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호

지식소매상이 아닌 정치인 유시민의 책

  • 이승협│한국노동행정연구원 교수 solnamu@gmail.com│

    입력2009-05-09 12: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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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소매상이 아닌 정치인 유시민의 책

    ‘후불제 민주주의’유시민 지음/ 돌베개/ 380쪽/ 1만4000원

    독일에서 가장 명망 있는 문학평론가인 마르셀 라이히 라니츠키는 독일 공영방송인 ZDF에서 문학비평 프로그램 ‘문학 4중주’를 1988년부터 2002년까지 무려 14년 동안 진행해왔다. 특유의 입담과 촌철살인의 독설로 수많은 문학가를 쥐락펴락하던 라니츠키는 마지막 방송에서 오로지 방송을 위해 볼 만하지 않은 책을 억지로 읽어야 하는 괴로움을 내비쳤다.

    유시민의 ‘후불제 민주주의’를 보면서 라니츠키의 기분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핵심 측근으로 정치활동을 해온 정치인 유시민이 쓴 책이기에 그나마 보통 정치인들의 책과는 무언가 다를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결코 정치인의 책에 손이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선 기대에 부응하는 측면을 살펴보자. ‘후불제 민주주의’는 스스로 지식소매상을 표방하는 저자가 갖고 있는 개인적 재능인 대중적 글쓰기의 전형을 보여준다. 지식소매상이란 말 그대로 자신이 축적한 전문적 논의를 대중이 알기 쉽고 다가서기 쉽게 풀어주는 역할을 하는 전문가를 말한다. 따라서 당연히 대중적 글쓰기가 가능해야 한다. 저자는 ‘후불제 민주주의’에서 헌법이라는 딱딱한 법제도적인 규정을 소재로 삼았지만 에세이라는 형식으로 풀어내면서 다양한 소재와 주장을 결합시키는 대중 접근 전략을 효과적으로 구사하고 있다. 저자가 ‘항소이유서’‘거꾸로 읽는 세계사’‘부자의 경제학 빈자의 경제학’ 등에서 유감없이 보여준 깔끔한 글솜씨와 논리 정연한 전개를 이 책에서도 그대로 볼 수 있다.

    뛰어난 지식소매상



    내용에서도 대한민국 헌법이 갖는 절대적 권위를 자기 주장의 정당성으로 활용하는 전술적 치밀성이 돋보인다. 한국사회에서 누가 감히 헌법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단 말인가? 특히 저자가 타깃으로 삼는 보수세력에게 헌법이란 어쨌든 형식적으로는 마치 성경과 같은 위치에 있기 때문에 더욱 효율적이다. 이러한 전략과 전술을 극대화하기 위해 ‘후불제 민주주의’는 크게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헌법의 당위’는 자기 주장의 권위와 정당성을 획득하고 동시에 자신을 자유주의자로 받아들이게 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으며, ‘2부 권력의 실재’에서는 이에 기초해 본격적으로 자기 경험과 주장을 전개한다.

    헌법의 조항을 하나씩 소개하고 풀어내면서 자기 주장의 근거가 헌법에 있음을 천명하는 전략은 전통이나 권위를 쉽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속성, 즉 베이컨의 ‘극장의 우상’을 활용한 것이다. 절대적 권위를 갖는 헌법적 규정의 규범적 당위성을 먼저 얘기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저자의 주장이 마치 헌법과 유사한 논리적 연장선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든다. 실제로 이러한 전략은 성공적인 것처럼 보인다. 이런 방식이 아니었다면 일부 사람들에게 전형적인 모사꾼 내지는 궤변가로 인식되는 정치인 유시민의 발언과 주장에 대해 훨씬 더 감정적인 반응이 나타났을 것이다.

    저자는 1부에서 자유와 대한민국의 주권을 받아들이고, 보수와 진보를 뛰어넘는 관용과 다양성을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경쟁을 받아들이면서 복지를 이야기하고, 애국과 법치주의를 언급하고 재산권의 정당성을 받아들인다. 그런데 책을 유심히 읽어보면 이러한 개념들의 사용에는 대부분 전제가 달려 있다.

    예를 들어 저자가 말하는 애국은 보수주의자들이 사용하는 애국과는 다른 의미다. 보수주의자들이 사용하는 애국과 애국주의는 국가에 대한 복종이라는 국가주의에 기초를 둔다. 이러한 형태의 보수주의적 애국과 애국주의는 실제 역사과정에서 타 인종과 타 민족에 공격적인 배타적 인종주의로 발현되었다. 서구 유럽의 지성계가 민족주의, 국가주의, 애국, 애국주의에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도 일본의 군국주의나 독일의 파시즘이 모두 보수주의적 애국주의 또는 배타적 민족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자들의 애국 개념과 달리, 저자가 주장하는 애국은 헌법애국주의(Verfassungspatriotismus)에 기초를 두고 있다. 저자는 독일 사회학자인 위르겐 하베르마스가 우파의 배타적 민족주의에 근거한 공격적 애국주의를 대체하기 위해 헌법애국주의 개념을 고안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헌법애국주의란 원래 독일 정치학자인 돌프 슈테른베르거가 1982년 책 제목으로 사용했던 용어다. 슈테른베르거는 이주노동자의 국적 문제와 관련해 독일이 폐쇄적 민족주의가 아닌 다문화적 열린사회의 새로운 공동체적 가치를 가져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 헌법애국주의 개념을 사용했다. 단순화해서 말하면, 다문화주의를 수용하면서, 헌법을 다문화주의를 유지시키는 공통의 규범으로 삼자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유시민은 왜 다문화주의 또는 다원주의를 직접 이야기하지 않고 진보세력이 터부시하는 애국이란 단어를 굳이 사용하고 있는가? 바로 여기에 정치인 유시민의 또 다른 전략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 사회에서 애국이란 단어는 암묵적으로 진보와 보수의 편을 가르는 기준이다. 유시민은 이러한 점에 착안해 애국과 헌법이란 용어를 결합시킴으로써 은연중에 보수의 정서에 다가서고자 하는 것이다.

