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이 남자의 특별함 ⑨

아낌없이 사랑하고 간 남자 이브 몽탕

  • 전원경│주간동아 객원기자 winniejeon@hotmail.com│

아낌없이 사랑하고 간 남자 이브 몽탕

1/4
  • 나뭇잎들이 서리 내린 대지 위로 내려앉는다. 새벽의 우윳빛 안개는 오전 내내 허공을 부유하고, 한낮의 햇살마저 창백하다. 대기를 가르는 바람이 싸늘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빨라지는 계절. 창에 두꺼운 커튼을 치고 머그컵에 뜨거운 밀크 티를 가득 채운 뒤, 오디오의 버튼을 누른다. 이제 ‘고엽(Les Feuilles Mortes)’을 들을 시간이다.
아낌없이 사랑하고 간 남자 이브 몽탕

이브 몽탕 연보<br>1921년 9월21일 이탈리아 밀라노 근교 몽스마노에서 출생<br>1923년 가족과 함께 프랑스 마르세유로 이주<br>1944년 에디트 피아프의 눈에 띄어 파리 물랭루즈 무대에 데뷔<br>1946년 영화 ‘밤의 문’ 출연. OST 앨범 중 ‘고엽’ 녹음<br>1951년 배우 시몬 시뇨레와 결혼<br>1956년 소련,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 순회공연<br>1960년 할리우드 영화 ‘사랑합시다’ 주연<br>1968년 프랑스 공산당 탈당<br>1969년 정치영화 ‘제트’ 주연<br>1985년 시몬 시뇨레 사망<br>1986년 영화 ‘마농의 샘’ 2부작으로 세계적인 찬사 받음<br>1987년 카롤 아미엘과 재혼<br>1988년 첫아이 발랑탱 태어남<br>1991년 11월9일 심장마비로 타계

고엽’은 프랑스의 가수 겸 배우 이브 몽탕(Yves Montand·1921~91)이 부른 샹송이다. 이 노래는 ‘파리의 지붕 밑(Sous le ciel de Paris)’ ‘장밋빛 인생(La Vie en Rose)’ ‘샹젤리제(Les Champs Elyse)’ 등과 함께 프렌치 샹송의 대명사처럼 알려져 있는데, ‘죽은 나뭇잎들’이라는 제목처럼 늦가을의 낙엽을 밟으며 떠나간 연인을 추억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고엽’은 원래 발레음악이었지만 1946년 개봉된 영화 ‘밤의 문(Les portes de la nuit)’ 삽입곡으로 편곡돼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이브 몽탕은 배우 데뷔작인 이 영화에서 하모니카를 불면서 ‘고엽’을 노래했다.

늦가을의 시린 바람처럼 애잔한 이 선율을 노래한 사람이 이브 몽탕만은 아니었다. ‘파리의 지붕 밑’을 부른 줄리엣 그레코는 연인이 갑자기 타계하자 그 슬픔을 담아 ‘고엽’을 노래했고, 1950년에는 영어 가사로 개작한 ‘고엽’이 미국에서 녹음되었다. 1956년에는 아예 이 노래를 주제로 한 ‘가을 낙엽(Autumn Leaves)’이라는 영화가 할리우드에서 제작되었다. 영화 주제가는 물론 ‘고엽’이었고, 재즈 가수 냇 킹 콜이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을 불렀다. 그 외에도 빙 크로스비, 프랭크 시내트라, 에디트 피아프, 실비 바르탕 등이 ‘고엽’을 녹음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고엽’의 진수는 이 노래를 처음 부른 이브 몽탕의 버전일 것이다.

이브 몽탕이라는 남자를 정의할 말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샹송 가수이자 배우였고, 반전평화운동의 기수였으며 1950년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한 진짜 공산주의자였다. 그는 또 미용실 보조나 부두의 노동자 같은 거친 직업을 거쳐 대스타로 자수성가한 남자이며 피카소나 프레베르, 장 콕토 등 당대의 지성들과 거리낌 없이 교유한 지식인이었다.

