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호

오솔길의 휴식과 담담함의 묘미

  • 함정임│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입력2009-11-03 1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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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솔길의 휴식과 담담함의 묘미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두 편의 소설 각색 영화가 눈길을 끌었다. 한강의 중편 ‘몽고 반점’을 영상으로 옮긴 ‘채식주의자’(임우성 감독), 그리고 콜롬비아 출신의 매직 리얼리즘의 대가 가르시아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동명 소설을 영화로 각색한 ‘사랑과 다른 악마들’(일다 이달고 감독, 코스타리카/콜롬비아 합작).

    사실 한강은 ‘몽고 반점’ 이후에 ‘채식주의자’라는 중편 소설을 발표했고, 이 작품을 표제작으로 소설집을 출간했다. 소설집 ‘채식주의자’는 ‘몽고 반점’과 ‘채식주의자’ 그리고 ‘나무 불꽃’으로 구성돼 있고, 이들 세 작품은 영혜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세 명의 화자로 진행되는 연작의 성격을 띤다.

    소설과 영화가 인접 장르, 또는 근친적 장르라고 말할 때 기준으로 삼는 것은 두 장르가 기본적으로 거느린 서사성(이야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벅찬 감동을 일으키는 영화에는 강렬한 문학적 체취가 수반된다. 소설이 원작인 영화는 두 가지 점에서 매력적이다. 우선은 탄탄한 서사이고, 서사를 감당할 배우의 연기력이다. 여기에 영상미가 결합되어 일으키는 감동은 활자로 읽을 때와는 또 다르다. 특히 현실에서 경험할 수 없는 시대나 이국의 공간을 눈앞에 불러와 생생히 보여줄 때는 특별한 여행을 떠난 듯 설렘과 황홀감에 빠져든다.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 상영된 마르케스 소설 각색 영화 ‘사랑과 다른 악마들’이 그렇고, 위화(余華)의 장편소설 ‘활착(活着)’을 장이머우(張藝謀) 감독이 영상으로 옮긴 영화 ‘인생’이 그렇다. ‘활착’은 우리말 번역으로 ‘살아간다는 것’으로 출간됐고, 장이머우 감독은 영어 제목으로 ‘life times’로 번역했고, 그것을 우리는 ‘인생’으로 옮겼다. 고백하자면, 나는 위화라는 대단한 작가가 중국 대륙에 존재한다는 것을 이 영화를 보기 전에는 인지하지 못했다. 위화의 경우처럼, 영화로부터 작가를 소개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속죄’(영화 ‘어톤먼트’의 원작)의 작가 이언 매큐언, ‘색, 계’의 작가 장 아이링, ‘브로크백 마운틴’의 작가 에니 프루….

    또 2009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만난 소설 각색 영화들처럼 나의 서가에는 소설과 영화가 나란히 꽂혀 소장되는 작품들이 있다.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장편소설 ‘마담 보바리’(1857)와 클로드 샤브롤 감독의 영화 ‘마담 보바리’(1991),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1922), 이 소설을 메타적으로 각색한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디 아워스 (The Hours)’(2003), 역시 버지니아 울프와 이 소설에 대한 지극한 오마주로 마린 호리스 감독이 만든 동명 각색 영화 ‘댈러웨이 부인’(2006),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1813)과 조 라이트 감독의 동명 각색 영화, 그리고 최근 한국에 개봉돼 깊은 울림을 남겼던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책 읽어주는 남자’(1995)와 스티븐 달드리의 동명 각색 영화 ‘더 리더 (The Reader)’(2008).



