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선덕여왕’의 한 장면
햇살이 눈부신 추석날 오후, 드라마 ‘선덕여왕’의 인기 영향으로 북적이는 경주를 둘러보았다. 특히 분황사와 첨성대에 눈길이 머물렀다. ‘향기 나는 황제의 절’이란 뜻을 가진 분황사에 들렀다가 첨성대로 가려면 샛길을 걸어서 10분이면 충분하다. 분황사와 첨성대는 모두 선덕여왕이 건립했다. 그래서인지 벽돌을 쌓은 모전이나 전탑 모양을 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구조물들은 석가의 진신사리를 모신 인도의 탑들과 유사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선덕여왕은 왜 분황사와 첨성대를 만들면서 굳이 암석을 벽돌 형태로 절단하여 쌓았던 것일까. 경제적으로 보나 시간상으로 많은 공이 들어가는 양식임에도 말이다. 여기에는 선덕여왕의 병약한 몸이 이유가 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불교와 의약학의 결합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선덕여왕은 질병을 심하게 앓았다. 선덕여왕 5년(636)에는 “왕의 병에 기도가 무효하므로 황룡사에 백고좌를 설치하고 승려를 모아 인왕경을 강하였다”라는 기록도 남아 있다. 다시 말해 독경으로 병을 고치려 했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밀본법사의 글에도 선덕여왕의 병이 오래되어 흥륜사의 스님 법창에게 치료를 받았으나 효과를 보지 못하다가 밀본법사의 독경에 의해 완치되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분황사에 모신 부처도 약사대불인 점을 보면 그 사실은 더욱 분명해진다.
이 시기의 치료는 불교와 의약학이 겸비된 ‘승려의약학’에 따른다. 여기에서 의약학은 종교적인 신앙이 아닌 인도의 약학이 중심이었다. 인도의학은 알렉산더의 동방정복 이전에 그리스 주위에 전해져서 히포크라테스 의학에도 다뤄질 정도였다. 특히 석가의 치유권을 이어받은 지바카의 이야기는 뒷날 편작신화의 모태가 될 정도로 유명하다. 특히 984년 일본 원융왕 때 만들어진 의심방이라는 책에 기록된 신라의서 신라법사방과 그 뒤를 이은 신라법사비밀방 역시 의술과 불교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보여준다. 당시 불교에 대한 숭배는 뒷날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으로 이어졌다.
동양의 천문은 서양의 천문학과는 전혀 다르다. 우선 동양의 천문은 농사를 짓기 위한 실용의 학문이었다는 점에서 차이를 갖는다. 어느 별이 어떻게 나타나고 사라지느냐보다는 언제 볍씨를 뿌리고 언제 물을 대주며 추수는 언제 해야 하는지를 해결하기 위한 시간 관측의 도구였다. 절대자의 위치에 있었던 동양의 왕들은천문을 이해함으로써 ‘하늘의 뜻을 아는 절대자’가 될 수 있었다. 태양이 지구에 뿌리는 에너지장의 변화에 따라 낮과 밤이 생기고 사계절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고 난 뒤부터 태양의 질서를 규명하는 일은 어리석은 백성을 가르침에 있어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 됐다. 천문을 관측하는 방법은 이랬 다.
먼저, 태양이 하늘을 달리는 일정한 길이 있음을 알고 길 주변에 서 있는 표적이 되는 별자리를 정한다. 사계절에 맞춰 계절별로 7개씩 별을 정해 1년 28개의 별자리를 기준으로 만든다. 28개의 별이 떠오를 때마다 땅속의 생명이 일제히 깨어나고 열매 맺는 시기가 일정하다는 것을 알면서 농사는 더욱 정밀하게 이루어졌다. 예를 들면 동양의 28수 별 중의 첫 번째 별인 각수는 봄을 상징하며 춘분날 나타나 농사의 때를 알리며 추분이 되면 사라졌다.
천문을 보는 방식은, 현재의 망원경으로 보는 것과 달리 있는 그대로의 하늘을 보는 식이었다. 굳이 더 잘 보기 위해 높이 발돋움할 까닭이 없었기 때문에 고려시대의 천문대나 조선시대의 천문대는 모두 낮게 만들어졌다. 이런 점에서 유추하면 첨성대는 원시불교의 탑 형식, 인도의 산치 대탑의 형식을 빌려 천문학과 결합한 양식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첨성대를 쌓은 석단은 27단, 맨 위의 정(井)자 모양의 돌까지 합하면 모두 28단으로 기본 별자리 28수를 상징한다. 첨성대를 쌓은 돌의 수는 361개 반으로 음력으로 따진 1년의 일수와 일치한다. 석단 중간의 네모난 창의 아래위 12단은 열두 달, 24절기를 상징한다. 첨성대 꼭대기는 신라 자오선의 표준이 되었으며 각 면이 정확히 동서남북을 가리킨다.
수많은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가장 잘 관찰할 수 있는 방법은 어둠에 묻히는 것이었다. 첨성대 내부의 원통은 원시적 어둠으로 별을 관찰할 수 있는 비밀의 열쇠였다. 하늘의 모든 별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태양의 궤도를 관찰하여 농사의 때를 목표로 한 것이다. 천문의 변화는 왕에게 보고돼야 하는 중요한 사안이므로 왕궁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 원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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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과 관련된 또 하나의 가설을 이야기하면, 우리 민족 고유의 특징 중 하나는 ‘칠성신앙’이다. 전국 곳곳에 산재한 고인돌군(群)에는 대부분 칠성이 새겨져 있다. 칠성당에 빌어서 아이를 낳고 칠성판에 누어서 저승으로 가는 것이 우리 민족 삶의 원형이었다. 지금도 절에 가면 칠성당이 존재한다. 토착신앙인 칠성신앙과 불교신앙의 타협인 셈이다. 김유신 장군도 등에 칠성무늬를 타고났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칠성신앙은 신흥종교인 불교와 각을 이루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천문대의 위용은 선덕여왕의 불교 신앙을 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원시불교의 탑인 스투파, 돔 형태의 모전탑 전탑의 양식과 칠성신앙의 타협을 통해 이데올로기의 통합을 노린 것이 바로 첨성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