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와 달리 미국은 알코올중독 수준의 상습 주취자를 적극적인 치료의 대상으로 여긴다는 것이었다. 이들의 소란 때문에 경찰력이 낭비되는 일도 없다는 말도 했다. 본인이 원하면 미국 보건당국이 운영하는 주취해소센터(Detoxification center)로 데려가 국가가 치료를 돕는다는 내용도 솔깃했다. 상습 주취자란 만성 알코올중독으로 인한 행동장애 증상을 보이며 단순 취객과 달리 병원 및 정신과 치료가 필요한 만큼 정도가 심각한 사람.
그는 몇 달 뒤엔 미국 경찰의 상습 주취자 대처 과정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한 주취자가 난동을 부리자 미국 경찰은 “당신은 집에서 술을 깨거나 주취해소센터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서 양자택일을 제안했다.
이 주취자가 주취해소센터의 치료를 원해 김 청장은 현지 경찰관과 함께 센터에 직접 가볼 수 있었다. 1층짜리 센터는 완벽한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일반 병원의 부속기관이 아니라 미국 정부의 예산을 받는 독립 의료기관이었다. 정신병 수준의 알코올중독자를 위한 폐쇄병동도 있었다.
“이런 주취자 대처방법이나 시설이 주취자는 물론 일반 시민, 경찰관도 보호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제도가 될 수 있겠다. 귀국하면 반드시 한국에 알려야겠다”고 그는 스스로 되뇌었다.
귀국한 뒤 경찰청 혁신기획단장을 맡게 된 그는 몇 가지 추가연구를 한 뒤 지휘관이 되면 상습 주취자를 위한 치료 보호 프로그램을 일선 지방경찰청에서 실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올해 부산지방경찰청으로 부임하면서 7월15일부터 ‘상습 주취 소란자 치료 보호 프로그램’을 전국에서 처음으로 도입했다. 10월15일까지 석 달 동안 부산시의사회, 부산의료원의 협조를 받아 부산시내 9개 지구대에서 시범 운영한 이 프로그램은 경찰 조직 안팎에서 큰 관심을 끌었다.
부산 연제구 연산5동 부산지방경찰청 집무실에서 그를 만나 ‘상습 술꾼 치료 프로그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 일반인이 듣기에 상습 주취자 치료 보호 프로그램은 생소한 제도입니다.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린다고 모두 병원으로 데려가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 취객은 대상이 아닙니다. 상습적이 아닌데다 음주 정도에 따라 실수를 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상습 주취자는 다릅니다. 만성 알코올중독으로 인한 행동장애를 보이기 때문에 심각합니다. 알코올중독자는 치료를 받도록 반드시 도움을 줘야 합니다. 부산경찰이 도움을 주기로 한 거죠. 그래서 응급 치료가 필요한 부산지역 상습 주취자를 경찰이 119구급차로 부산의료원 응급실에 옮긴 뒤 응급조치를 받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송 대상은 본인 또는 다른 사람의 생명과 재산에 피해를 줄 우려가 있는 취객, 응급환자, 알코올 의존자로 한정했습니다. 부산에서는 165명이 대상이며 사전에 본인과 가족의 동의를 얻고 있습니다. 이송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인권침해 논란을 막기 위해 시민단체도 참여시키고 있습니다. 술이 깬 뒤에는 본인 동의를 얻어 알코올중독 치료를 받게 하거나 집으로 보내는 내용입니다. 경찰이 이들을 의료기관에 떠넘기는 게 아니라 경찰이 치료, 보호 과정에 참여하면서 전문 의료인의 도움을 받는 것이죠. 워싱턴 주재관으로 근무할 당시 미국의 체계적인 주취자 관리에 관심을 두고 1년 동안 체계적인 연구를 했습니다.”
경찰 주취자 처리 업무로 연간 500억원 낭비
▼ 상습 주취자 때문에 피해가 심각한 모양이죠?
