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대사(왼쪽)와 퇴계 이황.
그러나 사람에게는 어머니의 사랑만으로 다 덮을 수 없는 시기가 찾아온다. 사춘기다. 사춘기는 부모의 품으로부터 정신적으로 독립하는 시점이다. 이성(異性)에 눈뜨고, 자기의 인생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는 때다. 육체적으로 거의 성인(成人)이 되었지만 정신적으로 미숙하던 사람이 사춘기를 지나며 정신적으로도 성인이 되기 위해 몸부림친다. 사춘기 때 가장 강력하게 다가오는 물음은 바로 이것이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춘기 이전까지는 별생각 없이 살아올 수 있다. 모든 문제는 부모가 해결해 준다. 특별히 고민할 것 없이 순조롭게 살 수 있다. 사춘기가 되면 달라진다. 부모의 품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고 사회에 적응하려 안간힘을 쓴다. 사춘기는 홍역을 치르는 때다. 홍역을 혹독하게 앓아야 인간이 된다. 과거에는 아이가 홍역을 치르기 전에는 부모가 출생신고를 하지 않는 예도 많았다. 출생신고를 미리 해봤자 홍역을 치르다 죽으면 헛일이 되기 때문이다. 60대에 접어든 우리 세대 가운데 법적인 나이와 실제 나이가 다른 이가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산다는 것은…
사춘기라는 홍역을 치를 때의 특징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그러지 않았다. 부모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달려오기만 했다. 부모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공부했고, 남과 경쟁했다. 경쟁은 남에게 이기기 위해서 한다. 경쟁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더 똑똑해지고 싶어 한다. 그래서 공부를 한다. 공부는 지식을 쌓는 것이다. 지식을 쌓는 것은 똑똑해지는 것이고,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다. 그러나 사춘기가 돼 생각이 많아지면 그런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생각 없이 살아온 지금까지의 세월을 돌아보면 그리 짧은 시간이 아니었지만, 지나고 보면 한순간이다. 그렇다면 남은 일생도 한순간일 것이다. 세월은 쉬지 않고 흐른다. 잠시도 쉬지 않고 흐르는 물처럼 한순간도 멈추는 일이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흘러간다. 흐르고 흐르다가 도달하는 곳은 죽음이라는 바다다.
죽음이란 바다에 들어가는 일은 조만간 다가온다. 그리 먼 훗날의 일이 아니다. 그 바다에 도달하면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의 차이가 없다. 이긴 사람이나 진 사람이나 매한가지다. 똑똑한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다를 게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바다에 들어가는 일은 생각지도 않은 채 남과 싸워 이길 궁리만 한다. 자기가 남보다 똑똑하다고 뽐내기에 바쁘다. 그런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까마득한 옛날에 살았던 공자도 그것을 깨닫고는 이런 말을 남겼다.
“사람들은 다 자기가 지혜롭다고 말하지만, 그들을 그물이나 덫이나 함정 속으로 몰아넣어도 피할 줄을 모른다(人皆曰予知, 驅而納諸 苦獲陷穽之中 而莫之知?也).”
참으로 그렇다. 사람들은 잠시도 쉬지 않고 죽음의 바다로 달려가고 있는데도 그것을 피할 줄을 모른다. 그물이나 덫이나 함정은 조만간 다가올 죽음의 바다다. 생전에 이뤄놓은 것이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 바다, 그 바다가 눈앞에 와 있다. 사람들이 그 바다를 까마득한 먼 훗날의 일로 느낀다면 착각이다. 지나온 시간이 금방이듯, 남은 시간도 순간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삶이 절박해진다. 의사에게 앞으로 살날이 두 달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을 들은 말기 환자와 같은 심경이 된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와 같은 방식으로 계속 살 수는 없다. 어제처럼 내일을 살 수는 없다. 그렇게 사는 것은 의미가 없다. 결국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방황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가치 있는 삶인지 몰라 방황한다. 사춘기 때의 방황은 홍역이다. 홍역을 치러야 인간이 되듯 방황을 해야 인간이 된다. 홍역은 육체적으로 인간이 되는 과정이고, 방황은 정신적으로 인간이 되는 과정이다. 방황을 하면 세속적인 가치들에 관심이 없어진다. 인생의 의미를 알기 위해 방황하지 않고는 세속적 가치에 대해 초연할 수 없고, 세속적 가치에 초연하지 못하고서는 진리를 얻을 수 없다.
