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9월호

겹겹이 듣기, 켜켜이 보기! ‘인생 대박’ 논어의 힘

  • 배병삼│영산대 교수·정치사상 baebs@ysu.ac.kr│

    입력2010-09-02 13: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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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어는 오늘날에도 인간사회의 ‘경영 모델’이 된다. 여기서 경영이란 모든 형태의 ‘관계 맺기’ 기술이다. 이 기술의 최대 덕목은 ‘개안(開眼)’이다.
    • 세상을 그저 거죽뿐 아니라 그 아래 켜켜이 들어찬 속살까지 꿰뚫어보는 창의적 안목을 틔워준다. 낯익은 것을 낯설게 보는 눈을 가지면 가난조차 즐기며 살 수 있다.
    • 가난을 누리면서 내려다보는, 진정한 주인의 삶이 펼쳐지는 것이다.
    겹겹이 듣기, 켜켜이 보기! ‘인생 대박’ 논어의 힘

    고전 ‘춘향전’을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한 영화 ‘방자전’의 한 장면.

    정작 대학에서는 ‘인문학이 죽어간다’는 비명이 터져 나온 지 오랜데, 바깥에서는 인문학 붐이다. 서점에는 인문학 관련 각종 서적이 즐비하고,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인문고전이나 철학과 관련한 강연회도 빈번하게 열린다. 정치철학 전문서적인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오랫동안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올라 있는 데서도 요즘 인문학의 ‘이상 열풍’은 감지된다. 실은 여기 아홉 번째 연재하는 이 글도 최근의 인문학 열기에 편승하는 것일 테다. ‘공자에게 경영을 묻다’라는 주제 자체가 인문학을 중심에 놓고 오늘날 이슈인 ‘경영학’과의 접점을 모색하는 시도라는 점에서 그렇다.

    이번에는 이런 시도에 대해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이기심을 용인할 뿐만 아니라 그걸 인간성의 핵심으로 용납하는 자본주의 시대인 오늘날, 공자와 그의 어록(‘논어’)은 어떤 의의를 갖는 것일까. 과연 이 속에서 혁신적 경영 모델이나 새로운 문명의 비전을 발견할 수 있을까. 아니면 고작 심신이 지친 현대인에게 도피처(마약)를 제공하는 데 불과한 것일까. 마치 옛날 봉건시대에 도교사상이 죽림칠현식 은둔의 쾌락을 제공하던 것처럼 말이다. 단도직입적으로 오늘날 이 냉혹한 자본주의 시대에 인문고전으로서 ‘논어’의 쓰임새는 과연 무엇인가.

    창의력의 샘 ‘논어’

    우선 ‘논어’는 창의성의 샘으로서 가치가 있다. 지난해 겨울, 빌 게이츠는 우리의 미래를 ‘창의력 자본주의(creative capitalism)’라고 명명한 바 있다. 최근의 아이폰, 앱스토어, 구글과 같은 첨단제품들을 보노라면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남이 생각하지 못한 것을 상상해서 창조할 때만 큰돈을 벌 수 있다!’ 그런데 오늘의 ‘창의력 자본주의’를 몸소 보여주는 아이폰의 주역 스티브 잡스는 또 이렇게 말한다.

    “애플은 언제나 기술과 인문학의 교차점에 서 있다.”



    인문학과 첨단기술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외려 인문학이야말로 창의력을 기르는 힘이라는 주장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스티브 잡스가 청년시절 심취한 분야가 한자의 서체, 곧 서예(書藝)였다는 점이다. 이것은 한자와 인문학이 가진 창의성과의 관련성을 귀띔해준다.

    아! 물론 한자와 인문학을 아이폰과 곧바로 연결하는 것은 억지처럼 여겨질지 모르겠다. 한데 현대 추상화가인 피카소가 한자의 세계에 오랫동안 빠져 있었던 이력은 창의력과 한자, 혹은 동양사상과의 관계를 좀 더 선명하게 보여준다. 피카소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내가 중국인으로 태어났더라면 화가가 아닌 작가가 됐을 것이다. 나는 그림을 ‘쓰고’ 싶다.”

