. 판금으로 ‘민족경제론’은 수난의 대상이 됐지만, 민주·민족·민중을 역사의 수레바퀴로 생각한 젊은이들과 운동권에서 박현채는 한때 ‘사상의 은사’이기도 했다.
경제학계에서 ‘민족경제론’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다. 2003년 ‘교수신문’에서 펴낸 ‘오늘의 우리 이론 어디로 가는가:현대한국의 자생이론 20’에서 이병천은 ‘민족경제론의 죽은 것과 산 것’을 통해, 민족경제론이 금융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소용돌이를 헤쳐나갈 어떤 이론적 요소를 제공할 수 있을까 반문하면서, 그 긍정적 유산을 이렇게 지적했다.
1965년 5월 인민혁명당 사건의 항소심인 고등법원에서 피고인들이 기립해 있다.
아울러 그는 거대체제 속의 수수께끼 같은 ‘존재로서의 민족개념’ 대신 국민경제의 내발적, 내포적 통합과 균형발전을 지향하면서 민족경제의 재구축, ‘시민사회론-시민정치론’과 동행할 수 있도록 재구성되는 민중적 민족경제론과 열린 민족주의론, 그리고 현대세계의 새로운 역사적 현실 및 사상 흐름과 호흡을 같이할 수 있는 새 정치경제학과 제도경제학에서 힘을 얻어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파도를 헤쳐나가는 길을 모색하는 대안을 제시했다.
민족경제론은 한국경제의 외형적 지표가 크게 신장되고 신자유주의가 경제의 모든 논리를 집어삼켜버리는 시대에 과연 퇴색하고 말 것인가. ‘동향과 전망’ 2001년 봄호는 민족경제론에 대해 그 이론적 성패를 떠나서 박정희식 발전모델이라 할 수 있는 성장 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적 전망을 내놓은 최초의 체계적 이론으로 평가했다.
박순성, 김균은 “민족경제론이 남한의 조국근대화론과 북한의 자립적 민족경제 건설노선을 균형 있게 비판했다”고 평가했다. 이들은 또 “민주적 시장과 계획의 조화, 시장과 공공영역의 공존, 그리고 민주적 통제 등의 경제이념을 내세움으로써 한국의 비판적 경제학자들에게 커다란 유산을 남겼다”고 말했다. 박영호는 민족경제론이 우리에게 남긴 일차적 과제는 남북으로 분단된 민족의 통일이고, 민족문제의 해결 없이는 세계화도 아무 의미가 없다고 주장했다. 박현채는 1960년대는 물론 70,80년대를 통해 경제학계 전체에 걸쳐 광범하게 영향을 준 우렁찬 목소리였음에 틀림없다.
민족문학 속에 자리잡은 민족경제
백낙청은 민족문학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에 힘입은 바 컸다고 했다. 한걸음 나아가 민족문학 자체의 일부로 그의 업적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며, 민족문학에 끼친 박현채의 영향을 적극적으로 거론하고 나선 바 있다. 백낙청은 박현채의 글을 민족문학의 한 성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생각이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고 덧붙였다. ‘문학’의 범주를 옛사람들처럼 넓게 잡는다면, ‘민족경제’ 개념을 중심으로 수행되어온 박현채의 문필활동은 이 시대의 문학적 성과 속에 충분히 포함시킬 수 있으리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1970년대 초반만 해도 박현채란 ‘문패’를 달고 글을 발표하기가 어려웠던 게 시대적 분위기였다. 박현채는 그런 엄혹한 상황 속에서도 지식인의 실천적 삶을 계속했고, 여기에 대해 그를 아껴주는 무언의 동지적 감싸줌이 있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 박현채가 어떤 문예지에 기고한 글을 계기로 문단의 몇몇 친우와 후배들이 박현채를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으로 가입시켰고, 박현채 또한 그리 싫지 않은 기색이었다 한다.