나는 사람들에게 방황을 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특히 사춘기의 청소년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거리를 헤매고 다니라는 말은 아니다. 정신적으로 인생의 의미를 찾아가는 방황이어야 한다. 방황을 하면 세속적 가치에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어진다. 생명이 두 달밖에 남지 않은 절박한 환자에게는 다른 사람의 일이 관심사가 될 수 없다. 자기의 문제가 너무 다급해 누가 어떻게 성공했는지, 성공한 사람들 중에서 누가 더 훌륭한지 등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다.
서로 어여삐 여기는 마음
어떻게 살아야 제대로 사는 것인지, 착실하게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런 것을 몰라 방황하는 일은 절박한 일이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질 수 없지만, 자기처럼 방황하는 사람을 만나면 예외다. 살날이 두 달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방황하다가 강가에 앉아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는 말기 환자는 세상사에 관심을 가지지 않지만, 자기 옆에 와서 자기처럼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는 환자를 보면 사정이 달라진다. 그에게는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두 달밖에 살 수 없어서 그렇다는 말을 들었다면 바로 친근해진다.
동병상련(同病相憐). 병이 같으면 서로 어여삐 여기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에게 매력이 있어서라기보다 그도 자기처럼 방황하는 고통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활짝 웃는 얼굴로 나타났다면 어떨까.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느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 만약 그에게서 ‘약을 만들어 먹고 나았다’는 말을 들었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그는 자기의 병을 고쳐줄 수 있는 생명수로 다가온다. 그에게 매달려 어떤 약을 어떻게 만들어 먹었느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절박하게 방황하면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다. 과거에도 절박하게 방황했던 사람이 무수히 있었다. 방황하다가 진리의 길을 발견한 사람도 많다. 이른바 세계 4대 성인도, 원효대사나 퇴계 선생도 그런 사람들이다. 방황 끝에 다가오는 그런 사람은 나를 구해주는 생명수다. 그런 사람은 부모처럼 그립고 부모처럼 고맙다.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만 하고 있어서는 의미가 없다. 그들과 만나고 그들처럼 되어야 의미가 있다. 그들과의 만남은 그들이 남긴 글을 통해 가능하다. 경전 공부와 고전 공부가 그래서 중요하다. 경전을 읽고 고전을 공부하는 것은 기쁜 일이다. 그것은 두 달밖에 남지 않은 절박한 환자가 약을 구해 먹고 낫는 것과 같다. 세상에 그보다 더 기쁜 일은 없다. 공자가 “배우고 때맞게 익히니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고 토로한 것이 그 의미다.
밥만 챙기는 바보들
배움의 내용은 무엇이고, 배워서 도달하는 곳은 어떤 곳일까. 배움은 남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남에게 이긴다 하더라도 늙고, 죽어야 하는 근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나’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아무리 세상이 행복하다 해도 의미가 없다. 배움은 나를 아는 것이고, 나의 행복을 찾는 것이다.
‘나’는 무엇인가. 가장 쉽게 다가오는 것은 몸이다. 몸이 없이 내가 존재할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몸은 중요하다. 그러나 몸이 나의 전부는 아니다. 몸은 마음이 들어 있을 때만 구실을 한다. 마음이 들어 있지 않은 몸은 의미가 없다. 배움이란 몸의 한계를 아는 것이고, 몸보다 더 중요한 마음을 찾는 것이다.
몸이란 ‘모음’을 의미한다. 몸은 여러 가지 물건이 ‘모여서 된 것’이다. 우리의 몸은 70%의 물과 콩나물, 쇠고기, 돼지고기, 시금치 등이 잔뜩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다. 몸이 ‘모음’이란 뜻이라면 그것은 집과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집은 본래부터 있던 공간이 아니다. 집은 다른 물건들, 말하자면 나무, 흙, 돌 등을 모아서 얽어놓은 것이다. 집은 사람이 들어가 살 수 있는 공간이다. 사람이 살 수 없는 집은 가치가 없다. 그러한 집은 흉가(凶家)라고 한다. 집이 가치 있는 까닭은 그 속에 사람이 들어가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리에는 집 자체보다 그 속에 들어가 사는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가치기준이 전제돼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집 가꾸는 데 열중한 나머지 사람 사는 것을 소홀히 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말에 ‘몸집’이란 말이 있다. 몸을 집으로 보는 것이다. 몸을 집으로 본다면 이미 그 속에 몸보다 더 귀중한 것이 들어 있어야 한다. 몸속에 들어 있는 몸보다 귀한 것이 바로 마음이다. 마음은 몸의 알맹이다. 마음은 삶을 이끌어가는 실체다.
