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맛은 피할 수 없는 유혹이다. 팜 파탈과 같은 존재다. 그런 유혹을 지닌 스위트와인 중에서 최고는 단연 ‘귀부(貴腐) 와인’이다. 샤토 디켐은 프랑스를, 에곤 뮬러는 독일을 대표하는 귀부 와인이다.
귀부 와인의 메카는 소테른(Sauternes)이다. 소테른은 프랑스 보르도 지방의 남쪽에 위치한 마을이며, 가론 강가에서 가깝다. 귀부 곰팡이는 강가에서 발생하는 물안개에 의해 확산된다. 귀부 곰팡이가 바람을 타고 소테른 포도밭까지 날아온다. 그리고 포도알에 내려앉아 곧 껍질을 갉아먹기 시작한다. 곰팡이의 작용으로 연해진 껍질에 아침 태양이 내리쬐면 껍질 사이가 벌어지며 그 틈으로 수분이 빠져나온다.
샤토 디켐.(왼쪽)에곤 뮬러.
귀부 와인의 대표, 샤토 디켐
소테른 중에서 가장 훌륭한 와인은 샤토 디켐이다. 디켐의 명성은 이미 수세기 전부터 알려지기 시작했다. 나폴레옹 3세는 소테른 와인의 등급을 메독과는 별도로 정했다. 소테른도 메독처럼 1855년에 등급이 매겨졌는데, 디켐만이 유일하게 특급 와인으로 지정됐다.
디켐의 포도밭 면적은 약 100ha다. 이는 대략 1㎢의 면적이다. 포도밭의 80%에는 세미용을 심고, 나머지 20%의 땅에는 소비뇽 블랑을 심는다. 소테른에서는 제철이 한참 지난 시기에 늦은 수확을 한다. 모든 수확은 사람이 직접 손으로 한다. 세미용을 추수할 때에는 곰팡이 작용이 심화된 송이만을 고른다. 오랜 기간 농익은 포도송이만을 일일이 골라야 하므로 포도밭에는 일꾼이 항상 대기하고 있다. 포도를 수확하는 데 보통 6주 정도 걸린다. 그들은 매일 밭에 나가 잘 익은 송이를 골라낸다. 도중에 비가 오면 작업을 멈추고 갤 때까지 기다렸다가 수확하기도 한다.
와인 한 병에 5만5800달러
디켐은 소테른 와인 중에서 가장 비싼 와인이다. 그 이유는 첫째 양조기간이 길기 때문이다. 새로운 오크통에서 3년 내지 3년 반 동안 숙성시키고, 병입하고 다시 1년을 지하 셀러에 저장하는 등 긴 준비 기간이 필요하다. 또 3개월마다 통을 갈아주는 래킹을 하기 때문에 새로운 오크통이 추가로 필요하다. 그게 모두 돈이다. 2009년에 수확한 포도는 2015년이 되어야 비로소 와인으로 출시된다. 약 6년이 걸린다. 둘째 포도의 농축된 맛을 얻기 위해 가지치기를 많이 한다. 그래서 소출이 아주 적다. 포도 수확 비율이 일반 보르도 레드와인에 사용되는 포도의 10%에 불과하다. 대략 포도나무 한그루에서 한 잔 정도만 생산될 뿐이다. 그런 이유로 ‘황금 액체’라고도 불린다.
2004년 5월 뉴욕 와인 경매에서는 뤼 살뤼스(Lur Saluces) 백작이 직접 출품한 디켐이 단연 화제였다. 샤토 지하 셀러에서 100년 이상 기다려왔던 1899년 빈티지를 포함해 20세기 대표적인 빈티지들이 출품됐다. 완벽한 조건을 갖춘 곳에 저장됐던 와인이라 경쟁이 치열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예상대로 1899년 빈티지는 한 병에 무려 5265달러에 낙찰됐다. 그리고 진귀한 맛과 향으로 유명한 1934년 빈티지 한 병은 5148달러에 팔렸다. 이날 경매에서는 출품된 40품목이 전부 낙찰될 정도로 화젯거리였다. 디켐은 경매 역사상 최고가 화이트와인의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디켐 1784년 한 병이 그 주인공이다. 낙찰가는 5만5800달러였다. 소장자가 토머스 제퍼슨 전 미국 대통령일 것이라는 추정에 힘입어 높은 가격에 팔렸다.
샤토디켐 와이너리. 프랑스 스위트와인의 대표주자다.
디켐은 숙성 분야에서 세계 챔피언이기도 하다. 어떤 와인보다도 오랫동안 저장할 수 있다. 빈티지가 좋을 경우에는 보통 50년에서 75년 숙성된다. 2005년산도 여기에 해당한다. 요즘도 외국 언론에는 19세기 빈티지 디켐을 시음한 후 그 맛의 대단함을 표현한 글이 가끔 실린다.
프랑스 영화 중에 ‘넬리와 아르노(Nelly & Monsieur Arnaud)’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에는 아르노가 넬리를 레스토랑으로 데려가서 미리 준비한 디켐을 대접하는 장면이 나온다. 힘든 일을 마무리하고서 나누는 와인, 혹은 생명의 은인에게 대접하는 와인으로 디켐이 제격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나는 이 영화를 보고나서 처음 하게 됐다.
