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대한 레보스키’는 냉소적 유머가 묘한 매력을 내뿜는 걸작이다. ‘화이트 러시안’은 보드카에 커피 리큐어를 섞은 ‘블랙 러시안’을 응용해 만든 칵테일.
코엔 형제의 데뷔작은 1984년 저예산으로 촬영한 ‘블러드 심플’. 이후 ‘애리조나 유괴사건’ ‘밀러스 크로싱’ 등을 발표했고 1991년에는 영화 속의 공간과 현실을 모호하게 뒤섞어놓은 독특한 영화 ‘바톤 핑크’로 칸영화제에서 극찬을 받았다. 1996년 발표한 ‘파고’는 리얼리즘과 작가적 성찰이 돋보이는 영화로 코엔 형제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국내에서도 개봉됐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No Country for Old Men, 2007년)’라는 작품으로 높은 흥행 수익을 기록하기도 했다.
1998년 작품인 ‘위대한 레보스키(The Big Lebowski)’는 비록 상업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개성 있는 배역들의 독특한 냉소적 유머가 묘한 매력을 선사하는 숨은 걸작이다. 이 때문에 영화는 열광적인 팬들을 낳아 인터넷 시대의 첫 컬트영화로까지 평가받고 있다. 영화의 무대는 1990년대 초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 군대가 쿠웨이트를 기습 침공한 뒤 당시 조지 H 부시 대통령(아버지 부시)이 군사작전을 준비하던 시절의 미국 로스앤젤레스다.
섹스 후 들이켠 화이트 러시안
주인공 제프 레보스키(제프 브리지스 분)는 이렇다 할 직업도 없고 그렇다고 특별한 삶의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닌, 보기에도 어수선한 게으른 백수건달이다. 그는 자기의 본명보다는 듀드(Dude·멋쟁이)로 불리기를 좋아하고 눈을 뜨고 있는 시간은 친구들과 볼링을 치면서 시간을 죽이며 산다. 그의 볼링 단짝은 베트남전쟁 참전군인 출신으로 다혈질 성격을 곳곳에서 드러내는 월터(존 굿맨 분)와 어수룩하면서도 조용한 성격의 순진한 도니(스티브 부세미 분)란 친구다.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반바지에 코트를 걸친 어수선한 복장으로 슈퍼마켓에서 간단하게 장을 본 뒤에 혼자 살고 있는 집으로 돌아온 듀드는 뜻밖의 사건에 휘말린다. 난데없이 재키 트리혼이란 사채업자가 보낸 청부 해결사들이 나타나 ‘레보스키의 부인’ 버니가 진 빚을 갚으라며 온갖 행패를 부린 것이다. 청부업자 중 한 명은 듀드가 아끼던 마루 카펫에 오줌까지 갈겼다. 부인이 없는 듀드는 영문도 모른 채 봉변을 당해야 했다. 청부업자들도 뒤늦게 자신들이 사람을 착각했다는 점을 알아챘다. 레보스키는 봉변을 당한 뒤에야 로스앤젤레스에 그와 동명이인의 큰 부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찾아간다.
백만장자인 또 다른 레보스키(영화 타이틀 The Big Lebosky는 이 사람을 가리킨다)는 6·25전쟁에서 두 다리를 잃고 휠체어를 타야 했지만 자수성가해 큰 부를 일궈낸 사람이었다. 그러나 빅 레보스키(데이비드 허들스톤 분)는 카펫에 대한 변상을 요구하러 온 듀드를 돈을 뜯어내려는 건달 사기꾼으로 취급하며 쌀쌀하게 대한다. 쫓겨나다시피 나온 듀드는 대신 레보스키의 집사를 속여 집안에 있는 카펫 하나를 들고 나온다. 바로 그때 듀드는 정원 의자에 도발적인 자세로 앉아 있던 문제의 젊은 후처 버니와 조우한다. 버니는 원래 돈을 보고 레보스키와 결혼했지만 남편이 그의 허영을 충족시킬 만한 돈을 주지 않자 평소 사채와 연관된 복잡한 문제를 일으키곤 했다. 듀드가 당한 봉변의 빌미를 버니가 제공했던 것이다.
집에 돌아간 듀드는 여전히 다혈질 월터와 순진한 도니와 어울려 볼링장에 드나들면서 백수의 자유로움을 만끽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 며칠 후 빅 레보스키의 비서로부터 연락이 온다. 갑자기 버니가 사라지고 납치범으로부터 100만달러를 요구하는 협박편지가 왔는데 아무래도 듀드의 집을 습격했던 해결사들의 소행 같으니 돈을 대신 전해주면서 그들인지 확인해달라는 것이다.