사람은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져 있는 존재다. 둘 중 어느 하나가 없어도 안 되지만, 둘 중에서 가치를 따진다면 몸보다 마음이 더 중요하다. 사람이 살 수 없는 집은 의미가 없듯이 마음이 들어 있지 않은 몸집은 의미가 없다. 그것은 흉물(凶物)이다. 우리가 몸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그 속에 마음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몸만을 가꾸는 사람은 바보다. 몸 가꾸기에 열중하는 사람은 밥을 챙긴다. 몸 가꾸기에 가장 중요한 것이 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몸 가꾸기에만 주력하는 사람을 밥 챙기기에 주력하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밥보’라고 했다. 나중에 ‘밥보’에서 ㅂ이 떨어져 나가 ‘바보’가 되었다. 우리말의 바보는 몸 가꾸기에 주력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변하는 마음, 변치 않는 마음
몸 가꾸기에 치중하는 사람은 밥을 차지하려 끊임없이 경쟁한다. 경쟁을 할수록 사람은 긴장한다. 방심하면 패배하고 말기 때문이다. 긴장하는 삶은 피곤한 삶이다. 인생은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어쩔 수 없이 늙어야 하고 죽어야 한다. 인생이란 ‘경쟁을 하느라 긴장된 상태로 피곤하게 살아가면서 쓸쓸하게 늙어가고 절망으로 마감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생은 비극이다. 인생이 이렇게 비극이 된 원인은 사람이 바보로 살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바보처럼 살 수는 없다. 지금까지와 같은 바보의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 바보에서 벗어나려는 사람은 관심의 대상이 몸에서 마음으로 바뀐다. 그렇다고 해서 몸을 완전히 방치하는 것은 아니다. 대충 먹고 입고 자면 된다. 그리고 마음에 관심을 갖고 마음을 가꾸어야 한다.
사람에게는 두 마음이 있다. 변하는 마음과 변하지 않는 마음이다. 변하는 마음은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마음이다. 그 마음은 본래의 내 마음이 아니다. 그 마음은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를 수 있다. 그러므로 그 변하는 마음을 가꾸고 실천하면 그 마음이 바뀌는 순간 바로 후회하게 된다. 가꾸어야 할 마음은 변하지 않는 마음이다. 변하지 않는 마음은 본래의 내 마음이다. 그 마음은 언제나 그 마음이다. 변하지 않는 마음을 가꿔 실천에 옮기면 후회하는 일이 없다.
변하지 않는 마음을 가꾸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사람으로 하여금 행동하도록 지시하는 것이 마음이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할 때는 언제나 마음이 뒤에서 조종을 한다. 그러므로 행동을 하기 전에 먼저 마음을 가꿔야 한다. 행동을 할 때 그 행동을 하게 하는 마음이 변하는 마음인지 아닌지를 판단해야 한다. 변하는 마음이라면 참아야 하지만, 변하지 않는 마음이라면 과감하게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이러한 태도를 유지하면 변하는 마음은 차츰 위축되고 변하지 않는 마음은 차츰 확장돼 급기야 변하지 않는 마음으로 꽉 차게 된다.
그런데 순간 순간의 마음이 변하는 마음인지, 변하지 않는 마음이지 어떻게 판별할 수 있는가. 그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어떤 마음이 들었을 때 그 마음이 과거에도 늘 그랬는지 생각해보면 된다. 어제도 그랬고, 한 달 전에도 그랬으며, 1년 전에도 그랬고, 10년 전에도 그랬으며, 어릴 때부터 그랬다면 그 마음은 변하지 않는 마음이다. 그러한 마음이라면 행동에 옮겨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마음이라면 행동으로 옮기지 말고 참아야 한다. 마음 가꾸기의 삶을 계속하다보면 어느 순간 변하지 않는 마음이 충만해진다. 그 순간이 진리를 얻는 순간이다. 진리란 변하지 않는 마음으로 사는 것을 말한다. 마음 가꾸기 방법은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경전을 읽는 것, 명상을 하는 것, 도덕적인 삶을 사는 것 등이 이에 속한다.