화이트와인의 강자 독일 와인
독일은 와인에서 프랑스의 영원한 맞수다. 레드에서는 프랑스가 강하지만, 화이트에서는 독일도 만만치 않다. 프랑스의 동부지방 알자스의 와인문화는 독일을 빼쏘았다.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파리와는 거리가 너무 멀고, 오히려 라인강 문화와 아주 유사하다. 화이트의 개성과 품질 면에서 오래전부터 세계 최고 반열에 올라 있는 독일 와인은 그 위상에 걸맞지 않은 오해로 늘 시달려왔다. 그것은 바로 독일 와인은 맛이 너무 달다는 인식이다. 독일은 대표 품종 리슬링뿐만 아니라 게뷰르츠트라미너, 실바너, 쇼이레베 같은 청포도로 무조건 달게 만든다고 알려져 있다.
독일 당국은 이런 오해를 살 만한 행동을 많이 했다. 와인 등급을 구분하는 기준의 경우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이 모두 비슷한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이른바 원산지 개념이다. 전통과 실질이 부합하는 원산지를 선정하고 그 경계 내에서 약속된 방식으로 양조된 와인은 해당 원산지 이름을 라벨에 새길 수 있는 것이다. 보르도 혹은 샴페인, 바롤로 혹은 모스카토 다스티처럼 말이다. 하지만 독일은 원산지 개념보다는 포도 당분의 함유량으로 등급을 나누었다. 포도알이 푹 익으면 익을수록 높은 등급을 받는 시스템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아이스바인은 정점 바로 아래에 위치하는 고(高)등급인데, 국가의 최고 등급 와인이 아주 달다는 이미지만 주는 것이 독일 와인의 문제점이다. 그러니 특히 레스토랑에서는 독일 와인을 좀처럼 주문하지 않는다. 달디단 와인에 어떤 음식이 어울리겠느냐면서. 사실 독일 와인은 단것보다는 달지 않은 게 더 많다. 그러나 독일 와인 등급이 복잡하고, 철자도 길고, 독일어 자체의 생소함과 난해함이 더해져서 선택하기 가장 힘든 와인이 되었다.
사실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은 독일 와인의 장점도 많다. 대부분의 생산자가 새 오크통을 사용하지 않는다. 여러 번 사용한 오크통을 써서 포도즙 특징만으로 와인을 만들려고 한다. 이는 새 오크통의 효과를 많이 활용하는 프랑스 화이트와 확연히 구분된다. 음식과의 궁합도 좋다. 2007년 와인의 고장 비스바덴의 한 레스토랑에서의 일이다. 미슐랭 별 하나 등급일 정도로 유명 레스토랑이었는데, 특히 오리요리가 유명하다. 당시 내가 선택한 와인은 독일 화이트였다. 에곤 뮬러 카비네트였는데, 오리고기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독일 스위트화이트의 최고봉 에곤 뮬러
독일의 최고 포도밭은 대부분 강변에 포진해 있다. 남향의 언덕에 조성된 것을 제일로 친다. 그런데 라인강의 지류인 자르강은 상황이 다르다. 자르강은 모젤강으로 연결되는데, 특이하게도 북으로 흘러 남향 언덕을 조성하기가 쉽지 않다. 이 지역은 지도상에서 보면 룩셈부르크에 훨씬 가깝다. 한 시간만 뜀박질하면 닿을 정도다.
자르강 최고의 포도밭은 샤르츠호프베르그다. 강 언덕이 아닌, 강에서 좀 떨어진 남향 언덕에 있다. 정확히는 5시25분 방향이다. 여기에서 와인을 만드는 에곤 뮬러는 자타가 인정하는 독일 대표 양조장이다. 에곤 뮬러는 독일 스위트 화이트의 최고봉이다. 현 세대에서만 인정받는 게 아니라 지난 세기, 아니 그전 세기부터 대단한 와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양조장이 위치한 고장에서 실시하는 경매에서 에곤 뮬러의 최고급 와인은 매년 최고가로 낙찰된다. 지난해 최고등급 트로켄베렌아우스레제 한 병이 4000유로에 낙찰됐다.
샤르츠호프베르그는 소테른처럼 보트리티스의 축복 세례를 받은 곳이다. 샤토 디켐처럼 포도알에 귀부 곰팡이가 기승을 부려 흉물스럽게 포도를 일그러뜨린다. 그런데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이곳을 샤르츠베르그와 헷갈리기 쉬운데 이것을 조심해야 한다. 샤르츠베르그는 이 지역 전체의 이름이면서, 포도밭으로는 일반급에 지나지 않는다.