    더욱이 피카소가 우리더러 “당신들은 보고 있지만 보고 있는 게 아니다. 그저 보지만 말고, 생각하라! 표면적인 것 배후에 숨어 있는 놀라운 속성을 찾으라! 눈이 아니고 마음으로 읽어라!”(루트번스타인, ‘생각의 탄생’, 116쪽)라던 요구는 상형문자로서의 한자, 그리고 인문학으로서 동양사상의 속성과 근사하다. 눈에 비친 표면을 모사하던 기존의 회화(구상화)를 벗어나 새로운 패턴, 곧 추상의 세계를 창조해낸 힘의 근원이 자연 속 사물을 추상해 ‘상형’한 한자의 속성에서 비롯됐을 법하지 않은가.

    그런데 창의력이란 결코 천재에게만 주어진 우연한 자질이 아니요 또 상상력이란 백일몽과 같은 환상을 두고 이른 말이 아니다. 여기에 인문학의 의의가 있다. ‘태양이 처음 떠오른 이래 새로운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서양 속담은 ‘오래된 미래’로서의 인문고전(‘논어’)의 의의를 되새기게 하는 금언이다.

    창의력을 기르는 데에 ‘논어’의 용도는 인간사회의 ‘경영 모델’을 제공한다는 점에 있다(여기에서 경영이란 국가경영이든 기업경영이든, 사회단체(NGO)든, 가족이나 개인의 삶이든 간에 모든 ‘관계 맺기 기술’을 포괄한다). 인간의 역사 가운데 최악이었던 춘추시대의 환란 중에 짐승으로 타락하는 인간의 꼴과 정글로 추락하는 사회를 구출하기 위한 모델이 ‘논어’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논어’ 속에는 인간다운 사회·문명의 기본 틀(모델)이 존재한다.

    ‘스타워즈’도 ‘아바타’도 溫故知新

    미래를 구상하고 상상할 때 모델은 필수적 요소다. 조각 예술의 영역에 창의적으로 빛을 도입해 ‘빛의 조각’ 세계를 처음 연 노구치 이사무는 자신의 작업에 대해 “나에게 있어 조각이란 모델(모형)을 만들고, 그 모델의 크기를 키우고, 이에 맞춰 실제로 돌을 깎는 작업을 혼합해나가는 과정”이라고 말한다(‘생각의 탄생’, 306쪽).

    이것은 예술 창작에서 모델의 중요성을 지적한 대목이다. 어디 조각 예술에서만 그러하랴. 모델은 글쓰기, 작곡, 영화 등 모든 예술분야에서 창작을 위한 핵심적 요소다. 아니다. 실은 창작이란, 창의성이란 도리어 고전적 모델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조명(재해석)에 지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1980년대에 출현해 오늘날까지 시리즈로 이어지는 신화적인 영화 ‘스타워즈’에 대한 신화학자의 감상평을 보자.

    “새 옷을 입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옛날 옛날 한 옛날의 이야기로구나!”

    이게 바로 제가 영화 ‘스타워즈’를 보았을 때 가졌던 생각입니다. 영웅이 모험의 소명을 받고, 여행을 떠나 시련을 겪고 위기를 극복하고, 마침내 승리를 얻은 뒤 사회의 이익이 될 만한 것을 가지고 돌아온다. 이건 바로 감독인 조지 루카스가 ‘신화’의 표준적 이미지를 사용한 겁니다.(조지프 캠벨/ 빌 모이어스, 이윤기 역, ‘신화의 힘’. 2001)

    조지프 캠벨의 지적처럼 영화 ‘스타워즈’의 모델은 그리스 신화에 나타난 오디세우스의 출향과 고난의 역정, 그리고 귀환이다. 또 2000년대의 베스트셀러 영화 시리즈 ‘반지의 제왕’도 북유럽의 설화와 신화, 다양한 종교현상에 기초를 둔 것이다. 최근 세계적으로 크게 히트한 영화 ‘아바타’ 역시 고색창연한 만물일체관의 번역인 터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최근 많은 관객을 불러 모은 김대우 감독의 ‘방자전’은 알다시피 ‘춘향전’이라는 고전을 모델로 삼되 새로운 해석을 영상으로 풀어놓은 ‘오래된, 그러나 새로운 이야기’였다.

    그러니 창의성이란 결코 어떤 천재만이 타고난 우연한 자질이 아니다. 도리어 인문학적 모델(고전)에 대한 침착한 독서와 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조명일 따름이다. 연암 박지원의 문장론 법고창신(法古創新), 즉 ‘옛것을 본으로 삼아 새로운 문화를 창조한다’는 의미가 이것이요, 공자의 온고지신(溫故知新)도 이와 다르지 않다.