“경찰청이 집계한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지구대 업무 가운데 주취자 처리 업무 비중이 26.6%에 달합니다. 이 때문에 연간 500억원가량의 인력 낭비요인이 발생합니다. 이에 따른 경찰력 손실은 순찰 등 민생치안에 공백을 주기 때문에 심각할 수 있습니다. 부산에서도 올 1~5월 처리한 상습 주정꾼 처리업무는 5만4925건, 하루 평균 364건에 달합니다. 특히 번화가인 전포지구대, 연일지구대는 거의 매일 찾아오는 주취자 때문에 경찰관들이 치안 업무를 제대로 볼 수 없다고 하소연할 정도입니다. 이런 가운데 4월에는 전남의 한 지구대에서 자해를 시도한 주취자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경찰이 입에 수건을 물린 뒤 저산소증으로 인한 뇌경색으로 주취자가 사망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의학적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경찰관의 과잉대응으로 빚어진 사건입니다. 이런 문제가 있는데도 주취자 처리 문제는 사실상 방치됐던 게 현실입니다. 이 문제를 반드시 풀어야 더 이상 주취자나 시민, 경찰관의 피해가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경찰이 상습 주취자를 병원에 후송하고 있다.
▼ 우리나라에서는 왜 주취자 문제 해결에 소극적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인권침해 논란 소지 등을 우려해 외면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입니다. 병원은 경찰이 주취자를 병원에 떠넘긴다고 생각했고, 경찰은 병원에서 주취자 받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그동안 상당히 소홀했습니다. 경찰관 직무집행법에 따라 자살을 시도하거나 주변 사람에게 위해를 가할 우려가 있을 때는 주취자를 보호조치할 수 있지만 단순히 술 마시고 소란만 피우는 사람은 대상에서 제외합니다. 함부로 연행하면 인권침해 논란을 빚을 수 있어 경찰관들이 꺼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잘못하면 소송을 당할 수 있던 부분도 경찰관 개인에게는 굉장히 큰 부담입니다. 하지만 이들을 방치하고 책임지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인권보호를 제대로 하지 않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지구대에서 상습적으로 난동을 부리는 주취 소란자를 이제는 공권력에 대한 도전자가 아니라 치료 대상자로 봐야 합니다.”
▼ 외국에서는 이들을 어떻게 치료하는지 궁금합니다.
“우리나라와 달리 대부분 선진국들은 상습 주취자를 위한 제도와 시설이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만약 공공장소에서 술에 취해 소란을 피우면 체포해 500~1000달러의 벌금을 매깁니다. 워싱턴DC에서는 단순 주취자(의식이나 사물 분별력이 있는 사람)는 본인 동의를 얻어 집이나 보건당국이 운영하는 주취해소센터로 보냅니다. 이 과정에서 만취자는 병원으로 후송하되 자살, 자해시도 등 정신병 증세를 보이면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주취해소센터의 폐쇄병동으로 데려가죠. 영국은 만취 소란자는 죄질에 관계없이 우선 체포해 후송용 차량에 태워 경찰서 유치장에 36시간 구금합니다. 일본에서도 ‘술에 취하여 공중에게 폐를 끼치는 행위의 방지에 관한 법률’에 따라 공공장소에서 난폭한 행동을 하면 수갑이나 포승을 이용해 강제 보호조치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는 공공장소에서 만취 상태로 발견되면 경찰서 주취자 보호실로 데려가 3000유로 이하의 벌금을 받게 되죠. 외국에서는 주취 소란자를 강하게 처벌하고 응급조치가 필요하면 강제 보호조치를 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 모든 게 술과 이들의 행패에서 일반 시민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인 셈이죠.”
김중확 청장이 시민단체 관계자들과 상습 주취자 치료 프로그램을 중간평가하는 간담회를 갖고 있다.
“사실 그 부분이 제도를 시행하기에 앞서 가장 큰 걱정이었습니다. 일부에서는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면 모든 사람을 병원으로 데려가는 것 아니냐’며 우려했지만 우리는 치료와 보호 대상을 엄격히 한정했습니다. 모든 경찰서와 지구대와 협의해 알코올중독 수준인 165명을 상습 주취소란자로 제한했습니다. 앞서 설명했듯이 본인이나 가족의 동의가 있을 때만 병원으로 옮기고 있습니다. 지구대에 후송과정에서 치료·보호 매뉴얼을 보낼 정도여서 인권침해 소지는 전혀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7월21일부터는 국가인권위원회 부산사무소, 부산인권상담센터, 경실련, 참여자치시민연대, 부산인권센터 등 5개 시민단체와 이 제도를 두고 간담회도 열었습니다. 경찰에서 주취자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설명하자 경찰의 업무 전가, 인권침해 등 부정적인 시선이 사라졌습니다. 경찰뿐만 아니라 사회복지 차원에서 주취자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는 등 시민단체의 반응도 대체로 긍정적이었습니다.”
