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정치의 꽃, 정쟁’ 신봉승 지음/ 청하출판사/ 742쪽/ 2만5000원
일본은 특히 조선은 허구한 날 당파싸움이나 하면서 지내던 나라라고 강변해야 했다. 자나 깨나 싸움질만 해대니 안 망할 수가 있겠느냐는 의미에서다. 그래서 그들은 조선 사람 셋만 모이면 싸운다는 논리로 ‘사색당쟁(四色黨爭)’이라는 말을 만들었다는게 신봉승씨의 설명이다. 여기에는 조선은 국론을 하나로 통일할 수 없었기에 일본에 의존해 새로운 문물을 익힐 수밖에 없다는 논리가 숨어 있다.
이렇게 조선에 대한 폄하로 칠해진 역사인식을 우리는 ‘식민사관’이라고 하는데, 바로 이 식민사관이 당파싸움 때문에 조선이 망했다는 인식을 확산시켜서 많은 사람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게끔 한 숨은 공로자(?)라는 게 저자의 시각이다.
백번 양보해서 일본의 주장처럼 사색당파라 하더라도 여러 붕당이 서로 싸우는 과정에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인 ‘견제와 균형’의 역할을 한다고는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못했다기보다는 그런 생각을 아예 하지 못하도록 미리 쐐기를 박았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이 점에 대해서도 저자는 조선왕실의 주궁인 경복궁 근정전 앞마당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석조 건물로 지은 사실을 예로 들며, 조선의 기를 말살하려는 일본의 철저히 계산된 숨은 의도가 있었음을 간파한다.
그래서 이 책 ‘조선 정치의 꽃, 정쟁’의 역사관은 분명하다. 일본이 만들어놓은 식민사관을 버리고 조선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자는 것이다. 그러면서 조선의 당쟁은 ‘당파적 논쟁(黨爭)’이 아니라 ‘정치적 논쟁(政爭)’이라는 관점을 유지한다. 필자는 이런 역사관을 바탕으로 이 책에서 조선시대에 있었던 당쟁의 역사 속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조선시대는 선조에서 순조에 이르기까지 장장 10대, 230여 년간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끊임없이 사화와 환국의 소용돌이가 이어진다. 군신강약을 노린 왕들, 그에 맞서 명분과 이념에 목숨을 건 신하들, 그들은 자신의 주장을 담은 수준 높은 토론으로 정책을 결정하고 역사를 일궈왔다. 이 책은 조선의 붕당정치의 시작을 알리는 동인과 서인, 그리고 남인과 북인으로 갈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책에서 다루고 있는 조선 붕당의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보자.
조선의 붕당은 선조 때 생겨난 동인과 서인에서 비롯된다. 높은 관직은 아니지만 내외 문무관을 천거·전형할 수 있는 이조전랑 자리를 두고 김효원과 심의겸이 대립하면서다. 김효원이 이조전랑으로 추천됐을 때 심의겸이 반대했으나 김효원은 이조전랑이 되었는데, 김효원이 자리를 내놓으면서 사람들이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을 추천했으나 김효원의 반대로 심충겸은 이조전랑이 되지 못한다. 그리하여 김효원을 지지하는 사람과 심의겸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나뉘는데, 김효원이 서울의 동쪽에 살아서 동인(東人), 심의겸은 서쪽에 살아서 서인(西人)이라고 했다.
그리고 1681년 서인의 우두머리인 정철이 세자책봉 문제로 삭탈관직당하는 일이 발생하는데, 이 일로 정철을 응징해야 한다는 이산해와 정인홍 중심의 북인(北人)과 온건론을 주장하는 우성전과 유성룡 등의 남인(南人)으로 나뉘게 된다. 후에 장희빈을 지지하던 남인이 완전히 실각하게 되는데, 남인의 처리 문제를 놓고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老論)과 남구만을 중심으로 한 소론(少論)으로 나뉘고, 또 영조를 지지한 노론은 사도세자를 배척한 벽파(僻派)와 정조의 정책에 편승한 시파(時派)로 나뉜다.
그럼 조선의 당쟁을 정쟁으로 보아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쟁의 한 예와 만나보자. 때는 인조 14년인 1636년, 청(淸) 태종 황타이치(皇太極)가 황제의 자리에 올라서는 조선에 군신의 예를 다하라고 일방적으로 통고했다. 오랑캐와 형제의 의를 맺으면서 정묘호란을 수습하며 치욕을 감내해야 했던 조선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특히 ‘군신의 예’ 강요는 말 그대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그러잖아도 후금(청)이 다시 침략해올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팽배해 있던 터라 당시 조선 조정에는 화친이냐 척화냐를 놓고 논란이 분분했지만 주류는 당연히 척화론이었다. 일전을 불사해서라도 오랑캐에게 머리를 숙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단교까지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이때 화친론자인 최명길이 척화파의 화신인 김상헌을 찾아간다. 최명길이 먼저 대감(김상헌)과 절교를 할까 해서 찾아왔다고 입을 열었다. 그러자 김상헌은 최명길의 진의를 알고 있다는 듯 절교할 일이 있다면 절교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담담하게 수긍한다. 그러자 최명길은 청이 하나 있다며 김상헌의 목을 가져갔으면 한다고 했다. 이에 김상헌은 그럼 최명길에게 목숨과 맞바꿀 것으로 무엇을 내놓겠느냐고 하자, 최명길은 명예를 내놓겠다고 했다.
