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손으로 만져보고 판단하기보다는 눈으로 보고 판단하려 합니다. 사람들은 군주를 바라볼 수 있을 뿐이지 만져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 -마키아벨리, ‘군주론’ 중에서
영국의 왕위 계승자 찰스와 결혼하며 동화의 주인공이 됐던 다이애나 전 영국 왕세자비. 하지만 그의 이후 삶은 영광과 추락, 동경과 질시가 뒤덮인 신산한 것이었다.
대중은 늘 바깥에 있는 ‘그녀 이상의 것’을 그녀들 자신의 것으로 오인했다. 대중은 왜 그들에게 ‘우리에게 결핍된 모든 것’을 투사했을까. 그 투사된 이미지는 그녀들의 이미지에 어떤 후광을 만들었을까. 여왕보다 더욱 사랑받은 왕세자비, 대통령보다 더욱 사랑받은 퍼스트레이디. 그들은 남편의 명성을 확산하는 데 일등공신의 역할을 했지만, 결국 남편보다 더 주목받고 남편보다 더 사랑받음으로써 남편의 존재를 본의 아니게 위협했다. 찰스 왕세자가 아무리 중요한 연설을 해도 신문 보도는 다이애나의 멋진 패션과 스타일링에만 주목했고 찰스는 아내의 유명세가 자신의 ‘중요성’을 위협한다고 느꼈다. 페론 대통령도 에비타로 인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었지만, 나중에는 자신보다 더 사랑받는 에비타 때문에 ‘그녀의 후광’을 없애기 위해 골몰했다.
만질 수 있을 것 같은 군주의 여인들
에비타와 다이애나는 저널리즘이 맹위를 떨쳤던 시대의 산물이다. 그들은 여성 정치인보다 더욱 강력한 문화적 영향력을 지녔고 남성 정치인보다 더욱 흥미로운 저널리즘의 먹잇감이었다. 특히 TV를 통해 전세계에 일거수일투족이 공개되던 다이애나의 경우, 파파라치의 끊임없는 추적이 그녀를 죽음으로까지 몰아넣었다. 다이애나와 연인 도디 파예드가 파파라치의 집단 추적을 받던 중 자동차 사고를 당해 파리에서 사망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세계로 전해졌다. 죽음마저 파파라치와 스캔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지만 그녀를 잃은 대중의 슬픔은 그 모든 추문을 잠재우고도 남았다. “타인을 보살필 줄 아는 다이애나, 더 이상 우리 곁에 없다”(The caring princess, no longer with us)는 식의 신문 헤드라인은 다이애나를 통해 대중이 보려고 했던 집단적 환상을 정확하게 압축하고 있다. 고통 받는 사람들을 돕는 그녀의 이미지는 단지 영국 왕세자의 아내가 아니라 대중이 갈망하는, 잃어버린 모성의 탈환이었다. 고통 받는 자와 더불어 슬퍼하는 퍼스트 레이디의 모델은 에비타에게도 그대로 투영돼 있다.
그들은 언제나 긴장감 넘치는 양극단 ‘사이’에서 서성이는 존재였기에 더욱 매력적이었다. ‘신성화된 권력’과 ‘세속적인 세계’를 이어주는 교각이고, 최고 권력과 대중 사이에 가로막힌 장벽을 무화시킨 존재였다. 마더 테레사처럼 완전한 ‘성(聖)’의 자리에 있지 않고 팝 가수 마돈나(마돈나는 에비타의 삶을 다룬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처럼 완전한 ‘속(俗)’의 자리에 있지도 않은, 성과 속의 경계에서 흔들리는 존재였다는 점이 그들의 매혹적인 ‘이미지’가 뿜어내는 아우라의 원천이다.
‘그들도 우리처럼’ 슬퍼하고 사랑하고 아파하는 존재라는 친밀감, ‘나도 그들처럼’ 비천한 자리에서 최고의 자리로 올라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승의 열망을 동시적으로 자극하는 존재라는 점이 바로 에비타와 다이애나의 결정적인 공통점이다. 그들은 대중이 가장 원하는 이미지를 창출했고 대중이 가장 슬퍼하는 방식으로 마지막을 장식함으로써 영원히 아련한 노스탤지어의 대상으로 등극하였다.