▼ 10월15일로 시범실시기간인 석 달이 지났습니다. 계획하신 대로 성과를 얻었나요?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석 달 동안 상습 주취자 20명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이 가운데 10명은 알코올중독 치료를 받으며 재활의 기회를 찾았습니다. 가족들도 경찰에 고마움을 표하고 있습니다. 상습 주취자의 대학생 아들은 ‘아들 혼자 아버지를 치료하는 게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경찰의 적극적인 도움이 고마웠다’고 전하거나 주취자 본인이 직접 ‘이제 술을 조금 마셔서는 아무런 느낌이 없고 너무 우울해 견딜 수 없다’며 정신치료를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165명의 관리 대상 주취자도 조심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구대 경찰관들이 이 프로그램이 언론에 소개된 뒤 이들의 소란이 현저히 줄어들었다고 입을 모으고 있으니까요. 무엇보다 가장 큰 성과는 상습 주취자에 대한 문제점을 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입니다. 국민 공감대가 확산되면 모든 지구대로 확대해도 괜찮겠다는 자신감도 얻었습니다.”
주취자 관련 법체계 정비해야
▼ 그럼 이 제도의 정착을 위해 추가로 필요한 게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부산시립의료원의 도움을 받아 운영하고 있지만 다른 병원 응급실에서도 일반 환자와 의료진의 안전을 위해 주취자를 보호할 수 있는 별도 시설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예를 들면 워싱턴 DC의 주취해소센터 같은 것이지요. 2004년 밀양 여중생 성폭력 사건 뒤 생긴 성폭력 피해자 원스톱 지원센터처럼 알코올중독자 방지를 위한 전문성 있는 치료 및 상담센터를 개설하는 것도 그 대안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뿐만 아니라 확대 시행을 위해 병원 진료비 확보를 위한 응급의료기금 확충도 시급하다고 봅니다. 대부분이 기초생활수급자이거나 정신과 입원 치료를 받을 만큼 생활형편이 넉넉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상습 주취자 가운데는 노숙자나 무연고자가 상당히 많습니다만 가족 동의가 없어 치료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법의 테두리 내에서 이들도 보호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돼야 할 것 같습니다. 주취자 관련 법 체계의 문제점이나 개선 방향을 연구해 보건복지가족부 등 관련 부처에 정책건의를 할 생각입니다.”
● 김중확 청장 : 1956년 경남 사천 출생. 부산고와 서울대 법대를 거쳐 연세대 사법행정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사법시험 26회 출신(사법연수원 16기)으로 1987년 경정으로 특채됐다.
주 시카고 한국총영사관 경찰주재관, 경찰청 외사2담당관, 경찰청 주 워싱턴주재관을 지내는 등 경찰 내에서 몇 안 되는 국제전문가로 분류된다. 강화서장, 경찰청 정보과장, 관악서장, 경찰청 수사과장, 부산경찰청 차장, 경찰청 혁신기획단장 등 주요 보직을 거쳤다. 2007년 치안감으로 진급한 뒤 경기경찰청 차장, 경남경찰청장을 지냈다. 올 3월부터 부산경찰청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경찰청 주 워싱턴주재관으로 있던 2006년 한미 FTA 저지 원정시위대가 워싱턴DC에 도착했을 때 우려와 달리 워싱턴 경찰국과 협조해 한 명도 체포되지 않게 평화적 집회·시위를 할 수 있도록 중재하는 등 조정 역할도 뛰어나다.
부산경찰청의 ‘상습 주취 소란자 치료 보호 프로그램’ 도입 과정이나 연세대 석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한 ‘현행 체포제도의 문제점과 개선방안에 관한 연구’에서 미국, 독일, 프랑스, 일본, 영국 등의 제도를 꼼꼼히 취재해 선진국 경찰제도의 장단점도 꿰뚫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