백낙청은 박현채의 글이 바로 우리 자신의 일로 느껴진 것이 명목상의 동료였다거나 누구나 정치경제학에 대한 학습을 해야 했던 당시의 풍조 때문은 아니라고 하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자립적 민족경제의 확립’을 논한 그의 글들이 폭넓은 독자들의 심금을 울린 가장 큰 이유는, 사회분석의 고전적 전통이 바야흐로 멸종위기에 처하고 부당한 체제에 대한 침묵과 굴종만이 강요되던 시기에, 온몸의 저항을 지속하면서 그때그때 필요하고 가능한 발성법을 찾아낸 것이 그의 문장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박 선생이 자신의 첫 논문집이라 할 ‘민족경제론’을 어째서 ‘체계 없는 평론집’으로 세상에 내놓는가를 밝힌 머리말은 지금 읽어도 감동적인 명문이다.”(‘박현채선생회갑기념논문집’에서)
1979년 10·26사태 후 광주민주화운동을 거쳐 1987년 6월 민주화대투쟁이 일어날 때까지 한국사회에는 격랑의 파랑주의보가 발령됐다. 그 무렵부터 민주화운동은 한 단계 고양된 사회변혁운동의 와중에 있었다. 이에 앞서 1985년 ‘창작과비평’에 박현채는 ‘현대 한국사회의 성격과 발전단계에 관한 연구’를 발표했다. 이 평론은 당시 경제학계의 중심테마 중 하나였던 주변부 자본주의론과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을 비판하면서, 한국의 사회구성체가 기본적으로 국가독점자본주의 단계에 이르렀다고 규정했다.
이른바 ‘사회구성체(흔히 ‘社構體’로 명명) 논쟁’으로 명명된 이 논쟁의 불길은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박현채 자신이 의도했든 않았든, 이론적 실천이 현실의 사회운동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지점과 맞부딪친 것이다. 그때 박현채는 논쟁의 한가운데에 있으면서 결코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고 논쟁을 격화시키는 기묘한 역할을 했다. 말하자면 박현채는 모든 사회과학자에게 논쟁을 가능케 하는 화두와 공통적 쟁점을 던져 문제를 격화시키는 모호한 전선이자 점령해야 할 ‘성지’ 비슷한 위치였다.
“야, 나도 의료보험증 가졌다”
한길사는 1986년 창사 10주년을 맞아 ‘단재상’을 제정했다. 단재 신채호가 1936년 여순감옥에서 옥사한 지 60주년이 되는 해였다. 1987년 제2회 수상자로 박현채가 뽑혔다. ‘단재상’은 평생을 재야에서 ‘평론가’로만 살아온 그에게 바치는 헌사이자 빛나는 감사패였다. 시상식에서 그는 힘차게 수상소감을 밝혔다.
“민족경제론은 민주적 생존권의 확보와 발전이라는 민족주의적 요구 위에 서서 국민경제 안팎에서 이루어지는 민족경제의 주체적 발전과 그것에 따른 외국자본, 그리고 매판자본가와 상호관계를 밝히기 위한 것입니다.”
박현채를 아는 사람들은 그의 강한 개성에 대해 자주 얘기한다. 1970년대에 박 선생을 처음 만난 내게 박 선생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박 선생이 평소 정장차림을 한 모습을 나는 거의 본 적이 없다. 박 선생은 언제나 코르덴 옷이나 점퍼차림이었다. 생전의 박 선생은 상아 파이프를 삐뚜름하게 비껴 문 모습으로 내게 남아 있다. 각진 얼굴에 역사와 민족과 진보에 대해 바윗돌 같은 결의를 담은, 거칠 것 없는 야인이 박 선생의 원래 모습이었다.
역사기행에 나선 박현채 교수(왼쪽에서 세 번째)와 김언호 한길사 대표(맨 왼쪽), 조정래 작가(왼쪽에서 두 번째).
박현채란 사람은 애당초 책상물림 이론가들과는 체질 자체가 달랐다. 기계론적이고 교조적인 이론의 틀을 성큼 뛰어넘으면서 자유자재와 무애의 경지를 넘나들었다. 먹고사는 문제로 제도권 진입에 가슴앓이를 하는 후배들에게는 그까짓 게 무슨 문젯거리냐며 등을 떠밀어주어 가슴속 체증을 시원스레 뚫어주기도 했다.
