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이우정
원재훈│시인 whonjh@empal.com│
사람의 마음이 항상 뽀송뽀송하고 밝고 환한 것만은 아니다. 중국 고대 인물을 이야기하면서 간혹 ‘옛날에는’이라고 회상하는 사마천은 아첨하여 출세한 자들의 인생유전을 열전에 소개한다. 중국 한나라 시절에 ‘옛날’이라고 하던 그 시절에도 이런 인물들은 ‘충신열사’보다도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절대 권력자 곁에는, 한여름 밤 가로등에 모여드는 날벌레들처럼 아첨꾼들이 맴돈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변화 없는 인간유형 중 하나다.
아첨은 칭찬의 왜곡된 형태다. 우리는 누구나 칭찬을 듣고 싶어한다. 유아기의 칭찬은 아이의 인성을 바르고 힘차게 한다. 성장기의 칭찬은 인생의 목표를 향한 젊은 피에 에너지를 공급한다. 어른이 되어서도 칭찬을 듣는 사람은 성공할 확률이 높다.
아첨과 칭찬의 공존
가만히 세상일을 들여다보면 행복과 불행이 한 자매라는 불교 우화처럼, 선과 악이 함께 기록되어 있는 성경 창세기처럼, 아첨과 칭찬도 아슬아슬하게 공존해왔다. 남녀를 불문하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칭찬을 듣고 싶어한다. 이 속성에서는 우리가 위대한 인물이라고 존경하는, 즉 범인과는 다른 탁월한 권력자도 벗어나질 못한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떠돌던 때도 있었다. 칭찬과 아첨은 서로 다른 의미이지만 아첨도 타인을 칭찬하는 행위 중 하나다. 그것이 바르지 못할 때 우리는 아첨이라고 하고, 바르게 가면 칭찬이라고 한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경계선이 어디인지 모호할 때가 있다. 확연하게 표시만 나지 않는다면 아첨인지 칭찬인지 듣는 사람은 알 수 없다. 인간은 자신에게 아첨하는지 알면서도 진정인 것으로 생각하고 좋아한다.
한나라 효문제 때 황제의 총애를 받는 세 명의 신하가 있었다. 사인(벼슬을 하지 않는 선비)으로 등통과 조동과 북궁백자라는 환관이 그들이다. 북궁백자는 인자한 풍모가 있었고, 조동은 망기술(구름 모양을 보고 점치는 것)이 뛰어나 황제의 관심을 끌었지만, 등통은 별다른 재능이 없었다고 한다. 세 사람은 황제의 수레를 함께 타고 외출했다. 등통은 어떠한 사람이기에 별 재주도 없이 황제의 총애를 받게 되었을까.
등통과 황제는 기이한 인연이 있었다. 황제를 만나기 전 등통은 노를 가지고 배를 젓는 ‘황두랑’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황두랑은 선주가 노란색 모자를 쓰고 있어 붙은 이름이다. 어느 날, 효문제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효문제는 하늘을 오르려고 애를 썼는데 잘 오를 수 없었다. 그런데 어떤 황두랑이 뒤를 밀어주어 오를 수 있었다. 누가 이렇게 기특한 짓을 하니 싶어 살펴보니 등 뒤로 띠를 맨 곳에 솔기가 터져 있었다. 잠에서 깨어난 효문제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황두랑들의 모습을 살펴봤다.
기이하게도 황두랑 중 ‘등통’이라는 자가 꿈속에서 본 모습 그대로였다. 효문제는 그때부터 그를 가까이 두고 지냈는데, 등통 또한 행동을 삼가면서 신중한 성품으로 황제의 곁에 머무는 것을 좋아했다. 심지어 휴가를 주어도 조용히 왕의 곁에 머물기를 좋아하니 효문제의 총애는 깊어졌다. 등통은 자신이 재주가 없음을 잘 알고 있어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왕을 모시는 진정한 ‘왕의 남자’로서 행동했다. 심지어 효문제가 종기를 앓아 고생할 땐 인상 한번 찌푸리지 않고 종기의 고름을 입으로 빨아냈다.
