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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스타인브레너 전 뉴욕 양키스 구단주

돈보다 승리를 사랑한 ‘보스’ 새로운 사업 모델 구축한 CEO

  • 하정민│동아일보 DBR 기자 dew@donga.com

조지 스타인브레너 전 뉴욕 양키스 구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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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많은 논란이 있지만 미국 야구계는 스타인브레너를 최고의 구단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2003년 1월 미국의 유명 스포츠주간지 ‘스포팅 뉴스’는 그를 미국 스포츠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선정했다. 프로팀 구단주가 야구, 농구, 미식축구, 아이스하키 등 미국 4대 프로 스포츠 종목의 커미셔너를 누르고 1위를 차지한 건 그가 최초였다.

그의 성격에 대한 논란은 있을지언정, 그가 미국 스포츠계에 끼친 영향력과 업적에 반기를 드는 사람은 없다. 그는 중계권 사업, 후원 계약 등을 통해 메이저리그 구단의 비즈니스 모델을 새로 마련했다. 미국인의 전유물이었던 야구와 메이저리그를 세계인의 오락으로 만드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1986년부터 1996년까지는 미국 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내며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유치 및 개최에도 큰 역할을 담당했다.

스타인브레너는 분명 오점이 많은 리더다. 그는 모든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고 싶어했고 잦은 실수와 오판, 심지어 불법 행위를 저지르는 일도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도 모두가 동의하는 사실이 있다. 승리에 대한 갈망이 그 어떤 선수, 감독, 단장보다 강했던 인물이 바로 스타인브레너라는 점이다. 과거의 영화에만 젖어 있던 양키스는 그가 구단주로 재직하던 시절에 와서야 메이저리그 최대, 최고, 최강의 명문 팀으로 완전히 자리 잡았다.

성적과 돈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프로 스포츠 세계에서 선과 악을 따지는 일 자체가 무의미한지도 모른다. 능력과 무능력만 존재하는 세계에서 스타인브레너는 철저히 능력으로 자신의 엄청난 존재 가치를 입증한 구단주였다. 그 어떤 스타 선수보다 더 스타였던 구단주, 단지 양키스 팀이 아닌 메이저리그 전체를 상징하는 구단주가 바로 스타인브레너다.

양키스 인수와 제국의 재건



스타인브레너의 본명은 조지 마이클 스타인브레너 3세다. 독일계 후손인 그는 1930년 미국 오하이오 주 로키 리버에서 아버지 헨리 스타인브레너 2세와 어머니 리타 사이에 1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48년 인디애나 주 북부의 쿨버 밀리터리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매사추세츠 주의 윌리엄스 칼리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미 매사추세츠 공대(MIT)를 졸업한 수재였던 그의 아버지는 자신만큼 학업 성적이 뛰어나지 못한 아들에게 칭찬을 해주는 일이 거의 없었다. 또 매우 엄격하게 아들을 훈육했다. 이런 성장 환경이 그의 폭군 기질을 부추겼다는 분석도 많다.

윌리엄스 칼리지 졸업 후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1955년 오하이오 주립대학에서 체육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학창 시절부터 육상팀의 장애물 경기 스타, 풋볼팀 러닝백으로 활약하며 스포츠에 재능을 보인 그는 학교 신문의 스포츠 편집장을 맡은 적도 있다. 스타인브레너는 오하이오 주립대에 재학할 때 유명 풋볼 코치인 우디 헤이스를 도와 일했다. 1955년에는 노스웨스턴대, 1956~57년에는 퍼듀대에서 풋볼 부코치로 활약했다.

그는 1956년 엘리자베스 조안 자이그와 결혼해 행크, 할, 제시카, 제니퍼의 2남2녀를 뒀다. 결혼 후 본격적으로 사업에 뛰어든 그는 1957년 집안에서 운영하던 킨즈먼 해운회사에 합류해 어려움에 처한 회사를 정상화시켰다. 1963년 그 회사를 사들였고, 1967년 아메리칸 해운을 인수하며 본격적인 선박 재벌로 이름을 알렸다.

스타인브레너는 1960년 클리블랜드 파이퍼스라는 농구팀에 투자하면서 스포츠 사업에 발을 들였다. 클리블랜드 파이퍼스는 미국 프로농구 사상 최초의 흑인 감독인 존 매클랜던이 이끌던 팀으로도 유명했다. 하지만 2년 만인 1962년 12월 미국 농구리그(ABL)가 파산으로 해체되면서 그의 첫 스포츠 투자는 완전히 실패했다. 그 와중에 그는 브로드웨이의 연극 무대에도 투자했다. 그가 투자한 뮤지컬 ‘시소(Seesaw)’는 1974년 토니상을 받았다. 그의 연극 투자는 1980년대 후반까지 이어졌다.

1973년 스타인브레너는 색다른 모험을 시도했다. 미국 3대 공중파 네트워크인 CBS가 소유하고 있던 양키스를 몇몇 투자자와 함께 1000만달러에 인수한 것이다. 1970년대 초 양키스는 과거의 영화와는 무관한 팀이었다. 양키스는 1960년대 초까지 무려 20차례 월드시리즈 우승을 거머쥐며 메이저리그를 평정했지만 CBS가 인수한 후 연이은 성적 부진으로 관중으로부터 외면당했다. 1966년에는 56년 만에 아메리칸리그 꼴찌까지 기록했다. 전설적인 스타 미키 맨틀이 1968년 은퇴한 뒤에는 내로라할 만한 스타 선수도 없어 관중 동원이 더 어려웠다.

이 때문에 스타인브레너가 인수하기 직전인 1972년, 양키스는 1945년 이후 처음으로 100만명 관중 동원에 실패하는 수모도 겪었다. 월드시리즈 단골 우승 구단, 메이저리그 최고 인기 구단이라는 이미지는 온데간데없었다. 이런 팀을 인수한다는 건 상당한 모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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