    담담(淡淡)과 현현(顯現)의 미학

    위화는 1960년 항저우 출생으로 중국 현대문학사에서 선봉문학의 기수로 꼽힌다. 중국 현대문학은 1917년부터 1949년까지는 현대문학시기, 1949년부터 현재까지는 당대문학으로 구분된다. 이 중 1976부터 현재까지를 신시기 문학시기로 부르는데, 1966년부터 10년간 혹독하게 몰아붙인 문화대혁명이 종지부를 찍으면서 1970년대 말부터 변화의 바람이 싹트기 시작한다. 개혁과 개방의 물결에 따라 혁명, 투쟁 일변도에서 선봉문학이라는 기치 아래 새로운 시도를 꾀하게 되는데, 위화는 바로 이 시기 ‘발치사(拔齒師)’에서 작가로 운명적인 변신을 한다.

    그가 작가로 나선 때는 선봉문학 초기 단계로 중국 문학은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작품들이 필요했고, 그는 천부적인 이야기꾼의 재능과 해학과 유머를 장편소설 속에서 유감없이 발휘함으로써 중국 문학의 새로운 변화의 욕구를 채워주기에 충분했다.

    우리는 피를 팔아 온갖 고난 속에 가족을 부양하는 한 웃긴 사내의 가슴 짠한 이야기를 기억한다. 가진 것이라고는 알량한 몸뚱어리 하나로 중국 현대사의 거대한 격랑을 온몸으로 헤쳐나간 허삼관이라는 이름의 보잘것없는 아버지 이야기인 ‘허삼관매혈기’. 내용으로 보아 짐짓IMF 상황에서 한국의 출판계를 강타한 ‘아버지’ 류의 안타깝고 비장한 분위기일 거라고 추측하기 쉽지만, 위화는 부실한 몸에서 피를 뽑아 매번 위기를 극복하는 이야기를 그리면서도 시종일관 독자로 하여금 비통이 아닌 폭소로 눈물이 비죽비죽 비어져 나올 만큼 배를 움켜잡게 만든다. 천연덕스러운 이야기꾼의 면모 속에 줄기차게 들고나는 해학과 순간적으로 번득이는 기지, 그리고 가슴을 촉촉하게 만들어주는 따뜻한 인간애의 감동은 중국 대륙을 넘어 가히 세계적이다. 그의 장편들은 소설이라는 장르가 인류 역사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대중과 동고동락할 수 있었던 오락적인 힘(재미)과 감동을 새삼 증명해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위화는 ‘허삼관매혈기’를 비롯해 ‘살아간다는 것’ ‘가랑비 속의 외침’ ‘형제’ 등 정력적으로 장편소설을 발표하며 활동 영역을 중국에서 세계로 확장해온 작가다. 이번에 번역 소개된 ‘무더운 여름’은 여섯 편의 짧은 단편으로 이루어진 단편집이다. 그의 소설을 손에 넣을 때면 기분 좋은 전율에 휩싸이곤 하는데, 이전에 그의 장편 서사들이 보여주었던 중국 현대사라는 특수한 시기에 살았던 웃기는 인간의 정 많은 삶의 풍경과 그 속에서 건져올린 반짝이는 유머들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그런데 첫 번째 단편 ‘전율’에서부터 마지막 단편 ‘그들의 아들’에 이르기까지 ‘무더운 여름’에 실린 작품은 위화라는 이름이 불러일으키는 엄청난 소설적 재미에 대한 기대감을 살짝 배반한다. 소설 속 인물들의 다채로운 일화에 빠져 웃고, 울던 장편소설의 세계와는 달리 그의 단편들은 일상에서 파편적으로 건져 올린 담담한 소묘의 소품들이다.

    위화는 한동안 치과의사 출신으로 소개돼왔다. 그런데 이 단편집의 말미에 ‘나의 문학의 길’이라는 비교적 긴 작가 노트(고백록)에서 치과의사가 아닌 발치사였음을 밝히면서 문학, 특히 소설에 입문한 사연을 흥미롭게 소개한다. 그는 대학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고, 아버지의 도서대출증으로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었으며, 스무 살이 되어 시내 중심가 병원에서 발치사로 일하며 매일 냄새나는 남의 입 속을 들여다보면서 평생 살아야 하는 것에 절망한 나머지 창밖을 자주 내다보곤 했는데, 그때 문화관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그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결국 한가롭게 문화관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삶이 그의 운명을 뒤바꿔놓는 계기가 된다. 위화가 고백한 내용은 이렇다.

