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로부터 약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프로 갬블러 이태혁씨는 서울 강남의 한 호텔 레스토랑 테라스에서 우아한 자세로 ‘신동아’ 기자를 맞이했다.
“인터넷 고스톱 쳐보셨습니까. 저도 가끔 치는데 30만원으로 시작해 2억원 만드는 데 정확히 1시간20분 걸립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돈은 사이버머니다.
“계속 더블 업, 더블 업 하면 더 큰 판으로 이동하죠. 고스톱에는 기술도 필요하고 집중력도 엄청 필요해요. 정확히 1시간20분 지나면 새로운 상대에게 한 번에 다 잃어요. 집중력이 떨어졌다는 얘기죠. 저는 인간이 최고의 집중력을 발휘하는 시간이 한 시간 전후라고 봅니다. 한 시간 동안 쏟아내고 나서 다시 채우려면 시간이 필요하지요. 집중이 집착으로 바뀌면 (게임을) 못 끝내요. 감정이 개입되는 거죠.”
그의 첫인상은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순한 눈매와 쌍꺼풀, 둥글둥글한 얼굴, 곱슬한 머리카락 따위가 어우러져 미소년의 이미지를 풍기고 있었다. 안경 너머 작은 눈은 초점을 잃은 듯 멍해 보이면서도 기지가 번뜩이고 강한 기가 느껴지는 묘한 매력을 갖고 있었다.
세계포커대회 우승
그는 20대 후반인 2004년 영국에서 열린 세계포커대회(RCT BRITISH TOURNAMENT)에서 우승을 차지한 후 카지노업계 유명인사가 됐다. 2008년엔 WPC (월드포커챔피언십) 아시아대회의 디렉터(경기운영자)로 활약했다. 방송(SBS-TV ‘스타킹’)에 출연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지난해 ‘천재포커 이태혁 52장의 심리게임’이라는 책도 펴냈다.
외국에서 오래 살다온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그의 발음은 조금 샜다. 바람처럼 해외에서 떠돌던 그는 2년 전 귀국했다. 오늘 그와 나눌 대화의 주제는 포커와 인생. 그는 도박사의 이미지를 벗고 싶다며 포커 자체에 대한 얘기보다는 정신적이고 지적인 얘기를 많이 나누고 싶다고 했다. 그는 요즘 저술활동과 기업체 강연을 하고 있다. 포커의 심리전을 비즈니스전략에 응용하는 강의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예술과 도박은 학습의 영역이 아니라 경험의 영역입니다. 경험에서 얻어지는 섬세한 무의식이 작용하는 거죠. 아무리 이론을 잘 알아도 소용없습니다. 물론 이론은 필요하죠. 우리나라 사람들은 원 페어, 스트레이트, 플러시 이런 것만 알면 바로 게임을 시작합니다. 게임의 속성이나 원리, 마인드는 배우지 않고요. 주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매도, 매수만 배우고 바로 시작합니다. 그러니 잃을 수밖에요. 돈을 따려면 굉장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관찰도 많이 해야 하고 축적된 경험도 있어야 해요.”
10년 동안 30여 개국을 둘러봤다는 그는 지난해 강원랜드에 초청받아 가보곤 깜짝 놀랐다고 털어놓았다.
“카지노에는 인구수 대비 면적이란 게 있어요. 객장에서 고객 한 사람이 차지하는 공간의 크기죠. 그 점에서 강원랜드는 게임장 환경을 갖추지 못했어요. 카지노라기보다는 사람 많은 박물관 같았어요. 집중해서 게임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돼요. 사람이 너무 많으니 테이블 뒤에 서서 베팅하잖아요.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이에요. 한국에서는 잘못된 카지노 문화가 자리 잡았어요. 도박으로만 생각하지 게임으로 즐기는 사람이 없어요.”
그에 따르면 슬롯머신 승률은 120% 안팎이다. 이론적으로는 딴다는 얘기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기계 하나가 아닌 전체 기계의 승률이 그렇기 때문이란다. 뜻밖에도 그는 도박게임 중 가장 잘하는 것이 슬롯머신이라고 말했다. 내가 깊은 관심을 보이자 그는 “그런데 오늘 주제가 도박이냐”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