‘그녀에게는 무엇인가가 있었어요. 그것은 제가 전에 딱 한 번, 넬슨 만델라로부터 본 적이 있는 것이지요. 사람들로 하여금 그녀랑 같이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일종의 아우라 같은 것이었어요.’ … 다이애나는 최근에 지뢰를 제거한 지뢰밭을 걸어가면서 사진을 찍는 데 동의했다. 그 사진이 그 어떤 호소보다 막강한 힘을 가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일에는 신체적 위험이 따를 수 있었다. 그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정말로 겁이 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해냈다. 수백만 시청자들이 텔레비전을 통해 왕세자비의 걸음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지뢰 문제에 대해 대중의 관심을 끄는 데 무엇보다도 지대한 공헌을 했다.
-‘다이애나 사랑을 찾아서’, 앤드루 모튼 지음, 유향란 옮김, 이너북, 2005년, 295~296쪽
고통을 전시하는 미디어
그녀들의 막강한 지위만큼 매력적인 것은 그녀들의 고통이었다. 에비타는 끔찍한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유랑극단을 전전했던 파란만장한 과거와 다사다난한 연애사로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다이애나는 불행한 가족사로 인해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했고 그 상처를 평생 안고 살아가야 했다. 그녀들의 불행은 그 자체로 대중의 연민을 자극하는 ‘매혹의 요소’였다. 그녀들의 인간적 결점이 오히려 대중의 폭발적인 열광과 공감 어린 연민의 진원지가 된 것이다.
게다가 그녀들의 최대 무기 중 하나는 기존의 정치인들에게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솔직함’이었다. 그녀들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늘 위기를 빠져나갈 궁리만 하는 기존의 정치인과는 달랐다. 에비타 또한 자신을 창녀라고 비난하는 일부의 공격을 피하지 않았으며 가난 때문에 몸을 팔아야 했던 과거를 인정함으로써 오히려 대중에게 더 큰 사랑을 받았다. 다이애나는 자신의 불행한 가족사, 불륜과 자해, 폭식증과 우울증까지 모두 인정했고 그 솔직함 때문에 더더욱 대중의 공감을 얻어냈다. 특히 다이애나는 모든 걸 다 가졌지만 가장 중요한 것(남편의 사랑)을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이 대중의 연민을 자극하는 결정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다 가졌지만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것만큼이나 ‘드라마틱하게 불행’해 보였던 것이다.
에비타는 솔직하고 당당한 매력과 뛰어난 연설 재능으로 어디를 가나 남편을 능가하는 환호와 사랑을 받았다.
-‘다이애나 사랑을 찾아서’, 147쪽
대중은 가족과 왕실로부터 아무 지원을 받지 못한 다이애나가 이에 굴복하지 않고 두 아들에게 애정을 쏟고 자선활동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살아보려 한 노력을 매일 미디어를 통해 거의 생중계처럼 알 수 있었다. 일거수일투족을 왕실에서 허락받아야 했던 시절을 통과하자, 이제 일거수일투족을 대중에게서 허락받아야 했던 다이애나. 친정은 물론 시댁과 남편에게도 버림받은 그녀가 기댈 곳은 오직 대중의 사랑뿐이었기에 그녀는 대중의 반응에 더욱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대중은 그녀의 감시자이자 응원자였고 구원투수이면서도 배신의 칼날이었다. 대중의 반응은 말 그대로 그녀의 행동에 대한 사후적 리액션이었을 뿐 그녀의 삶 자체를 바꾸는 능동적 액션은 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대중의 관심과 사랑에서 위로를 얻었지만 사랑과 선망으로 가득 찬 대중의 시선이 언제든 잔혹한 질시와 비난의 시선으로, ‘샤리바리(중세 이후의 유럽에서 공동체의 규범을 어긴 자에게 가하던 의례적인 처벌 행위)’의 악몽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지 못했다. 그녀가 기대고 있던 대중은 허공 위의 소파처럼 불안한 언덕이었던 셈이다.