    사물의 속살 보는 겹눈 길러라

    그렇다면 문제는 오로지 눈이다. 그렇다면 눈, 즉 ‘새로운 안목’은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논어’에서 눈에 대한 논의를 찾아보자. 공자 당대에도 오늘날처럼 직장을 얻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한 제자가 스승을 찾아와 ‘직장 구하는 법’을 묻는다. 이 대답 속에 공자가 계시하는 눈의 의미가 언뜻 드러난다.

    공자 제자 자장이 직장 얻는 법을 배우고자 하였다.

    스승이 말했다. “많이 듣고 그중에 ‘아니다’ 싶은 것은 내버려라! 그 남은 것을 조심스럽게 발표하면 큰 잘못은 없을 거야. 둘째로, 이것저것 많이 보라고. 그중에 ‘아니다’ 싶은 것들은 내버려! 나머지를 삼가서 행동으로 옮기면 큰 실수는 하지 않을 거야. 이렇게 말과 행동, 즉 언행에 잘못이나 실수가 없다면 자연히 직장이 생길 걸세.”

    (子張學干祿. 子曰, “多聞闕疑, 愼言其餘, 則寡尤, 多見闕殆, 愼行其餘, 則寡悔. 言寡尤, 行寡悔, 祿在其中矣.” 논어, 2:18)

    우선 다문궐의(多聞闕疑)라, “많이 듣고 그중에 ‘아니다’ 싶은 것은 내버리는” 과정은 곧 귀에 들리는 것을 흘려듣지 말고 ‘들리는 것을 다시금 들으라’는 뜻이다. 또 다견궐태(多見闕殆)라, “많이 보고 그중에 ‘아니다’ 싶은 것은 내버린다”란 육안으로 보는 것을 다시금 보라, 즉 보는 것을 새겨 보라는 뜻이다. 보는 것을 보고, 듣는 것을 듣는 것!

    겹겹이 듣기, 켜켜이 보기! ‘인생 대박’ 논어의 힘

    ‘창의력 자본주의’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아이폰의 주역, 스티브 잡스.

    말하자면, 그냥 보아 넘기지 않고 보는 것을 다시금 (각성하여) 보는 눈에 직장이 걸려 있다. 듣는 것을 그냥 흘려듣지 않고, 듣는 것에 브레이크를 걸어 (각성하여) 듣는 귀에 취업의 문이 열린다! 그리고 그 해석된 눈으로 걸러진 봄과 들음을 조심스럽게 실천(작품화)할 때 ‘돈이 생긴다(祿在其中矣)’.

    이건 곧 사물을 적어도 두 겹으로 보고 또 들으라는 권고다.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며 징징대지 말고, 또 기업이 요구하는 스펙에 목매달지 말고, 사물의 피상만을 훑고 지나가는 이 눈을 깊게 만드는 길로 나설 때 제대로 된 직장이 생기리라는 공자의 조언은 오늘날 젊은이들에게도 직통하는 가치가 아닐까.

    여기서 공자가 자장에게 권고한 직장 구하는 방법과, 앞서 현대 추상화가 피카소가 권고한 “그저 보지만 말고, 생각하라! 표면적인 것 배후에 숨어 있는 놀라운 속성을 찾으라! 눈이 아니고 마음으로 읽어라!”는 지적은 꼭 같지 않은가. 스티브 잡스가 말한 “기술과 인문학의 접점에 애플이 있다”는 말이 가리키는 지점 역시 이 근처다. 그렇다면 젊은이들이 직장을 구하는 법은 동서고금이 다를 바 없다. 피상을 스쳐 지나가는 얄팍한 눈을 웅숭깊게 만드는 길, 오로지 이 길 외엔 없다.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인 오늘날에도 ‘논어’를 읽어야 할 이유다.

    알기〈좋아하기〈즐기기

    창의력과 관련해 ‘논어’ 속 문장을 하나 더 찾아보자. 자로(子路)는 스승과 여덟 살밖에 차이나지 않는 ‘공자학교’의 고참이었다. 어린 후배들로선 아무래도 스승보다 선배에게 질문하기가 부담이 덜했을 터. 이에 자로에게 이것저것 자주 질문을 한 모양이다. 자로로서는 매번 ‘모른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제 딴엔 이러구러 대답을 해주곤 한 모양이다. 한데 그게 정답일 수는 없으렷다.