변하지 않는 마음은 모두의 마음과 하나로 통해 있다. 그러므로 변하지 않는 마음을 가꿔 키워가면 어느 순간 모두의 마음과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한 마음이 한마음이다. 한마음을 회복하면 지금까지의 마음가짐과는 전혀 다른 세계가 전개된다. 한마음이 되면 남이라는 생각이 없어진다. 남을 보더라도 남으로 보이지 않고 자신처럼 보인다. 그래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여유를 갖고 양보하며 살게 된다. 그래서 긴장이 풀리고 건강을 되찾는다.
죽는 것이 사는 것
한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하는 일마다 성공한다. 한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듯 남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의 얼굴은 인자한 어머님의 얼굴같이 된다. 그래서 그를 보는 사람은 그를 좋아하고, 그의 일을 도와준다. 그의 일은 성공할 수밖에 없다. 그가 하는 일은 엄청난 생산성을 발휘한다.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은 일에 마음이 없다. 돈을 받을 목적으로 일을 하기 때문에 일은 수단일 뿐이다. 그러한 사람은 마음에 없는 일을 한다. 마음에 없는 일은 지겹고 피곤하다. 그래서 생산성이 떨어진다. 그러나 욕심이 없는 사람은 일을 하더라도 욕심을 채우기 위해 일을 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일을 수단으로 하지 않는다. 일을 할 때 마음이 언제나 그 일에 있다. 마음이 있으면 일이 재미있다. 재미있게 일하면 생산성이 높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돈이 따라온다.
한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창의력이 넘친다. 앞으로의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은 창의력이다. 창의력이 넘치는 한 사람이 수십만, 수백만 명을 먹여 살리는 시대가 온다. 그래서 사람들은 창의력에 지대한 관심을 갖는다. 그런데 막상 창의력이 무엇인지 알기가 어렵다.
창의력이란 한마음의 능력이다. 한마음은 하나마음이고 하나마음은 하나님마음이다. 하나님마음은 하늘마음이고 곧 천심(天心)이다. 하늘마음은 부모의 마음과 같다. 부모는 자녀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배고픈 자녀에게는 ‘밥 먹어라’고 하고, 피곤한 자녀에게는 ‘쉬라’고 하며, 밤이 늦으면 자녀에게 ‘자라’고 한다. 이는 모두 자녀를 살리기 위해서 하는 말이다.
하늘의 마음도 그렇다. 하늘도 사람들에게 끼니때가 되면, ‘밥 먹어라’고 하고, 쉴 때가 되면 ‘쉬라’고 하며, 잘 때가 되면 ‘자라’고 지시한다. 하늘의 지시는 귀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느낌으로 전달된다. 배고픈 느낌이 드는 것은 ‘밥 먹어라’는 하늘의 지시고, 피곤한 느낌이 드는 것은 ‘쉬라’는 지시이며, 졸리는 느낌이 드는 것은 ‘자라’는 지시다. 담배 한 대 피우고 싶은 느낌이 드는 것은 ‘담배를 피우라’는 하늘의 지시가 아니다. 그것은 중독에 의한 착각이다. 주의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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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에 성공해야 사는 사람에게는 하늘이 그 성공비법을 지시하고, 그 비법은 느낌으로 전달된다. 그렇기 때문에 한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언제나 창의력이 왕성하다. 한마음을 가진 사람은 앞으로 크게 빛날 것이다. 한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늙는 것이 쓸쓸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 몸이 늙는 것은 모두가 자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두를 나’라고 판단하면, 언제나 모두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된다. 모두의 입장에서 보면 이 몸이 늙는 것은 모두가 성장하는 것이고, 이 몸이 죽은 것은 모두가 사는 방식임을 알게 된다. 죽는 것이 사는 것이다. 죽는 것이 사는 것이면 죽는 것이 없어진다. 그것이 영생이다. 그렇게 사는 사람이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완전한 행복을 얻는 출발은 방황할 때 시작된다. 방황은 귀하다. 고달픈 일이 생겨 방황하는 것은 좋은 일이 있을 징조다. 실패해서 방황하는 것도 좋은 일이 있을 징조다. 그것을 불행으로 생각지 말고 진지하게 고민해보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다.