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호

‘혼魂백魄’ 초청하는 제사 다시 만나는 부모 마음

  • 이기동| 성균관대 유학동양학과 교수 kdyi0208@naver.com

    입력2012-09-20 09: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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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魂백魄’ 초청하는 제사 다시 만나는 부모 마음

    충남 아산시 송악면 외암민속마을에 있는 한 종가 며느리들이 제사에 쓸 놋그릇을 볏집으로 닦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해마다 추석이 되면 귀성·귀경전쟁이 벌어진다. 10시간 넘게 걸려도 우린 고향으로 향한다. 도로는 한바탕 몸살을 앓는다. 그래도 우리는 추석명절을 챙긴다. 왜 그럴까.

    그 중심에 제사가 있기 때문이다. 고향에 계시는 부모와 친척을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사에 참여하는 것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제사 때문에 여러 복잡한 일이 일어난다. 며느리는 기독교 신자, 시어머니는 불교 신자인 가정에서는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제사에 참여할 것을 강요하고, 며느리는 한사코 거부한다. 이 때문에 불거지는 갈등이 이만저만 아니다. 또 여러 형제 중에서 장남이 교회에 다니면 영락없이 제사 문제 때문에 가족 간에 불화가 일어난다. 제사가 너무 많은 가정에서도 문제가 생긴다. 그렇지 않은 가정에서도 제사를 꼭 지내야 하느냐 하는 반응도 있다. 조상의 신령이 직접 와서 제사상의 음식을 먹는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때문에 제사는 우상숭배나 미신으로 오해받기도 한다.

    제사는 생기충전의 기회

    제사의 본래 의미는 무엇일까? 무엇 때문에 우리 민족은 500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줄기차게 제사를 지내왔을까. 진지하게 한번 생각해볼 때가 되었다.



    제사의 기능은 다음 네 가지 정도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 제사는 생기충전(生氣充電)의 기회다. 사람들의 삶은 경쟁으로 인한 긴장의 연속이다. 긴장이 계속되면 피곤해서 견디기 어렵다. 가끔 그 긴장을 풀어줘야 한다. 긴장을 푸는 가장 좋은 방법은 부모를 만나는 것이다. 부모는 경쟁 상대가 아니다. 부모를 만나면 긴장이 풀린다. 부모를 만나 긴장을 풀면서 세상을 살아갈 힘을 다시 얻는 것이다.

    그런데 부모가 안 계시면 어떻게 할 것인가. 부모가 안 계시면 생기를 충전할 수 있는 기회가 없다. 그럴수록 더욱 외롭고, 더욱 그립고, 더욱 보고 싶어진다. 이런 문제를 풀어줄 해결책을 찾아낸 것이 바로 제사다. 제사는 부모와 만나는 자리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반문할 것이다. 돌아가신 부모를 만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사람들은 종종 돌아가신 부모의 사진을 꺼내 본다. 사진은 종이에 불과하다. 그 종이에 생전 부모의 얼굴이 박혀 있다 하더라도 실제 부모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므로 의미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사진을 보는 순간은 부모와 만나는 시간이다. 그 만남은 마음에서의 만남이다. 부모와의 만남은 언제나 가능하다.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부모는 부모의 몸이 아니다.

    ‘장자(莊子)’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공자가 일찍이 초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목격한 일이다. 돼지새끼들이 죽어가는 어미돼지의 젖을 빨고 있었는데, 조금 있다가 그 새끼들이 순식간에 모두 그 어미를 버리고 달아났다. 그 까닭은 그 어미가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이를 본 공자는 말했다.