    수제자 안연조차 스승의 경지를 두고 “우러러보면 볼수록 더욱 높이 있고, 뚫으면 뚫을수록 더욱 단단하네. 앞에 계신가 하여 쳐다보면 홀연히 뒤에 계시네!”(仰之彌高, 鑽之彌堅. 瞻之在前, 忽焉在後. 논어, 9:10)라고 한탄할 지경이었으니, ‘조폭’ 출신인 자로에게야 일러 무엇 하리. 이즈음 공자가 자로의 뒤통수를 슬그머니 어루만져준다.

    공자 말씀하시다. “자로야! 네게 앎에 대해 알려주련? 아는 것은 안다고 알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아는 것, 이것이 참된 앎이니라.”

    (子曰, “由! 誨女知之乎?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논어, 2:17)

    여기 ‘아는 것은 알고, 모르는 것은 모름을 아는 것’이란, 앎이 정보나 지식의 단순한 습득이 아님을 뜻한다. 참된 앎이란 무지의 각성, 즉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이것은 꼭 소크라테스가 말한‘너 자신을 알라’이고, ‘자신의 무지를 알 때라야 제대로 된 앎이 된다’라는, 철학(philosopia)의 본래 뜻에 다를 바가 없다. 그렇다면 앎의 차원도 ‘알고/모르고’ 의 얄팍한 이분법이 아니요, 앎의 켜 역시 앞서 ‘듣고·보는’ 것처럼 여러 겹으로 이뤄져 있음을 알 수 있겠다.

    공자 말씀하시다. “모르는 것을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며,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느니라.”

    (子曰, “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논어, 6:18)

    무식함보다는 아는 것이, 또 아는 것보다는 좋아하는 것이, 그리고 좋아하는 것보다는 즐기는 것이 낫다는 공자의 ‘앎의 단계론’에서 우리는 배움의 성취가 고작 ‘알고/ 모르고’ 사이의 이분법이 아니라 앎 역시 켜켜이 여러 차원에 있음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앎이란 모른다는 것을 (각성하여) 아는 것이요, 본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을 (다시금) 보는 것이요, 들음이란 귀로 듣는 것을 (느끼며) 듣는 것이다. 그리고 삶(인생)이란 앎과 봄, 그리고 들음이 계속 나선형적으로, 점점차 깊숙이 쌓여가거나 또는 깊어져가는 과정이다. 그러니까 참된 앎과 진정한 보기, 제대로 듣기란 겹겹으로 이뤄져 있다! 정녕 참된 앎이란 두 겹, 아니 세 겹, 다섯 겹으로 이뤄져 있다. 가령 맹자는 한 사건을 두고 세 가지로 나눠 볼 줄 아는 눈을 가졌고(‘맹자’), 부처는 다섯 개의 눈, 즉 육안(肉眼) 천안(天眼) 혜안(慧眼) 법안(法眼), 그리고 불안(佛眼)의 다섯 겹의 안목을 갖췄던 것이다(‘금강경’).

    낯익은 것을 낯설게 보라

    겹겹이 듣기, 켜켜이 보기! ‘인생 대박’ 논어의 힘

    신화의 표준적 이미지를 차용한 영화 ‘스타워즈’ 시리즈의 한 장면.

    우리 속인들 눈에 보이는 피상(皮相)의 거죽 말고 그 아래 층층이 들어차 있는 여러 겹의 속살을 뚫어서 볼 때(이걸 ‘통찰력’이라고 한다), 그제야 일상적이고 평상스러운 삶은 갑자기 비상하고 낯선 새로운 것으로 확 달려든다. 이것이 ‘대학’에서 지적한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의 뜻이다. ‘날마다 새롭고 또 날마다 새롭다’는 말이 어찌 매일매일 새로운 도시를 찾아 관광하는 것을 뜻하랴. 지금 여기 이 땅에 붙박이로 살면서 매일매일 똑같은 일을 거듭하더라도, 남의 눈에는 심드렁한 하루하루가, 내게는 순간순간 낯설고 새로우며 설레는 시공간으로 주름져서 덤벼드는 것(으로 느낌)이 일신우일신의 경지요, 또 그런 순간에 피어나는 것이 창의성이다.

    그렇다면 ‘일신우일신’의 새로움, 상상력, 그리고 창의성을 기르는 방법은 무엇일까. 공자가 이른바, 민이호학(敏而好學, 논어, 5:15)이라 “민감하게 배움을 좋아하노라”라던 그 예민한 감성과 호학의 자세에서 비롯할 테다. 열린 마음으로 민감하게 대상과 호흡을 같이할 적에야 지금 내 주변을 새로운 눈으로 각성하여 바라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을 내일을 위한 수단으로 밀쳐버리지 말고, 지금 이때를 매 순간 절실히 느끼면서 살아갈 때라야 제대로 ‘살아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자기 주변을 낯설게 바라보는 자세는 오늘날 역시 창의력을 기르는 지름길로 제시된다.

