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네스는 잘 볶은 보리가 빚어낸 묵직하면서도 격조 있는 맛이 일품이다. 옻칠처럼 검고 광택이 나는 맥주를 덮은 하얀 거품은 기네스의 알파요, 오메가다.
영화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일랜드는 17세기 이후 영국의 지배를 받다가 1922년 독립했다. 그 뒤 종교 갈등이 대두된다. 개신교 신도가 많은 북아일랜드 6개 주가 아일랜드공화국 편입을 거부하고 영연방에 잔류하기로 결정하면서 분란이 시작된 것이다. 아일랜드는 가톨릭 신도들의 주도로 건국된 나라다.
영국은 무력을 동원해 북아일랜드 지역에 대한 통치를 기정사실화했으며, 영국령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의 통일을 요구하는 아일랜드계 반(半)군사조직 IRA(Irish Republican Army)는 1969년부터 북아일랜드의 수도 벨파스트를 중심으로 테러를 벌였다. 이 갈등으로 1990년대 초까지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같은 종교 갈등을 봉합하려는 노력은 199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결실을 본다. 토니 블레어 당시 영국 총리의 중재로 1998년 북아일랜드 평화협정이 체결되는데, 강경 개신교 정당인 민주연합당과 가톨릭 원주민 정당인 신페인당은 이 협정을 통해 화합을 약속했다. IRA는 2005년 무장해제를 선언한다.
‘아버지의 이름으로’는 1974년을 시대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 제리 콘론(다니엘 데이-루이스 분)은 자신의 좀도둑질에서 비롯된 주민 폭동의 와중에서 영국군뿐 아니라 IRA한테도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힌다. 제리의 장래를 염려한 아버지 조제프 콘론(피트 포스틀스웨이트 분)은 아들을 런던에 있는 숙모 집으로 보내기로 결정한다. 조제프는 성실하면서 고지식한 사람으로 일상의 삶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아일랜드계 소시민. 말썽꾼인 아들 제리는 그런 아버지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교도소에서 만난 아버지
제리는 잉글랜드로 가는 페리선에서 우연히 학교 동창인 폴 힐을 만난다. 이 만남은 결국 악연이 된다. 폴과 함께 런던에 도착한 제리는 폐건물에서 히피 생활을 하는 옛 친구를 찾아간다. 그런데 연쇄 폭발사건이 일어나고 경찰이 테러범 검거에 나선다. 앞으로 닥칠 불운을 알 턱이 없는 제리와 폴은 고급 창녀의 아파트에 들어가 돈을 훔친다. 제리는 훔친 돈을 갖고 고향으로 되돌아가 호기를 부린다. 그 즈음 런던에서 만난 잉글랜드계 히피 하나가 제리와 폴이 테러범일 가능성이 있다고 경찰에 신고한다. 결국 폴은 런던에서, 제리는 벨파스트에서 각각 체포된다.
영국 경찰은 온갖 고문과 비열한 방법으로 제리에게 자백을 강요한다. 제리는 완강히 부인했으나 고문과 회유에 굴복한 폴이 그를 범인으로 지목하면서 곤경에 빠진다. 죄를 인정하지 않으면 아버지에게 위해를 가하겠다는 경찰의 협박에 제리는 굴복한다. 거짓 자백을 한 것이다.
어느 날 제리는 교도소에서 아버지를 목격하고 경악한다. 조제프는 아들을 구하고자 런던에 왔다가 제리와 마찬가지로 테러범이라는 누명을 쓰고 수감됐다. 아버지뿐 아니라 제리의 친지들이 공범으로 지목됐다. 제리와 조제프는 교도소에서 한방을 쓰는데, 아버지는 아들을 만나자마자 “테러를 저질렀느냐?”고 묻는다. 제리가 “그런 적 없다”고 말하자 조제프는 믿는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아들을 끌어안는다.
제리는 교도소에서도 아버지한테 투정을 부린다. 아버지의 고지식함에 대한 불만, 아버지의 기대에 못 미치는 자신의 대한 콤플렉스, 자기 때문에 아버지까지 투옥됐다는 자괴감이 뒤섞인 것이었다. 하지만 투정은 잠시였다. 부자는 좁은 감방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진한 정을 느낀다.
제리는 법정에서 무죄를 항변했으나 경찰의 증거 조작으로 재판은 불리하게 돌아갔다. 폴이 뒤늦게 진실을 말했으나 그것도 소용없었다. 매춘부의 집에서 돈을 훔친 사실이 드러나면서 증언의 신뢰성이 추락한다. 배심원들은 제리와 그의 친지들이 유죄라고 결정한다. 제리는 무기징역, 아버지는 12년형, 고모는 14년형을 선고받는다. 재판이 끝난 뒤 폭발 테러의 주범인 바커가 다른 죄목으로 교도소에 들어온다. 바커는 누명을 쓴 제리 가족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자신이 범인이라고 자백한다. 그러나 경찰은 되돌릴 수 없다면서 “모른 척하라”고 말한다. 바커는 제리와 조제프에게도 이 사실을 말한다. 제리는 누명을 썼음에도 바커가 아일랜드를 위해 용감한 행동을 했다고 추어올린다. 조제프는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살인행위였다고 바커를 비난한다. 제리는 교도소에서 바커를 도우면서 영국인들과 대결하지만 바커의 지나친 폭력 지향에 실망한다. 아버지 조제프의 지병인 폐질환은 점점 더 악화한다.