    결국 저자는 보수주의자들의 용어를 자유주의적으로 전용하면서 자신에 대한 적대감을 무마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내용적으로 여전히 진보주의의 틀 내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는 것으로 보인다. 보수와 진보를 뛰어넘는 새로운 정치철학이나 정치윤리를 내세우기보다는 향후 정치활동을 염두에 둔 사상적 위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사회자유주의란 자기규정은 이러한 점에서 노무현의 좌파 신자유주의란 말만큼이나 모순적인 동시에 정치적이다. 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집단과 공동체, 즉 사회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와 달리 서구의 사상사적 전통에서 자유주의가 결코 ‘사회’와 어울릴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저자가 사회자유주의란 용어를 쓰는 것은 이 책이 바로 지식소매상 유시민의 책이 아니라 정치인 유시민의 책이기 때문이다.

    ‘양복 입은 침팬지’

    ‘후불제 민주주의’를 읽고 기분이 유쾌하지 않은 결정적 이유는 지식인의 기본적 덕목이라고 할 자기반성이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는 데 있다. 저자가 서문에 쓰고 있듯이,이 책은 헌법에 대한 에세이이자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며, 정치인으로서의 활동에 대해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지식인이란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해답을 추구한다. 이러한 행위가 정당성을 갖기 위해서는 동일한 과정이 자신에게도 행해져야 한다. 자기반성이란 자신의 사고와 주장에 대해 끊임없이 회의하고 의심하고 그로부터 자기 확신을 얻고 나아가 다른 물음에 대한 확신을 찾아가는 출발점이 된다. 따라서 자기반성은 사유하는 지식인의 기본적 덕목이다.

    정권의 핵심부에서 대통령을 가까이 모시던 주요 인물의 한 사람으로서, 한 지역구에 살고 있는 주민들을 대표했던 국회의원으로서, 전 국민의 보건의료 정책을 담당했던 장관으로서 자신의 정치적 활동을 정치인 유시민이 아닌 지식인 유시민, 아니면 하다못해 지식소매상 유시민으로서, 때로는 열정적으로 때로는 냉철하게 평가하고 반성하면서 자기주장을 할 수는 없었을까?

    이 책에 대해 기대한 것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솔직한 입장과 자기반성이었다. 사회개혁세력이 모였다는 개혁신당을 이끌던 사람으로서 국정에 관여하면서 개혁신당의 기본 원칙과 지향을 국정에 반영했다고 할 수 있는가? 아직도 여전히 스스로를 진보개혁세력이라고 생각한다면 반전과 반핵 문제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 그러나 저자는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행위에 대해 변명과 정당화로 일관하고, 여전히 모든 문제를 수구세력과 보수언론의 탓으로만 돌리고 있다.

    독일 녹색당 당수였던 요쉬카 피셔가 독일 국회에 운동화를 신고 등원했던 것을 베껴, 유사한 정치적 이벤트로 기획해 평상복 등원 논란을 일으킨 일이나 이라크 파병문제를 외화벌이 차원으로 격하시키는 인식 등으로 볼 때 저자가 이 책에서 보수세력에 대해 가하는 ‘양복 입은 침팬지’라는 비난은 가장 먼저 자기 자신을 향해야 한다. 정치활동을 대중의 관심을 독점하기 위한 이벤트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바로 기성 정치인의 전형이다. 미디어의 ABC라는 책에서 노베르트 볼츠는 현대 미디어사회에서 정치인은 카메라 앞에서만 일하며, 대중의 관심을 독점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저자가 이 책에서 결론적으로 제시하는 바는 선의 연대와 거대한 시민행동 조직을 통해 악한 시스템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을 읽는 순간, 한편으로 악의 축에 대항하기 위한 십자군을 얘기하던 전 미국 대통령 부시의 발언이 떠오르고, 다른 한편으로 선의 연대와 거대한 시민행동의 중심에 자기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은 지나친 억측일까?

    이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니묄러의 인용문은 다음과 같이 고쳐져야 할 것이다.

    그들이 이라크 파병을 반대했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열린우리당 국회의원이었으니까/ 그들이 비정규직 법안을 통과시켰을 때/나는 침묵했다/ 나는 보건복지부 장관이었으니까/ 그들이 민주노총과 전교조를 공격할 때에도/ 나는 항의하지 않았다/ 나는 안티는 현실을 주도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마침내 내가 선의 연대와 거대한 시민행동의 중심에 있고 싶었을 때/ 나와 함께해줄/ 그 누구도 남아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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