    “돼지새끼들이 그 어미를 사랑한 것은 그 몸을 사랑한 것이 아니다. 그 몸을 부리는 것을 사랑한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부모를 그리워할 때는 그 몸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다. 몸을 그리워한다면 돌아가신 부모의 시신을 방부처리해서 계속 보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부모의 몸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운 것은 부모의 마음이다. 그런데 부모도 사람이기 때문에 부모에게도 두 마음이 있다. 본심과 욕심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 참으로 그리운 것은 부모의 본심이다. 본심은 모든 사람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한마음이다. 한마음에서는 남과 나를 구별하지 않는다. 그 마음은 욕심에 가려져 잘 나타나지 않지만, 자녀를 대하는 부모에게서 가장 잘 나타난다. 자녀를 대하는 부모의 마음은, 공자가 말하는 인(仁)이고, 석가모니가 말하는 자비(慈悲)이며, 예수가 말하는 사랑이다. 사람들이 부모를 좋아하는 것은 그 마음 때문이다. 그 마음은 천지에 가득한 하늘의 마음이고, 우주에 가득한 우주의 마음이다. 그 마음은 부모의 몸이 돌아가신 뒤에도 우주에 가득하다. 그 마음은 변치 않는다. 그러므로 그 마음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만날 수 있다. 하느님에게서 받는 사랑과 부모에게서 받던 사랑은 일치한다.

    祭如在, 祭神如神在

    부모의 사랑을 다시 느끼기 위해서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 사진을 꺼내서 보는 것도 좋지만, 옛날에는 사진이 없었다. 그래서 찾아낸 방법이 제사다. 옛사람들은 부모가 돌아가신 날을 부모와 만나는 날로 정했다. 부모의 제사를 지낼 때 공자는 부모와 만났고, 부모의 사랑을 느끼고 있었다. ‘논어(論語)’ 팔일편(八佾篇)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공자가 조상을 제사 지내실 때는 조상이 앞에 계시는 것처럼 하셨고, 천신이나 산천의 신을 제사 지내실 때는 신이 앞에 있는 것처럼 하셨다(祭如在, 祭神如神在).”

    조상이 앞에 있는 것처럼 하셨다는 것은 없는데 있는 것처럼 했다는 뜻이 아니다. 공자가 제사 지내는 모습을 보는 사람의 눈에는, 공자 앞에 조상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적었을 뿐이다. 물론 공자의 앞에 조상의 몸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공자는 조상의 몸을 만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만난 것이다. 부모를 만나 생전처럼 부모의 사랑을 듬뿍 느끼는 것, 그것이 제사를 지내는 가장 중요한 의미다.

    둘째, 제사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화합의 기회다. 모든 존재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인간과 아메바도 유전자가 거의 같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가장 바람직한 판단은 남을 남으로 생각하지 않고, 남을 나처럼 여기는 것이다.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 행복이고, 서로 다투고 갈등하며 사는 것이 불행이다. 그중에서도 서로 가까워야 할 가족이나 친척끼리 다투는 것은 큰 불행이다. 이런 큰 불행에서는 빨리 벗어나야 한다. 옛사람이 이런 큰 불행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찾아낸 것 또한 제사다. 사람들이 다투는 까닭은 자기들이 하나임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하나라는 사실을 망각하면 형제도 다툰다. 형제는 한 부모의 몸을 받아서 태어났기 때문에 하나라는 사실을 가장 빨리 알 수 있다. 형제는 다투면 안 된다. 형제가 다투는 것은 큰 불행이다. 이 불행에서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형제가 하나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 방법 중에 가장 효과적인 것이 제사다. 형제가 함께 부모의 제사를 지내면 부모를 통해서 서로 하나라는 것이 확인된다. 그렇게 되면 형제는 바로 화합할 수 있다. 사촌끼리 갈등이 생긴 경우에는 조부모 제사를 함께 지내면 바로 해소될 수 있고, 육촌끼리 다투면 증조부 제사를 함께 지내면 해소될 수 있다. 한국인끼리 갈등이 많을 경우에는 다 함께 단군할아버지의 제사를 지내면 해소될 수 있고, 세상 사람들이 갈등하고 있을 경우에는, 다 함께 하느님 제사를 지내면 해소될 수 있다. 제사는 사람들 사이의 껄끄러움을 극복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제사를 통해 사람들이 화합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들이 제사에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공자는 “제사에 직접 참여하지 않으면 제사를 지내지 않은 것(吾不與祭 如不祭)”이라고 했다

    셋째, 제사는 그리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다. 사람은 누구나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가족이 멀리 흩어져 있을 때에는 더욱 그렇다. 한자리에서 다 같이 만나고 싶지만 날짜 맞추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찾아낸 가장 좋은 날짜가 바로 제삿날이다. 제삿날이란 그리운 사람들을 다 만날 수 있는 축제날이다.