다이애나비를 둘러싼 언론의 가차 없는 비방과 충격적인 과장 보도는 각종 루머 기사에 익숙한 우리 시대의 시선으로 봐도 여전히 충격적이다. 왕세자비가 별거를 앞두고 있을 때 ‘선데이 타임스’ 표지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다. ‘무심한 찰스로 인해 다이애나, 다섯 번이나 자살을 시도하다.’ ‘결혼 생활의 파탄으로 인해 발병하다, 왕세자비 왈, 자신은 결코 왕비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기사가 나고 있는 동안 다이애나의 평전을 준비하고 있던 기자 앤드루 모튼은 살해 협박까지 받을 정도였다.
대중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환호하다가 그녀의 실수에 분노하고 그녀의 고통에 연민을 느꼈다. 이 연민이야말로 다이애나비를 죽인 또 하나의 살해자가 아니었을까. 중요한 것은 대중이 다이애나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아니었다. 그녀는 일거수일투족을 대중과 주변 인물들에게 감시당하고 조종당하는 삶을 살면서 ‘나의 삶’이라는 감각의 중추 자체를 잃어버렸다. ‘나의 힘으로 내 삶을 조종하고 내 가치를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성년 시절 전부를 자신의 삶을 통제하는 제도 안에서 보내야 했다. 그녀의 시간표를 알아서 처리하고 그녀의 자아를 주물러대는 조신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경호원, 황당한 왜곡이나 아무 생각 없이 경솔하게 써내려간 자가당착적인 내용, 혹은 상투적인 표현으로 그녀의 인격을 정의해버리는 미디어들 틈에서 조종당하며 살았다. 대체로 미디어의 반응을 기준 삼아 다이애나는 날이면 날마다 자기 자신을 판단했다.
-‘다이애나 사랑을 찾아서’, 80쪽.
그녀는 단지 영국의 왕세자비가 아니라 전세계의 왕세자비가 되었다. 죽음으로써 그 영원한 아름다움은 완성되었다. 국왕과 왕비라는 상징적 신성성의 지위가 추락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그녀는 국왕도 왕비도 공주도 아니면서, 나중에는 왕세자비의 자리까지 빼앗기면서, 그 모두를 합한 것보다 더 강력한 대중적 영향력을 지닌 진정한 퍼스트레이디가 되었다. 그러나 한 인간으로서 그녀는 더없이 끔찍한 불행 속에 죽어가는 모습마저 파파라치에게 도륙당한 고통스러운 인간이었다. 그녀는 미디어로 인해 중요해졌고 미디어로 인해 폭풍의 눈이 되었으며 미디어로 인해 몰락과 상승을 반복했다.
대중의 시선, 대중의 욕망
에비타와 다이애나는 남편을 보충하는 역할을 넘어 남편을 능가하는 대중의 사랑을 받았고 바로 이 점이 그녀들을 남편의 사랑에서 멀어지게 했다.
1994년부터 1995년에 걸쳐 다이애나는 종종 켄싱턴궁을 나와 그 구역의 집 없는 자들의 거처로 가서 돈과 음식을 주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키워야 할 어린애가 둘이나 있는 한 여인에게 겨울 코트 살 돈을 몽땅 준 적도 있었다. 또 언젠가는 뜨내기 노동자가 발견하기를 바라면서 자신의 모피코트를 폐기물 운반 용기에 던져 넣기도 했다. 그녀는 줄기차게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하며 보고 싶어했다. …‘나는 상류층 사람들보다는 밑바닥 사람들을 더 가깝게 느끼고 있어요. 그런데 상류층 사람들이 바로 그 점 때문에 나를 용서하려 들지 않았어요.’
-‘다이애나 사랑을 찾아서’, 180~181쪽.
에비타는 타인이 그녀의 단점을 공격할수록 더 강해지는 타입이었다. 에비타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것, 한때 살기 위해 몸을 팔아야 했다는 것, 첩의 자식이라는 것. 이 모두가 그녀에게 불리한 조건이었지만 그녀는 그러한 인신공격을 받을 때마다 주눅 들기는커녕 더욱 당당해졌다.