    나는 대학 문턱에 가보지 못했다.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발치사였다. 그때 소설을 쓰고자 마음먹은 이유는 발치사를 그만두고 문화관(대중의 문화활동을 보급할 목적으로 설립된 기구)에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문화관 사람들은 매일 출근하지 않았는데, 그 점에 끌린 것 같다. 당시 문화관에 들어갈 방법은 세 가지뿐이었다. 첫째는 그림을 배우는 것, 둘째는 작곡을 배우는 것이었는데, 이 두 가지는 완전히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기 때문에 너무 번거로웠다. 셋째가 소설을 쓰는 것이었고, 이건 도전해볼 만했다.

    소설가로의 도전과 변신

    내가 누구이고 이 세상은 어떻게 흘러가는가 하는 최초의 의문이 생기는 시기부터 우리는 작가를 꿈꾼다. 또한 수많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고난과 역경을 겪으면서 작가가 되어볼까 하는 생각을 수시로 갖는다, 위화처럼. 소설에 대한 도전은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매년 12월이면 열병처럼 휩쓸고 지나가는 각 신문사의 신춘문예 투고 바람이 그것을 증명한다. 인간은 호모 내런스(homo narrance), 곧 이야기를 듣고, 또 이야기 하기에 대한 욕망을 본능으로 가진 ‘이야기하는 존재’인 까닭이다.

    위화의 경우로 돌아가자면, 그가 처음 소설을 쓸 당시 아는 한자는 5000~6000자였고, 소설 작법도 몰랐고, 인용부호도 몰랐다. 중학교 다닐 때 작문해본 게 전부였다. 그는 문예지 ‘인민문학’을 읽기 시작했고 가와바다 야스나리를, 카프카를, 루쉰을, 제임스 조이스를,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를 읽었다. 그는 그들로부터 문장을 익히고, 이야기와 세부 묘사 방법을 터득했다.

    그러니까 위화의 스승인 책은 도서관에 있었고, 그의 문학적 스승인 조이스나 보르헤스도 마찬가지로 거기에 있었다. 쉰 살이 넘은 중견 작가가 30대 초반에 창작한 단편들로 구성된 이 특별한 단편집이 제임스 조이스의 유일한 단편집 ‘더블린 사람들’과 여러모로 겹치는 이유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예술가 소설이자 교양소설, 성장소설인 ‘젊은 예술가의 초상’과 현대 소설사에 전무후무한 백과사전으로 불리는 걸작 ‘율리시즈’. ‘더블린 사람들’의 담담한 단편들은 이 두 거대한 협곡과 대양에 해당되는 장편 사이사이 쉬어가는 옹달샘, 덧없이 흘려보내는 구름 한 점과 같은 존재들이다.

    위화의 ‘무더운 여름’여섯 단편은 그의 익살스럽고, 거침없고, 유장하고, 아름다운 장편 서사들 사이사이 잠시 발을 멈추고, 눈을 감아보는 오솔길의 휴식과 담담함을 선물한다. 조이스의 단편들이 거느린 담담함의 묘미, 곧 일상 속에 묻혀 있는 흐릿한 세부가 어느 순간 우리 눈앞에 또렷이 형상을 드러내게 하는 현현(顯現, epiphany·평범한 사건이나 경험을 통해 직관적으로 진실의 전모를 파악하는 일)의 미학이 위화의 ‘무더운 여름’에 잘 구현돼 있다. 단편소설의 미학을 오랜만에 확인하는 즐거움이 있다.

    ‘무더운 여름’위화 지음 / 조성웅 옮김 / 문학동네 / 254쪽 / 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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