    창의력을 기르려면 사물과 현상을 ‘낯설게, 거꾸로’ 보세요. 무수히 많은 과학자의 사례를 분석해 본 결과, 나는 이들의 공통점을 발견해냈어요. 물론 전략 자체는 각각 다르게 나타났지만, 기본적으로 이들은 현상을 ‘거꾸로’ 보는 사람들이었어요. 어떤 패턴이든, 어떤 모양이든 항상 회전해보고, 거꾸로 보고, 다양한 각도에서 분석했죠. 이는 (창의성을 기르기 위해) 매우 유용한 전략입니다. (로버트 루트번스타인, ‘위클리비즈’, 345쪽)



    그러나 고작 피상만 훑어볼 줄밖에 모르는 눈으로는, 즉 ‘육안’의 눈으로는 저 일신우일신하는 웅숭깊은 안목이 그저 상상으로 꾸며낸 허구로 여겨질 뿐이겠다. 꼭 공자가 지적한 바대로 “소인배는 천명을 알지 못해 까불어대며, 위대한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성인의 말씀에 콧방귀를 뀌곤 한다.”(小人不知天命而不畏也, 狎大人, 侮聖人之言. 논어, 16:8) 예나 지금이나 다 ‘아는 만큼 보이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눈에 비치는 것을 사실로 여기는 소인배의 눈으로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낼 수가 없다. 소인배가 허구라고 입을 비쭉거리는 저 상상의 영역이야말로 그들 눈에 비치는 ‘사실’ 이상의 것이다. “왜냐하면 그 속에는 창조의 과정이 개입됐기 때문이다. 예술이나 과학 분야 모두가 그러하다. 아인슈타인은 ‘창조적인 일에는 상상력이 지식보다 더 중요하다’라고 단언한 바 있다. 피카소는 ‘예술은 사람들이 진실을 깨닫게 만드는 거짓말’이라고 했다.”(‘생각의 탄생’, 46쪽)

    비디오아트의 창시자 백남준이 “예술은 사기다”라고 한 말도 여기서 멀지 않다. 즉 상상력이란 단순히 어떤 ‘진실’을 발견하게 하는 도구가 아니라, 도리어 상상력을 통과함으로써만이 진실이 구성된다! 이 구성하는 힘을 따로 ‘창의력’이라고 부를 따름이다. 그러니까 공자는 직장을 구하는 자장에게, 또 알고 모르는 것의 경계가 흐릿한 제자 자로에게 창의력의 비밀을 귀띔한 셈이다.

    창의력 없으면 노예가 된다

    그런데 창의력이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그만인 것이 아니다. 자율적이고 독립된 인간, 즉 ‘자유로운 존재’로 살아가기 위한 절체절명의 조건이기도 하다. 작가이자 화가인 폴 호건(1903~95)은 이렇게 말한다.

    상상할 수 없으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없다. 또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 묘사하고 있는 세계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자기 자신의 눈이 아닌 다른 사람의 눈으로 현실을 보게 된다. 더 나쁜 것은 환상을 볼 수 있는 통찰력을 갖춘 ‘마음의 눈’을 계발하지 않는다면 ‘육체의 눈’으로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것이다.(‘생각의 탄생’, 45쪽)

    제 눈으로 제 스스로의 가치를 창조하지 못하면 곧 남의 눈을 빌려서야 세계를 보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자유인이 아니라 노예에 불과하다! 창의력이 없다면 자기 세계를 만들지 못하고, 자기 세계를 갖추지 못한 사람은 남의 눈을 빌려서 세계를 보게 된다는 폴 호건의 지적은 정말 무서운 말이다. 이건 외국의 명품 브랜드를 찾아 헤매는 오늘날 우리들의 행태를 떠올리게 한다. 지금 우리는 ‘남의 눈을 빌리는’ 데 쓸데없이 많은 돈을 소모하고 있다. 사막에서, 정글에서, 지하에서 피땀 흘려 얻은 알토란 같은 소득을 이른바 ‘명품’에 소비(소모)하고 마는 오늘날 사치 바람의 뿌리가 바로 ‘내 눈이 없다’는 인문학적 명제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제 스스로 명품을 발견(제작)하는 눈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고작 남이 만들어놓은 ‘명품’ 가방을 둘러메고서 남의 눈길의 피사체가 되기를 즐기는 노예(속물)의 삶을 사는 것이다. 남의 눈길에 휘둘리고, 남에게 보일 것을 생각하는 육안, 즉 피상적인 눈으로는 애써 노동해 얻은 소득을 고스란히 남에게 갖다 바치고 고작 럭셔리 브랜드 상품을 비싸게 사오는 ‘바보짓’을 면키 어렵다. 더욱 두려운 것은 ‘내 마음의 눈을 계발하지 못하면 육체의 눈만으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으리라’는, 곧 노예의 상태가 지속되리라는 호건의 경고다. 그렇다면 개안(開眼)은 인간의 본질에까지 닿는 거대한 문제가 된다.

