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기하와 얼굴들
장기하 열풍과 88만원 세대
장기하가 관심을 받는 건 자신의 이야기를 대중에게 ‘호소력 있게’ 들려주는, 흔치않은 20대 뮤지션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단, 그 이야기는 1990년대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다”며 ‘교실이데아’를 부르고 “정직한 사람의 시대는 갔다”며 ‘시대유감’을 표하던 서태지의 이야기와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이는 민주화 이후 낙관론이 지배적이던 1990년대 초와 불황으로 비관론이 지배하는 2000년대 말의 차이인지도 모른다. 혹은, 새로움을 갈망하던 ‘문화르네상스 시기’를 보낸 젊은이와 경제가 무엇보다 중요한 ‘불안의 시대’를 살고 있는 젊은이의 차이일 수도 있다. ‘싸구려 커피’를 마시고 ‘별일 없이 산다’고 말하는 장기하의 노래를 언론에서는 ‘88만원 세대의 자화상’이라고 표현했다.

서태지는 1990년대 초중반 X세대의 상징이었다.
‘싸구려 커피’는 2008년 5월 출시된 장기하와 얼굴들의 싱글앨범 수록곡이다. 서울대 사회학과 출신으로 전직 ‘눈뜨고 코베인’의 드러머였던 장기하는 “공부는 잘하는 분야일지 모르지만 즐기면서 할 수 있는 건 음악이기 때문에 음악을 택했다”고 말한다. 그의 노래는 처음엔 인터넷 UCC를 중심으로 인기를 얻었다. 1970년대 포크를 연상시키는 멜로디와 기발한 가사, 읊조리는 랩과 미미시스터즈의 퍼포먼스는 기존 대중가요에서 볼 수 없던 파격이었다. 20대 중심으로 인기를 얻기 시작하더니 40대 아저씨들의 통화연결음에도 ‘싸구려 커피’가 울려 퍼졌다. ‘싸구려 커피’가 수록된 장기하와 얼굴들의 싱글앨범은 약 1만2000 장 판매됐으며 2월 말 발매된 첫 번째 정규앨범도 3월 한 달 동안 1만3000장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메이저 연예기획사 소속 가수의 음반이 5만장 기록을 깨기 어려운 현재의 시장상황에서 인디 레이블(음반사) 출신 장기하가 별다른 마케팅과 홍보 없이 그 못지않은 성과를 거뒀다는 사실은 무척 이례적이다(장기하의 소속사인 붕가붕가레코드 측조차 싱글앨범 ‘싸구려 커피’의 경우 “처음엔 500장 팔릴 것으로 예상했다”고 말할 정도다). ‘싸구려 커피’는 3월 초 열린 한국대중음악상시상식에서 올해의 노래, 최우수 록(노래)으로 선정됐으며, 장기하는 아이돌 출신 가수들을 제치고 네티즌이 뽑은 올해의 음악인이 됐다.
물론 현재 장기하의 인기만으로 ‘사회현상’ 혹은 ‘열풍’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빅뱅’이나 ‘슈쥬(슈퍼주니어)’를 모르는 기성세대가 장기하의 노래에 호응한다는 것, 그의 노래 속에서 풍자하는 남루한 현실은 의미심장하다. 이는 장기하가 신문의 연예면이 아닌 칼럼과 시사잡지 혹은 텔레비전 시사 프로그램에서 비중 있게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1990년대 초 서태지가 당시 X세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받아들여진 것처럼, 2000년대 말 장기하는 미디어와 대중이 지금의 88만원 세대를 이해하는 아이콘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