    넷째, 제사는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다. 사람들은 경쟁사회에 살면서 남에게 무시당하는 일이 많다. 남들에게 거부당해 자기의 자리를 잃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자기 자리와 역할을 빼앗기고 소외되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다. 옛사람이 이런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으로 찾아낸 것 또한 제사다. 제사에 참여하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소외되어서는 안 된다. 어떤 집안에서는 혼인하지 않은 어린이나 여자들을 제사에 참여시키지 않는데 이는 아주 잘못된 일이다. 아무리 무능하고 못난 사람이라도 제사에 참여한 경우에는 소외시키면 안 된다. 제사에 참여한 모든 사람은 각각 자기의 정해진 자리가 있다. 많은 사람이 제사에 참여한 이상 각각의 항렬에 따라 줄을 선다. 항렬이 높은 사람은 앞줄에 서고 항렬이 낮은 사람은 뒷줄에 선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정해진 자리를 통해 자기의 당당한 존재가치를 확인할 수 있다.

    또 사회적 명망이 있는 사람에게 아무 역할도 주지 않으면 그 또한 소외시키는 것이 되므로, 그들에게는 헌관(獻官)이라는 중요한 역할을 준다.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축관(祝官)이나 봉작(封爵) 등의 역할을 준다. 나이가 많지만 항렬이 낮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무 역할이 없으므로, 또한 소외감을 느낄 수 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그분들에게 먼저 음복주를 마시게 한다. 젊어서 아무 역할이 없는 사람은 음복주가 들어 있는 그릇을 들고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술을 따르는 역할을 하게 한다. 이처럼 제사에 참여한 모든 사람은 각각의 자리가 있고 각각의 역할이 있어, 그간 소외되거나 위축되었던 마음을 만회하는 기회를 갖는다.

    헌관·축관·봉작 역할을 맡기는 이유

    ‘혼魂백魄’ 초청하는 제사 다시 만나는 부모 마음

    추석을 맞아 조상 묘를 찾은 성묘객들이 제사를 지내고 있다.

    제사의 기능은 이처럼 중요하다. 아무리 그리워도 만날 수 없는 사람을 만나는 자리이고, 껄끄러운 사람들이 만나 껄끄러움을 해소하는 자리이며, 보고 싶은 사람들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자리이고, 소외되고 위축되었던 마음을 다 해소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이런 자리는 천국이다.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행복을 만끽하는 천국 체험이 바로 제사다. 사람들은 제사를 통해서 천국 체험을 한다. 옛사람들이 제사를 중시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옛사람들은 제사의 의미가 중요한 만큼 형식도 중시했다. 제삿날은 천국을 체험하는 설레는 날이다. 제삿날이 다가오면 설레는 마음으로 제사에 쓸 음식을 장만한다. 최근에는 제사음식에 대해 상당한 논란이 있다. 가장 많이 거론되는 주장은 조상의 혼령이 직접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제사상에 음식을 올리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제사상에 음식을 올릴 때 조상의 혼령이 먹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으로 만나는 것이지만, 조상을 만나면 우선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싶은 정성이 마음속에서 솟아나온다. 그러므로 제사상에 음식을 올리는 것은 정성이다. 실제 조상이 먹는지 어떤지는 상관할 일이 아니다. 그리운 사람이 멀리 있다면 그의 사진을 꺼내 보기도 하고, 혼잣말로 보고 싶다고 중얼거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일본의 탄광에는 일제강점기에 징용으로 끌려간 한국인들이 탄광 벽에 ‘어머니 보고 싶어요’라고 쓴 글씨가 남아 있다. 어머니가 보고 싶다고 탄광 벽에 아무리 쓴들 어머니가 알 까닭이 없다. 그러나 어머니가 모른다고 해서 그것을 헛된 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 어머니가 보고 싶은 정성을 표현한 것일 뿐이다.