    요컨대 인문고전 ‘논어’를 제대로 읽으면 창의력이 파생되는데, 그 창의성은 오늘날 ‘큰돈’이 된다! 남의 밑에서 작은 돈으로 연명하고 싶지 않은 자존심 강한 사람이라면, 남의 눈에 휘둘리는 노예(속물)로서의 삶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평생을 두고 대박을 터뜨릴 야망을 가진 젊은이라면 인문학을 공부할 일이다. 그 속에서 삶과 경영의 새 모델을 찾아내고 또 그것을 재해석하는 눈길을 통해 창의력은 싹을 틔우리라. 돌아가는 길 같지만, 실은 가장 가깝고 질러가는 것이 이 길이다(오늘날을 두고 ‘창의력’의 시대로 명명한 사람은 공자가 아니라 빌 게이츠였다.)

    ‘논어’는 가난을 버텨내는 힘

    그러나 ‘논어’가 어찌 ‘잘살기’에만 쓰이랴. 도리어 고통에 처한 인간에게 ‘논어’는 더더욱 필요하다. 불교식으로 하자면 인생 자체가 ‘고해(苦海)’이겠으나, 공자에게 고난은 경제적 곤란과 계급적 고통, 즉 빈천(貧賤)이 그 대명사다. 이 둘 가운데서도 ‘가난’은 오늘날도 사람들이 다 피하고 싶어하는 절박한 고통이다. ‘논어’는 이 가난의 고통을 헤쳐나가는 기술을 제시한다.

    어쩌면 ‘논어’의 진정한 가치는 창의력보다 가난의 고통을 이기는 힘을 제공하는데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공자 스스로가 물질적 고생을 몹시 심하게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제 스스로를 두고 “어려서부터 가난하여 많은 기예를 익혔노라”(‘논어’ 9:6)라고 했기에 드는 생각이다. 공자가 가난을 어떻게 대했는지 잠시 살펴보자. 공자가 천하를 주유하다가 곤경에 처하여 따르는 제자들이 영양실조로 쓰러질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제자 자로가 스승에게 덤빈다.

    자로가 화난 낯으로 공자를 뵙고 말했다. “군자도 역시 궁핍하답니까(亦窮)?”

    공자 말씀하시다. “군자야말로 ‘정녕 곤궁할 줄을’(固窮) 알지. 소인배들은 궁핍하면 바로 넘치느니라.”(子路·#53784;見曰, “君子亦有窮乎?” 子曰, “君子固窮, 小人窮斯濫矣.” 논어, 15:1)

    이 대화에서 주목할 점은 두 사람이 군자(君子)라는 말을 같이 쓰지만 그 의미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자로에게 군자는 역궁(亦窮)하는 사람으로, 공자에게는 고궁(固窮)하는 사람으로 인식된다. 자로가 말한 역궁(역시 궁핍하답니까) 속엔 ‘본시 군자는 경제적으로 가난하지 않다’는 전제가 숨어 있고, 공자가 말하는 고궁(정녕 곤궁할 줄 안다) 속엔 ‘군자는 부유함이나 가난함과 상관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깃들어 있다.

    자로의 군자는 요즘 식으로 하면 ‘사회계급론’에 입각한 존재다. 그는 ‘군·자’를 원래의 말 뜻 그대로 임금(君)의 아들(子), 즉 ‘군자=임금의 아들=지배계층’이라는 뜻으로 이해한다. 사실은 이것이 당시 유통되던 군자라는 말의 의미였다. 발굴된 갑골편들을 보면 “자(子)란 은나라의 왕자들로서 중요한 지역의 통치를 맡고 있었던 사람들을 말한다.”(진순신, ‘중국고적발굴기’) 그러니까 자로는 당시 통용되던 군자의 말뜻대로 군자=지배계층으로 인식했기에 “군자도 역시 곤궁하답니까?”라고 힐문한 것이다.