‘황제의 혀’처럼
말 그대로 황제의 혀처럼 굴었다. 황제는 관상쟁이에게 자신이 총애하는 등통의 관상을 보게 하니 “가난해서 굶어 죽을 상”이라는 답변이 나왔다. 황제는 “내가 있는데 그런 일이 있겠느냐”면서 등통에게 촉군 엄도현에 있는 구리 광산을 주고 마음대로 돈을 만들어 쓰라고 명했다. 등통이 만든 돈인 ‘등씨전’은 온 나라에서 쓰였다. 부자도 이런 부자가 없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굶어 죽을 상이라는 예언은 점쟁이의 오판이었을까? 정치권력과 관련된 부는 그 권력과 더불어 지는 법이다. 등통의 몰락은 아주 사소한 일에서 비롯됐다.
어느 날, 황제는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나를 사랑하는가?”라는 동화 같은 질문을 등통에게 한다. 등통은 주저 없이 “물론 태자를 따를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한다. 등통은 별다른 재주는 없었지만, 정치권력의 속성을 잘 알고 있었다. 황제가 세상을 떠나면 태자가 천하의 주인이 될 것이니 그에게 미리 잘 보여 두려 한 것이다. 황제는 태자가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는지, 등통의 말이 맞는지 궁금해졌다.
효문제는 태자가 문병을 오자 자신의 종기 고름을 빨아내게 했다. 태자는 등통처럼 잘 빨지는 못했다. 또한 단 한 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태자는 등통에게 앙금이 남았다. 요즘에도 아첨 떠는 행위를 시쳇말로 ‘빨아준다’고 표현한다. 이 말의 기원이 등통이 효문제의 고름을 빨아준 것에서 직접적으로 연유된 것인지는 잘 알 수 없지만 ‘고름 빨기’와 ‘아첨’은 의미가 상통하는 측면이 분명히 있다. ‘장자’에도 고름을 빨아주는 우화가 나온다. 자신도 더러워하는 고름을 입에 넣어 빨아주니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느끼는 것이다.
효문제가 죽자 태자인 효경제가 즉위했다. 효문제 사후 등통은 모든 벼슬을 그만두고 조용히 집에서 살았지만, 돈을 주조하는 일이 빌미가 되어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고 많은 빚까지 지게 됐다. 등통을 아꼈던 효경제의 누나인 장공주가 등통을 먹고살게 해주려고 재산을 주었지만 그마저 관리가 몰수해버렸다. 그래서 결국 등통은 재산 한 푼 없이 남의 집에서 얹혀살다 죽었다. ‘가난해서 굶어 죽을 상’이라고 한 점쟁이 말은 사실이었다. 솔기가 터져 비단옷이 다 찢어지고 맨살이 드러난 형국이었다.
2007년 1월 7일 중국 한나라 황제무덤 발굴 현장.
동양에서는 사람의 인생 중에서 말년이 편안한 것을 최고로 친다. 등통의 말년이 비참한 것을 두고 사마천은 아첨꾼의 최후를 비극적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이러한 비극적인 생애보다 더 비참한 것은 후대의 평가다. 아무도 등통을 모범적인 인물로 보지 않는 것이다. 아첨꾼의 특징은 후대의 평가에 둔감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행동을 당당하게 한다.
젊은 날의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있지만, 늙어서 고생을 사서 한다는 말은 없다. 젊은 시절엔 기운이 넘치고 할 일이 많으니 고생은 성공의 지름길이 되기도 한다. 늙어서는 그럴 수 없다. 이제 40대부터 노후대책을 생각하고 있다. 대다수 사람은 등통과 같은 운이나 재주가 없어 막대한 부가 없으니 별로 잃을 것도 없다. 그러나 잃을 것이 없다고 즐거워할 일만은 아니다. 회사에서 ‘상관’을, 거래에서 ‘갑’을 빨아주어야 하는 현실이 등통과 특별히 달라 보이지 않는다. 크건 작건 아첨과 아부는 탁월한 재주가 없는 사람의 삶의 방편이다.