박 선생은 하필이면 서울 중부경찰서 맞은편에 ‘국민경제연구소’를 내어 주로 ‘논문생산공장’으로 가동했다. 말이 연구소였지 허름하고 낡아빠진 사무실이었다. 길거리 먼지와 매연으로 유리창에는 늘 얼룩이 져 있어 바깥 모습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연구소 안은 빛이 잘 들지 않아 대낮에도 형광등을 켜야 했다. 한마디로 연구소 풍경은 혼돈 또는 난장 그것이었다. 3면 벽에는 천장 높이까지 각종 자료와 책과 신문뭉치들이 쌓여 있었다. 그래도 무슨 자료나 책이 어디 있는지 족집게처럼 찾아내는 ‘기술’(?)을 보고 나는 여러 차례 감탄했다.
1987년 6월의 민주화대투쟁 이후 89년부터 93년까지 박현채는 자칭 ‘실업가’에서 대학교수 자리로 ‘강등’(?)했다. 당시 조선대학교 총장이 된 이돈명 변호사의 배려 덕이었다. 30여 년 동안 공식적으로 막혀 있던 말길과 글길이 비로소 훤히 트였다. 조선대학교 발령을 받았을 때였다. 송기숙을 우연히 만난 그는 의료보험증을 내보이며 “야, 나도 이제 의료보험증을 가졌어야” 하고 어린애처럼 자랑했다. 온전한 국민 대접을 받은 것이 교수 발령보다 더 자랑스러웠던 모양이다.
모닥불 피워놓고 통곡
박현채를 처음 대하는 사람들은 그를 괄괄하고 거칠고 도무지 우회를 모르는 직선적인 인물로 보기 쉽다. 그런 점이 분명 있었다. 박현채는 자기가 보기에 사리에 맞지 않다거나, 말을 비비 틀어야 직성이 풀리는 듯한 고품위(?) 부르주아적 속물근성에 대해서는 사정없이 면박을 준다. 술자리에서는 언어폭력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삼국지’의 장비다.
박현채, 그는 거침이 없었고 꾸밈도 없었다. 예닐곱 살 개구쟁이가 50여 년을 훌쩍 뛰어넘어버린 것 같다. 그러나 박현채는 가슴이 넓고 속이 따뜻한 사람이다.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의 천의무봉함과 명주실 같은 부드러움, 그지없이 맑은 성품을 이야기한다. 그는 겉보기와는 달리 다정다감하고, 섬세하고 예민하며, 곡절 많고 다채로운 경험에다, 비상한 기억력까지 갖춘 사람이다. 온갖 세상살이와 이 땅 민초들의 삶에 대해 그는 잡학박사라고 할 만큼 세밀한 알음알이와 애정을 가진 열정적 인물이었다. 그와 함께 여행을 하거나 한가로운 시간을 나눌 때면, 국토의 구석구석에 배어 있는 현대사의 이면이며 그 고장의 풍물과 먹을거리에 이르기까지 화제가 마르지 않는다.
1980년 광주에서 참혹한 ‘한국판 홀로코스트’ 소식이 들려오던 6월 초였다. 평소 자주 어울리던 ‘거시기 산악회’와 지리산 종주 등산을 했다. 세석평전 초입, 음양수 앞에서 그들은 모닥불을 피워놓고 밤새껏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불렀다. 세석평전에 남아 있던 술을 몽땅 다 비웠다. 그날 밤 박현채와 얽힌 사연을 김정남(‘진실, 광장에 서다:민주화운동 30년의 역정’의 저자)은 이렇게 회상했다.
“박 선생도 불렀다. 그의 노래는, 그의 평소의 목소리와는 달리 청아하다. 고음이 되면 박 선생의 목소리는 떨려 나오는데, 나는 박 선생의 영혼이 맑고 깨끗하기 때문에 그런 소리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박 선생이 즐겨 부르는 노래 역시 ‘보리밭’ ‘모닥불’ ‘비목’ 같은 아름다운 곡이다. 노래를 부를수록 목소리는 더욱 맑아지고, 때로는 너무 진지해져서 듣는 사람들을 언제나 숙연하게 한다. 그날도 그랬다. 처음에는 그냥 눈이 젖어들더니, 이내 그 큰 눈에서 눈물이 철철 흘러내리고 있었다.”