신문기자들은 그녀를 그냥 놔두지 않았다. 그들은 에바를 에워싸고는 일제히 빈정거리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작가는 누구지요? 좋아하는 음악은? 취미는?’ 에바는 빙그레 웃었다. 그녀는 우선 자신이 교양이 없는 천연 그대로라고 고백했다. ‘어느 작가를 좋아하느냐구요? 톨스토이요. 읽어보았느냐구요? 아뇨, 아직. 좋아하는 음악이 뭐냐구요? 가장 짧은 거요.’
-‘에비타 페론’, 알리시아 두호브네 오르띠스 지음, 박주연 옮김, 홍익출판사, 2001년, 184쪽.
빼어난 외모와 다양한 봉사 활동, 불행한 사생활 등으로 대중의 사랑과 연민을 한 몸에 받았던 다애이나 전 영국 왕세자비.
“저는 일개 여자일 뿐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그녀의 연설은 자신의 삶에 대한 고백과 끝도 없이 이어지는 자기 정당화, 그리고 거듭되는 ‘페론과 함께 미래를!’로 계속되었지만 이제 그녀는 비로소 연설의 기능을 이해한 것 같았다. 나중에 그녀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연설가가 된 것은 그녀 자신의 노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녀가 즐겨 쓰는 용어가 일상적이면서도 열정적이라는 데서 기인했다. 망치질을 계속하는 듯한 규칙적인 소리를 연상시키는 그녀의 연설은 마치 원시 리듬처럼 그녀의 입을 통해 정열적이면서 끈질기게 터져 나왔다. 남미의 탱고리듬처럼, 그녀가 수도 없이 반복하는 ‘페론’이라는 리드미컬한 용어는 청중들에게 기이한 감동을 주었다. 그것은 민중들이 반드시 손에 쥐고 살아야 하는 무엇, 아르헨티나의 미래를 위해 민중들이 반드시 담보해야 할 그 무엇으로 여겨졌다.
-‘에비타 페론’, 184쪽.
‘회개한 창녀’는 톨스토이의 소설에나 나오는 일이지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인신공격을 참아내면서, 에비타는 고통스러운 과거에 대한 보상심리와 세상을 향한 복수심을 ‘대중 연설의 열광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이용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고, 하층계급에 대한 그녀의 관심과 하층계급의 그녀에 대한 관심은 환상의 정치적 궁합을 생산해 냈다. 에비타는 수많은 실수와 스캔들로 비난받았지만 그 비난조차 그녀를 더욱 신비로운 광휘로 채색하는 의외의 결과를 낳았다.
에비타와 다이애나는 대중이 원하는, 대중이 지지하는, 대중이 예찬하는 국모로 거듭나기 위해 스스로를 창조한 사람들이었다. 그녀들의 진정한 부모는 생물학적 부모가 아니라 보이는 것, 들리는 것, 그렇게 ‘각인’되는 것이 중요한 미디어의 매트릭스, 대중이라는 사회적 태반이었다. 그녀들의 문화적 유전자는 부모가 아니라 대중의 눈빛, 대중의 시선, 대중의 욕망이었다. 그들은 본래의 자아를 버리고 대중이 원하는 자신이 되기 위해 스스로를 낳은 존재들이었다. 실제보다 상징이 더 큰 사람. 드라마틱한 삶보다 더 드라마틱했던 죽음. 실제 삶보다 미디어에 비치는 삶이 중요했고 그 ‘보이는’ 삶이 ‘진짜 삶’을 거꾸로 규정했던 사람들. 전통적으로 군주들은 ‘만질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군주의 옆에서 손을 흔들던 아름다운 그녀들은 마치 눈앞에서 생생하게 ‘만질 수 있는’ 존재들처럼 친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였다. 그리고 그녀들의 안타까운 죽음은 그녀들의 ‘세속적 아름다움’을 ‘성스러운 아름다움’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그들은 가족과 부모와 연인으로부터 버림받았지만 죽는 순간 대중의 사랑이라는 영원한 허상의 품에 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