이브 몽탕을 단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가장 근사한 정의는 이것이 아닐까 싶다. ‘사랑을 하고 간 남자.’ 그는 정말로 70년의 인생 동안 한시도 빠짐없이 사랑을 했다. 에디트 피아프를 비롯해서 시몬 시뇨레, 마릴린 먼로, 셜리 매클레인, 카트린 드뇌브, 로미 슈나이더 등 공식, 비공식 연인에 대한 사랑만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직업인 노래와 연기를 사랑했으며, 자신에게 갈채를 보내는 팬들을 사랑했다. 또 자신의 모국인 이탈리아와 조국인 프랑스를, 그리고 ‘인간’이라는 존재를 가슴 깊이 사랑했다. 그 사랑이 너무도 컸기 때문에, 그는 가수나 배우라는 불안정한 위치에서도 반전·반핵운동 등에 용감하게 참여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어디엔가 한번 빠져들면 아낌없이 자신을 모두 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브 몽탕이라는 남자가 가진 매력의 핵심이었다.

촬영이 끝나면 “온 마음으로 몰입했던 영화의 인물을 벗어버리는 데 보름 이상이 걸린다”고 말했던 이브는 자신의 마지막 영화인 ‘IP5’ 촬영을 마친 날인 1991년 11월9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신기하게도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심장마비로 죽는 장면을 연기했다. 그리고 바로 그날 밤, 진짜 심장마비를 일으킨 것이다. 일생 동안 배우와 가수로 살던 그는 ‘온 마음으로 빠져들었던’ 역할에서 결국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영혼의 맨 밑바닥까지 예술가였다.



골수 공산주의자 가족

이브 몽탕이라는 이름은 1970년대 반공세대에게는 일종의 금기어였다. 그것은 그가 열렬한 좌파 예술인 정도가 아니라 진짜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이다. 이브는 프랑스 공산당(PCF) 당원으로, 파블로 피카소와 함께 공산당이 자랑하는 대표적인 좌파 예술가였다. 그는 냉전과 매카시즘의 열풍이 불던 1950년대에 모스크바를 비롯한 소련과 동유럽 순회공연을 떠났고, 모스크바에서는 흐루시초프를, 유고슬라비아에서는 티토를 만나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이러한 전력 때문에 미국 입국을 여러 번 거부당했다.

어찌 보면 이브가 공산당원이 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탈리아 출신인 아버지와 형이 열렬한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가난한 농부였던 그의 아버지 지오반니 리비(Giovanni Livi)는 셋째아들 이브가 태어난 1921년 이탈리아 공산당에 가입했다. 리비 가족이 이탈리아를 떠난 것도 아버지의 공산당 활동 때문이었다. 이탈리아에서 점차 득세하던 파시스트당은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해 탈당을 강요했고, 지오반니 리비는 이를 피해 1923년 온 가족을 이끌고 프랑스 마르세유로 망명을 떠났다.

말이 좋아 망명이지, 가난한 노동자 가족을 환영해주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리비 일가는 마르세유의 산동네에 자리 잡았다. 납공장과 식용유공장 사이에 있는 마을에서는 늘 악취가 났고, 오염된 물을 먹은 아이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죽어나갔다. 리디아, 줄리앙, 이브 세 아이는 부모가 이탈리아어로 물으면 프랑스어로 대답하며 자랐다. 부모는 이브를 이탈리아식으로 ‘이보’라고 불렀다. 아이들은 더러운 거리를 떼지어 몰려다니다 설탕공장의 포대를 찢어 설탕을 훔쳐 먹곤 했다.

곤궁한 형편 때문에 리비 일가의 아이들은 아무도 상급학교에 가지 못했다. 막내인 이브 역시 열한 살에 학교를 중퇴하고 국수공장에서 일했다. 점심 대신 생국수를 씹어 먹으며 배고픔을 참던 날들이었다. 누나 리디아가 거리의 창고에서 미용실을 연 뒤에는 이곳에서 손님들의 머리 감겨주는 일을 하기도 했다. 미용실 일에는 조금도 흥미가 없었지만,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했다.

이런 신산한 삶의 와중에서 이브가 어떻게 노래를 부르게 되었을까? 그의 ‘교사’는 마르세유 시내에서 상영되던 할리우드의 뮤지컬 영화들이었다. 전차요금이 없는 소년은 10㎞나 되는 길을 걸어서 미국 영화를 보러 갔다. 셜리 템플의 뮤지컬 영화와 브로드웨이 멜로디 시리즈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영화를 흉내 내기 위해 탭댄스를 배우던 소년은 가끔 마르세유 부두에서 떠나는 배들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언젠가는 대서양 저편에 있는 나라 미국에 갈 거라고, 가서 그 나라를 정복할 거라고 그는 막연히 생각했다.

1/4
전원경│주간동아 객원기자 winniejeon@hotmail.com│
연재

이 남자의 특별함

더보기
목록 닫기

아낌없이 사랑하고 간 남자 이브 몽탕

댓글 창 닫기

2023/06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