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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록, 그 진실과 왜곡 사이 ⑥

우리 편은 좋은 사람 나머지는 나쁜 사람?

‘선조실록’은 왜 수정됐나

  • 오항녕| 전주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hallimoh@hanmail.net

우리 편은 좋은 사람 나머지는 나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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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느 날 밤 선조가 요동으로 건너갈 것을 의논하자 사관들은 몰래 도망치기로 의견을 모으고 먼저 사초책(史草冊)을 구덩이에 넣고 불을 지른 뒤 어둠을 타고 도망했다.

선조가 길에서 자주 돌아보며 사관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는데 모두 보지 못했다고 대답했더니, 선조는 “김선여가 탄 말이 허약하더니 걸어서 오느라 뒤처졌는가?”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도망친 자의 승승장구

그러다 새벽이 되어서야 그들이 도망한 것을 알고는 선조도 말씨와 낯빛이 참담해졌다. 같이 가던 신하들은 모두 격분하며 “뒷날 상이 환국(還國)하시면 이 무리들이 어떻게 살아나겠는가”라고 했다 한다. 네 사람은 각각 영남과 호남으로 가서 가족을 찾았는데 고을 관아에서 먹을 것을 얻으면서 핑계 대기를 “상이 물러가라고 허락했기 때문에 왔다”고 했다.

그 후 이들의 이름은 사간원의 요청에 따라 사판(仕版·관원 명단)에서 삭제됐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선조 32년(1599)에 조존세와 김선여는 다시 대교와 검열로 복직해 사관의 직무를 맡게 된다. 따라서 “상이 도성에 돌아온 뒤 네 사람이 돌아와 모였는데, 다시 이들을 사관으로 주의(注擬·후보로 올림)하자, 상은 ‘어찌 도망한 자들에게 다시 사필(史筆)을 잡게 할 수 있겠는가. 백집사(百執事·일반 관원)는 가하다’고 했고, 이 때문에 모두 외직(外職 ·지방 관직)에 벼슬했다”고 쓴 ‘선조수정실록’의 기록은 조금 부정확하다고 하겠다. 어쨌든 조존세와 김선여는 지방 관직이 아니라 다시 사관으로 복직됐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의주로 파천했을 때 기록한 사초를 옮겨왔지만 춘추관에 보관한 채 관리를 하지 않아 수정하려고 했을 때, 선조가 조존세와 김선여는 사초를 버리고 도망친 자들이라며 수정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은 모두 이산해(李山海)의 문하였다. 김선여는 김첨경(金添慶)의 아들로 가장 문망(文望)이 있었으며, 임취정은 임국로(任國老)의 아들이고, 박정현은 박계현(朴啓賢)의 종제(從弟)이고, 조존세는 조사수(趙士秀)의 손자로서 모두 대대로 벼슬한 명문이었다. 이렇게 임무를 방기했으니 명문이란 말은 어폐가 있을지 모르지만. 김선여는 그래도 벼슬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살다가 일찍 죽었지만, 조존세·임취정 등은 광해군 때 귀척(貴戚·귀한 인척)이라는 이유로 등용돼 대관(大官)이 됐다.

또한 조존세는 영창대군이 강화로 유배될 때 호송했던 의금부 당상관이었다. 계축옥사의 핵심 인물로 지목된 영창대군을 압송했다는 것은 곧 광해군의 신임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그는 성균관 대사성까지 지냈다. 성균관은 태학(太學)으로 나라를 이끌어갈 인재를 키우는 국립대학인데, 사초를 태우고 도망친 그가 국립대학 총장을 맡았으니 그 나머지는 무슨 볼 것이 있겠는가. 임취정은 광해군의 신임을 얻어 승지·대사헌을 지냈고, 당초 이이첨의 세력이었으면서도 형인 임수정(任守正)의 첩 자식이 후궁으로 들어가 소용(昭容)이 된 뒤 총애가 날로 높아지자 나중에는 이이첨의 견제세력이 됐다. 박정현은 광해군 8년 강원도 감사까지 지냈다.

자료 다 모으라

광해군 원년(1609) 7월, 춘추관에서는 임진왜란 때문에 사초가 하나도 남은 게 없다고 보고했다. 이게 첫 번째 문제였다. 일단 고(故) 지사(知事) 유희춘(柳希春), 고 참판 이정형(李廷馨)이 기록한 개인의 일기가 다행히 춘추관(春秋館)에 보관돼 있었다. 유희춘은 ‘미암일기(眉巖日記)’로 잘 알려진 학자관료로, 선조 때 삼경(三經·시경 서경 주역)을 언해(諺解)한 학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마저 소략했다. 실록청에서 행장(行狀·선조의 행장으로 추정)을 지을 때 그 일기를 확인했는데 이정형의 일기는 조보(朝報·요즘의 관보)에 나온 것 가운데 일부 내용만을 기록한 것으로 15, 16년 전에 기록한 것이 단지 1권뿐이었고, 유희춘의 일기는 1년에 한두 달의 사건만 기록하고 다른 달의 사건은 모두 기록하지 않았으므로 너무나 소략해 1만 분의 1도 고증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선 임진년 이후의 사초를 토대로 편찬하되, 한편으로는 먼저 그 사초를 수정하고 한편으로는 여러모로 자료를 수집하기로 했다.

그래서 고 감사 배삼익(裵三益)의 집에 보관된 왜란 이전의 연도별 조보, 고 판서 이기(李·#54702;), 고 첨지(僉知) 이수준(李壽俊)의 집에 보관된 왜란 이전의 조보, 고 참의 유조인(柳祖?)의 집에 있던 임진년의 ‘행조일기(行朝日記·의주로 파천했을 때 조정의 일기)’를 가족에게 연락해 올려 보내라고 했다. 요즘으로 치면 전직 관료들이 가지고 있던 관보든 일기든 다 수집하는 셈이다.

이밖에 여염(閭閻)에 살고 있는 사대부 집에 가장일록(家藏日錄)이 있는지를 알아보아 가져오게 했다. 사관이나 겸춘추(兼春秋·사관을 겸직한 관리)를 지낸 사람은 집에 남겨둔 사초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가지고 있으면서도 즉시 내주지 않는 자에게는 사실이 드러나는 대로 치죄(治罪)하게 하며, 고증할 만한 긴요한 문서에 대해서는 온 지방에 알려 사서인(士庶人)을 막론하고 스스로 바치는 자에게 특별히 상을 주도록 했다.

굳이 사초에 준하는 기록이 아니더라도 왜란 이전에 벼슬자리에 있던 사람이 각자 듣고 본 것을 평소 사관의 가장 일기처럼 기록해놓은 것이 있을 경우에는 많고 적음을 막론하고 바치게 해 취사선택할 수 있게 했다. 사대부의 문집 중에 비명(碑銘)·소(疏)·차(箚)의 내용이 시정(時政)에 관계돼 고증하고 채택할만한 것이 있으면 역시 모두 수집했다. 원래 실록을 편찬할 때 제출하게 돼 있는 겸춘추 및 이조의 비초(批草·인사기록 초본)는 당연히 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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