분단된 한반도에서 치열하게 살았던 박현채, 그의 의지는 강철 같았고 가슴은 끓어오르는 용광로와 같았다. 시골동네의 고샅길에서 험한 산길에까지, 허름한 선술집에서의 모임이나 대중적인 자리에서 그는 크고 작은 수많은 인연의 고리를 만들었다. 정치인, 학자, 종교인, 언론인, 법조인, 문인, 출판인, 농민,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그는 지역, 계층, 세대, 성별을 뛰어넘어 광폭의 인간영토를 형성했다. 오죽했으면 1993년 그가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을 때 문병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 간호사들이 비명을 질렀을까.
‘거시기 산악회’와 ‘개판’
박현채와 가깝게 지내던 사람은 너무 많아 일일이 들기가 어렵다. 그중 ‘거시기 산악회’ 모임이 있다. 얼른 듣기에 무명초 집단 같은 느낌이 들지만, 그 면면을 보면 한 시대의 양심을 대표하던 쟁쟁한 얼굴들이다. 이돈명, 변형윤, 송건호, 리영희, 백낙청, 이호철, 홍성우, 김정남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암울하고 답답하던 세월 속에서 산행을 통해서나마 마음속 화기를 바깥으로 뿜어내고 산 공기를 마시면서 내공을 쌓아갔다.
‘거시기’란 명칭과 관련, 리영희는 이렇게 기억했다.
“‘거시기’란 명칭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요. 그 마음 맞는 산행 동행인들이 어느 날 북한산 일선사 뒤의 양지바른 바위에서 점심을 먹다가, 제각기 작명시간을 가졌어. 그때 이돈명 변호사가 좋은 이름이 생각나지 않으니까, 그의 전라도 사투리로 ‘거시시, 거시기……’만 되풀이하더라고. 그래서 누군가가 이름을 지을 것 없이 ‘거시기’를 따서 ‘거시기 산악회’로 하자고 했어.”(리영희-임헌영, ‘대화: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한길사, 2005)
1934년생 개띠(甲戌生) 모임이라 해서 ‘개판’이란 모임도 있었다. 이해동에 의하면 1981년 여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가 당시 민주회복과 인권운동을 하다가 고생하는 분들을 초청, 설악산으로 위로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그 여행길에서 우연히 네 사람이 한 상에 둘러앉아 음식을 나누게 되었다. 한승헌 변호사, 조화순 목사, 박현채 선생, 그리고 나, 그렇게 네 사람이 우연히도 한 상에 동석을 하게 된 것이다.……그런데 우리 네 사람에게는 두 가지의 공통점이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하나는 모두가 시국문제와 관련되어 징역살이를 한 이른바 ‘빵잡이’였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모두가 동갑내기였다는 점이었다.……처음에는 개띠들의 모임이라 ‘개 파티’라고 이름을 붙였다가, 역시 재기 넘치는 한승헌 변호사가 ‘개들에게 무슨 파티냐. 개들에게는 판이 훨씬 어울린다는 제안으로 만장일치 ‘개판’이라고 개명했다.”
나중에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한 김중배도 참여했다. 술을 즐겨 마신 박현채는 취기가 거나하게 돌면 좌중의 언론을 독점지배하는 파워를 과시했다. 보통의 학자들과 그는 체질이 달랐다. 한승헌의 기억에 의하면 개판 식구들이 50대의 아홉수를 지나고 있을 때 ‘합동’회갑모임을 갖자고 했다. 세상도 어수선할 때라 절충식으로 하기로 한 것이다. 이왕 합동회갑연을 할 바에는 회갑연 입구에 ‘맹견 주의’도 써 붙이자는 우스개도 나왔다. 그들 각자가 세상을 향해 항상 ‘멍멍’ 하고 짖어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임은 불발로 끝났다.