이즈음 우연히 등장하는 이가 인권 감시를 위해 교도소를 방문한 여변호사 피어스(엠마 톰슨 분)다. 그는 조제프와 면담한 뒤 부자를 돕겠다고 결심한다. 제리는 피어스에게 아버지한테 헛된 꿈을 심어주지 말라고 말하지만 피어스의 노력으로 조제프와 제리의 억울한 사연이 조금씩 세상에 알려진다. 아버지의 설득을 받아들인 제리도 누명을 벗고자 안간힘을 쓴다.
그런 와중에 아버지 조제프가 지병으로 사망한다. 겉으로는 투정을 부렸지만 속으로는 아버지를 사랑했을 터. 제리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피어스와 함께 법정 투쟁을 벌인다. 사랑하는 아버지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 마침내 피어스가 결정적 증거를 확보하고 제리와 지인들은 무죄를 선고받는다. 수감된 지 15년 만의 일이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엔 아일랜드의 국민주(酒)가 등장한다. 아일랜드의 자존심으로 불리는 세계적 명주 기네스. 이 맥주는 제리와 폴이 만난 페리선에서 등장한다. 둘은 주크박스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면서 기네스를 마신다.
영화에서 이 술을 기네스라고 지칭하지는 않지만 흑백의 아름다운 조화는 이 술이 기네스임을 단번에 알 수 있게 한다. 제리가 훔친 돈을 갖고 고향에 돌아온 뒤 거실에서 가족과 담소를 나눌 때 조제프가 마시는 술도 기네스다. 쉐리단 감독은 아일랜드인의 가슴에 깊이 새겨진 기네스에 대한 사랑을 이 장면을 통해 표현하고 싶었을 게다.
기네스북
아일랜드인의 기네스 사랑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한 상당수의 영화에서 아일랜드의 상징으로 이 맥주가 등장한다. IRA가 등장하는 또 다른 영화 ‘크라잉게임(The Crying Game)’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한국에선 기네스의 대중적 인지도가 높지 않다. 우리는 ‘기네스’라는 단어를 들으면 맥주보다 ‘기네스 월드 레코드’를 먼저 떠올린다.
‘기네스북’은 자연·역사·과학·인문 분야의 특이한 기록을 수록한 책이다. 이 책은 1951년 기네스양조장의 책임자이던 휴 비버가 유럽에서 가장 빨리 나는 새가 어떤 종인지 궁금하게 여긴 데서 비롯했다. 이처럼 사소하면서도 흥미로운 호기심을 풀어주는 책이 등장하면 잘 팔리리라는 판단에서 기네스양조장은 기록광으로 소문난 노리스 맥훠터 형제에게 ‘월드 레코드 북’의 제작을 의뢰한다. 초판은 1955년 나온다.
기네스양조장은 아서 기네스(Arthur Guinness)가 1759년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 세운 회사다. 한때는 세계 최대 규모의 맥주 생산회사로 자리매김하기도 했다. 지금도 기네스는 고급 맥주의 대명사로 불린다.
흑맥주의 대표선수인 기네스는 잘 볶은 보리에서 비롯한 묵직하면서도 격조 있는 맛이 일품이다. 옻칠처럼 검고 광택이 나는 맥주를 하얗게 덮은 거품이 기네스의 알파요, 오메가다. 이 매혹적인 거품은 어떻게 만들었을까?
비밀은 질소 가스에 있다. ‘드래프트 기네스’를 서빙할 때 쓰는 질소 가스는 생맥주를 서빙할 때 사용하는 이산화탄소 가스에 비해 용해도가 낮다. 낮은 용해도 덕분에 높은 압력이 만들어지고 높은 압력 덕택에 기포가 작은 크기로 형성된다. 작은 거품이 크림과 같은 형태로 모인 게 기네스 특유의 흰 거품 띠다.
하얀 거품
기네스를 따를 때는 컵의 4분의 3가량을 먼저 채운 뒤 기포가 충분히 위로 올라온(settling) 것을 확인하고 나머지를 채워야 한다. 그래야 거품이 아름답다. 기네스사는 ‘좋은 일은 기다리는 사람에게 생긴다(good things come to those who wait)’라는 광고 문구를 통해 이 짧은 기다림에도 의미를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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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기네스사가 캔맥주와 병맥주를 내놓으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질소 펌프를 사용할 수 없기에 생맥주와 같은 거품이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다. 기네스 애호가들은 캔 기네스와 병 기네스에 실망했다.
기네스사의 고민은 질소가 들어 있는 플라스틱 볼을 개발하면서 해결됐다. 이 볼을 병이나 캔에 넣어두면 병, 캔이 열릴 때 발생하는 압력 차이로 질소가 볼의 작은 출구로 빠져나오면서 생맥주를 따를 때와 비슷한 효과가 나타난다. 기네스사의 기술자들이 발명한 이 볼은 1988년 캔맥주에 처음 도입됐다. 지금 시판되는 제품에서 볼 수 있는 부유형 볼은 1997년부터 사용한 것이다.
맥주 애호가가 아니더라도 기네스의 흰색 거품을 보면 목이 타게 마련이다. 오늘 저녁, 사랑하는 이와 함께 기네스를 들이켜는 건 어떨까? 그 사랑하는 이가 아버지라면 금상첨화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