척화파, 즉 주전론자들은 맞서 싸우다 죽을지언정 머리를 숙일 수 없다는 입장이고, 화친론은 어차피 청나라에 맞설 만큼 군사력이 약하므로 맞섰다가 큰 해를 입기보다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어 피해를 최소화하자는 입장이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에서 행간을 들여다보면 두 사람은 나라의 운명을 위해 명예와 목숨을 놓고 담판을 지은 것이다. 그러나 지향하는 목표가, 또 목표에 이르는 과정이 다를지라도 결국 나라의 안위를 위한다는 것에는 차이가 없었다. 척화파든 친화파든 둘 다 나라를 망하게 하자는 것이 아니라 백척간두에 선 나라를 구하려 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렇듯 조선시대에 일어난 수많은 당쟁은 모두 서로를 모함하는 나쁜 의미의 싸움이 아니라 상생의 정쟁이었다. 또한 고도의 학문적 성과를 바탕으로 주고받는 논쟁이었기에 식견이 없는 사람은 끼어들 틈도 없었다고 한다.
이런 학문적 성과를 바탕으로 일어난 정쟁의 대표적인 사례가 효종이 죽었을 때 벌어진 예송(禮訟)논쟁이다. 인조의 계비인 조대비가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를 놓고 서인과 남인 사이에 논쟁이 붙었던 것이다. 주자가 지은 ‘가례’에 따라 1년을 입어야 한다는 서인과 ‘예기’ 등에 따라 3년은 입어야 한다는 남인 간의 논쟁이었는데, 그동안 우리는 이 논쟁을 사소하게 상복을 몇 년 입을 것인지를 놓고 벌인 소모적 논쟁이라고 여겨왔다.
그러나 이 논쟁의 이면에는 단순한 1년상이냐 3년상이냐 하는 문제를 뛰어넘어 주자학에 의해 운용되는 조선사회가 앞으로 어디로 나아갈 것인지 하는, 당시로서는 매우 중요한 의제가 담겼다.
사실 조선사회에서 관혼상제 같은 예는 생활에서 핵심 기능을 했기에 예에 어긋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물며 왕위 계승 원칙인 종법(宗法)에서는 새삼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효종이 둘째아들이라는 점이었다. 따라서 효종은 둘째아들이지만 왕위를 계승했으니까 맏아들로 보고 3년을 입어야 한다는 남인의 주장과 종법은 왕이든 일반인이든 똑같으므로 둘째아들에 해당하는 1년을 입어야 한다는 서인의 주장이 맞섰던 것이다. 예를 둘러싼 순수한 학문 논쟁으로 시작한 논쟁이 점점 격화되어 효종의 적통에 관한 싸움으로 상승작용하면서 정치적인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는 것이 이 책의 설명이다.
조선은 세계 역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500년이나 지속된 나라다. 조선 왕조가 이렇게 장구하게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오히려 사색당파와 같은 견제와 균형의 시스템이 작동했기 때문 아니었을까.
예나 지금이나 어느 나라든 당파는 있게 마련이다. 우리의 정치판을 보더라도 한나라당, 민주당 등 각자의 정치적 입장과 이해관계에 따라 당을 이루어 서로 자신의 주장을 내놓고 치열하게(?) 싸운다. 일본도, 미국도, 영국도… 세계 어느 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그렇다고 그들 나라가 망했는가. 그렇지 않다. 조선의 정쟁이란 것도 그런 범주에서 이해해야 한다.
붕당 속에서 피어난 정쟁, 그 정쟁을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이 책은 우리에게 중국 송나라 때 정치가이자 당송8대가의 한 사람인 구양수(歐陽脩)의 ‘붕당론(朋黨論)’을 인용하면서 이제 당쟁이 조선을 망하게 한 원흉이라는 ‘원죄’(?)에서만큼은 벗어나야 함을 일깨워준다.
“군자(君子)는 군자와 더불어 도(道)를 함께하고 붕(朋)을 이루며, 소인(小人)은 소인끼리 이(利)를 같이하여 붕을 이루니, 군주가 소인의 위붕(僞朋)을 물리치고 군자의 진붕(眞朋)을 쓴다면 천하가 잘 다스려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