영행열전의 인물들은 ‘총신’이라고 불린다. 군주의 총애를 받는 신하라는 뜻인 총신은 사사로운 이권을 멀리하고 올곧은 ‘충신’과는 차이가 있다. 주로 자신의 일신을 위해 행동하는 아첨꾼을 뜻하기 때문이다. 사마천 당대의 황제인 무제에게도 한왕의 손자인 한언, 환관 이연년이라는 총신이 있었다.
한언은 말타기, 활쏘기를 잘했고 황제가 흉노를 치려 할 때 흉노의 군사에 대해 잘 알고 있어 왕의 사랑을 받았다. 더불어 아첨을 잘하여 왕과 함께 기거할 정도가 되어, 부와 권력을 누렸다. 그러나 한언은 무제의 아우에게 미움을 받았다. 왕의 총애로 간이 부어서인지 궁녀와 정분까지 나누어 결국 황태후의 노여움을 사 죽음에 이르게 된다. 황제는 한언의 이러한 일을 다 알고 있음에도 황태후에게 사과했다고 하니 황제가 한언을 아끼는 마음을 알 수 있다. 아첨의 위력은 이토록 대단한 것이다.
환관인 이연년은 총신이었다. 원래 춤을 추던 예술인이었는데 어떤 죄를 지어 궁형을 받은 후, 황제의 사냥개를 돌보는 구중이라는 직업을 얻었다. 이연년의 누이동생도 춤으로 황제의 사랑을 얻었다. 이연년은 아첨, 춤, 노래를 겸비한 엔터테이너였다. 그러나 누이동생이 죽자 황제의 마음이 떠나 이연년은 결국 처형을 당하게 된다.
우리는 중국 궁중에서 황제의 총애를 받는 인물로 환관을 먼저 떠올린다. 중국 역사에서 환관에 의해 나라가 붕괴되는 일이 자주 있었다. 환관과 외척은 군주에게는 경계의 대상인 줄 알면서도 가까이 해 실수하게 되는 대상이기도 했다.
한나라 환관 이연년의 계보는 한나라 말기 영제에 이르러 극치에 달한다. 손자를 예뻐하면 그 손자가 할아버지 수염을 잡아당긴다는 옛말이 있지만, 황제의 총애를 받는 환관이 어느 정도까지 나라를 말아먹을 수 있는지는 열 명의 환관인 ‘십상시(十常侍)’가 잘 보여줬다. 영제는 십상시의 우두머리인 장양을 아버지라고, 그 아래인 조충을 어머니라고 불렀다고 하니 그들의 권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할 수 있다. ‘후한서’에는 이들의 행태를 이렇게 비판한다.
“손으로 왕의 작위를 거머쥐고 입으론 하늘의 법을 머금어 그들의 뜻에 따라 모든 형벌과 상이 결정되었다. 황제의 명을 왜곡해 삼족이 영예를 누렸으며 기분 내키는 대로 종실을 멸했다. 이 때문에 한나라 기강은 크게 어지러워졌다.”
달콤함, 망국의 근원
여성이 미모로 황제의 마음을 빼앗아 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경국지색’과 더불어 황제가 환관, 아첨꾼에게 모든 것을 맡기면 나라가 온전할 리 없다. 후한 말 환관들이 이러한 권력을 거머쥐게 된 배경에는 어지러운 정국이 자리 잡고 있었다. 황제들은 10세 미만에 사망한 경우가 3명이나 있을 정도로, 재위기간이 짧았다. 30세를 넘긴 황제는 단지 2명이었다. 즉위 때의 나이도 10대 초반 아니면 10세가 되기 이전이 대부분. 황제의 어머니인 태후의 섭정과 그로 인한 외척 세력이 권력을 장악한다. 어린 황제가 성년이 되어 외척 세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경우에는 자신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환관 세력에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외척 세력과 환관 세력의 다툼이 일고 두 세력에 비판적인 관료집단과의 갈등이 생긴다.