민족경제는 죽었는가
1980년대 말부터 박현채는 외부로 향한 말문과 글쓰기의 빗장을 닫아걸었다. 가족들의 눈에는 그가 깊은 밤 홀로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 보였다. 1980년대 후반에 나타난 사회주의권의 몰락 이후 모든 경제적 화두는 온통 “시장이 지배하게 하라. 시장은 내버려둬라. 시장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게 하라”였다. 경제학계에도 시장에 대한 과신, 한국 자본주의의 성공신화가 대세가 되었다. 비판경제학으로서 민족경제론은 경제학계에서 설 자리를 잃었다. 지구화 시대에 자주적이고 민주적, 민족적인 경제논리를 견지한다는 것 자체가 시대착오로 폐기처분되는 듯한 양상이었다.
이런 추세 속에서도 박현채의 후학들 중 조석곤은 2006년에 발표한 ‘다시 민족경제론을 생각한다’에서 시장 이데올로기에 대해 비판적인 발언을 멈추지 않았다.
“지구화를 화두로 하는 신자유주의가 1980년대 이후 세력을 확대한 것은 사실이지만, 지구화는 지금까지는 어떤 국민국가가 자국의 이익을 위해 다른 국민국가의 장벽을 허무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하는 데 불과하다.”
이어서 조석곤은 “시장의 중립성을 앞세워 사냥감을 찾아 나선 투기적 금융자본 앞에서는 이른바 선진국의 중앙은행도 무력하기는 마찬가지”라며 “특히 이제 막 자본시장의 방에 돌입한 나라일수록 그들의 활동에 취약한 경우가 많았음을 우리는 최근 20여 년의 역사에서 배울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경제학계 일각에서는 지구화 시대의 민족경제론은 국민경제의 안정적 성장을 목표로 한 비판적 성찰의 프로젝트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했다. 부연하자면 자주적이고 민족적인 국민경제의 수립은 어쩌면 세계경제가 지구화 시대로 나아가기 위한 필요조건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특히 분단국가인 한국사회에서는 이러한 과제가 민족적인 관점에서 해결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1992년 박현채는 정윤형과 함께 한국사회과학연구소(1988년 설립한 한국사회연구소 후신)를 설립했다. 이 연구소에 참가한 정태인은 한때 노무현 정부에서 일하기도 했다. 그는 민족경제론의 문제의식을 오늘의 시대에 맞게 발전시키고 한국 정치경제학의 새로운 이론으로 정립하는 역할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몫이라고 하면서, 민족경제론이 생명력이 소멸된 과거이론에 불과하다고 보지 않는다.
“초국적 자본이 지배하는 글로벌 시대에도 민족적 삶의 단위는 쉽게 해제될 수 없고 국가 간 마찰, 인종 간 마찰 또한 필연적이다. 따라서 글로벌 시대엔 국민 삶의 질 향상을 최우선으로 추구하는 개방적 민족경제론이 필요하다.”
40여 년 자갈길로 달리더니
1989년의 조선대학교 교수생활 이후 박현채는 지방으로 통근하는 생활로 건강에 무리가 따랐다. 게다가 소장학자들의 폭발적 요청에 따라 민족경제론의 논리를 갱신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쫓겼을 것이다. 이래저래 사정은 박현채에게 어려웠다. 때마침 창작과비평사로부터 단순히 그의 소년시절 이래의 저항활동만이 아니라, 과거 어떠한 글로도 발표되지 않은, 그냥 묻어버리기에는 너무나 소중한 그의 면모를 담는 저술을 청탁받았다. 상당부분 집필도 진행되었다.
박현채는 호탕하고 낙천적인 천성이었다. 그러나 평소에 고혈압 증세가 있었다. 다만 무시하고 지나친 것이다. ‘산 생활’ 시절 “한 친구가 내 손금을 보더니, ‘현채야, 너는 18세 때 죽지 않으면 81세 때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며 그는 81세를 자신에게 주어진 정명(定命)으로 믿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1993년 강건하기 이를 데 없던 박현채가 난데없이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알고 보니 고혈압말고도 그는 대여섯 가지 병을 안고 살았다. 소년시절 이래 근 40여 년 거친 자갈밭길을 질주하던 차가 한번 고장나자, 수리할 수조차 없게 돼버렸다.