    정성은 결과에 따라서 평가되는 것이 아니다. 정성은 마음속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아름답고 귀중한 것이다. 제사상에 음식을 올리는 것도 바로 그 정성이다. 제사상에 음식을 올리는 또 하나의 이유는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먹기 위해서다. 제사음식을 잘게 썰어 꼬치에 꿰는 것은 여러 사람이 바로 먹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제사는 천국 체험이고, 제사음식은 천국을 체험하면서 먹는 천국 음식이다. 그러므로 제사음식은 가장 맛있고 진기한 것이어야 한다. 과거에 제사상에 올려놓았던 음식은 당시로서는 가장 진기하고 맛있는 음식이었다. 그 음식은 지금은 진기한 음식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 음식을 지금도 고집하는 것은 잘못이다. 지금의 제사음식은 지금 세상에서 가장 진기하고 맛있는 음식이어야 한다. 제사에 쓰는 술 또한 매우 맛있고 진기한 것이어야 한다. 그 음식과 술 때문에라도 사람들이 제사를 기다리게 되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 홍동백서(紅東白西), 조율이시(棗栗梨枾), 동두서미(東頭西尾) 등 음식을 진설하는 방법에도 이제 얽매일 필요가 없다. 옛날에 그런 방식을 정한 것은 사람들이 음식을 진설하는 방법 때문에 논란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제사상에 장만한 음식을 올려놓고 나면 지방(紙榜)을 붙이고 조상을 초청하는 예부터 시작한다. 제례 하나하나에는 모두 그에 맞는 의미가 담겨 있다.

    사람의 몸은 천기(天氣)와 지기(地氣)의 결합체다. 사람의 몸은 생겨난 뒤에도 계속 천기와 지기를 섭취한다. 천기는 코로 섭취하고, 지기는 입으로 섭취한다. 코는 위로 천기를 섭취하는 곳이고, 입은 아래로 지기를 섭취하는 곳이므로, 코가 위이고 입이 아래며, 그 사이가 인중(人中)이다. 사람이 죽으면 모였던 천기와 지기가 도로 흩어진다. 천기 부분은 위로 올라가 하늘로 가는데 이를 ‘혼(魂)’이라 하고, 지기 부분은 아래로 내려가 땅속으로 들어가는데 이를 ‘백(魄)’이라 한다. 조상을 초청한다는 것은 이 혼과 백을 초청하는 것이다. 향을 피워 연기를 하늘로 보내는 분향(焚香)은 하늘에 가 있는 혼을 초청하는 예식이고, 모사(茅沙)에 술을 붓는 관주(灌酒)는 땅속에 가 있는 백을 초청하는 예식이다. 관주는 원래 땅에서 해야 하지만, 번거롭기 때문에 땅을 제사상 앞으로 가지고 왔다. 그것을 모사라 한다. 모사는 모래를 담은 그릇에 풀을 꽂는 것으로 땅을 상징한다. 분향과 관주를 하고 나면 조상이 온 것이므로 모두 다 절을 하여 예를 표한다. 분향과 관주가 실제로 조상의 혼령을 부르는 방식이라고 주장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사진을 꺼내 드는 것과 같은 상징적인 방식일 뿐이다.