유교를 국가 통치이념으로 하는 한나라는 도덕적 교양과 인품, 학식이 있는 선비를 지방관으로 선발했다. 수도 낙양의 태학을 나온 예비 관료들이 후한 시대에 3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선비들이 학연과 지연으로 여러 학파를 형성하면서 세력을 형성했다. 올곧은 선비들은 외척과 환관 세력이 권력을 장악한 현실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세력을 사족이라고 하는데, 사족 출신 정부 관리들은 환관에게는 눈엣가시였다. 환관 세력은 사족들이 사사로이 당파를 지어 국정을 혼란스럽게 한다고 중상모략해 사형, 유배, 금고 등의 형으로 처벌했다.
한나라 환제와 영제 때 한 차례씩 일어난 이러한 탄압을 ‘당고(黨錮)’라 한다. 당고는 예비 관료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사족들에 대한 일종의 공포정치이고, 그들의 공적인 활동을 금지하는 조치이기도 했다. 이러한 계략으로 환관 세력의 위치가 더욱 확고해졌다.
평생 환관의 품에서 떠나지 못한 영제가 사망하고 소제가 14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어머니인 하태후가 섭정했다. 하태후의 오라버니 하진이 대장군으로서 정권을 장악했다. 환관 세력에서 외척 세력으로 권력이 넘어갈 분위기였다. 우리가 널리 읽고 있는 ‘삼국지’의 역사적인 첫 무대가 되는 시기다.
하진은 환관 세력을 몰아내고자 원소, 동탁과 결탁했으나 하태후는 오랫동안 권력을 누려온 환관들의 저항이 두려워 하진의 계획에 반대했다. 하진은 환관을 우습게봤다. 고우영 화백이 그린 만화 ‘십팔사략’을 보면 환관들이 하진을 암살하는 장면이 나온다. 환관들이 하진 장군을 둘러싸고 칼로 찌르는데 하진이 “아! 따가워”라고 했다. 침에 쏘인 듯한 표현이었다. 환관들을 우습게 본 하진을 고우영 화백이 유머로 그려낸 것이다. 그러나 권력의 세계는 냉혹했다. 환관 세력은 하진 가문을 몰살시켰다. 환관 10명이 주도한 ‘십상시의 난’이다.
환관들의 만행에 분개한 원소는 궁성에 진입해 환관 1000여 명을 살해했다. 동탁도 낙양에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진입해 권력을 장악한 뒤, 소제를 폐위시키고 헌제를 즉위시켰다. 소제의 폐위 문제에서 동탁과 사이가 벌어진 원소는 고향으로 돌아가 군대를 모집하고 동탁과 일전을 벌이기 위해 토벌군을 모집한다. 원소가 주도한 토벌군에서 조조, 손견, 유비 등이 등장한다. 환관을 비롯한 아첨꾼들은 한 나라를 무너뜨리는 거대한 독버섯으로 성장하기도 한다. 둑은 바늘구멍 하나로도 무너진다. 군주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 중 하나는 달콤한 아첨이다.
많은 직장인은 조직내에서 처신에 어려움을 겪는다.
조선시대에도 아첨에 대한 흥미 있는 자료가 있었다. 부산대 한문학과 강명관 교수는 ‘오유재집(烏有齋集)’ 필사본 문집에 대한 글을 썼다. 이 문집을 건넨 노인은 자신의 조상이긴 하지만 저자를 모른다는 이상한 말을 했다. 강 교수는 그 문집 중 ‘붕당론’이라는 글에 부기된 ‘논아첨 : 아첨을 논한다’는 글을 번역해서 소개했다. 강 교수가 ‘혼자 읽기에 아깝다’고 한 조선시대 ‘아첨론’은 다음과 같다.
선비가 출세하려면 공부도 출중해야 하지만, 아첨하는 능력도 있어야 한다. 공부가 있으면 출세할 기본이 마련된 것일 뿐 꼭 출세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남의 질시로 출세를 못할 수도 있다. 반면 공부가 없어도 아첨을 잘하면 출세할 가능성이 높다. 요컨대 아첨은 출세에 꼭 필요한 조건이라 하겠다.