듀드는 레보스키의 돈을 노린 버니의 자작극으로 판단했지만 2만달러를 받고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다. 그런데 당일 듀드가 돈을 싣고 가는 차량에 다혈질 월터가 동승하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결국 월터의 단순 무모한 계획 때문에 그들은 범인들을 놓친 채 돈을 전달하는 데도 실패한다. 돈을 받지 못한 범인들이 버니를 죽일지도 모르며, 또 레보스키에게는 뭐라고 변명해야 하느냐며 걱정하는 듀드에게 월터는 “자작극이 틀림없다”며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차에 남아 있는 100만달러를 자연스럽게 차지할 것이라며 자신감을 보인다.
그런데 볼링장 앞에 세워둔 듀드의 차가 사라지면서 일이 복잡하게 꼬인다. 빅 레보스키의 딸로 개성을 자랑하는 전위 미술가 머드(줄리안 무어 분)와 납치범을 자처하는 무정부주의자 일당 그리고 사채업자 재키 트리혼이 속속 등장해 돈을 요구하면서 사건이 복잡해진다. 머드는 자기가 아버지 레보스키의 합법적인 상속자임을 내세우는 한편 버니에 대해선 아버지의 돈을 노리고 접근한 포르노 배우라고 주장한 뒤 그 증거를 제시한다. 그러면서 그는 듀드에게 아버지가 범인에게 건네려는 100만달러는 그가 재단에서 횡령한 돈이기 때문에 다시 찾아야 하며, 만일 듀드가 그 일을 해주면 10%를 수고비로 주겠다고 제안한다. 한편 자칭 납치범들은 신나치주의 무정부주의자들로 이들은 자기들 여성대원의 발가락을 잘라 빅 레보스키에게 버니의 발가락이라고 위협한 뒤 돈을 요구한다. 그리고 사채업자 트리혼 역시 채무자인 버니가 사라졌으니 100만달러는 당연히 자기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찌됐건 사라진 듀드의 낡은 차는 경찰에 의해 교각 밑에서 발견됐지만 100만달러가 든 가방은 이미 없어진 상태였다. 이후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 전개와 엽기적인 장면들(귀 물어 떼기, 커피 깡통에 유골 담아 뿌리기, 유골 얼굴에 덮어쓰기)은 코엔 형제의 탁월한 유머감각을 마음껏 보여주고 있다.
영화는 버니가 일시적으로 도피했을 뿐 납치되지 않았고, 빅 레보스키가 공금을 횡령할 목적으로 100만달러를 가로챈 것으로 결론짓는다. 그가 듀드에게 준 가방에는 돈 대신 잡동사니만 가득 들어 있었다. 버니에 대한 그의 사랑도 위장된 것이었다.
그러나 어수룩하면서도 인간성 좋은 친구 도니는 애석하게도 가짜 납치범인 신나치주의자들과 싸움하는 중에 사망한다. 듀드와 월터는 도니의 유해를 화장한 뒤 유골을 바다에 뿌린다. 그 후 그들은 또다시 볼링에 매진하는 평범한 일상에 빠진다.
영화 마지막에는 첫 장면에서도 나오는 화자의 묵직한 목소리가 다시 등장한다. 그가 설명하듯이 바로 이것이 듀드가 사는 법이며, 휴먼 코미디가 세대를 거쳐 이어오는 이유일 것이다.
보드카와 커피의 달콤한 만남
술이 영화에 등장하는 사례는 열거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많다. 그중에는 스토리 전개의 필요상 순수한 목적으로 등장하는 경우도 있고, 흔히 이야기하는 PPL(product placement) 광고, 즉 해당 회사와의 상업적인 계약에 의해 광고 목적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처럼 한 종류의 술이 영화 전체에 걸쳐 집요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주인공의 입과 행동을 빌려 등장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이 술이 바로 보드카를 기본 술로 한 유명한 칵테일 ‘화이트 러시안(white Russian)’이다.
‘화이트 러시안’은 보드카에 커피 리큐어를 섞는 전통적인 칵테일 ‘블랙 러시안(black Russian)’을 응용한 작품이다. ‘블랙 러시안’에다 우유 또는 크림을 추가로 섞어 희게 만든 것이다. 어떻게 보면 술을 넣은 아이스커피로 생각할 수 있다. 커피 리큐어란 한마디로 커피를 주성분으로 한 혼성주를 말한다. 커피향에 대한 대중적인 인기를 감안하듯 세계적으로 여러 종류의 커피 리큐어가 상품화되고 있다. 따라서 ‘화이트 러시안’에 사용할 수 있는 커피 리큐어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그중에서 깔루아(Kahlua)가 가장 유명하다. 이 영화에서도 듀드가 손으로 얼음을 집어 컵에 넣은 다음 보드카와 깔루아를 타고 마지막으로 팩 우유를 첨가하는 장면을 수차례 보여준다. 멕시코 커피 리큐어로 알려져 있는 깔루아는 단맛이 강하면서 커피향이 짙은 리큐어로 그 자체가 보드카를 포함하고 있다.