    그러나 공자에게 군자라는 의미는 이와 달랐다. 그는 군자라는 말에 든 계급적 의미를 벗겨내고 새로운 문명사회를 개척할 영웅의 속성을 집어넣고자 했다. 즉 공자의 군자는 지배계급이나 경제적 부유와 관계없는 도덕적 존재였다. “군자가 인(仁)에서 벗어난다면 어찌 ‘군자’라는 이름을 이룰까!”(君子去仁, 惡乎成名? 논어, 4:5)라는 주장에서도 인(仁·사람다움)을 지향하는 이상적 인격체로서 군자의 의미가 잘 부각된 바다. 공자의 군자는 ‘인’의 실천자이지 권력계급이나 부귀계층의 뜻이 아니었던 것이다.

    달동네 체질? 貧而樂 체질!

    따라서 공자의 군자에겐 도리어 빈궁함이 기본조건이기 일쑤였다. 이를 두고 공자는 “부유함과 귀함은 모두 바라는 것이지만, ‘나의 길’로 얻은 것이 아니라면 취하지 않는다. 반면 빈곤과 천함은 내 탓이 아닐지라도 벗어나려 애쓰지 않는다”(논어, 4:5)라고 지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외부의 물질적 환경과 상관없이 자신이 이뤄야 할 길(道)을 묵묵히 실천해 나아가는 존재가 군자다.

    이것은 널리 알려진 군자의 안빈낙도적 특성과 상통한다. 공자는 군자란 ‘빈이락’(貧而樂. 논어, 1:15)하는 존재라고 규정하는데, 이는 곧 위의 뜻과 말만 다를 뿐이다. ‘빈이락’은 “가난한데 즐기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세상에! 가난을 즐긴다고?

    “가난한데도 즐길 줄 아는 삶”이란 결코 ‘달동네 체질’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즉 가난을 즐기는, 미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빈이락’이란 가난을 가난으로 여길 겨를이 없음, 또는 물질적 조건이 나의 일상생활을 침해하지 못함과 같은 ‘경지’를 이른다. 이미 물질적 가난이 내 속의 찌꺼기로조차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가난의 콤플렉스를 벗어던진 말간 평화의 자리다. 공자가 제시한 새로운 인간, ‘빈이락’의 군자는 빈부와 같은 물질적 조건과 욕망에서 벗어난 자리에 거처한다. 이때서야 마치 한여름 태풍이 지나간 해맑은 하늘처럼, 티 없고 왜곡 없이 사물을 바로 볼 수 있는 세계가 열린다.

    정녕 곤궁할 줄 아는 존재

    이렇게 ‘군자=빈이락’이라는 등식을 염두에 두고 자로가 ‘역궁’이라는 말로 달려들던 대목을 다시 보면, 공자가 군자를 ‘정녕 곤궁할 줄 아는 존재’(固窮)로 묘사한 데는 깊은 뜻이 들어 있다. 여기 ‘정녕 곤궁하다’고 할 때의 ‘정녕’(固)이란, 가난할 줄 번연히 알면서도 그 길을 가는 것이다. 또는 부자가 되는 방법을 알면서도 짐짓 가난을 버티며 살아가는 것이다. 연암 박지원의 작품 ‘허생전’의 주인공 허생(許生)처럼 얼마든지 돈을 벌 수 있지만, 그것이 나의 참된 즐거움이 아니기 때문에 ‘짐짓’ 가난 속에서 책을 읽으며 몸을 닦을 따름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궁’에는, 가난함 혹은 부유함조차 비죽이 미소 지으며 내려다보는 의연한 자존심이 깃들어 있다.

    그렇다면 앞서 창의력의 근원으로서 겹눈을 추출한 것과 마찬가지로 가난에 대한 눈길도 겹겹이다. 자로의 ‘군자=빈곤하지 않음’의 천박한 출세론을 오늘날 우리의 가난에 대한 두려움과 같은 자리에 둔다면, 공자의 ‘군자=부귀와 상관없음’은 ‘가난 속에 즐거움의 경지가 있음’(빈이락)과 동석에 놓을 수 있으리라. 즉 가난은 객관적이거나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가난에도 다양한 켜가 존재한다는 것을, 즉 눈에 따라 가난이 즐거움으로 바뀌는 수도 있다는 것을 ‘논어’로부터 배운다.