아첨을 잘하는 사람은 총명하고 약빠른 사람이다. 세상을 성현의 말씀처럼 고쳐보자는 생각은 결코 하지 않는다. 부자(夫子·공자)와 정암(조광조의 호)이 실패했던 전력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서 비판의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날카로운 어조로 권귀(權貴)를 비판한다. 권귀가 앞으로도 장구하게 조정을 쥐락펴락할 것이라고 예상되면, 권귀가 하는 일을 올곧은 어조로 조목조목 비판하되, 넌지시 빠져나갈 구멍까지 일러준다. 당연히 인격적인 비판은 하지 않는다. 권기는 그 사람의 비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안다. 불러 한 자리를 떼어주면, 몇 번 고사하는 척하다가 짐짓 근엄한 표정으로 조정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대고 그 자리에 나아간다.
“비판하는 척하는 게 최고”
권귀의 권세가 장구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하면, 마치 원수를 대하듯 매서운 비판을 퍼붓는다. 실정(失政)은 물론 인격적인 부분까지 마구 비난한다. 물론 백성을 위해서, 조정을 맑게 하기 위해서 등의 명분도 잊지 않고 곁들인다. 이것은 권세를 잡으려 세력을 키우고 있는 다른 당파의 우두머리에게는 더할 수 없는 좋은 신호가 된다. 이 사람이 펼친 비판은 외견상 무척 정대하지만, 기실은 벼슬을 달라고 칭얼대는 아첨일 뿐이다. 이처럼 비판하는 척하면서 하는 아첨이야말로 아첨의 가장 높은 도인 것이다.
하지만 이 아첨꾼은 조정에 들어오면 옳고 그름을 따지던 입을 굳게 다물고, 권귀가 내뱉은 말의 속내를 헤아리는 데 나날을 다 보낸다. 오로지 권귀의 생각을 좇기에 급급할 뿐이다. 아첨꾼이 언관(言官·사헌부와 사간원)이 되면, 올곧은 언론은커녕 권귀의 뜻을 받들어 반대 당파를 공격하는 상소를 올리기 바쁘고, 천관(天官·이조)을 맡으면 반대 당파를 배제하고 자기 당파만 심는 인사를 하고, 지관(地官·호조)을 손에 넣으면 백성의 궁핍한 살림살이를 보살필 생각은 하지 않고, 오로지 권귀로 당파의 재산을 불릴 방도만 궁리한다.
포장(捕將·포도대장)이 되면, 도둑을 잡을 생각은 하지 않고, 백성을 잡도리할 꾀만 내는 것은 물론이다. 올곧은 선비와 백성들이 항의하면, 포의(布衣)로서 감히 조정의 일에 간섭하려 한다면서 정거(停擧: 과거 응시 자격 정지)를 시키고, 심한 경우 잡아다 옥에 가두어 매를 치기도 한다.
요컨대 아첨꾼은 사직과 백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자리에서 떨려나지 않기 위해, 권귀가 듣고 싶은 말만 골라서 하고, 권귀가 흡족해 할 만한 일만 골라서 할 뿐이다. 아첨의 지극한 도는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오유재가 누구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 문장은 시공을 초월한 정치권력의 행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권력자가 존재하는 한, 아첨꾼의 존재는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 이기붕 역시 그런 권력의 맛을 누리고 즐겼을 것이다.
이기붕은 연희전문학교를 다니던 때 선교사 J. R. 무스의 통역으로 일한 것이 인연이 되어, 미국 아이오와주 데이버 대학을 졸업했다. 그 후 뉴욕에서 허정 등과 교포신문인 ‘삼일신문’ 발간에 참여하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34년에 귀국한 그는 1945년 이승만의 비서로 취직했다. 이승만의 총애를 받으면서 1949년 서울특별시장, 1951년 국방부 장관이 됐다. 절대 권력의 신임을 얻은 그는 정치인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다. 바로 국민의 사랑이었다. 4·19혁명이 발발하자 이기붕 일가는 자살했다.