    天氣의 魂, 地氣의 魄

    조상에게 모두가 인사를 한 뒤에는 술을 따라서 올리는 예를 세 번에 걸쳐서 하는데, 이를 초헌(初獻) 아헌(亞獻) 종헌(終獻)이라 한다. 헌관을 결정하는 방식은, 참여하는 사람이 많은 경우에는 사회적 지위 등 여러 조건을 고려해 적당하게 정하지만 조촐한 가정에서는 맏이가 초헌관, 둘째가 아헌관, 며느리가 종헌관을 한다. 맏이가 없고 맏며느리가 있는 경우에는 맏며느리가 초헌관을 해도 좋을 것이다. 세 차례 술을 올린 뒤에도 술을 더 올리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번거로움을 피해 이미 올려놓은 술잔에 술은 약간 더 따르는데, 이를 첨잔(添盞)이라 한다. 제사에 참여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경우라면 첨잔을 하기보다는 모두가 차례로 술을 올리는 것도 좋을 것이다. 술을 올린 뒤에는 차린 음식을 잘 드시라는 내용의 축문을 읽은 뒤에 한참 기다렸다가 하직인사를 하고 제사를 끝낸다. 제사를 끝낸 뒤에는 다 함께 제사상에 올렸던 천국의 음식을 만끽한다. 제사상에 올렸던 술도 돌려가며 모두가 마신다. 이때만큼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마시도록 한다. 어린이에게 술을 마시도록 권하는 것은 모양이 좋지 않다. 그래서 술을 마시라고 하지 않고 음복(飮福)을 하라고 한다. 음복을 하는 일에 남녀노소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제사의 방식은 제사의 의미를 손상하지 않는 범위에서 가감해도 좋을 것이다. 제사는 모두가 참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므로 제삿날은 조상이 돌아가신 날 전후로 하되, 모두가 모이기 좋은 날짜로 정해도 좋을 것이다. 제사 지내는 시간 또한 모두가 참여하기 좋은 시간으로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제사 때의 복장은 따로 정할 필요는 없다. 다만, 만나고 싶은 귀중한 사람을 만나는 날이기 때문에 정성스럽게 갖추어 입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제사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화합에 중요한 목적이 있으므로 화합에 저해되는 말이나 행동은 하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또한 화합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이벤트를 겸하면 좋을 듯하다. 제사를 지내고 성묘를 하면서 소풍이나 산행을 겸하는 것도 좋을 것이고, 고적답사를 하는 것도 뜻 깊은 일이 될 것이다. 근처에 있는 어른을 찾아뵙고 귀한 말씀을 듣는 것도 좋을 것이다.

    제사와 우상숭배

    ‘혼魂백魄’ 초청하는 제사 다시 만나는 부모 마음
    이기동

    1952년 경북 청도 출생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학·석사

    일본 쓰쿠바대 철학박사

    前 한국일본사상사학회장

    現 동인문화원장

    2007년 한국인 최초 사서삼경 강설 완역

    저서: ‘곰이 성공하는 나라’ 외 다수


    끝으로 하나 덧붙일 것은 제사가 우상숭배인가 하는 문제다. 특히 기독교에서 제사를 거부하는 이유로 내세우는 것이 주로 우상숭배인데, 그것은 우상숭배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이 범하는 실수 중에 ‘하느님’이라는 개념에 대한 것이 있다. 사람들은 각자의 의식 속에 자기가 판단하는 것들을 집어넣는다. 하느님에 대해서도 거의 예외가 아니다. ‘하느님이란 여차여차한 존재다’라고 하는, 하느님에 대한 개념을 의식 속에 집어넣고 만다. 많은 사람이 하느님이라고 말할 때, 그 하느님은 실제 하느님이 아니라, 자기의 의식 속에 넣어놓은 하느님이다. 의식 속에 넣어놓은 하느님은 같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사람이 열이면 하느님은 열이 되고, 사람이 백이면 하느님도 백이 된다. 사람이 자기 의식 속에 하느님을 넣을 때는 자기에게 유리하게 넣는다. 그런 하느님도 실제 하느님이 아니다. 그런 하느님은 넣은 사람의 아바타일 뿐이다. 죄를 많이 짓고 난 뒤 “하느님, 저의 죄를 용서해주시겠지요?” 하고 기도하면 “그래, 너의 죄를 사하노라” 하며 응답하는 하느님이다. 그런 하느님이 우상이다. 그런 우상은 매우 위험하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못할 짓이 없다. 수많은 종교전쟁도 거의가 우상숭배의 결과물이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를 침공한 것도 마찬가지다.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는 것은 자신의 아바타로 만든, 그런 하느님을 섬기지 말라는 것이다. 우상숭배를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신앙인 중에 더 많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우상숭배의 의미를 왜곡해 그것을 제사에 갖다 붙였다. 참으로 큰 실수를 했다.

    어쨌든, 이번 추석명절은 제사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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