    ‘논어’에 따르면 한 가지 사태에 겹겹이 쌓여 있는 켜들을 헤아릴 줄 아는 눈(안목)을 얻는 것이야말로 ‘객관적’이고 ‘물질적’인 빈곤을 버티는 힘이 된다. 적빈 속에서도 의연히 사람다움을 실현하는 힘은 인문(人文)의 웅숭깊은 눈길에서 발화한다. 가난에도 다양한 켜가 있음을 발견하는 눈, 이것이 인문학이요 ‘논어’의 참된 쓰임새다. 역시 가난마저 지긋이 내려다보는 웅숭깊은 안목을 기르려는 것이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유다.

    가난도 보는 눈마다 다르다

    그런데 이건 2500년 전 고대사회에서나 있을 법한 호랑이 담배 피던 이야기가 아닌가. 오늘 21세기 지식정보사회를 허덕이며 사는 우리에게는 꿈같은 소리가 아닐 터인가. 다음 사례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이 될 수 있을까. 지지난해 땅으로 돌아간 농부 전우익은 가난을 ‘누리며’ 사는 삶 가운데 이런 편지를 남겼다.

    우린 밥만 먹고 사는 게 아니라 사계절도 먹고 살지요. 계절은 피부로, 마음으로, 눈과 코로 마시지요. 누군가 말했어요. 살림살이는 비록 구차하지만 사계절이 있어 풍성하다고요.

    눈, 그 차가운 눈이 어째서 마음을 그렇게 포근하게 해주지요? 비는 소리 내며 오는데 눈은 소리 없이 와요. 한 수 위 같아요. 소리치는 것, 소리 없는 것, 어느 쪽이 나아요, 형은? (전우익, ‘사람이 뭔데’, 현암사, 76쪽)

    전우익은 가난한 와중에도 ‘사람은 밥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라 사계절도 먹고 산다’는 경지를 토로하고 있다. 이것은 공자가 제시한 ‘빈이락’의 세계와 전혀 다를 바 없다. 또 그는 입으로 먹는 밥만이 아니라 피부로, 마음으로, 눈으로, 코로 먹는 밥에 대해서도 말한다. 고작 입으로 삼키는 것만을 밥으로 아는 우리의 천박한 입(마치 자로의 군자론처럼!)에 비하면, 그는 네 개의 입(피부, 마음, 눈 그리고 코)으로 사계절을 먹고 있다.

    나아가 비나 눈이나 모두 자연현상이건만, 그중에 또 ‘비보다는 눈이 한 수 위인 것 같다’며 자연물을 세심하게 헤아리는 예민한 눈길에서 정녕 ‘인문의 힘’을 절절하게 느낀다. 소리 내며 쏟아지는 비와 소리 없이 내리는 눈 사이에 차이를 발견하고, 이를 기준으로 삼아 즐거움의 경중을 헤아리는 전우익의 눈길은 헛된 짓인가.

    겹겹이 듣기, 켜켜이 보기! ‘인생 대박’ 논어의 힘
    裵 柄 三

    1959년 출생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경희대 대학원 정치학과(정치학 박사)

    한국사상사연구소 연구원

    現 영산대학교 학부대학 교수

    저서:‘논어, 사람의 길을 열다’‘ 한글세대가 본 논어’ ‘풀숲을 쳐 뱀을 놀라게 하다’ 등


    만약 이게 의미 없는 짓이라면, 원두커피의 원산지를 예민하게 감식하는 입맛이나, 포도주의 출산연도와 출신지를 감식하는 저 날카로운 혀끝이 돈이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농부로 살다간 전우익의 눈과 비를 구별하는 눈과 특급호텔에서 비싼 돈으로 초빙하는 프랑스 특급 소믈리에의 감식안이 다른 점이란 과연 무엇일까. 전우익은 안목을 돈과 바꿔먹지 않았던 데 반해 소믈리에는 돈을 좇아 세계를 돌아다닌다는 정도가 아닐까.

    글을 맺자. 우선 ‘논어’를 잘 읽으면 돈이 벌린다! ‘창의력 자본주의’ 시대를 사는 오늘, 창의력의 근원이 인문학이요, 그 인문학의 모델이 고전이라는 등식을 긍정한다면 정녕 그러하다. 실업과 가난을 버틸 수 있는 힘도 ‘논어’에는 있다. 문제는 눈이다. 부유함과 고난을 여러 겹으로 보게 만드는, ‘논어’는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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