박현채는 병실에서 2년여를 버텼으나 1995년 8월17일 회갑을 겨우 넘긴 나이에 파란에 찬 생애의 막을 내렸다. 그와 친하게 지내던 이들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그들의 비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박현채가 가다니! 그들에게는 정말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진지함이 조롱받고 속류의 대중문화와 지식 포퓰리즘이 휩쓸고 있는 이 경박한 시대에 박현채는 삶 전체를 통해 진정한 권위에 값했다. 그를 그리워하며 말문이 막히던 사람들은 2006년 박현채 11주기를 맞아 ‘박현채전집’ 7권을 펴냈다. 김경희, 김금수, 김낙중, 박중기, 백낙청, 송기숙, 이경의, 임동규, 박영호, 정태인, 조석곤 등이 그들이다. 그들은 ‘박현채전집’을 내면서 전집은 ‘박현채의 얼과 넋에 바치는 공양미’이며 박현채와 동시대의 수많은 추모공동체에 바치는 헌정사라고 했다.
신자유주의 넘어 어디로
자본은 종종 미스터리한 것이다. 특히 21세기 금융자본은 더욱 괴물과 같다. 정치경제학자들은 “금융자본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것은 망상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2008년 후반부터 미국에서 불어온 금융위기가 대재앙의 마그마가 되어 전세계에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역사는 종말을 고했다. ‘우파의 이념적 승리’는 완료됐고, 모두가 만족한 가운데 자본주의의 결정적 형식으로 굳어졌다.” 이처럼 세계를 석권하다시피 했던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론’류(類)의 담론은 미국발 금융대지진으로 무너져 내려앉았다. 영국의 어느 외신은 “2008년 10월13일은 영국 자본주의 시스템이 실패한 날로 기록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심지어 뉴욕 월가의 일부 시위대는 “마르크스가 옳았다!”는 팻말까지 들고 나왔다.
금융위기 원인으로는 복잡한 금융상품의 휘발성, 자체 규제 불능의 자본시장, 금융계의 도덕적 해이 등이 거론된다. ‘실물경제’에 대한 ‘상품의 허구’, 특히 화폐의 허구는 세계경제를 들쑤시고 다니는 바이러스와 같다. 아무런 실체가 없고, 시장에서 가격을 매길 수 있는 가치투자가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모든 게 눈앞에서 연기처럼 사라져버린다.
10여 년 전 이마누엘 월러스틴은 ‘세계화의 궤적, 1945-2025’에서 미래학자의 어조로 지구 현실이 또 하나의 변곡점을 통과하고 있음을 갈파했다. 좀 더 근본적으로 성찰해보자면 오늘의 경제위기는 인류의 산업문명 전체가 파탄을 향해 한 걸음씩 추락해가고 있다는 증거로 읽을 수 있다고 그는 보았다. 기후변화, 식량의 불균형과 자연자원의 고갈, 환경파괴, 인구과잉 등 수많은 표징은 그 같은 비관론이 지나친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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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박현채가 살아 있어 오늘의 상황을 보면 어떤 진단을 내릴까. 이는 망자(亡者)의 안식마저 빼앗는 몰염치일는지 모르지만,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이 워낙 암울하고 막막해서 해보는 넋두리다. 다만 한 가지 경계해야 할 일이 있다. 이른바 실용주의가 튜브에서 짜낸 치약을 다시 튜브로 밀어넣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칫 전속력으로 역주행하기 십상일 터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국민경제 차원에서만이 아닌, 전 지구적인, 또는 최소한 지역적인 차원에서만이라도 사회와 문화에 내장된 시장을 다시 만들어내는 새로운 방정식 또는 근본적인 해법을 찾아낼 역사적 전환기에 마침내 이르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