그러나 정치의 상하관계에 있어 어느 선까지가 아첨이고 어느 선까지가 충언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의 인물 중 한명회는 아첨꾼일까.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마천도 이 열전에서는 비교적 적은 수의 인물만을 아첨꾼으로 규정해 다루고 있다.
“미모 사라지니 마음 떠나”
사마천 열전에 따르면 미자하는 춘추시대 위나라 영공의 총애를 받던 여인인데, 자신이 먹던 복숭아를 임금에게 주어도 칭찬을 받을 정도로 임금의 눈과 귀를 멀게 한 미인이었다. ‘한비자’에 기록된 미자하의 이야기는 이렇다.
옛날 미자하가 위나라 군주에게 총애를 받았다. 위나라 법에 따르면 군주의 수레를 훔쳐서 타는 자는 월형에 처해진다. 미자하의 어머니가 병이 나자 어떤 사람이 이 사실을 듣고 밤에 미자하에게 알려주었다. 미자하는 군주의 수레를 몰래 타고 궁 밖으로 나아갔다. 군주가 이 사실을 듣고 “효성스럽구나! 어머니를 위하는 마음 때문에 자신의 행동이 월형에 당할 수 있다는 것도 감내했구나”라고 말했다.
다른 날 미자하가 과수원에서 복숭아를 먹다가 달자 다 먹지 않고 그 절반을 군주에게 먹였다. 그러자 군주는 “나를 사랑하는구나! 자신의 입맛을 잊고 내게 그것을 주는구나”라고 말했다.
세월이 흘러 미자하의 외모가 전같지 않아 군주 사랑이 식었을 때 그녀는 군주에게 죄를 지었다. 그러자 군주는 “이 여자는 과거에 내 수레를 몰래 탔고, 제가 먹던 복숭아를 내게 먹인 적이 있다”고 말했다. 미자하의 행실은 처음과 달라진 것이 아니었지만 군주의 마음이 변했기 때문이다.
미자하를 빗댄 사마천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사람은 권력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주변을 서성거린다. 미자하는 자신의 미모로 군주의 사랑을 얻었지만 미모가 사라지자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신하가 군주에 대한 처신을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한비자에 나오는 ‘역린(逆鱗)’이라는 말은 용의 목 아래에 있는 직경 한 자쯤 되는 비늘인데, 다른 비늘과는 방향이 반대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을 건드리면 용은 그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다.
역린은 건드리지 말라
군주는 용에 비유할 수 있다. 용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등에 올라탈 수는 있지만, 역린을 건드리면 목숨을 잃는다. 선비의 처신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미자하와 역린을 통해 잘 드러난다. ‘아첨에 의존하지는 말되 역린도 건드리지 않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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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논어’에서 ‘교언영색’을 말한다. “공자는 말씀하시길 ‘듣기 좋게 꾸미는 말과 보기 좋게 꾸미는 낯빛에는 인덕이 드물다’라고 하셨다.” 주자는 공자의 이 말을 이렇게 해석한다. “교(巧)는 좋게 하는 것이다. 영(令)은 잘하는 것이다. 말을 듣기 좋게 하고 얼굴빛을 잘하여 겉으로만 꾸며 사람을 기쁘게 하는 데 힘쓰면 인욕이 생겨나서 본심의 덕이 없어진다. 성인은 표현이 박절하지 않으므로 ‘드물다’고 표현했으니 실상은 ‘인덕이 전혀 없음’을 알 수 있다. 배우는 자가 깊이 경계해야 할 것이다.”
한 번 더 풀이하면 교언은 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간살을 떠는 것이고, 영색은 고의로 공경하는 모습을 지어 다른 사람에게 아첨하는 것으로, 위선자의 모습이다. 영행열전의 인물들은 교언영색의 달인들이었다. 어쩌면 그들도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는 심경으로 최선을 다해 아첨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말년이나 후대의 평가보다는 지금 당장이 더 중요했다. 이러한 사람들이 있어 충신과 열녀 그리고 올곧은 선비들의 후광이 더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