블랙 러시안이란 칵테일 이름이 단순히 러시아의 대표 술인 보드카를 사용해 커피 리큐어로 색깔을 진하게 만든 데서 유래한 데 비해, 화이트 러시안은 그 외의 다른 뜻도 지닌다. 즉 러시아에서 1917년 10월 블라디미르 레닌(1870~1924) 주도로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 후 이들에 대항하는 세력의 군대를 ‘화이트 아미(White Army)’ 또는 ‘화이트 러시안’이라고 불렀다. 이들 화이트 러시안들은 러시아 내전(1917~1923) 당시 볼셰비키의 레드 아미와 전쟁을 치렀다. 블랙 러시안이나 화이트 러시안 모두 실제 러시아에서 개발된 칵테일은 아니지만, 러시아의 대표 술인 보드카를 기본 술로 만든 칵테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
영화에서 듀드의 화이트 러시안 만들기는 그의 집을 시작으로 레보스키의 딸 머드의 작업장과 집, 그리고 사채업자 트리혼의 집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의 집에는 다른 것은 없지만 한쪽 모퉁이에 화이트 러시안을 만들어 마실 수 있는 작은 바가 있다. 듀드가 단골로 다니는 볼링장 바에서 갈증을 풀 때도 월터는 맥주를, 도니는 청량음료를 시키지만 듀드는 항상 화이트 러시안(비록 이때는 코카시안이라는 변형된 표현을 쓰기도 하지만)을 주문한다. 그리고 머드가 제공한 리무진 차 안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정사 이후에도 화이트 러시안을 한잔 들이켠다.
영화에 등장하는 화이트 러시안의 경우 기본 술이 되는 보드카가 어떤 제품인지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깔루아의 존재는 특징적인 상표 디자인과 함께 등장할 뿐만 아니라 듀드가 몇 번이고 강조해 말하기 때문에 놓치기가 어렵다. 사실 화이트 러시안을 만들 때 보드카는 맛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깔루아의 향과 맛이 보드카를 압도할 만큼 강력하기 때문이다. 바텐더들은 “잘 만든 화이트 러시안의 경우 까만 바탕의 깔루아 위에 떠 있는 흰색 우유가 마치 어두운 밤이 지나고 어슴푸레 밝아오는 안개 낀 여명을 연상시킨다”고 말하기도 한다.
왜 이 영화에서 화이트 러시안이 영화 전체의 흐름과 관계없이 주인공 듀드의 상징물이 될 정도로 자주 등장하는지, 그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주인공의 이름인 레보스키가 러시아 계통의 이름인 것과 연관돼 이를 상징하는 무엇인가로 사용됐을 것이라고 추측만 할 뿐이다. 혹은 코엔 감독이 개인적으로 이 칵테일에 특별한 애착을 갖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이 영화 때문에 화이트 러시안은 일약 유명세를 타게 되어 세계 각지의 바에서 한때 주문이 크게 느는 현상이 생겼다. 심지어 이 칵테일의 이름 자체를 아예 ‘빅 레보스키(Big Lebowski)’로 부르며 주문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2004년 국내에서도 개봉된 작품으로 할리 베리 주연의 ‘캣 우먼(Cat Woman)’이라는 영화가 있다. 영화 배트맨 시리즈 중 ‘배트맨2’에서 미셸 파이퍼의 매력적인 연기로 인기를 끌었던 조연 역할을 주인공으로 바꾸어 만든 영화다. 배트맨의 무대인 고담시의 한 재벌의 어수룩한 비서로 일하다 상사의 비리를 알아차린 잘못으로 억울한 죽음을 당한 뒤 고양이의 영을 받고 ‘캣 우먼’으로 다시 태어나는 설정은 같다. 비록 평론가들로부터 혹평을 받았지만 섹시 스타 할리 베리의 매력을 한껏 이용한 이 영화에서 캣 우먼이 화려한 한 바에서 화이트 러시안을 주문하는 장면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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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어지는 뒷말이 재미있다. “얼음 없이, 보드카는 빼고, 깔루아도 빼고(no ice, hold the vodka, hold the Kahlua.” 이 말은 결국 우유(또는 크림) 한잔 달라는 표현이다. 이 표현은 화이트 러시안이란 칵테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고서는 이해할 수 없다. 여러분! 이 글을 읽는 오늘 저녁 동네 바에서 화이트 러시안을 한잔 주문해 마시는 게 어떨지? 아니면 영화 속의 듀드와 같이 재료를 구해 집에서 간단히 한잔 만들어 마시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화이트 러시안 한잔으로 어수룩한 듀드가 되든지, 아니면 유유 한잔으로 화이트 러시안의 기분을 즐기는 캣 우먼이 되든지는 당신의 선택이다.
영화 ‘위대한 레보스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