에곤 뮬러 양조장은 1797년부터 가족경영으로 이어오고 있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 이후 프랑스군은 독일 라인강 지역까지 접수했다. 이후 나폴레옹의 교회 재산 세속화 정책에 따라 수도원과 부속 포도밭은 경매 처분됐는데, 1797년에 요한 야곱 코흐가 낙찰받았다. 그의 사위 펠릭스 뮬러가 1829년부터 이 장원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1880년에는 에곤 뮬러 1세가 가족 재산을 되찾았고, 이후 계승돼 1959년생인 에곤 뮬러는 4세가 된다. 지금 청년인 그의 아들은 5세다. 그 집안에서는 개 이름도 에곤이다. 4세인 3명의 형제 이름도 모두 에곤이다. 아버지, 즉 뮬러 3세 생각에는 집안 양조장을 누가 물려받을지 모르기 때문에 아들 이름을 모두 에곤으로 지었다고 한다.
현재 8ha의 샤르츠호프베르그와 그 밖의 포도밭을 합쳐 약 12ha의 포도밭에서 매년 약 7만병을 생산한다. 98%가 리슬링이다. 시련도 많았다. 19세기 말에는 미국에서 건너온 필록세라 해충에 의해 일부 밭이 황폐화됐지만 일부는 살아남았다. 아직도 필록세라 해충 공격 이전 시대의 클론들이 3ha 면적에서 경작되고 있다. 2차 대전 당시에는 미 공군기가 샤르츠호프베르그에 추락하면서 밭의 일부가 피해를 보기도 했다. 그럼에도 당시에 일부 포도원에서 수확을 할 수 있었다. 1945년 가을은 전투기 추락사고 피해 영향과 관리 소홀 탓에 1000병 정도를 병입하는 데 그쳤다.
독일에서 유명한 양조대학교 가인젠하임 출신인 4세는 “샤르츠호프베르그는 스위트 버전이어야 땅속의 맛을 표현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독일 와인 가이드(The guide to German wines)의 저자 조엘 페인은 “스위트와인 카테고리에서 독일 내에서는 이보다 더 진전시킬 생산자를 찾기 어렵다”고 기록한다.
독일 와인너리의 첨단셀러(저장고).
샤토 디켐과 대등한 수준의 와인을 골라야 한다면 아우스레제급 이상이어야 한다. 그래야 귀부 곰팡이의 작용을 제대로 비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에곤 뮬러의 아우스레제는 매년 5000병가량만 생산되며, 이보다 더 당도가 높은 베렌아우스레제나 트로켄베렌아우스레제는 빈티지가 허락해야 조금 담글 수 있을 정도다. 디켐의 평균 생산량이 11만병에 달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생산규모가 매우 작은 편이다. 그러나 맛과 향기만큼은 뒤지지 않는다. 에곤 뮬러 4세가 태어난 해이기도 한 ‘1959년 트로켄베렌아우스레제’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와인으로도 꼽힐 정도다. 그는 이 점을 아주 자랑스러워한다. 에곤 뮬러 4세는 뱅커로 있는 두 형제에 비하면 자신은 큰돈을 벌지 못했다고 말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리 낙담하지 않는다. 지하 깊숙이 저장돼 있는 1959 빈티지 와인 병수를 감안하면 자신이 더 부자일지도 모른다고 믿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숙성이 가능한 에곤 뮬러
에곤 뮬러는 또한 알코올 도수가 낮아도 아주 오랫동안 숙성할 수 있다. 카비네트, 슈페트레제는 10~25년, 아우스레제 이상이면 50년, 길게는 100년까지 숙성할 수 있다. 디켐의 도수 13.5%에 비해서 턱없이 도수가 낮지만, 숙성력에 서는 따라올 와인이 없다. 왜냐하면 샤르츠호프베르그 포도밭의 미세한 기후가 리슬링의 진면모를 모두 다 와인으로 치환하기 때문이다. 특히 강력한 산도는 숙성력을 뒷받침하는 든든한 기둥이다. 이런 산도는 당분으로 가려져 있어 맛으로는 조화롭게 다가온다.
양조상 특징으로는 발효 작업이 무척 늦다는 점을 들 수 있다. 10월 말이나 11월 초까지 기다려서 수확한다. 양조장으로 포도를 운반하면 그때에는 기온이 매우 낮다. 그래서 캐스크의 크기도 작은 편이다. 발효는 10hℓ(헥토리터), 즉 1000L 캐스크에서 한다. 그러니 여러 캐스크가 필요하며, 특정 캐스크 와인이 뛰어나면 다른 캐스크와 섞지 않고 독립적으로 병입하여 따로 구분한다. 아우스레제급 이상의 와인은 모두 캐스크별로 양조한다. 700㎏의 포도를 담은 용기에서 보통 15L, 즉 20병 정도를 생산한다. 그러니 그 포도가 귀부곰팡이에 의해 얼마나 말라비틀어졌는지 짐작할 수 있다.
루이비통이 소유한 디켐처럼 에곤 뮬러 역시 일반 대중을 위한 와인이 아니다. 와인 사회 내부자들을 위한 와인, 와인 심미주의자를 위한 와인이다. 오직 품질과 전통 그리고 철저한 고급화 전략으로 오늘날 각각 그 나라를 대표하는 스위트와인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